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사일
가장 가슴 벅찬 피날레와 끝내 덮을 수 없는 장부
카타르는 돈과 기술로 달력과 기후까지 바꾸고 눈부신 결승을 만들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통계 속에 사라진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경기의 아름다움과 교환될 수 없는 여항으로 남았다.
이 글의 목차
1. 모든 것을 다시 짜 맞춘 대회
2022년 월드컵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짜 맞춘 대회였다.
먼저 시기가 바뀌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월드컵은 거의 언제나 여름인 6월과 7월에 열렸다. 그런데 이 대회는 연말로 옮겨 갔다. 2015년 3월 19일, 국제축구연맹 FIFA 집행위원회는 결승전을 12월 18일에 치르기로 정했다. 대회 전체가 전례 없던 11월과 12월 사이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결정 때문에 유럽의 클럽 축구 일정도 모조리 다시 짜야 했다. 2022년에 이르러 FIFA는 월드컵 출전 선수들이 소속 클럽에서 치를 수 있는 마지막 경기일을 11월 13일로 공식 지정했다. 다시 말해 전 세계의 리그가 이 월드컵을 위해 진행을 멈추고, 짧지만 분명한 빈자리를 내주었다. 한 대회가 세계 축구의 달력 전체를 자신을 중심으로 다시 배치하게 만든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변화의 무게를 가늠하려면 무엇이 바뀌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월드컵의 여름 개최는 아무렇게나 정해 놓은 규칙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수십 개 나라의 리그, 선수들의 신체 리듬, 팬들의 관전 습관이 겹겹이 맞물려 만들어 낸 질서가 있었다. 한 군데만 건드려도 전체가 흔들리는 질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을 정말로 건드렸다. 축구 자체에 반드시 바꿔야 할 이유가 생겨서가 아니었다. 개최지의 기후와 개최지의 의지가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백 년 가까이 이어진 관행조차 충분히 강한 힘 앞에서는 흔들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이미 이 대회가 어떤 성격을 띨지가 드러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던 것들도 다시 배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다음은 경기장이었다. 카타르의 여름은 축구를 할 수 없을 만큼 덥다. 그래서 이 대회는 시기만 옮긴 것이 아니라 지붕이 트인 경기장에 냉방까지 설치했다. FIFA는 이 경기장 냉각 기술을 공식적인 대회 유산 이야기 속에 포함시키면서, 카타르가 개최권을 얻은 뒤 이 시스템을 특별히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사람들은, 여름이면 야외에서 축구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더운 곳의 개방형 경기장에서 수만 명의 관중과 그라운드의 선수들에게 시원한 바람을 보냈다.
이 두 가지를 나란히 놓고 보면 현기증에 가까운 감각이 찾아온다. 이 월드컵을 위해 시간은 휘어졌고 기후는 길들여졌다. 반세기 넘게 이어 온 여름 개최 관행은 바꾸겠다는 말과 함께 바뀌었고, 축구를 하기 어려운 폭염은 기술의 힘으로 억눌렸다. 이것은 이제 대회 하나를 개최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의지를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일에 가까웠다.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고 믿는 의지였다. 이 대회에는 준비 첫날부터 온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는 야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받치는 자신감의 뒤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거론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마지막은 돈이다. 여기서는 이야기가 엇나가지 않도록 몇 가지 범위를 구별해야 한다. 2010년 유치 신청 당시 카타르가 제출한 경기장 신축·개보수 예산은 약 30억 달러였다. 이것은 경기장에 한정된 수치다. 반면 외부에서 더 자주 거론하는 2,000억~2,200억 달러는 개최권 획득 이후 카타르가 추진한 훨씬 넓은 범위의 도시·국가 기반시설을 가리킨다. 도로, 지하철, 공항, 호텔, 통신망, 신도시가 여기에 들어간다. FIFA가 심사한 월드컵 예산이 아니라 한 나라가 십여 년 동안 벌인 건설의 총량인 셈이다. 건설이 절정에 이른 2016년에는 카타르의 기반시설 지출이 국내총생산의 18퍼센트에 달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 수치들을 나누어 보아야 비로소 분명해진다. 이 월드컵의 뒤에는 현실을 다시 쓸 만큼 거대한 돈이 있었다. 달력을 옮기고, 사막의 열기를 식히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 신도시를 줄줄이 세울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그 돈은 무엇을 사들였으며, 또 무엇을 가렸을까.
2.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
그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아무도 서로 맞추지 못한 숫자들을 펼쳐 볼 필요가 있다.
한쪽에는 영국의 한 신문이 2021년에 내놓은 조사 결과가 있다. 이 신문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십 년 사이에 인도,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 가운데 카타르에서 사망한 사람을 집계했다. 총인원은 6,500명이 넘었다. 평균을 내면 그 십 년 동안 매주 이 다섯 나라 출신 열몇 명이 카타르에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중요한 점이 있다. 이 수치는 월드컵 경기장을 짓다가 사망한 사람의 수가 아니다. 카타르 전역의 모든 업종에서 일한 이 다섯 국적 노동자의 사망을, 사망 원인에 관계없이 전부 합친 숫자다.
