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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미학 · 미학의 갈래 · 04 / 13 · 물리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생각도, 세계의 대답을 기다려야 한다

전기 실험에서 얻은 수가 왜 빛의 측정에 나타날까. 아름다움은 길을 안내할 수 있지만 기구 대신 답할 수는 없다.

Han Qin ·

먼저 두 수를 나란히 놓아 보자.

하나는 전기 실험에서 왔다. 기구로 전하를 측정해 계산에 쓸 수 있는 양을 얻는다. 다른 하나는 빛을 측정한 데서 왔다. 알려진 거리를 빛이 지나가게 하고 얼마나 빨리 가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1860년대 맥스웰은 앞의 측정값을 자신의 이론에 넣어 전파 속도를 계산했다. 그 값은 뒤의 실험에서 얻은 빛의 속도와 가까웠다. 둘 다 초속 약 31만 킬로미터였다.

오늘날의 정확한 광속이 아니며, 두 기록이 마지막 자리까지 같았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측정은 계속 개선되고 있었다. 잠시 머물 만한 점은 두 수가 서로 다른 길로 왔다는 사실이다. 한쪽은 전기와 자기에서, 다른 쪽은 빛에서 왔다.

왜 여기서 만났을까?

익숙한 숫자를 알아본 것만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우연은 만난다. 친구 생일과 번지수가 같거나 두 금액을 합치니 깔끔한 수가 된다. 잠깐 기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관계를 발견한 것은 아닐 수 있다.

맥스웰의 경우에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이론은 광속처럼 보이는 숫자를 내놓았을 뿐 아니라 전자기적 교란이 전파될 수 있고, 해당 조건에서는 이 속도로 전파되어야 한다고 했다. 광속에 가까워지도록 뒤늦게 여러 답 중에서 고른 수가 아니었다.

대략 이런 비유로 생각할 수 있다. 한 방의 물건을 진지하게 정리하다가 이미 있는 관계를 따라가면 옆방의 닫힌 문 앞에 이른다는 것을 안 것이다. 옆방에 가고 싶어서 먼저 벽에 문을 그린 게 아니다. 이쪽의 길이 정말 그쪽으로 가는 방향을 가리킨 것이다.

비유는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문은 상상으로 그릴 수 있지만 이론의 길은 단계마다 계산할 수 있어야 하고 실험의 측정값도 어디서 왔는지 근거가 있어야 한다.

전자기 관계로 얻은 속도가 독립적으로 잰 광속과 가깝다는 사실은 숫자끼리 닮았다는 것 이상의 판단을 뒷받침했다. 빛 자체가 전자기 현상이라는 판단이다. 떨어진 학문처럼 보이던 두 분야가 같은 일의 두 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빛은 전자기파’라는 지식 하나로 외우고 넘어가기 쉽다. 하지만 외우기 전에 잠깐 멈추면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 보인다. 우리가 전기와 자기를 아름답게 적었다고 빛이 그 속도로 가야 할 의무는 없었다. 얼마든지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작은 바퀴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이론이 처음부터 오늘 교과서와 같은 형태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맥스웰은 구체적인 기계적 그림을 생각의 발판으로 쓴 적이 있다. 회전하는 소용돌이 사이에 움직임을 전달하는 작은 바퀴가 들어 있었다. 오늘 보면 조금 기이하다. 사람이 익숙한 것으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조립해 보려는 그림 같다.

1865년 발표한 전자기장 논문에서는 그 특정한 바퀴 장치에 의존하지 않고도 논증을 이어 갈 수 있었고, 전자기 전파와 광속의 관계는 남았다. 여기서 그가 에테르까지 버렸다고 한 걸음 더 써서는 안 된다. 당시에도 그는 매질과 운동으로 장을 이해했다. 벗어난 것은 특정 기계 모형의 제약이지, 이후 물리학의 모든 생각을 한꺼번에 완성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점 때문에 이야기가 더 볼 만하다.

출발할 때 임시 발판을 빌렸다고 발견의 무게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발판도 도움을 주었다고 영원히 철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설명에는 상상을 도우려고 잠시 빌린 것이 있고, 다시 쓴 뒤에도 성립하는 관계가 있다.

아름다운 것은 처음 그린 그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림을 고쳐도 정말 근거 있는 관계 하나가 함께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일 수도 있다.

