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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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유라시아 제왕 시리즈 — 제04편 · 총 22편

제4편: 카이사르에서 옥타비아누스로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상전이

Han Qin (秦汉)·2026년

앞선 글에서 우리는 로마 공화정의 한계에 다가갔다.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 술라를 둘러싼 충돌 뒤에도 관직과 회의는 계속 돌아갔다. 동시에 그것들을 우회하는 선례도 남았다. 이제 술라가 죽은 뒤의 로마에서 이야기를 이어 간다. 기원전 78년, 그가 남긴 공화정은 다시 정비된 상태였다. 원로원은 약 600명으로 늘었고 호민관의 권한은 줄었다. 훗날 호민관의 권한은 회복된다. 그러나 다른 길 하나는 이미 열려 있었다. 먼저 군대로 국가를 점거하고, 그다음 법과 임명으로 새로운 질서를 짜는 길이었다.

이어지는 거의 반세기 동안 이 선례들은 거듭 사용된다. 마침내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통치를 ‘공화정 회복’이라는 틀 안에 넣는다. 이 글에서는 먼저 그 전환을 따라간다. 그런 다음 거기서 생겨난 구성체가 어떻게 작동하고, 다음 사람에게 권력을 어떻게 넘기는지 살펴본다.

물어야 할 것은 로마의 내전에서 마지막으로 누가 이겼느냐만이 아니다. 승리자가 어떻게 권력의 중심에 계속 머물렀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그리파의 함대 지휘와 삼두정의 살생부는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얻는 과정에 속한다. 이 글은 그 뒤의 다른 일에 주목한다. 그는 집정관과 원로원, 공화정이라는 이름을 없애지 않았다. 그러면서 원래 나뉘어 있던 권력들이 갈수록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했다. 옛 제도는 말로만 남은 것이 아니었다. 관직과 절차는 여전히 일을 했다. 달라진 것은 그 사이의 관계였다.

깎아냄과 구성의 주기 법칙에서 이 움직임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중국 제왕 연작에서는 군현, 관료제, 정통성을 설명하는 언어가 다시 결합하는 과정을 다뤘다. 제도가 바뀌면 제도를 설명하는 언어도 달라졌다. 로마에서는 또 다른 결합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 연작의 독법으로 보면,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의 이행은 실질적인 상전이였다. 그러나 그 전환은 공화정의 폐지를 선언하며 자신을 세우지 않았다. 새로운 권력관계는 옛 공동체의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공화정의 관직과 절차를 보존하면서, 흩어져 있던 권력을 지속적으로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것. 이 글에서는 이 배치를 ‘옥타비아누스의 기술’이라 부른다. 옛 관직은 권한을 부여하고 옛 절차는 일을 처리한다. 변화는 그 연결부에서 일어난다. 서로를 견제하던 여러 권력이 한 사람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름은 역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역사를 바꾸는 일에 참여했다.

뒤에서는 로마를 몇 가지 다른 경우와 나란히 놓아 볼 것이다. 부와이 왕조가 실권을 잡은 바그다드, 로마의 명호를 지닌 제국, 왕권과 의회의 역할을 다시 나눈 영국, ‘왕정복고’ 아래 새로운 국가를 세운 일본이다. 각각은 저마다의 경로를 거쳐 왔다. 비교의 초점은 옛 명호와 실제 결정권의 관계다. 어떤 경우에는 권력이 모이고, 어떤 경우에는 나뉘며, 또 어떤 경우에는 결정권이 다른 기관으로 옮겨 간다. 이 사례들이 모두 ‘옥타비아누스의 기술’을 달리 부르는 이름은 아니다.

우선 로마로 돌아가자. 옥타비아누스가 이 배치를 어떻게 만들어 갔는지, 이제 그 과정을 끝까지 따라간다.

1. 카이사르의 역설

카이사르부터 시작해야 한다. 옥타비아누스가 가장 직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반면교사였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로마에서도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 가운데 하나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민회와 평민의 지지에 자주 기대어 자신의 법안을 밀어붙였다. 고모가 마리우스와 결혼했으므로 마리우스 계열과 인척 관계가 있었고, 술라 시대에는 숙청당할 뻔했다. 원로원 안의 반대자들과 자주 부딪혔지만 귀족 정치인들 사이에서 동맹자를 구하는 일도 그치지 않았다. 이런 행보 때문에 원로원 주류는 오랫동안 그를 위험한 인물로 보았다.

