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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미학 · 미학의 갈래 · 03 / 13 · 수학의 아름다움

답은 둘 다 맞는데, 왜 이쪽이 아름다울까

5050을 얻을 뿐 아니라 왜 5050인지 보게 된다. 아름다움은 속도에 주는 상이 아니다.

Han Qin ·

두 장의 종이 끝에 모두 5050이라고 적혀 있다.

1부터 100까지 더하는 문제다. 첫 종이는 덧셈으로 가득하고, 더할 때마다 나온 합을 옆에 써 두었다. 둘째 종이는 몇 줄 되지 않는다. 1과 100, 2와 99, 3과 98을 짝짓는다. 한 쌍의 합이 101이고 모두 쉰 쌍이다.

답안을 걷는다면 두 사람 모두 점수를 받아야 한다. 첫 사람은 틀리지 않았고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잠시 걷지 않고 두 장을 나란히 놓으면 둘째 종이가 하나 더 건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답뿐 아니라 이 수들을 더하면 왜 그 답이 되는지도 눈에 보이게 해 준다.

짝을 따라가면 한쪽이 하나 늘 때 다른 쪽이 하나 줄어든다. 차례로 더해야 할 긴 수의 줄이 같은 합을 가진 쉰 쌍으로 바뀐다.

“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이 말에는 왜 나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섞일 때도, 기쁨만 있을 때도 있다. 어떤 기분이든 종이를 다시 볼 수 있다. 짝짓기가 성립하는 까닭은 그것을 쓴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지에 있지 않다.

빨라서가 아니다

우리가 쓰기 전에 계산기가 5050을 띄웠다면 그것이 더 빠르다. 결과도 충분히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빠르다고 쉰 쌍을 대신 보게 해 준 것은 아니다.

짝짓기 자체도 지시대로만 하는 방법으로 배울 수 있다. 처음과 끝을 더하고 항의 수를 곱해 둘로 나눈다. 외우면 편리하고 문제에 대입하면 된다. 잘 쓴다고 매번 그 까닭을 보는 것은 아니다. 한때 눈을 번쩍 뜨게 한 방법이 나중에는 서랍 속 익숙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도구가 망가진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은 꺼내 쓰기 전에 조금 더 보려 한다.

100 대신 10까지 더해 보자. 1과 10, 2와 9를 짝지으면 다섯 쌍이며 한 쌍이 11이다. 수가 줄어도 관계는 남는다. 9까지라면 가운데 5가 남으니 주의해야 한다. 앞의 쉰 쌍이라는 방식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1부터 9를 두 번 쓰되 한 줄은 순서대로, 다른 줄은 거꾸로 써도 된다. 위아래로 짝지으면 아홉 쌍이고 한 쌍이 10이라 모두 90이다. 같은 줄을 두 번 썼으니 원래 합은 45다.

1부터 100으로 돌아오면 둘째 종이는 단지 여러 단계를 줄인 것이 아니다. 길이가 달라질 때 어떤 관계가 달라지고 무엇이 그대로 성립하는지 보여 준다. 새 수열을 만날 때마다 새 답을 다시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예쁘다는 말은 빠르게 끝낸 데 주는 상이 아니다. 여기에는 다시 들어가 따라가 볼 수 있는 분명함이 있다.

짧다는 것은, 긴 것을 감췄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떤 풀이는 ‘어느 정리에 따라 알 수 있다’는 한 줄뿐이다.

그 정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충분할 수 있다. 무엇을 생략했는지 알고 펼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종이 위의 모르는 것 하나가 더 큰 모르는 것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글자가 적다고 왜 그런지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몇 줄 더 쓴 풀이에서 관계가 더 말끔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이 줄이 어디서 왔고 다음 줄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독자가 건너뛰고 이해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

반대로 아주 가지런한 수의 줄도 까닭을 내놓았다고 할 수 없다. 앞의 몇 개가 맞았다고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지런함에 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거기에 끌려 증명을 찾는 일과 가지런함 자체가 증명인 것은 다르다.

아름다움은 더 따라가 보고 싶게 할 수 있지만 확인할 일을 면제하지는 않는다. 너무 아름다워 보이는 생각도 틀릴 수 있다. 틀린 줄 알면 판단을 고쳐야지, 예쁜 모습을 지키려고 안 맞는 대목을 몰래 숨겨서는 안 된다.

원논문이 지키는 구분은 간단하다. 결론이 성립하는 것과 왜 성립하는지 드러내는 것은 다르다. 맞고 짧다는 것, 어렵고 유명하다는 것만으로 뒤의 일을 대신할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다시 따라갈 수 있다

소수가 어디에선가 끝나지 않는다는 오래된 증명이 있다. 소수는 1보다 크고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떨어지는 정수다. 2, 3, 5, 7 같은 수다.

일단 모두 몇 개인지 묻지 말자. 누군가 유한한 목록을 내고 이것이 전부라고 했다고 하자.

