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에서 옥타비아누스까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간 상전이
카이사르의 역설
카이사르는 공화정의 위기를 해결할 만큼 강했지만, 자신이 왕이 아니라는 점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종신독재관, 과도한 명예, 개인에게 집중된 인사권은 로마인이 가장 두려워하던 왕의 귀환처럼 보였다. 기원전 44년의 암살은 공화정을 구한다는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암살자들은 카이사르 이후의 질서를 설계하지 못했다. 한 사람을 제거하면 낡은 규칙이 저절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이미 군대·속주·재정이 개인 권력과 결합한 상태에서 그 믿음은 공백만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의 학습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였지만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레피두스와 삼두정치를 구성하고 잔혹한 숙청을 벌이면서도, 최종 승리 뒤에는 권력을 반납하는 사람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의 강점은 군사적 천재보다 언어와 형식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한 선전전도 그 일부였다. 내전을 로마인끼리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동방의 여왕에게 로마를 넘기려는 배신과의 싸움으로 다시 썼다. 악티움의 승리는 군사적 승리이면서 이야기의 승리였다.
‘공화정의 회복’이라는 연출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비상권한을 원로원과 인민에게 돌려준다고 선언했다. 그 대가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핵심 속주, 군대의 통제권을 받았다. 공화정의 관직과 회의는 남았지만, 실질적 권력은 한 사람에게 모였다.
이것은 단순한 사기가 아니었다. 정당성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정치기술이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익숙한 공화정의 언어를 계속 사용하게 하면서 전혀 다른 권력구조를 받아들이게 했다.
원수정: 낡은 외피 속의 새 구(構)
아우구스투스는 왕이 아니라 ‘제1시민’이라고 불렸다. 집정관·호민관·최고사제 등 기존 권한을 한 몸에 겹쳐 놓았지만 새로운 왕관을 만들지는 않았다. 원로원은 존속했고 선거도 이어졌다. 다만 결정의 범위는 황제가 설정했다.
공화정의 제도는 폐지되지 않고 길들여졌다. 그 덕분에 상전이는 공개적인 단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형식과 실질의 분리는 이후 수많은 제국과 권위주의 정권이 반복해서 활용하는 기술이 된다.
해결되지 않은 계승
원수정의 가장 큰 여항은 후계였다. 왕조를 부정하는 체제에서 황제의 권력을 누구에게 넘길 것인가. 아우구스투스는 양자·혼인·관직경력을 조합해 티베리우스를 준비했지만, 명확한 법적 원칙은 만들지 못했다.
이 불확실성은 로마 제정 내내 반복된다. 유능한 후계자를 선택하는 시대에는 체제가 안정되었고, 군대가 황제를 결정하는 시대에는 내전이 일어났다. 창건자의 기술이 모든 다음 세대에 자동으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사람보다 오래간 제도와 신화
카이사르는 낡은 질서를 정면으로 돌파하다 죽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낡은 질서의 언어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웠고 살아남았다. 그가 만든 원수정은 두 세기 이상 로마의 기본틀이 되었다.
착구주기율의 관점에서 이 상전이의 핵심은 담론과 실질의 분리다. 구(構)는 새로워졌지만 사람들은 옛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정치에서 이름은 장식이 아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견디게 하고 권력을 정당한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하중지지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