기원전 60년, 카이사르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Gnaeus Pompeius Magnus),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와 제1차 삼두동맹을 맺었다. 법으로 정해진 관직이 아니라 유력한 정치인 세 사람 사이의 사적 합의였다. 동방 전쟁에서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퇴역병의 땅을 확보하고 동방에서 자신이 내린 조치들을 승인받으려 했다. 막대한 부를 소유한 크라수스에게는 징세 청부업자들의 이해관계도 로마에서 지지를 모으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카이사르는 첫 집정관 선거에서 이기고 뒤이어 갈리아 지휘권을 얻기 위해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세 사람이 자원을 나눠 갖기로 한 것이다.

제1차 삼두동맹은 사적 결합의 힘을 공화정의 절차 안으로 끌어들였다. 세 사람은 관직과 속주, 군권을 어떻게 배분할지 의논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선거와 발의, 표결을 거쳐야 했고 저항에도 부딪혔다. 아피아노스가 전하는 기원전 56년의 루카 회담은 이 작동 방식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 준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다시 집정관직을 노리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지휘권은 5년 연장하기로 했다. 먼저 세 사람 사이에서 합의가 이뤄진 뒤, 동맹자와 표와 법이 그것을 국가의 조치로 바꿨다. 공화정의 절차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 절차는 동맹이 통과해야 하고, 또 장악하려 하는 길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에서 계속 전쟁을 벌였고, 기원전 50년에도 그곳의 지휘권을 쥐고 있었다. 장기전은 세 사람의 균형을 바꾸며 그에게 세 가지를 가져다주었다. 첫째는 막대한 부였다. 갈리아에서 얻은 노예와 귀금속, 토지였다. 둘째는 거듭된 전투를 통해 자신과 관계를 맺은 군대였다.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병력과 군단도 보충되고 확대되었다. 셋째는 로마 전역에 걸친 명성이었다. 그는 《갈리아 전쟁기》를 써서 자신의 영웅상을 직접 만들었다. 기원전 50년이 되자 그의 재산과 군대는 로마의 정치 협상을 바꿀 만한 힘이 되어 있었다.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 카라이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에 패해 전사했다. 로마에 큰 패배를 남긴 전투였다. 셋은 둘이 되었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보수파가 카이사르에 맞서 손잡기 시작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넜다.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허가받은 속주를 떠나 이탈리아로 들어간 것이다. 강은 넓지 않았다. 그러나 강이 나누고 있던 것은 그저 두 땅덩어리가 아니었다. 로마가 누가 계속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지를 다투는 동안, 카이사르의 군대는 먼저 경계 너머로 답을 가져갔다. 정치적 다툼은 무장한 진격이 되었다.

기원전 49년부터 45년까지 이어진 내전에서 카이사르가 이겼다. 기원전 48년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살해되었다. 카이사르는 이어 북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파의 잔여 세력을 차례로 제압했다. 기원전 45년 무렵 전쟁은 대체로 끝났다.

그다음 카이사르는 무엇을 했는가. 기원전 44년 초, 그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로마의 전통적인 독재관은 임기가 제한되어 있었다. 길어야 6개월이었다.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기한이 없었지만 술라는 나중에 스스로 물러났다. 카이사르의 독재는 종신이었다. 만료일도, 권력 인계의 예정도 없었다. 그는 전에 없던 여러 영예도 받아들였다. 그의 조각상이 신전에서 신들의 상과 나란히 섰다. 로마력의 한 달은 ‘율리우스의 달’로 이름을 바꿨다. 오늘날 영어의 7월, July가 여기서 나왔다. 그는 개선식 복장을 입을 수 있었다. 영예가 옷과 달력, 도시 공간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수에토니우스는 원로들을 불쾌하게 만든 다른 일도 적었다. 원로원이 영예를 바치러 베누스 신전 앞에 왔는데, 카이사르는 앉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는 《신격 카이사르》에 이 영예들을 자세히 기록하며, 카이사르가 ‘인간에게는 너무 큰’ 영예를 받아들였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이 카이사르의 역설이다.

카이사르는 왕, rex라는 이름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관직들 사이의 권력관계는 이미 바꿔 놓았다. 종신 독재관에게는 다음 해의 인계를 기다릴 이유가 없었고, 다른 관직의 인선도 갈수록 그의 의향에 좌우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왕관을 거절하기도 했다. 기원전 44년 2월 루페르칼리아 축제에서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내밀자 카이사르는 밀어냈다. 군중이 환호했다. 거절당한 것은 그 왕관이었다. 이미 집중된 권력까지 함께 되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이 어긋남은 암살자들의 명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자유와 반왕정의 언어로 반대를 조직했다. 공화정의 언어에는 여전히 개인의 권력에 맞설 힘이 있었다. 그렇다고 갈등의 결말이 구조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가 오랫동안 보유한 권력, 그를 둘러싼 영예, 정치인들 사이의 충돌을 이 사람들은 하나의 구체적인 선택으로 끌고 갔다.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암살자들이 고른 도구는 가장 직접적이었다. 칼이었다.