다른 한쪽에는 주최 측이 오랫동안 제시해 온 공식 집계가 있다. 월드컵 경기장 건설에 직접 참여한 노동자 가운데 사망자는 37명이며, 그중 3명은 업무 관련 사망, 나머지 34명은 업무와 무관한 사망으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이 집계는 월드컵 경기장과 직접 이어지는 범위만 포함한다. 도로와 지하철, 호텔과 공항을 짓는 일, 경비·청소·급식처럼 더 넓은 대회 준비 체계에 속한 일은 들어가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또 다른 집계들이 흩어져 있다. 국제노동기구 ILO는 카타르와의 협력 체계 안에서 전국의 산업재해를 집계했다. 이를테면 2020년의 산업재해 사망은 50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국의 산재 수치이지 월드컵 관련 사망 수치가 아니다. 2022년에는 대회 준비·유산 최고위원회의 사무총장이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지난 수년간 월드컵 관련 공사로 사망한 이주노동자가 400~500명 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뒤이어 주최 측은 이 숫자가 사실 카타르 전역의 모든 업종, 모든 국적을 포괄한 산업재해 사망 통계를 가리킨다고 해명했다.
이렇게 말을 한 번 바꾼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드러난다. 책임 있는 공식 집계라면 한 명 한 명 대조할 수 있는 명부가 바탕에 있어야 한다. 누가, 언제, 어느 현장에서,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사무총장이 텔레비전에서 400~500명이라는 추산치를 말하고, 같은 조직 사람들이 나서서 그것을 다른 뜻으로 다시 설명한 것이었다. 숫자가 서로 다른 설명 사이를 미끄러진다는 사실은, 그 밑에 한 사람씩 세어 놓은 탄탄한 기초 명부가 없음을 드러낸다. 그 명부가 없는 것은 이들이 한 명씩 기록할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이들을 한 명씩 기록해야 할 사람으로 대하는 체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죽음은 서로 어긋나는 여러 집계 사이에 흩어져 다시는 하나씩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것은 범위와 추산치뿐이다. 그 어떤 범위 안에서도 구체적인 얼굴 하나를 알아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상한 상황이 생겼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느냐는 하나의 물음 앞에 6,500명 이상, 37명, 3명, 400~500명, 50명이라는 숫자가 놓여 있다. 서로 맞지 않으며 어느 하나로 다른 것을 대신할 수도 없다. 진짜 어려움은 어느 숫자를 고를 것인가에 있지 않다. 왜 이 숫자들은 애초에 서로 맞추기 어려운가에 있다. 이유는 적어도 네 가지다. 첫째, 사업 범위가 다르다. 월드컵 경기장만 세는 것과 도로·지하철·공항·호텔·경비·서비스업까지 월드컵을 준비하는 국가 사업에 넣어 세는 것은 모집단부터 전혀 다르다. 둘째, 사망 원인의 범위가 다르다. 산업재해 통계에는 보통 공식적으로 산재로 인정된 사망만 들어간다. 충분한 법의학적 조사 없이 급사, 심부전, 호흡부전, 이른바 자연사로 처리된 많은 죽음은 아예 산재 사망 명부에 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셋째, 국적의 범위가 다르다. 그 신문은 남아시아 다섯 나라만 다루었으므로 필리핀과 케냐 등 노동자를 많이 보내는 다른 나라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넷째, 국가 전체의 통계와 개별 사업의 통계는 애초에 서로 다른 것이다.
두 가지 주장은 곧바로 배제할 수 있다. 6,500명 모두가 월드컵 경기장을 짓다가 죽었다는 말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공식 집계의 3명을 두고 사망자가 모두 합쳐 겨우 세 명이었다고 하는 말 역시 잘못이다. 그 3명은 경기장 관련 사망 가운데 산업재해로 인정된 사람만 가리킨다. 경기장 사망자의 전체 숫자도 아니고, 대회 준비 기간에 죽은 노동자의 전체 숫자는 더더욱 아니다.