목록의 소수를 모두 곱한 뒤 1을 더한다. 얻은 수는 목록의 어떤 소수로 나누어도 1이 남는다. 그래도 1보다 크니 어떤 소수로는 나누어떨어진다. 그 소수는 원래 목록에 없다.

새 수 자체가 반드시 소수인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빼면 안 된다. 2, 3, 5만 적으면 곱해서 1을 더한 값은 31로 소수다. 2, 3, 5, 7, 11, 13을 쓰면 30031이고 59와 509의 곱이다. 매번 새 소수 자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새 수에 원래 적지 않은 소인수가 적어도 하나 있으면 된다.

이 한 걸음이 보이면 목록이 얼마나 긴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빠뜨린 수를 보태고 이제 전부라고 해도 같은 방법을 쓸 수 있다. 목록 자체가 그 목록을 넘어설 재료를 준다.

물론 끈기가 필요하다.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고 아름다움을 알아볼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목록을 짧게 적고 직접 몇 번 나누어 본 뒤 돌아와도 된다.

한 번 따라가고 나면 까닭은 알려 준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유명한 수학자가 보증해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직접 그 단계를 밟아 어느 대목에서 조건을 바꿔치기해서는 안 되는지 알 수 있다. 그 길을 처음 찾은 사람이 영원히 앞에서 이끌 필요는 없다.

수학의 아름다움에는 이런 특별한 면이 있다. 처음 발견한 순간은 되풀이할 수 없어도 그것을 성립시킨 관계는 뒤의 사람이 다시 따라갈 수 있다. 당시 얼마나 흥분했는지 남의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다.

미완성이라고 더 아름답지는 않다

여기까지 들으면 증명된 것에만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원논문은 다른 경우도 남긴다. 답은 아직 없지만, 이미 아는 관계들 덕분에 어떤 이유가 더 필요한지 그 윤곽은 보이는 경우다.

논문은 리만 가설로 그 아직 채우지 못한 곳을 논한다. 수학적 준비가 더 필요한 이야기라 여기서는 몇 줄의 비유로 그 내용을 대신하지 않는다. 먼저 하나만 나누어 두자. 모르는 것은 많지만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다.

연습문제를 못 푼 것은 아직 배우지 못해서일 수 있다. 어떤 수의 소수점 아래를 어느 자리까지만 계산한 것도 계산을 멈췄기 때문일 수 있다. 미완성이라는 사실만으로 깊은 아름다움이 되지는 않는다.

원논문이 말하려는 것은 윤곽이 더 뚜렷한 빈자리다. 이미 성립하는 관계가 정확히 어떤 이유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지 보여 준다. 미래의 답에서 빛을 빌려 오는 게 아니라 오늘 이미 볼 것이 있다. 그렇다고 보기 좋다는 이유로 증명이 성립했다는 자격을 미리 가져갈 수도 없다.

완성된 짝짓기 표와 높낮이를 겨룰 필요도 없다. 찾는 동안의 긴장도, 답이 이미 서 있고 다시 봐도 분명한 고요함도 좋아할 수 있다. 탐구를 사랑하는 듯 보이려고 다 만든 것을 싫어할 필요는 없다.

탁자에 있던 사람이 둘째 종이를 돌려 첫 종이를 쓴 사람에게 건넨다. 상대가 펜을 들어 1과 100 사이에 선을 긋고 또 하나를 긋는다.

이때 이렇게 쉬운데 왜 생각 못 했느냐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이제 막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된 길이, 다시 그 사람이 충분히 똑똑한지 보는 시험으로 바뀐다.

선을 다 그을 때까지 기다리자. 웃을 수도 있고 조금 끄덕일 뿐일 수도 있다. 앞으로도 수학을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 그는 이 수들이 왜 이렇게 함께 놓일 수 있는지 보았다. 그것으로 이미 완결된 일 하나가 있다.

원논문과 참고 자료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되었으며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기술적인 원논문 전체의 번역은 아닙니다. 각 글의 집필 설명에는 논의를 위해 만든 장면과 실제 연구·사료로 확인한 내용의 구분을 남겼습니다. 이론 논문은 영어·중국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 소개는 한국어판이 있지만, ‘일상의 발견’과 예전 장문 ‘예술가는 죽었다’는 기존 영어·간체 중국어판으로 이어집니다. 그 본문까지 이번에 한국어로 다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바탕과 범위

『수학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썼다. 두 답안과 펜을 건네는 장면은 논의용 예시이지 가우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복원한 것이 아니다. 짝짓기 덧셈과 소수의 증명은 단계마다 확인할 수 있으며, 새로 만든 수 자체가 반드시 소수인 것은 아니다. 리만 가설은 마지막 절에서 원논문으로 더 들어가는 길로만 제시했다. 비유로 정의나 증명을 대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