2. 암살, 그리고 그 실패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극장에 딸린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되었다. 로마력의 Idus Martiae, 훗날 널리 알려진 ‘3월의 이두스’였다.

암살자는 약 60명으로, 대부분 원로원 의원이었다. 핵심 조직자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였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정치적 동맹자였다.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의 오랜 연인이었고, 그 자신도 내전에서 카이사르의 사면을 받은 뒤 발탁되었다. 한편 로마의 가문 기억에서 그의 이름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와도 이어졌다. 전통에 따르면 기원전 509년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낸 인물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조상 관계에 이견이 있었음도 전한다. 그래도 ‘브루투스’라는 이름에 담긴 반왕정의 기억은 그를 둘러싼 정치적 기대에 실제로 들어가 있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서 행동의 신호는 겉옷에 걸려 있다. 틸리우스 킴베르(Tillius Cimber)가 카이사르의 옷을 잡아당기고, 카스카(Casca)가 첫 칼을 찌른다.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저항했다. 사방에 단검이 있음을 알아차리자 겉옷을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그는 23곳을 찔려 죽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서술에서는 저항을 멈추는 순간이 브루투스를 보는 순간과 연결된다.

암살자들은 이 행동을 자유의 회복이라 설명했다.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까지 함께 죽이자는 제안에 반대했다. 행동의 대상을 카이사르 한 사람으로 한정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쓰러진 뒤 도시의 상황을 누가 통제할지, 군대와 관직을 누가 이어받을지는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정해야 했다.

문제는 카이사르의 권력이 다른 관계들에서 떨어져 혼자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는 반세기에 걸친 정치적 변형의 한 지점이었다. 마리우스와 술라,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모두 그 과정의 일부였고, 각자 어느 정도 개인화된 정치·군사력을 만들었다. 공화정의 명의는 지지를 구하는 데 거듭 쓰였으며, ‘공화정 회복’도 정치적 다툼에서 내거는 깃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죽은 카이사르 뒤에는 거대한 군대, 그에게 매우 충실했던 정치 세력인 카이사르파(partes Caesaris), 막대한 사유 재산, 그리고 유언장 한 통이 남았다.

암살 뒤에도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자리에 있었다. 며칠 동안 화해와 쟁탈이 함께 진행되었다. 원로원은 암살자들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는 한편 카이사르가 이미 내린 조치들도 유지했다. 칼푸르니아는 카이사르의 문서와 돈을 안토니우스에게 넘겼다. 유언장이 그의 집에서 공개되었고, 장례식은 카이사르를 다시 군중 앞으로 데려왔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전령은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내린 영예와 그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읽었다. 피 묻은 옷도 내걸렸다. 영예를 결정한 사람들은 남아 있었고, 영예를 받은 사람은 이미 살해된 뒤였다.

유언장에는 서로 다른 몇 가지 상속이 함께 담겨 있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남성 시민 한 사람마다 300세스테르티우스를 남기고, 테베레강 가의 정원을 대중이 쓰도록 내놓았다. 사유 재산의 4분의 3은 누이의 외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에게 돌아갔다. 나머지는 다른 친척 두 사람이 나눠 받았다. 유언장은 옥타비아누스를 아들로 입양하고 카이사르의 이름도 주었다. 군중 앞에는 받을 수 있는 돈과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정원이 있었다. 청년 앞에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이름이 놓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장이 정한 신분을 받아들여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후대에 그를 ‘옥타비아누스’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죽은 카이사르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카이사르의 아들’은 그가 유산을 요구하고 유증을 이행하며, 퇴역병과 카이사르의 옛 동맹자들에게 지지를 청할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유언장에 이름을 적는다고 군단이 저절로 그 이름 앞에 도열하지는 않는다. 재산과 관직과 지지자는 따로 얻어야 했다.

아피아노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돈을 요구했지만, 유증을 모두 이행할 만큼 순조롭게 넘겨받지는 못했다고 쓴다. 그는 상속한 재산을 팔기 시작했고 자신과 가족이 마련할 수 있는 자산도 동원해 시민들에게 약속된 돈을 지급했다. 카이사르를 기념하는 행사도 이어 갔다. 유언장은 정치에 들어설 이유를 주었다. 돈을 지급하고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그 이유를 로마인들의 눈앞에서 행동으로 바꿨다.

암살은 카이사르를 중심으로 맺어진 군대와 재산, 정치적 관계를 없애지 못했다. 안토니우스는 집정관직과 카이사르와 함께 일한 경험을 발판으로 권력을 이어받으려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상의 상속인이자 양자로 이 쟁탈에 들어왔다. 레피두스와 다른 옛 부하들도 있었다. 유언장은 재산과 이름의 상속인을 정했다. 군단과 옛 부하들이 누구를 따를지까지 정해 주지는 않았다.