이 숫자들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한 가지가 선명해진다. 도대체 6,500명인가, 37명인가, 400명인가를 다투는 물음 자체가 어딘가 빗나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정확한 숫자 하나를 찾아 빈칸에 써넣기만 하면 이 장부를 덮고 이 일을 지나간 일로 돌릴 수 있다는 듯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장부의 계산 단위가 아니다. 숫자 하나하나의 뒤에는 인도에서, 네팔에서, 방글라데시에서 온 젊은이가 있다. 멀리 있는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릴 돈을 벌어 보내려고 고향을 떠난 사람이다. 그는 통계 분류표의 한 칸이 아니다. 이름이 있고, 마음에 걸리는 이들이 있으며, 이 일자리 하나로 달라진 삶 전체가 있다. 그런 사람을 아직도 논쟁 중인 숫자로, 업무 관련인지 아닌지 가르는 분류 하나로 줄여 버리는 행위는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
휴먼라이츠워치와 국제앰네스티가 거듭 지적한 것은 숫자보다 더 서늘한 사실이다. 카타르 당국은 오랫동안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실질적인 사인 조사를 하지 않았다. 많은 사망 기록에는 자연적 원인 또는 심정지라고 적혀 있지만, 그런 기록은 왜 사람이 죽었는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사람이 죽었고 사인란에는 자연적 원인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그 장부를 끝내 덮을 수 없는 진짜 이유다. 한 생명을 업무 관련인지 아닌지로 분류하고, 자연적 원인이라고 적은 뒤 더 묻지 않으면, 그 생명은 더 이상 생명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허공에 떠서 누구도 맞출 수 없는 숫자가 된다. 장부를 덮지 못하는 까닭은 숫자를 아직 다 세지 못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그렇게 세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3.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이 노동자들을 둘러싼 카타르의 제도가 실제로 바뀐 것도 사실이다.
변화의 핵심에는 카팔라라는 고용 제도가 있었다. 법적으로 중요한 고비는 두 번이었다. 하나는 2018년 9월 4일, 카타르가 대다수 외국인 노동자에게 적용하던 출국 허가 요건을 폐지한 일이다. 이전에는 노동자가 카타르를 떠나려면 먼저 고용주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제 대다수에게서 그 관문이 사라졌다. 다른 하나는 2020년의 법 개정이다. 직장을 바꾸려는 노동자가 반드시 받아야 했던 이직 동의서 요건이 폐지되었다. ILO는 이 조치를 카팔라의 핵심 통제 고리를 해체하는 중요한 단계로 평가했다.
개혁이 가져온 혜택도 실재했다. ILO의 협력 사업 최종 평가에는 그 점이 분명히 적혀 있다. 2022년 조사에 응한 저임금 이주노동자의 86퍼센트가 개혁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답했다. 2023년까지 약 67만 건의 이직 신청이 승인되었고, 최저임금법은 28만 명이 넘는 노동자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었다. 고온 속에서 온열질환으로 진료를 받은 사람의 수까지 눈에 띄게 줄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없었던 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법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 법 조항 하나를 없애는 일은 하룻밤 사이에도 할 수 있다. 표결 한 번과 공고 한 장이면 된다. 반면 그 조항의 변화를 모든 현장과 모든 노동자의 삶에 실제로 닿게 하는 일은 별개다. 여권을 빼앗기고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이런 일자리 하나를 얻으려고 거액의 알선료까지 낸 노동자를 생각해 보자. 법적으로 자유롭게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해도, 현실에서 떠날 엄두를 낼 수 있는지, 정말 떠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그를 묶어 놓는 것은 출국 허가서 한 장만이 아니었다. 빚, 서류, 언어,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처지가 한꺼번에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끈 하나를 빼내더라도 나머지 끈들은 여전히 그를 제자리에 단단히 붙들 수 있다.
모든 노동자 가운데 이 개혁의 빛조차 가장 닿기 어려운 집단도 있다. 가사노동자들이다. 대다수가 여성인 이들은 공사장이나 공장이 아니라 각 가정의 지붕 아래서 일한다. 통계와 감독의 손길이 가장 쉽게 닿는 곳에 있지 않은 것이다. 노동법의 여러 보호 장치도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의 처지는 개인 주택의 문 뒤에 가려져 있어 외부에서 보기도, 따져 묻기도 어렵다. 개혁은 전국에 적용되는 법 조항으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조항의 힘은 굳게 닫힌 집집의 문 앞에서 약해지곤 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한 개혁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었는지와 누구를 빠뜨렸는지는 함께 보아야 한다. 빠진 사람들은 흔히 가장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거의 모든 독립적인 평가는 하나의 결론을 가리킨다. 법률 문구가 달라졌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ILO 스스로도 법 집행과 절차 개선이 아직 진행 중이며 가사노동자가 얻은 혜택은 제한적이라고 강조한다. 휴먼라이츠워치와 국제앰네스티의 평가는 더 날카롭다. 무단이탈을 범죄로 다루는 제도, 여권 압류, 과도한 알선료, 임금 체불, 결사의 자유 제한, 노동자가 배상을 받기 어려운 현실은 대회가 끝난 뒤에도 남았다. 국제앰네스티는 2023년에 대회 이후 상황을 진전이 멈추고 추진력이 약해진 상태로 정리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카팔라식 통제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고스란히 유지된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에서는 두 부류가 각자 절반씩만 가져가기 쉽다. 한쪽은 86퍼센트와 이직 67만 건만 내세우며 말한다. 개혁의 성과가 이렇게 큰데 왜 아직도 옛 문제를 붙들고 있느냐고. 다른 쪽은 여전히 계속되는 여권 압류와 체불, 무단이탈의 범죄화만 내세우며 말한다. 이 모든 개혁이 외부에 보여 주기 위한 겉치레일 뿐이라고. 그러나 어느 절반도 전체 모습은 아니다. 정직하게 말하려면 두 쪽을 동시에 들고 있어야 한다. 법 조항을 뜯어고친 것도 사실이고 현실의 억압도 사실이다. 노동자의 처지는 분명 나아졌지만 진정한 자유에는 아직 멀다. 어떤 일은 진전이면서 동시에 불충분할 수 있다. 인정받을 만하면서도 계속 따져 물어야 할 수 있다. 그것을 칭찬이나 비난 한마디로 눌러 담으려는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정에 너무 일찍 판정을 찍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법적 차원에서 카팔라는 실제로 해체와 개편을 겪었다. 하지만 제도적인 억압이 그 때문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익숙한 동작이다. 오래된 규칙 하나를 엄숙하게 폐지하고 새 법 조항에 써넣은 뒤, 그것으로 문제를 매듭지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현실의 통제는 법 조항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모습만 바꾸었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출국 허가에서 여권 압류, 알선료 징수, 무단이탈죄로 위협하기 같은 어두운 곳으로 옮겨 가 계속 작동한다. 규칙은 종이 위에서 바뀌었고, 억압은 삶의 현장에 남았다. 그것은 꺼진 것이 아니라 집을 옮긴 것이다.
