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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대지가 읽는 『장자』 · 제17편

잠에서 깨고 나서, 질문이 시작됩니다―장주의 나비 꿈

꿈이었다고 끝내려는데, 꿈속의 삶도 그토록 확실했습니다. 모른다는 말과 구별이 있다는 말을 어느 쪽도 지우지 않고 읽습니다.

Han Qin ·

잠에서 깨고 나서, 질문이 시작됩니다

장주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나비였습니다. 한껏 날개를 펴고 날며 마음에 꼭 드는 삶을 살았고, 장주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아예 몰랐습니다. 그러다 잠에서 깹니다. 눈앞에는 다시 장주로 사는 하루가 펼쳐집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쉽게 끝날 수 있습니다. 아, 꿈이었구나. 그런데 「제물론」의 마지막 대목은 바로 여기에서 다시 입을 엽니다.

옛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생생히 날아다니는 나비여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마음에 흡족했으며, 장주라는 사람은 알지 못했다. 문득 깨니 뚜렷이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를 물화라 한다.

장주가 나비를 꿈꾼 것일까요, 나비가 장주를 꿈꾸는 것일까요? 그렇게 묻고는 한마디를 더 붙입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분명 구별이 있으며, 이것을 물화라고 한다고요. 의문도 남고 구별도 남습니다. 앞말만 남기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이야기로 읽기 쉽고, 뒷말만 남기면 그 의문은 아예 없었던 듯해집니다. 가장 읽어 볼 만한 점은 오히려 두 말을 나란히 두고, 어느 하나로 다른 하나를 지우려 서두르지 않는 데 있습니다.

꿈속에는 다른 답이 없었습니다

‘장주를 알지 못했다’는 짧은 말은 가벼워 보이면서도 무겁습니다. 꿈속의 나비는 날아다니면서 ‘나는 사실 잠든 사람일지도 몰라’라는 다른 답을 준비해 두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삶은 날아다니며 흡족해하는 것이 전부였고, 장주는 시야 안에 없었습니다. 깨어난 뒤에는 ‘거거연히 장주였다’고 합니다. ‘거거연(蘧蘧然)’에는 놀라 깨닫거나 선명히 드러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이 장주의 현실 확인에 쓰인 증거를 전부 나열한 것은 아닙니다. 꿈과 깨어 있음의 증거가 똑같다고 증명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꿈속에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은, 깨어난 사람을 잠깐 머뭇거리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느껴진다’는 것만으로는 모자란 듯합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머뭇거림입니다. 매일 내가 나비인지 의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쓴 이메일을 우연히 보고는, 그렇게 단언하던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지금 봐도 나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뒤에 새로운 소식을 알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대가를 직접 감당했습니다. 재료 하나하나가 모두 틀렸던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때 가진 한 장의 그림을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전체 모습으로 여겼다는 것이 문제였을 수 있습니다.

구별이 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는 말로, 장자는 애초에 의문이 없었고 모든 것을 명확히 구분했다는 결론을 바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원문은 바로 앞에서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과, 지금 있는 상태에서 최종적인 보증을 제시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반대쪽의 성급한 결론도 막아 줍니다. 틀릴 수 있으니 굳이 가려 볼 필요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수상한 이메일과 은행의 진짜 안내가 철학적 의심 때문에 같은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출처를 조사하고, 전화를 걸고, 계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확인할 때마다 절대적인 보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어도, 확인하지 않을 때보다 훨씬 믿을 만할 수 있습니다.

나비의 꿈이 일상의 판단을 마비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나는 확신해’ 다음에 자리를 조금 남겨 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확신하는지, 어떤 소식을 들으면 말을 바꿀지 묻는 자리입니다. 그 여유가 구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구별을 고칠 기회를 남겨 줍니다.

그 앞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나비의 꿈 바로 앞에서 망량이 그림자에게 묻습니다. 아까는 가더니 지금은 멈추고, 아까는 앉더니 지금은 일어서니, 왜 그렇게 자기 주장이 없느냐고요. 망량(罔兩)은 보통 그림자 가장자리의 옅은 그늘이라고 풀이합니다. 원문에서 ‘경(景)’이라고 쓴 것이 여기서 말하는 그림자입니다.

망량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아까는 가더니 지금은 멈추고, 아까는 앉더니 지금은 일어서는구나. 어찌 그리 스스로 지키는 바가 없는가?’ 그림자가 말했다. ‘나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런 것일까? 내가 의지하는 것도 다시 무엇에 의지해서 그런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 무엇 때문에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림자는 완전한 인과 설명을 내놓지 않습니다. 내가 무언가에 의지하는 것인지, 그것도 다시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인지 되묻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지, 왜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아느냐고 합니다. 이 대목을 나비의 꿈과 이어 읽으면 흥미로운 전환이 보입니다. 방금까지 밖에서 그림자의 독립성 없음을 비판하던 자리에서, 이제 장주가 자기 상태는 어디서 왔는지 묻는 자리로 옮겨 갑니다. 두 대목을 함께 놓는 것은 저의 독법입니다. 어느 층위에서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이미 증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림자의 물음은 의존 관계를 더 물을 여지를 남깁니다. 모든 지식을 취소하는 판결문은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우리는 흔히 좋은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에도 거쳐 온 길이 있습니다. 받아 온 훈련, 만난 사람들, 기억하는 성공, 잊기 어려운 실패가 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모두 틀린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경로를 묻지 않으면 익숙한 것을 유일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방 안의 모두가, 분명히 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떤 팀에서 모두가 사용자는 무엇보다 기능이 많은 것을 원한다고 믿는다고 해 봅시다. 회의 때마다 새 기능을 몇 가지 넣었는지 비교하고, 인터뷰 때마다 어떤 기능이 더 필요한지부터 묻습니다. 게으른 사람들도 아니고, 데이터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미 떠난 사용자가 가장 간단한 입구조차 찾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방 안의 사람들이 부지런할수록 기존 그림은 더 정교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빠진 한 귀퉁이는 줄곧 비어 있습니다.