3. 옥타비아누스의 부상

카이사르가 암살된 기원전 44년 3월 15일, 옥타비아누스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는 오늘날 알바니아에 있는 아폴로니아에서 카이사르가 계획한 파르티아 전쟁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안의 배경이 아주 화려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원로원에 새로 진입한 인물이었고, 옥타비우스 씨족(gens Octavia)은 기사 계층에서 원로원 계층으로 올라간 가문이었다.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입양되기 전까지 그가 로마 정치에서 차지한 비중은 거의 없었다.

암살 소식을 들은 그는 아폴로니아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유언장의 내용을 확인한 뒤 입양과 상속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가족은 사인으로 물러나 살라고 권했지만,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열여덟 살 청년이 카이사르의 이름을 달고 돌아왔다고 해서 카이사르의 자리를 이미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큰 전쟁을 지휘한 적도 없었고 로마 관직의 승진 순서도 밟지 않았다. 키케로는 그를 이용해 안토니우스에 맞서려 했다. 이 협력에는 훗날 한 말장난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벨레이우스는 키케로가 그를 칭찬하고, 그다음 ‘들어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마지막 낱말 tollere에는 들어 올린다는 뜻도, 제거한다는 뜻도 있었다. 같은 청년을 먼저 올려 세울 수도, 나중에는 치워 버릴 수도 있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우선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에 반대하던 이들과 손잡고 무티나(Mutina) 주변의 전쟁에 참여했다. 두 집정관이 잇따라 죽었다. 히르티우스는 전투 중에, 판사는 부상 뒤에 사망했다. 그래도 전장에 남은 지휘관이 옥타비아누스 한 사람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포위되어 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살아 있었다. 승리 뒤 원로원이 지휘권을 어떻게 나눌지, 군단은 누구를 따를지, 곧바로 다음 다툼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3년 8월,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하며 비어 있는 집정관직을 요구했다. 마지막에는 선거가 치러졌다. 다만 투표한 도시는 이미 군대의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열아홉 살로, 스무 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 통상 집정관에 도전할 나이에는 한참 못 미쳤다. 술라의 선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무력이 먼저 성 가까이 오고, 합법적인 관직은 그다음에 주어졌다.

이어서 그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화해하고 기원전 43년 11월 27일 제2차 삼두정을 구성했다. 제1차 삼두동맹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첫 동맹은 법적 근거가 없는 사적 합의였다. 두 번째는 법률로 공식 출범한 비상 통치 체제였다. 세 사람은 ‘국가 재건을 위한 삼인 위원’(tresviri rei publicae constituendae)으로서 독재에 가까운 권한을 얻었다. 임기는 5년이었고 이후 연장할 수 있었다. 비상 상태가 합법화된 것이다. 첫 동맹보다 공개적인 독재에 훨씬 가까웠다.

제2차 삼두정의 첫 행동은 프로스크립티오, 곧 살생부를 공표하는 것이었다. 술라의 방법을 복제하고 확대한 일이었다. 공개된 명단의 사람을 밀고하거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보상이 정해졌고, 죽은 사람의 재산은 별도로 몰수되어 팔렸다. 아피아노스가 적은 규모는 원로 약 300명, 기사 약 2,000명이었다. 가장 유명한 희생자는 키케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정치적 도움을 받았지만, 안토니우스가 그의 이름을 올리겠다고 고집하자 동의했다. 키케로는 기원전 43년 12월 7일 살해되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처음에는 살생부에 반대했으나 일단 집행되자 끝까지 관철하려 했다고 쓴다. 처음의 반대는 명단에 오른 사람들을 살려 주지 못했다.

삼두정 성립 뒤 가장 중요한 군사 과제는 암살자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으로 떠나 반카이사르파 군대를 조직했다. 기원전 42년 10월 필리피(Philippi)에서 두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이 이 핵심 군대를 격파했다.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모두 자살했다.

필리피 뒤 로마 세계가 승리자 세 사람의 안정된 재산으로 나뉜 것은 아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와 퇴역병을 정착시키는 동안 토지 문제는 페루시아 전쟁으로 번졌다. 기원전 40년 브룬디시움에서 화해하면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동서의 활동 범위를 다시 나눴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보유했다. 바다에는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이탈리아의 곡물 수송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도 있었다. 기원전 37년, 세 사람은 타렌툼에서 협력을 다시 연장했다. 기원전 36년 시칠리아 전쟁 뒤 폼페이우스의 해상 세력이 패배하고, 레피두스마저 군대와 실권을 잃었다. 그제야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치가 한층 뚜렷해졌다.