4. 개막을 앞둔 이틀
개막 직전 며칠 동안 몇 가지 일이 거의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모두 같은 문제와 이어져 있었다. 이 거대한 축제의 막이 오르기 전에,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하나는 맥주였다. 개막을 이틀 앞둔 2022년 11월 18일, FIFA와 개최국은 경기장 주변에서 알코올이 들어간 맥주를 더 이상 팔지 않겠다고 갑자기 발표했다.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뒤집은 것이었다. 공식 설명에 따르면 개최국 당국과 논의한 뒤 내린 결정이었다. 수년간 준비하고 후원 계약에도 넣었던 계획이 개막 이틀 전에 바꾸겠다는 말과 함께 바뀌었다.
작아 보이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무언가가 새어 나온다. 여러 해 동안 주최 측과 FIFA 사이에 수많은 협의와 약속이 오갔을 것이다. 맥주 판매도 계약서에 명문화된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 합의는 결국 개최국의 뜻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거대한 협력 속에서 누구의 의지가 최종적으로 관철되는지 드러난 셈이다. 국제적인 후원 계약조차 이틀 만에 뒤집을 수 있는 개최국이라면 이 월드컵을 어떤 모습으로 세계에 보여 줄지 결정할 힘도 충분했을 것이다. 맥주는 작은 각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각주가 설명하는 것은 대회 전체를 관통하는 힘의 관계였다.
또 하나는 연설이었다. 개막 전날인 2022년 11월 19일,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이 나중에 널리 알려진 연설을 했다. 그는 오늘 자신이 카타르인처럼 느껴진다는 말로 시작했다. 이어 같은 문장 형식을 거듭하며 오늘 자신이 아랍인, 아프리카인, 동성애자, 장애인, 이주노동자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연설의 중심은 차별과 이중잣대에 반대하는 데 있었고, 유럽 역사 속 대외 정복과 노예화의 오래된 빚도 다시 꺼냈다. 이 발언은 이후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으로 거듭 해석되었다.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남을 내려다보며 이중잣대를 들이대 온 서구를 향한 강력한 반격으로 들었다. 다른 이들은 FIFA 회장이 개최국을 두둔하면서 거창한 도덕적 자세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외부의 추궁을 슬쩍 밀어내는 말로 들었다. 두 가지 반응은 모두 실제로 존재했다.
이 연설을 서로 다른 두 부류가 모두 가져다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 실제로 아픈 지점을 짚었기 때문이다. 비서구 국가가 대규모 대회를 여는 일을 비판할 때 서구의 말에는 이중잣대가 섞이는 경우가 분명 적지 않다. 똑같은 문제라도 다른 곳에서 일어나면 유난히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자신의 역사, 심지어 현재에 남아 있는 여러 빚은 가볍게 지나친다. 이 아픔은 실재한다. 하지만 진짜 아픈 지점도 방패로 쓰일 수 있다. 외부에 이중잣대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반대로 노동자들이 어떻게 죽었느냐는 구체적인 질문들을 없던 일로 만들지는 못한다. 둘 다 성립하며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월드컵은 그토록 설명하기 어렵다. 실제 문제와 실제 억울함이 하나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완장 문제도 있었다. 몇몇 유럽 대표팀은 원래 다양성과 차별 반대를 상징하는 여러 색의 완장을 주장에게 채워 경기에 나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FIFA 대회 규정은 선수와 관계자가 장비나 몸에 정치적·종교적·개인적 메시지를 표시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또 본선의 주장은 FIFA가 제공하는 완장을 착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월 21일, 잉글랜드·웨일스·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독일·덴마크의 일곱 대표팀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FIFA가 경고 카드까지 포함할 수 있는 경기상 제재를 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각 팀은 주장들이 경기 중 그 완장을 차게 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라운드 위에서 드러내려 했던 입장은 경고 카드 한 장의 위협 앞에서 그라운드 밖으로 물러났다.
