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론 보론 · 02
내 몫인 일이라고 해서 옳은 요구는 아니다
월급을 빠짐없이 줬다면 아무 때나 다시 불러도 될까. 회사가 맡은 일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 개인에게나 떠넘겨도 될까. 어떤 요구가 현실에서 나를 누르고 있더라도, 그 요구에 대한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다시 그 부서를 맡은 사람의 이야기다. 목록을 다 대조하기도 전에 회사가 주말 회고 회의에 나오라고 한다. 책임자는 “월급은 한 푼도 안 빼고 줬는데 이 정도는 협조해야죠”라고 말한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느낌은 든다. 보수를 지급했다는 사실에서 이번에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까지 가려면, 아직 몇 단계를 더 거쳐야 하지 않을까.
교환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업무 약정에 보수와 결과물의 조건이 들어갈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내가 이미 줬잖아’가 모든 새 요구를 뒷받침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쉽게 잊는다. 이미 주었다는 바로 그것은 어느 요구를 어디까지 뒷받침하는가. 하나의 관계를 큰 총계 하나로 묶어 세부 항목을 모두 삼키게 할 수는 없다.
양쪽의 요구는 저마다 근거가 있어야 한다
회사 쪽에는 정해진 바에 따라 그에게 목록 대조를 요구하는 연결이 있다. 직원 쪽에도 회사에 제때 보수를 지급하라거나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다른 연결이 있을 수 있다. 두 연결은 같은 고용 관계 안에서 만난다. 하지만 한쪽이 작동한다고 다른 쪽의 모든 요구까지 함께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가 약속한 보수를 모두 지급했다고 그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근거를 자동으로 얻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회사가 약속한 급부 가운데 하나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쪽의 요구가 전부 사라졌다고 미리 선언할 수도 없다. 어느 요구가 어느 급부를 적용 조건으로 삼는지는 구체적인 약정으로 돌아가 하나씩 알아봐야 한다. 모든 관계에 통하는 보편적인 환산 공식으로 대신할 수 없다.
이렇게 구분하자는 말은 임금이 밀려도 참고 계속 일하라는 권유가 아니며, 어떤 계약에 대해 판정을 내리려는 말도 아니다. 손쉬운 두 가지 결론을 거부할 뿐이다. 나는 이 하나를 했으니 무제한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결론, 당신은 저 하나를 안 했으니 이제 아무것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다. 실제로 어떻게 대응할지는 구체적인 근거와 보호 장치가 있어야 정할 수 있다. 그 두 문장만으로 답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이 두 방향의 관계에 놓인 회사는 자기 인생의 계획을 가진 한 사람이 아니다. 회사는 요구가 나오는 곳일 수도, 응답을 요구받는 곳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권한을 행사하고 이의를 처리하며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해당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절차다. ‘회사 결정’이라는 말로 실제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모두 감춰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반대 방향으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회사가 맡은 일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전화를 받은 직원, 막 부임한 관리자, 혹은 모든 평범한 구성원이 각각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조직의 업무가 사람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과, 어떤 사람이 무슨 근거로 어떤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다. 앞의 사실은 개인이 맡아야 할 몫에서 도망치는 껍데기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모든 부담을 아무 한 사람에게나 몰아줄 근거도 되지 않는다.
조직에 한 사람의 일인칭 삶이 없다고 해서 응답할 필요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한편 요구가 조직을 지나 실제 개인에게 미칠 때, 그 사람을 보호할 필요가 조직의 이름에 흡수되어서도 안 된다. 누구의 절차가 답해야 하는지, 누구의 삶의 경계가 침범되는지는 각각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에서 살펴야 한다.
내 지위가 바뀔 수 있다는 것과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다르다
일상에서 ‘책임’이라고 하면 이미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배상해야 하는지,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묻는 경우가 많다. 원 논문은 이와 별도로 더 좁은 관계 하나를 가려낸다. 어떤 권한이 나의 관계상 지위를 바꿀 수 있지만, 당장 내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닐 수 있는 상태다. 논문은 여기에 영어 liability를 쓴다. 일상에서 쓰는 모든 ‘책임’을 이 제한된 용법 안에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가령 가상의 조직에서, 해당 권한을 가진 쪽의 조정으로 어떤 직위의 소속이 바뀌었다고 해 보자. 조정 대상이 된 사람이 업무를 소홀히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내놓아야 하는 결과물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내 위치가 저 결정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과, 지금 내가 응답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는 것은 아직 같은 층위가 아니다. 앞의 상태는 있어도 뒤의 요구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수 있다.
월말 인계 요구가 이번 재직에 실제로 연결되면 비로소 한 겹이 더 생긴다. 이제 바뀔 수 있는 지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식별되고 응답을 기다리는 요구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직책상의 책무는 이것이다. 그 뒤에 목록을 실제로 제출해야 이행이 이루어진다. 어떤 관계에 놓이는 것, 구체적인 요구를 마주하는 것, 실제로 응답하는 것을 한 단어에 몰아넣을 수는 없다.