두 승리자가 권력을 나눠 갖는다고 다음 전쟁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여러 번 다퉜고 여러 번 화해했다. 군대와 토지와 보급은 그들을 계속 협상 탁자로 돌려보냈다. 중국 제왕 연작의 항우와 유방도 승리를 나눈 뒤의 충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로마 고유의 관계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관계망 안으로 들어온 또 한 명의 통치자가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였다.

4. 클레오파트라와 선전전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Cleopatra VII Philopator)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실권 군주였다. 카이사르와 관계를 맺었고, 아들 카이사리온(Caesarion)을 카이사르의 아들이라 불렀다. 이 부자 관계에 대해서는 고대에도 서로 다른 말이 있었다. 카이사르가 죽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자신의 통치를 유지했다. 기원전 41년,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에 있는 타르소스(Tarsus)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어진 정치적·사적 관계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정치 동맹이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군단을 유지하고 파르티아 전쟁을 준비할 이집트의 재정 지원이 필요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통치를 지키고 동지중해에서 왕조의 영향력을 넓힐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보호가 필요했다. 기원전 37년 두 사람은 동방에서 재회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 사이의 결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집트의 재정, 동방의 전쟁, 왕조의 아이들을 잇는 다른 관계도 펼쳐졌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아이 셋,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토 증여’ 의식을 열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서술에서는 은으로 된 단 위에 황금 좌석이 놓이고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리온, 아이들에게 왕호와 영토가 주어진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의 목록에는 아르메니아와 메디아, 아직 정복하지도 않은 파르티아까지 들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게는 페니키아와 시리아, 킬리키아가 약속되었다. 이미 지배하는 땅도, 종속 왕국도, 앞으로 정복해야 할 땅도 섞여 있었다. 의식 속 지도는 군대가 밟고 있는 지도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이 의식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거듭 꺼내 쓸 장면을 제공했다. 로마의 장군이 이집트 여왕 옆에 앉아 있고 동방의 땅이 아이들 이름으로 나뉜다. 각 지역의 실제 지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치적 공격 속에서 한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었다. 그가 로마를 여왕에게 넘겼다는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을 또 한 번의 로마 내전이 아니라 외국의 위협에 대한 저항으로 꾸몄다. 구체적으로는 동방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 맞서는 전쟁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외국 여왕에게 홀려 로마의 가치를 버리고 여성의 지배를 받게 된 실패자로 그려졌다. 반대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절제, 남성적 위엄,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전통적 로마 가치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플루타르코스는 안토니우스의 반격도 기록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시칠리아를 독차지하고 레피두스의 권력을 빼앗았으며 토지와 군대를 자신에게 남겼다는 비난이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동맹은 실제였고 증여 의식도 실제였다. 그래도 그 행동에서 ‘로마에 대한 배신’까지 가려면 선전하는 쪽의 해석을 한 번 더 거쳐야 했다. 양쪽은 상대가 실제로 한 일을 이용해 누가 로마를 대표하는지 다퉜다.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의 여사제들에게 맡겨진 안토니우스의 유언장도 손에 넣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먼저 혼자 읽고 몇몇 구절을 골라 원로원에서 낭독했다. 유언장에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에서 죽더라도 시신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보내 묻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이 바람은 그의 충성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목하는 데 쓰였다. 그러나 회의장에서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원로들의 불만을 특별히 남겼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야 효력을 가질 유언장을 가지고 이렇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유언장은 정치적 무기가 되었고, 그 무기를 쓰는 방법 자체도 논쟁이 되었다.

기원전 32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의 제안에 따라 클레오파트라에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대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였다. 안토니우스는 군사 지휘권과 이미 예정된 다음 집정관직을 박탈당했지만, 선전포고의 직접 대상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 법적 외피 덕분에 옥타비아누스는 ‘나는 로마 내전을 치르고 있다’는 불리한 위치를 피하고 ‘외국 여왕에게 맞서 로마를 지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언어의 차원에서 이뤄진 치밀한 정치적 조치였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다.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를 만났다. 실제 지휘관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옥타비아누스 평생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보좌자이자 정치적 동맹자였다.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결정적 장면은 이렇다. 전투가 한창일 때 클레오파트라의 배 60척이 갑자기 돛을 펴고 전장을 떠났다. 안토니우스도 따라갔다. 남은 함대는 해 질 무렵까지 싸우다 무너졌고 약 300척이 나포되었다.