이 작은 일은 어떤 관계를 선명하게 비춘다. 완장 하나에 얼마나 큰 힘이 있겠는가. 천 조각을 한 바퀴 두른 것에 색깔과 의미가 조금 담겼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천 조각이 경기장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다.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가 개최지가 보여 주고 싶은 조화로운 장면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칙을 꺼내 들고 제재를 내보였으며, 그 천 조각은 끝내 등장하지 못했다. 이것은 축구 규칙을 둘러싼 다툼이 아니다. 가장 성대한 이 무대에서 무슨 말을 해도 되고, 무슨 말은 해서는 안 되는지를 둘러싼 다툼이다. 흥미로운 점은 메시지를 억누르려 할수록 그것이 오히려 더 멀리 퍼진다는 사실이다. 만약 조용히 경기장에 등장했더라면, 정작 팔에 채우지 못했을 때처럼 그 완장이 이토록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세 사건은 사실 같은 방향을 향했다. 가장 성대한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불협화음을 하나씩, 가능한 한 눌러 놓으려는 방향이었다. 맥주를 거둬들인 것은 양보였고, 비판의 틀을 다시 짠 것은 변론이었으며, 완장을 막은 것은 금지였다. 그러나 논란을 끝내려던 이 동작들은 어느 하나도 정말로 논란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맥주 판매의 번복, 완장 착용의 포기, 인판티노의 연설은 오히려 개막 직전 며칠 동안 가장 많이 회자된 이야기가 되었다. 목소리를 누르려던 손이 스스로 그 목소리의 일부가 되었다.
5. 그라운드 위의 밤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공이 굴러가기 시작하자 누구도 미리 연출할 수 없는 힘이 생겨났다.
2022년 11월 22일,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아르헨티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1 대 2로 졌다. 메시는 경기 시작 10분 만에 페널티킥으로 아르헨티나에 리드를 안겼다. 그러나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사우디가 승부를 뒤집었다. 48분에 알셰흐리가 동점골을 넣었고, 53분에 알다우사리가 역전골을 터뜨렸다. 아르헨티나가 이어 오던 36경기 연속 무패는 그렇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경기에서 끊겼다. FIFA는 이 승부를 역사적인 이변으로 규정했다. 다음 날 사우디아라비아는 전국이 공휴일을 보내며 이 승리를 축하했다. 달력을 다시 쓰고 경기장의 열기를 식힌 그 돈으로도 이런 밤은 살 수 없었다. 연출할 수도 없었다.
모로코의 이야기는 더욱 그랬다. 모로코는 4강까지 올라가 남자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준결승에 진출한 아프리카 팀이 되었다. 조별리그에서는 크로아티아와 0 대 0으로 비기고 벨기에를 2 대 0으로 꺾었다. 16강에서는 스페인과 0 대 0으로 맞선 뒤 승부차기에서 탈락시켰다. 골키퍼 보노가 혼자 두 차례의 킥을 막았다. 8강에서는 다시 포르투갈을 1 대 0으로 막아 세웠다. 한 아프리카 팀이 아랍 세계에서 열린 첫 월드컵에서 한 걸음씩, 이전에는 어느 아프리카 팀도 닿지 못했던 곳까지 나아갔다.
이 밤들은 이 월드컵에서 누구도 미리 써 놓을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앞서 배치해 놓은 모든 것, 대회 일정과 경기장과 기반시설, 심지어 개막 전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다루는 방식에는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기색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공이 굴러가자 그 장악력은 작동하지 않았다. 사우디가 아르헨티나를 뒤엎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아프리카 팀이 4강에 오르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세심히 준비한 대회에서 가장 가슴 벅찬 장면들이 계획에 전혀 없던 우연에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축구가 가장 매력적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어떤 권력도, 어떤 돈도, 어떤 빈틈없는 준비도 억누르거나 사들일 수 없는 부분이 언제나 남는다. 그것은 대본의 틈에서 스스로 자라난다.
아르헨티나의 우승 여정 전체는 바로 그 치욕스러운 패배에서 시작되었다. 사우디에 진 뒤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경기씩 승리를 이어 갔다. 멕시코와 폴란드를 각각 2 대 0으로 꺾고 조 1위로 올라갔다. 토너먼트에서는 호주를 2 대 1로 이겼고, 네덜란드와 2 대 2로 비긴 뒤 승부차기로 통과했으며, 크로아티아를 3 대 0으로 꺾고 결승까지 갔다. 나중에 수없이 되풀이될 동화의 시작은 통쾌한 대승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 팀은 끝났다는 판정을 받을 뻔한 참패였다. 진정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흔히 이처럼 가장 덜 계획된 자리에서 자라난다.