나중에 누군가 구독 해지 사유를 읽거나, 새 사용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하는 과정을 곁에서 함께 봅니다. 이전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갑자기 다른 체계로 바뀐 것이 아니라, 그동안 셈에 넣지 않았던 경험이 비로소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일에서 ‘깨어남’은 꿈에서처럼 극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듣기 거북한 한마디, 한 번의 실패, 예상과 다른 기록 하나일 수 있습니다. 성찰이나 조사도 힘을 발휘합니다. 운명이 눈앞에 바다를 가져다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꿈을 ‘하나의 시스템은 내부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보편 정리로 쓰지 않겠습니다. 이 문학적 대목이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상에 더 가까운 당부는 이렇습니다. 점검할 때마다 같은 증거와 같은 질문만 허용한다면, 아무리 부지런히 살펴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보증서가 아닙니다

이야기는 문득 잠에서 깼다고 할 뿐, 장주가 어떤 추론으로 꿈을 벗어났는지는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 맹점을 능동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낼 수도 없습니다. 질문을 바꿀 수도, 나를 지지하지 않는 자료를 찾아볼 수도, 전에는 듣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내가 못 본 부분이 보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외부는 아니지만, 쓸모가 있기에는 충분합니다. 물론 그 사람도 틀립니다.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옳음을 보증할 수 없고, 새로운 견해가 그저 더 요란한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소중히 여길 것은 반대하는 자세 자체가 아닙니다. 그 반대가 새로운 관찰이나 이유, 확인할 만한 질문을 가져오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친밀함도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친구가 매일 반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관계 안에서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결론이 하나뿐이라면, 우리는 일깨움을 받을 길 하나를 잃습니다. 상대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해 주는 것이, 때로는 ‘네 말이 맞아’ 백 마디보다 믿음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판단을 바로 상대에게 넘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을 서둘러 내쫓지 않고, 우선 거기 남겨 두어도 됩니다.

물화는 여행 증명서가 아닙니다

끝의 ‘이를 물화라 한다’는 구별과 변화를 이어 줍니다. 장주와 나비는 같은 모습이 아닌데, 이야기는 한 삶이 갑자기 다른 삶으로 넘어가게 합니다. 지금의 정체성과 경험이 한 사람을 영원히 고정해 두지는 않을 수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이야기에서 더 펼쳐 본 생각입니다. 장주의 몸이 실제로 종의 경계를 넘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물화를 오직 하나의 현대 심리학 설명으로 묶어 둘 필요도 없습니다.

변화가 꿈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예전에 믿었던 일을 더는 믿지 않아 아는 사람들을 잃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판단이 틀렸다고 인정한다면 사과가 필요할 수 있고, 남이 이미 떠안은 손실을 내 쪽으로 다시 가져와야 할 수도 있습니다. 확신이 흔들린다고 마음이 가벼워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임도 따라옵니다. 한편 ‘나는 이미 깨어났어’는 새로운 자만이 되기 쉽습니다. 이제 남들은 다 꿈속이고 나만 꿰뚫었다고요. 그러면 나비는 다음 일깨움을 거절하려고 가슴에 다는 훈장이 됩니다. 「제물론」은 앞에서 꿈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꿈의 물음을 되돌립니다. 그 물음을 꺼내는 사람을 위한 귀빈석을 따로 남기지 않습니다.

말을 바꿀 수 있는 자리를 조금 남기기

천뢰는 판단마다 거쳐 온 길이 있음을 듣게 하고, 조삼모사는 나누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이 어떻게 반응을 움직이는지 보여 주며, 나비의 꿈은 가장 내밀한 확신을 묻습니다. 이 독서 경로에서 세 이야기는 세계를 단계적으로 취소하지 않습니다. ‘내 쪽이면 이미 충분하다’는 태도를 조금씩 풀어 줍니다. 매일 삶을 뒤집을 필요는 없습니다. 밥은 먹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며, 약속을 ‘꿈일 수도 있잖아’라는 말로 없앨 수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결정에서는 단죄하는 말을 조금 줄이고, 다시 볼 기회를 하나 남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생각을 바꾼 일을 하나 떠올려 보세요. 무엇이 들어왔나요? 책이었나요, 사람이었나요, 전에는 이름도 없던 감정이었나요? 그때 그 문을 막았다면 오늘은 어땠을까요? 그렇다고 자신을 더는 믿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나는 알아’라고 말하면서도, 그다음 말도 끝까지 들을 마음을 남기는 것뿐입니다.

원문과 출처

이 한국어판은 Non Dubito의 중국어 산문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장자』 원전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며, 고문 인용 부분도 여기서는 그 내용을 한국어로 풀어 전합니다. 중국어 원래 페이지에는 고문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기존 영어판 역시 영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썼고,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례에 빗대거나 거기서 논의를 더 펼친 부분은 이 산문 저자의 해석이지, 원전에 그런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과 해석에 관한 설명

원문과 독법: 「제물론」.

중국어 페이지에는 고문 인용을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기존 영어 서술은 이 판을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 이 한국어판에서는 인용의 내용을 한국어로 풀어 전합니다. 현대 사례에 빗대거나 더 펼친 생각은 저자의 해석이며, 원문에 그런 사건까지 따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