악티움의 구체적인 전개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갈린다. 어떤 이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해전에서 질 것으로 보고 함대와 재물을 보존해 이집트로 돌아가려 했으며, 철수도 미리 계획했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불리해진 전황 속에서 현장에서 내린 긴급 결정이었다고 본다. 어느 쪽이든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집트로 돌아갔다. 옥타비아누스가 결정적인 우위를 얻었지만 추격은 다음 해까지 이어져야 했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까지 따라왔다. 안토니우스는 로마 전통의 방식으로 자살했고 클레오파트라도 뒤이어 자살했다.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이야기는 문학적으로 다듬어진 전설일 수 있으며, 실제 죽음의 방법은 확실하지 않다. 카이사리온도 나중에 살해되었다.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이미 양쪽이 다투는 정치적 자원이 되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끝났다.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지만 특별한 통치 방식을 따랐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사 출신 갈루스에게 이곳을 맡겼고 원로들은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었다. 중요한 곡물과 수입, 주둔군이 그의 직접 통제 아래 놓였다. 그렇다고 이 땅이 법적으로 그의 사유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악티움의 승리와 이듬해의 이집트 정복으로 최고 권력을 둘러싼 이 싸움이 끝났다. 술라가 죽은 기원전 78년부터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기원전 30년까지, 거의 반세기가 흘렀다. 옥타비아누스 앞에는 더 이상 안토니우스 같은 적수가 없었다. 그는 서른두 살이었다. 서른세 번째 생일도 아직 오지 않았다.

5. 공화정 회복이라는 연출

악티움은 기원전 31년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온 것은 기원전 29년, 기원전 27년의 정치적 조치까지는 거기서 다시 2년이 흘렀다. 그에게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전쟁으로 얻은 권력을 이제 어떤 방식으로 로마에 남겨 둘 것인가.

역사에는 이와 비슷한 순간이 몇 차례 있었고, 답은 매번 달랐다.

술라의 답은 독재관 권한을 얻어 제도를 다시 정비한 뒤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권력자는 떠날 수 있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그 배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선례가 생겼다. 기원전 70년 호민관 권한이 회복된 일은 그가 정한 경계도 새로운 동맹에 의해 바뀔 수 있음을 이미 보여 주었다. 은퇴한다고 다툼까지 함께 로마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의 답은 종신 독재관직과 계속 쌓이는 영예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왕관은 거절했지만 집중된 권력은 내놓지 않았다. 기원전 44년의 칼은 로마의 기억에 남았다. 최고 권력을 얻는 일과 그 권력이 지속될 배치를 찾는 일은 같지 않았다.

헬레니즘 군주들은 왕호를 직접 사용하고 왕조와 신성한 영예를 중심으로 통치를 조직할 수 있었다. 반면 로마의 정치 전통에서는 반왕정이 강력한 언어적 자원이었다. 카이사르가 왕관을 거절할 때 터진 환호가 이미 그 장애물을 눈앞에 드러냈다. 옥타비아누스는 끝내 rex라는 이름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이름들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무엇을 했는가. 새 왕국의 수립을 선언하는 대신, 자신이 내놓은 배치를 공개적으로 ‘공화정 회복’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27년 1월,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과 로마 인민에게 국가를 돌려준다는 몸짓을 정치 무대의 한가운데에 놓았다. 원로원은 군대가 주둔해야 하는 중요한 속주들을 계속 그에게 맡기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어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예도 있었다. 집의 문설주에는 월계수가 걸렸고 문 위에는 참나무 관이 매달렸으며, 황금 방패는 원로원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배치는 연설에만 남지 않았다. 집 입구와 회의장, 멀리 떨어진 속주의 지휘 관계 안에도 들어갔다.

이 연출을 이해하는 핵심 텍스트는 아우구스투스가 훗날 직접 쓴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Res Gestae Divi Augusti)이다. 그는 34장에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집정관 재임기에 ‘내전을 종식한 뒤’, res publica, 곧 공화국을 ‘나의 권력에서 원로원과 로마 인민의 재량으로 옮겼다’고 말한다. 이 자술은 기원전 28년과 27년의 조치를 한데 묶는다. 아우구스투스가 만년에 후대에 남긴 판본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나중에 아우구스투스가 두 차례 공화국을 돌려줄 생각을 했지만 결국 통치를 유지했다고 썼다. 전기는 그가 자신의 안전을 걱정했고, 국가가 다시 여러 사람 손에 넘어가는 것도 걱정했다고 설명한다. 이 후대의 설명은 《업적록》의 ‘이미 돌려주었다’는 서술과 다른 곳에 힘을 싣는다. 한쪽에는 반환이, 다른 쪽에는 보유가 적혀 있다. 그래도 두 기록 모두 하나의 결과를 비켜 갈 수 없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화정 회복’이 작동하려면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믿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원로들은 반환 선언에서 자기 기관이 여전히 인정받는다고 볼 수 있었다. 퇴역병과 도시 주민들은 정착과 곡물, 전쟁이 멈출지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중요한 군대와 속주를 계속 장악했다. 지지와 기대, 의존과 압력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권력을 부여하는 동일한 절차 안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옥타비아누스의 기술이 실제 배치가 되기 시작한다. 공화정의 기관이 계속 권력을 부여하고, 받는 사람은 계속 중심에 남는다. 원로원이 수여하면 옥타비아누스가 받는다. 같은 주고받음이 원로원에는 수여자의 자리를 남기고 원수에게는 계속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준다. 공화정을 회복한다는 이름은 이런 실제 절차들을 따라 새로운 통치 안으로 들어갔다.