지나고 나면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운명이라고 말하기 쉽다. 메시만큼 위대한 선수라면 이런 결말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우디에 패한 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이들은 이 팀과 메시가 또 한 번 아쉬움을 안고 돌아가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결국 이들이 이긴 것은 처음부터 승리하도록 대본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뒤의 매 경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한 경기씩 자신을 벼랑 끝에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나중의 승리를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로 읽는 것은 결과를 알고 뒤돌아볼 때 생기는 착각이다. 실제 과정에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던 갈림길이 가득했다. 그 선방이 실패했다면, 그 페널티킥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우승은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공을 한 번씩 차며 만들어 낸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이 대회를 떠올리며 차가운 숫자나 여러 번 바뀐 규정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시가 조별리그에서부터 탈락할 뻔했던 밤은 기억할 것이다. 모로코 선수들이 어머니들을 관중석 한가운데로 모셔 온 모습, 사우디 전국이 한 번의 승리 때문에 쉬며 환호하던 모습도 기억할 것이다. 누구도 계획해 낸 적 없는 그 장면들이야말로 이 월드컵에서 진정으로 살아 있는 부분을 이루었다. 이것은 또 다른 각도에서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거대한 축제에서 가장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흔히 정성껏 준비한 부분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었던 부분이다. 사람의 마음에 가장 오래 남는 기억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계획으로 빚어낸 웅장함이 아니라, 예고도 없이 스스로 눈앞에 뛰어든 진짜 모습 말이다.
6. 가장 위대한 결승전
2022년 12월 18일, 루사일 스타디움. 아르헨티나 대 프랑스.
정규시간과 연장전을 합친 결승전 스코어는 3 대 3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승부차기에서 4 대 2로 이겨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 90분에 30분을 더한 시간에 벌어진 일은 이후 수없이 재생되었다. 메시가 23분에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넣었고, 디마리아가 36분에 2 대 0으로 차이를 벌렸다. 아르헨티나가 손쉽게 우승하는 듯하던 순간, 음바페가 80분에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데 이어 81분에 한 골을 더 넣었다. 2분도 채 안 되어 2 대 2가 되었다. 연장전에서는 메시가 108분에 흘러나온 공을 다시 차 넣었다. 그러나 음바페가 118분에 또 한 번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승부를 3 대 3으로 끌고 갔다. 음바페는 이로써 1966년의 허스트에 이어 남자 월드컵 결승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승부차기에서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스는 코망의 킥을 막았다. 그보다 앞선 연장전 마지막 순간에는 콜로 무아니와의 일대일 상황에서 나온 슛을, 골라인을 박차고 나와 다리를 뻗어 막아 냈다. 그 선방은 널리 이 우승의 결정적인 장면으로 꼽혔다. 마지막에는 몬티엘이 우승을 확정 짓는 킥을 성공시켰다. 메시는 대회 7골과 함께 골든볼을 받았다. 음바페는 8골로 골든부트를 받았지만, 개인의 영예가 가장 빛난 그 밤에 가장 들어 올리고 싶었던 트로피를 놓쳤다.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스에게는 골든글러브가 돌아갔다.
경기가 끝나자 두 가지 이야기가 거의 곧바로, 그날 밤에 틀을 갖췄다.
하나는 이것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승전이었다는 이야기다. FIFA가 주는 공식 상이 아니라 그 순간 터져 나온 여론의 평가였다. 그러나 그 평가는 빠르고 거세게 퍼졌다. 로이터는 당일 기사에서 이미 이 경기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승전 가운데 하나로 불렀다. FIFA의 공식 자료도 많은 이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승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경기라고 직접 썼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곱씹어 보면 확고한 근거를 잡기 어렵다. 위대함은 측정 가능한 양이 아니다. 한 결승전의 위대함을 수치로 계산해 다른 결승전과 우열을 비교해 줄 기계는 없다. 그것은 느낌이며 평가다. 느낌과 평가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마음속에 어떤 다른 경기를 간직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 이 경기를 역대 최고로 꼽는 사람과 당시의 다른 경기를 역대 최고로 꼽는 사람은 서로를 설득하지 못한다. 애초에 하나의 동일한 척도로 가려낼 수 있는 대상을 비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말은 확인된 사실이라기보다 그 벅찬 밤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감탄에 가깝다. 감탄이 붙잡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심장 박동이다. 기록집에 적어 넣을 최종 결론이었던 적도 없고, 그런 결론이 되려는 것도 아니다.
다른 하나는 메시가 왕관을 썼으니 역사가 완결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날 밤 여러 매체가 완성, 봉인, 대관식 같은 말을 쏟아 냈다. 메시가 마침내 월드컵을 들어 올렸다는 사실은 대회 전체를 관통하는 줄거리로 쓰였다. 누가 역대 최고의 선수인가를 둘러싼 오랜 논쟁도 그 순간 이 트로피 하나로 최종 판정을 받은 듯했다.