세계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가장 쉽게 망치는 방법은 천재가 아름다움을 보았으니 옳았다고 쓰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런 보증을 하지 않는다.

종이 위의 관계가 아무리 엄밀해도 세계를 대신해 서명한 것은 아니다. 실험과 맞지 않으면 유도 과정과 측정, 사용한 조건을 살펴야 하며 이론을 고쳐야 할 가능성도 열어야 한다. 안 맞을 때마다 세계를 잘못 측정했다고만 탓할 수는 없다.

반대로 측정값이 맞지 않다고 모든 것이 틀렸다는 뜻도 아니다. 기구에 문제가 생기고 계산이 틀릴 수 있으며 적용 범위를 넘었을 수도 있다. 세계의 대답을 진지하게 들으려면 이런 가능성을 하나씩 구분해야지, 속 시원한 구호 하나를 고르면 안 된다.

그러니 여기서 기다린다는 것은 앉아서 그렇다는 대답을 바라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한 말을 검증할 수 있는 자리에 놓고 다른 사람도 같은 길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리 무엇을 말했는가, 어떻게 쟀는가, 차이는 얼마나 났는가, 어떤 조건에서 비교해야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보면 물리학의 아름다움은 맞힌 기쁨만이 아니다. 상자 속 사탕 수를 맞히면 신날 수 있지만 상자 안의 관계를 드러낸 것은 아니다. 여기서 볼 것은 이론이 원래 내놓을 수밖에 없던 것이 독립적인 검증의 바로 그 지점에서 응답을 얻었다는 점이다.

‘나는 너를 언제나 설명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네가 여기서 대답했다’는 말이다.

대답이 늘 ‘그렇다’일 필요는 없다

맞지 않았다면 어떨까?

거기에도 볼 만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너그럽게 보이려고 모든 실패가 아름답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자료를 잃거나 기구를 제대로 보정하지 않거나, 원인을 찾지 않고 추측만 거듭했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무게 있는 불일치에는 뚜렷한 윤곽이 있을 때가 많다. 차이가 늘 특정한 데서 나타나고, 다른 데서 여전히 성립하는 관계가 함께 그 틈을 드러낸다. 이제 막연히 모르는 게 많다는 문제가 아니라 왜 하필 여기서 맞지 않느냐는 질문이 된다.

새 답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옛 답도 모든 곳에서 무효가 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 사이에서 일을 계속한다. 볼 만한 것은 이미 틀린 줄 드러난 말 자체가 아니라 갈수록 분명해지는 경계일 수 있다.

하지만 맥스웰 이야기는 이후의 미해결 문제를 빌려 와야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길은 이미 만났다. 이 대목은 이미 성립했으니 다시 볼 만하다. 완성이 생기의 소멸은 아니다.

시험 때문에 방정식을 외운 사람, 평생 그것으로 계산하는 사람, 이 이야기만 읽고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 안 사람도 있다. 보는 깊이는 다르다. 이야기를 읽었다고 유도할 수 있는 척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일반 독자를 문밖에 둘 필요도 없다.

적어도 이론이 아름답다는 말이 왜 마지막 말은 아닌지 먼저 볼 수 있다.

종이에 적힌 속도는 결국 다른 곳의 기구가 읽어 낸 수와 나란히 놓여야 했다. 종이가 잘 쓰였다고 기구 대신 대답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둘은 실제로 맞아떨어졌다. 이 점이야말로 멈추어 볼 만하다.

원논문과 참고 자료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되었으며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기술적인 원논문 전체의 번역은 아닙니다. 각 글의 집필 설명에는 논의를 위해 만든 장면과 실제 연구·사료로 확인한 내용의 구분을 남겼습니다. 이론 논문은 영어·중국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 소개는 한국어판이 있지만, ‘일상의 발견’과 예전 장문 ‘예술가는 죽었다’는 기존 영어·간체 중국어판으로 이어집니다. 그 본문까지 이번에 한국어로 다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바탕과 범위

『물리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썼다. 맥스웰의 역사 부분은 1862년과 1865년 논문을 참고했다. 속도는 당시 측정한 근삿값이지 현대의 정확한 값이 아니다. 1865년 논증이 특정 소용돌이 기계 모형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고 에테르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방과 문은 관계를 설명하는 비유이지 물리적 유도를 대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