로마 사회 전체가 동등하게 둘러앉아 체결한 계약은 아니었다. 전쟁의 승리자는 이미 군대를 쥐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현실 아래에서 새 배치에 참여했다. 그렇다고 옛 형식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발의하고 누가 부여하는지, 얼마 동안 부여하는지, 어떤 이름은 쓰지 않는지가 권력의 공개적 행사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구성체는 이런 불균등한 주고받음 속에서 점차 형태를 갖췄다.

기원전 27년 이후에도 배치는 더 세밀해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왕과 독재관이라는 이름을 거절하면서 다른 영예와 권력을 받아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칭호였고, 기원전 2년 정식으로 주어진 ‘국부’(pater patriae)는 영예였다. 집정관은 관직이었지만 호민관 권한은 호민관직을 맡지 않은 사람에게도 줄 수 있었다. 기원전 23년의 조정으로 호민관 권한은 그의 지속적인 권위의 일부가 되었다. 기원전 12년 레피두스가 죽은 뒤에는 최고제사장에도 선출되었다. 모두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고 한꺼번에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여된 것들이 마지막에는 한 사람 위에 겹쳐졌다.

옛 이름들과 새로운 수여 방식이 결합해 전통적이지 않은 효과를 낳았다.

6. 원수정 — 공화정의 형식 안에 들어선 새 구성체

후대의 연구는 이 정치적 구성을 보통 원수정, Principatus라고 부른다. 고대 저자들도 같은 어근의 낱말들로 원수의 통치를 서술했다. 중요한 것은 훗날 비로소 이름이 생겼느냐가 아니다. 하나의 이름 안에 두 사실이 어떻게 함께 들어가는가다. 공화정의 관직은 남아 있고, 한 사람의 권력은 어느 단일 관직의 권한보다 훨씬 크다.

원수정의 핵심은 옛 공화국의 여러 권력을 한 사람에게 묶는 데 있었다. 어떤 것은 전통적인 관직이었고, 어떤 것은 관직에서 분리해 새로운 기간과 범위로 부여한 권한이었다. 합쳐 놓자 한 사람이 국가를 거의 전면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집정관부터 보자.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43년에 처음 이 자리에 올랐고, 기원전 31년부터 23년까지 연이어 재임했다. 기원전 23년에는 이 연간 관직을 계속 자신에게 남겨 두기를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집정관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보유한 다른 권력들 덕분에 그 자리에서 나온다고 통치에서도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호민관 권한(tribunicia potestas). 기원전 23년의 조치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권한을 지속적으로 누릴 지위를 주었지만 그를 보통의 호민관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해당 절차와 관할 안에서 그는 인민을 소집하고 법안을 추진하며 관원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전에는 하나의 관직이 다른 권력을 견제하는 도구였던 거부권이 이제 군권과 다른 자원에 결합되어 원수의 손에 들어갔다. 절차의 경계는 남아 있었다. 결합된 힘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최고제사장(pontifex maximus). 기원전 12년 레피두스가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이 자리에 선출되었다. 종교적 권위를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로마에 이미 있던 사제 제도의 중심으로 들어간 것이다. 달력과 의례, 국가 제사는 원래 정치 바깥의 한가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제단과 종교적 직책이 모두 없어진 것도 아니다. 여러 종교적 신분과 정치적 권력이 이제 한 사람 안에서 서로를 강화할 수 있었다.

시민과 원로의 명부도 이 결합에 들어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업적록》에서 조상의 관례에 맞지 않는 특별한 ‘법과 도덕 감독’ 권한은 거절하고, 해당 일을 호민관 권한으로 처리했다고 말한다. 또 자신이 주재한 인구 등록과 원로원 명부 정비를 열거한다. 기원전 28년에는 아그리파와 함께, 기원전 8년에는 혼자, 서기 14년에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등록을 진행했다. 구체적인 몇 차례의 행동이었다. 관직의 이름은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명부 위의 이름들은 그래도 다시 심사를 받았다.