두 이야기가 이토록 빠르고 거세게 퍼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이야기에 결말이 있기를 바란다. 온 나라의 기대를 짊어진 한 천재가 마지막 고비에서 번번이 쓰러진다. 아쉬움을 안고 물러날 것만 같던 그가 선수 생활의 황혼에 마침내 꿈을 이룬다. 이 궤적은 너무나 완전하고, 너무나 마음을 움직인다. 사람들은 서둘러 그 끝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진다. 이제 됐다. 완벽하게 끝났다. 더는 다툴 것이 없다고. 그날 밤 루사일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역사의 마지막 장을 목격했다고 믿고 싶어 했다.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봉인하려는 충동은 이해할 수 있다. 그 충동 자체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충동은 충동이고, 그것으로 어떤 일을 종결해도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여기서 잠시 멈춰야 한다. 이 결승전의 아름다움은 의심할 필요 없이 진짜였다. 그날 밤 사람들이 흘린 모든 뜨거운 눈물에 어울리는 경기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무언가를 완전히 닫았다고 말하려면 조심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승전,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말은 판결로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판단이다. 판단에는 최종 결정을 내려 주는 제도가 없다. 언제나 다른 결승전을 기억하고 다른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메시의 대관식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관식이 논쟁의 끝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논쟁은 애초에 한 번의 승리로 계산을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피날레도 어디까지나 피날레다. 그것이 끝낸 것은 그 밤의 승부가 품고 있던 긴장이지, 애초에 정답이 없는 것들이 아니다.
7. 이미지 세탁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야 또 하나의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월드컵 전체를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거듭 등장한 말이 있다. 스포츠워싱, 곧 스포츠를 통한 이미지 세탁이다. 이 말을 쓰는 데 찬성하는 쪽의 정의는 비교적 분명하다. 국가나 기관이 대규모 스포츠 행사, 구단 투자, 스타의 이야기를 이용해 국제적 이미지를 개선하고, 어떤 억압적 현실을 향하던 외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행위를 뜻한다. 학계와 공론장에서 카타르 월드컵은 그 전형적인 사례로 자주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 용어를 의심하는 쪽도 노동·인권 문제에서 카타르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따지는 것은 말 자체의 정확성이다. 이후의 연구는 스포츠워싱에 누구나 인정하는 일관된 정의가 없으며, 언론에서 포괄적인 비난의 말로 자주 쓰인다는 점을 거듭 지적했다. 아예 ‘규범적 함정’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과 국가 유형, 이를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과 대회의 효과를 한꺼번에 얇은 선 하나로 눌러 버리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스포츠워싱이라고만 부르면 오히려 그 뒤에 있는 더 복잡한 지역 정치사, 외부 강대국에 오랫동안 지배당한 지역들의 역사적 경험,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적 이중잣대를 가릴 수 있다고 경고하는 연구도 있다.
여기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대칭이 숨어 있다. 주최 측은 한 편의 공연으로 이 대회의 의미를 하나로 확정해 사람들이 아름다움만 기억하게 하려 한다. 일부 비판자는 단어 하나로 그 의미를 확정해 추악함만 보게 하려 한다. 방향은 반대지만 두 동작의 성격은 같다. 한마디로 묶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일에 억지로 말끔한 결론을 붙이려는 것이다. 실제의 카타르는 순수한 번영의 축제도, 순수한 추문 한 건도 아니었다. 실제 노동자의 죽음과 실제 제도 개선이 함께 있었고, 국가 이미지를 가꾸는 실제 사업과 실제로 이중잣대에 시달린 일이 함께 있었다. 부패 의혹은 실제로 제기되었지만, 증거로 그 의혹이 끝내 확증된 것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이미지 세탁’에 집어넣으려는 일과 ‘가장 위대함’에 집어넣으려는 일은 사실 같은 잘못을 범한다.
이 모든 것의 밑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오래된 사건도 깔려 있다. 미국 법무부가 2020년에 공개한 기소 자료에는 장기간 이어진 부패 수사에서 다룬 범행 계획 의혹들과 관련해 2018년과 2022년 월드컵 개최권이 등장했다. 2022년 개최지 선정에 관해 기소장은 2010년 투표에서 카타르를 지지하는 대가로 뇌물이 제공되고 수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무부 스스로도 이것은 아직 혐의이며,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고 강조했다. 카타르 측은 의혹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거론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은 2019년 범죄인 인도를 기다리던 중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은 FIFA 윤리 체계에서 평생 축구 활동 금지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그 처분이 미국 법원이 해당 투표에 관한 형사재판을 마쳤다는 뜻은 아니다.
