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E와 스피노자의 『에티카』 · 10번째 글
열 번째 글 · 어렵고 드물다
지복은 숙제를 마친 뒤 받는 상이 아닙니다. 마지막 페이지에도 길은 남아 있습니다.
전체로는 259번째, 5부에서는 42번째 명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지복은 덕의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다. 욕망을 억제했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을 누리기 때문에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
앞의 주석에는 대다수 사람이 품고 있는 듯한 생각이 나옵니다. 경건함과 종교, 정신의 강인함에 관한 모든 것이 짐이며, 사람들은 죽은 뒤 그 짐을 내려놓고 이 예속에 대한 품삯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명제의 증명은 지복이 신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중간에는 덕과 힘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는 4부의 정의를 끌어옵니다. 마지막 단계는 감정을 억제했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욕망을 억제하는 능력은 지복 자체에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다
주석은 정신이 감정에 대해 갖는 힘과 정신의 자유에 관해 보여 주려 한 것은 모두 보여 주었다고 시작합니다. 이로써 지혜로운 사람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욕망에만 끌려다니는 무지한 사람보다 얼마나 나은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부의 첫머리로 돌아가 봅시다. 서문의 첫 문장은 자유에 이르는 방식 또는 길을 말하고, 둘째 문장은 지혜로운 사람이 무지한 사람보다 얼마나 나은지 보게 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예고할 때는 ‘보게 될 것’이었고, 여기서는 ‘볼 수 있다’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외적 원인에 여러 모양으로 휘둘릴 뿐 아니라, 정신의 참된 평온을 얻지 못하고, 자신도 신도 사물도 모르는 것처럼 삽니다.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게 되면 존재도 멈춥니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인 한에서 보면 정신이 거의 흔들리지 않고, 영원한 필연성으로 자신과 신과 사물을 압니다. 존재를 멈추지 않으며 정신의 참된 평온을 늘 누린다는 것입니다.
찾을 수는 있다
그 길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내가 보여 준, 여기에 이르는 길이 아주 어려워 보일지라도, 그래도 찾을 수는 있다.
그는 이유도 제시합니다. 찾아낸 사람이 이렇게 적다면, 당연히 찾기 어려운 것이어야 한다. 구원이 손닿는 곳에 있어 큰 수고 없이 찾을 수 있다면, 어째서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겠는가.
그는 적다는 데서 어렵다는 것으로 추론합니다.
비파나무
동네에 비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5월이면 열매가 가득 달립니다. 손이 닿는 사람도 몇 없고, 손을 뻗는 사람도 몇 없습니다. 곁에서 한동안 지켜보던 사람이 말합니다. “따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네.”
맺으며
그는 어려움과 드묾을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빼어난 것은 어려운 만큼 드물다.
본문·판본·출처
이 한국어판은 Non Dubito에 공개된 중국어 산문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가 읽기 편하도록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에티카』 전체나 전문 논문을 옮긴 번역은 아닙니다. 기존 영어판도 영어권 독자를 위해 따로 썼으며, 중국어 간체판과 번체판에는 전문이 있습니다. 바탕 원고가 인용한 공개 라틴어 본문에는 사용한 인쇄본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웹판에서는 The Latin Library의 라틴어 전사본으로 대조하고, 각 편의 판본 주와 링크에 해당 위치 및 확인 범위를 적었습니다. 이 전사본을 새로 편집한 비평판이라고 하거나, 원고가 처음 이용한 미상의 웹페이지와 같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SAE와 나란히 읽는 곁글은 선택해서 읽는 비교이며, 증명은 아닙니다.
본문과 판본에 관한 주
5부 명제 42와 그 주석에 해당하며, 명제 41의 주석과 이 부의 서문으로도 돌아갑니다. 지복을 잠깐의 기분 좋은 상태로 단순화하지 않습니다.
비파나무의 예는 적다는 데서 어렵다고 추론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드문 것은 모두 어려워서 드물다는 증명도 아니며, 사람들이 추구하지 않는 이유를 전부 설명하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