용어를 늘리려는 구분이 아니다. 판단을 너무 일찍 내리지 않으려는 구분이다. 직위가 바뀌었다고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치지 않은 일이 있다고 그 내용과 조건도 살피지 않은 채 직무를 소홀히 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바뀐 것이 지위인지, 어떤 요구인지, 이미 이루어진 행동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인계를 준비하던 중 회사가 예전 시스템을 읽을 권한을 막아 버렸다고 해 보자. 그래서 목록을 제출하지 못했다.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남겨 두어야 한다. 필요한 통로가 막혔고, 결과물은 제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직원의 과실이 있는지, 앞으로 어떤 결과도 그와 관계없는지까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업무 요구가 달라졌는지, 필요한 조건은 원래 누가 제공해야 했는지, 다른 가능한 방법은 있었는지 각각 살펴야 한다.
그렇다고 ‘책무 이행을 방해받은 상태’가 곧 새 권리의 이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침해된 것은 직원이 원래 갖고 있던 어떤 권리일 수도 있고, 결과물을 기다리던 사람의 권리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관계자의 처지일 수도 있다.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지는 그 자체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부담을 자산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보호가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요구가 성립한다는 설명은 정당화가 아니다
다시 주말 회고 회의로 돌아가 보자. 그 요구에 실제 근거가 있고 내용도 분명하며, 현실의 약정에 따라 직원의 업무에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이 회의가 그가 일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지, 아니면 언제든 그를 추궁할 자료를 남기려는 것뿐인지까지 답한 것은 아니다. 책무가 성립한다는 설명은 요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 방향이 좋은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관계를 떠날 길이 아직 있다는 사실도 ‘요구가 선을 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관계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부터 이미 침범하면 안 되는 영역으로 들어오는 요구도 있다. 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자리마저 잃을 때까지 기다려야 비로소 상처받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경계가 남아 있다는 말은 필요한 보호가 모두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반면 한 사람이 응답하고 거절하고 관계에서 물러날 주체의 자리 자체가 지워졌거나, 요구의 출처와 작동 조건이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사람을 움직일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책무라는 이름을 남겨 둘 수는 없다. 이미 단순한 강제가 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 성립하지 않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어디가 끊어졌는지는 사실에 따라 보아야 한다. 책무가 성립하지 않는 모든 경우에 반드시 강제력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담을 분류했다고 그 부담이 정당하다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분류를 바꾼다고 현실의 강제가 알아서 멈추지도 않는다. 침해적인 요구를 거절한 사람을 두고 ‘그가 요구된 것을 내놓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실 하나로 직무를 소홀히 했다는 판정을 끝낼 수는 없다. 평가는 더 물어야 한다. 이름 하나를 내세워 질문을 먼저 닫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권력이 클수록 책임도 자연히 커진다고 말하곤 한다. 이는 만들어 가야 할 제도의 방향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현실을 묘사하는 자동 법칙은 아니다. 어떤 자리는 큰 처분 권한을 가졌는데도, 그에 걸맞은 설명과 조사, 시정 장치는 갖추지 않았을 수 있다. ‘자연히’라는 말을 넣었다고 빠진 장치가 저절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직원과 책임자가 실제로 논의해야 할 것은 그가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닌지가 아니다. 이번 회고 회의는 무엇을 근거로 요구되는가. 어떤 시간대를 요구하는가. 그 용도를 누가 되물을 수 있는가. 별도로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인가. 이야기해 보고 기꺼이 성실하게 할 일도 있을 것이다. 바꿔야 할 것도, 책무라는 말로 이의를 막아서는 안 될 것도 있을 것이다.
단어 하나가 모든 일을 동시에 해낼 필요는 없다. 요구가 실제로 내게 미친다는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그것을 정확히 마주하기 위해서다. 그 요구가 앞으로는 질문받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 논문과 이 글의 범위
이 세 편은 『On Accountability · Wei』를 일반 독자를 위한 산문으로 다시 쓴 글이다. 논문의 스물여섯 명제를 차례대로 번역한 것은 아니다. 직장과 아이에 관한 장면은 모두 가상의 예시다. 원 논문은 accountability, liability, duty를 특정한 범위 안에서 구분하며, 그 구분으로 일상 언어나 법률에서 쓰이는 책임과 의무의 모든 의미를 대체하려 하지 않는다. 어떤 요구를 분류했다고 정당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강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은 실제 근로 조건, 퇴직 뒤에도 유지되는 비밀유지 약정, 구제 수단, 미성년자의 법적 책임을 판단하지 않는다. 한국어판은 중국어 산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