이 과정은 4년 전 월드컵을 둘러싼 의혹과 같은 길을 걷는다. 혐의는 매우 구체적으로 적을 수 있다. 특정 인물, 특정한 돈, 특정한 표를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기소의 주장과 법원의 최종 유죄 확정 사이에는 입증, 신문, 재판이라는 일련의 절차가 있다. 그 절차는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이름이 거론된 이들 가운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다른 제재를 받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큰 질문, 그 표는 돈으로 산 것이었는가에 법적 결론이 났다는 뜻은 아니다. 사건은 의혹과 확정 사이에 매달려 있다. 가장 난처한 자리다. 의혹을 벗지도 못했고, 사실로 확정되지도 못했다. 어느 편이든 속 시원한 답을 재촉하는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월드컵이 무엇이었는가라는 물음조차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비판자들은 이미지 세탁이라는 말 하나로 대회 전체의 의미를 단번에 규정하려 한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너무 많은 복잡함을 납작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는다. 부패 사건도 혐의의 단계에 머물러 최종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이 대회에 마지막 판정을 내리려는 사람은, 죄를 묻고 싶든 결백을 증명하고 싶든, 깔끔한 결론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8. 맺음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 보자.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구축이 벌인 가장 대담한 닫힘의 시도였다. 여기에 동원된 것은 이제 2010년의 그 기계, 공이 골라인을 넘었는지에만 답하는 기계도 아니었고, 2018년의 그 규칙, 판정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지를 가르는 규칙도 아니었다. 현실을 다시 쓸 만큼 거대한 이 행성의 힘, 돈과 공연이었다. 그 힘으로 전 세계의 달력을 옮겼고 사막의 경기장에 냉방을 설치했으며 아무것도 없던 곳에 신도시들을 세웠다. 마지막에는 수많은 사람이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부르는 결승전과, 그 밤 온 세계를 울리기에 충분했던 메시의 대관식이라는 동화까지 내놓았다.
이 닫힘들 가운데 많은 것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라운드 위의 아름다움은 특히 진짜였다. 그러나 어느 것도 가장 깊은 잔여항까지 말끔히 정산할 수는 없었다. 그 모든 화려함 아래 가려진, 다 헤아릴 수 없는 죽음들이다. 경기장 하나의 비용을 정산할 수는 있다. 대회 하나의 장부를 결산할 수도 있다. 한 나라가 십여 년 동안 투자한 돈도 항목마다 계산을 마칠 수 있다. 그러나 이 잔여항 앞에서는 정산이라는 행위 자체가 효력을 잃는다. 그것은 애초에 계산을 미처 끝내지 못한 액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살아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산할 수 없다. 그는 장부의 한 항목이 아니다. 이름이 있고 고향이 있으며, 먼 곳에서 귀향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다.
이것은 구축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끈질긴 생각이다. 모든 것을 더할 수 있고, 상쇄할 수 있고, 끝내 청산할 수 있는 것으로 환산하려는 생각이다. 경기장 하나는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 승리 한 번은 얼마나 큰 명성을 가져오는가. 한 나라의 이미지를 개선하려면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가. 이 계산법 안에서는 만물에 가격이 붙고, 모든 것을 같은 저울에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계산법이 유독 통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이다. 한 사람의 무게는 그 저울로 잴 수 없다. 노동자 한 명의 목숨이 지하철 몇 킬로미터나 경기장 몇 분의 일과 맞먹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트로피 하나의 영광으로 공사 현장에서 조용히 꺼진 생명을 상쇄할 수도 없다. 어떤 것에는 가격이 없다. 거기에 값을 매기고 다른 것으로 환산하려는 순간,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못 본 것이다.
2022년 대회는 바로 이 잘못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내놓은 것은 어설픈 은폐가 아니라 이 행성에서 가장 가슴 벅찬 공연이었다. 가장 위대한 결승전, 가장 완벽한 대관식, 하룻밤 사이 온 세계의 눈시울을 붉힌 동화였다. 거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보라. 이토록 아름다운 것으로도 저 보기 좋지 않은 장부를 상쇄하기에 부족한가. 그러나 그럴수록 가리려던 것은 오히려 더 눈에 거슬렸다. 아름다움과 장부는 애초에 같은 차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승전의 위대함은 미적 의미의 위대함이다. 장부의 결손은 다른 성격의 결손이다. 앞의 것으로 뒤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다. 아름다운 노래 한 곡으로 무거운 빚을 갚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 애초에 아니다. 하룻밤의 아름다움으로 곳곳에 남은 장부를 덮으려는 동작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밤의 아름다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장부는 본래 아름다움으로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피날레를 뚜껑 삼아, 덮을 수 없는 것들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공연이 성대할수록 그것이 가리지 못하는 곳은 더 밝게 드러났다. 루사일의 찬란한 조명 뒤에는 인도에서, 네팔에서, 방글라데시에서 먼 길을 와서 자신은 영원히 관중석에 앉아 보지 못할 경기장을 손수 세운 사람들이 서 있다. 죽은 뒤에도 제대로 된 사인 조사 한 번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수상자 명단에도, 어떤 전광판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벽돌 한 장 한 장으로 이 축제를 쌓아 올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계산을 맞춰 없앨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경기장 안에서 가장 완벽해 보였던 닫힘조차 마찬가지다. 메시가 신성한 경지에 올랐으니 역대 최고 논쟁도 끝났다는 말 역시 결국 하나의 판단일 뿐, 실제 논쟁을 끝낼 수는 없다. 어떤 것들은 아무리 성대한 공연으로도 가릴 수 없고 지워 없앨 수 없다. 모든 조명이 꺼진 뒤에도 그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누군가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바라봐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순환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돌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중·영문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