군권은 이 배치의 핵심이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주둔군이 필요한 여러 중요 속주를 보유했다. 디오에 따르면 기원전 23년에는 각 속주 총독보다 우월한 지휘권도 얻었다. 후대에는 이를 흔히 imperium maius로 요약한다.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대부분, 시리아 등은 그가 보낸 사람들이 다스렸고 이집트는 기사 출신 장관에게 맡겼다. 원로원은 다른 속주들을 계속 배정했으며 그중 아프리카에는 군단도 있었다. 한쪽은 모든 군대를 갖고 다른 쪽은 병사 하나 없다는 구별이 아니다. 주요 군대와 속주를 넘어서는 최고 지휘권이 어디에 모였는가가 차이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업적록》 34장에서 auctoritas와 potestas를 구별한다. 권위에서는 자신이 앞섰지만 각 관직에서 법적 권한은 동료보다 크지 않았다고 자신의 지위를 설명한다. 단일 관직 안에서 그는 자신을 동료들 사이에 놓는다. 그러나 그 관직 밖에는 군권과 호민관 권한, 계속 연장되는 임기가 있었다. 동료의 좌석은 옆에 있었다. 권력의 전체 묶음까지 옆에 함께 놓인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auctoritas라는 말의 특수성을 짚어야 한다. 이것은 구체적인 직위나 권한 하나가 아니다. 오랜 성취와 가문, 개인의 품성과 사회적 인정으로 쌓이는 ‘개인의 권위’다. 공화정의 성숙기에 원로 중 연륜 있는 이들이 auctoritas를 지녔고, 원로원 전체도 그러했으며, 대카토 같은 두드러진 정치인들도 그러했다. 이 인정은 임명장 한 장과 같지 않았고 개인의 공적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갖추면 어느 특정 관직의 법적 권한을 훨씬 넘어서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양자, 내전의 승리자, ‘공화정 회복’의 수행자. 이 신분들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공적 이미지에 들어갔다. 그는 로마 시내에 건설의 흔적도 남겼다. 《업적록》에는 다시 지은 신전, 수리한 수로, 광장과 도로가 나열되어 있다. 그중 ‘신전 82곳’은 그 자신이 후대에 남긴 숫자다. 수에토니우스는 벽돌 도시를 넘겨받아 대리석 도시를 남겼다는 말을 그에게 돌린다. 사람들이 본 것은 관직 이름의 목록만이 아니었다. 권력자를 공공생활에 계속 연결하는 도시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므로 동료는 아우구스투스와 관직 하나를 공유할 수 있었어도 그가 가진 권력 전체를 함께 나누기는 어려웠다. 개인의 위망은 이 비대칭을 더했고, 군대와 임기와 법적 수여는 그것을 단순한 위망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권력은 법 바깥에서만 집중되지 않는다. 하나하나 합법적으로 부여된 권한들이 서로 이어질 때도 집중된다.

이것이 원수정의 근본 구조다. 공화정의 많은 관직과 법, 절차가 계속 작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임기와 권한 수여가 더해졌다. 개인의 권위와 군 지휘권이 서로를 강화하면서, 실질적인 일을 하는 기관들이 갈수록 하나의 중심을 둘러싸고 움직이게 되었다.

타키투스는 훗날 《연대기》의 첫머리에서 이 과정을 돌아보며 비판했다. 군대와 민중, 살아남은 귀족들은 서로 다른 이익을 통해 새 질서에 들어갔고, 원로원과 관원과 법에 속하던 기능은 점차 원수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이어받을 때 집정관들이 먼저 맹세하고, 이어 근위대 지휘관과 원로원, 인민이 맹세했다고 쓴다. 옛 선후관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맹세는 그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새 중심 앞으로 데려갔다.

타키투스는 후대 제국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돌아보며 이 일련의 배치를 공화정의 권력을 거둬들이는 과정으로 읽었다. 관직들은 여전히 일을 할 수 있었다. 최종 권력은 갈수록 원수에게서 떼어 놓기 어려워졌다. 그가 비판한 것은 바로 이 두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7. 원로원 — 길들여진 자문 기구

원수정 아래에서 원로원은 폐지되지 않았다. 보존되고, 선별되고, 길들여졌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의 원로원은 계속 결의를 내리고 정무와 사법 업무를 처리했으며 일부 속주의 통치에도 참여했다. 선거가 일찌감치 모두 그 회의장으로 옮겨 간 것도 아니었다.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권력을 이어받는 시점에야 타키투스는 선거가 민회에서 원로원으로 옮겨 갔다고 분명히 쓴다. 기관에는 실제 기능이 있었고, 그 기능의 배분은 계속 달라졌다.

그러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과 원수와 최종 권력을 반씩 나눈다는 것은 같지 않았다.

첫째는 구성원 자격이다. 술라가 원로원을 확대했고 카이사르와 내전기의 권력자들도 계속 인원을 늘렸다. 수에토니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명부 정리를 서술할 때 원로의 수는 이미 1,000명을 넘었다. 선별 방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원로들끼리 서로 추천하게 하기도 했고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함께 심사하기도 했다. 누가 남을 자격이 있는지, 누가 이 집단에 들어올 수 있는지가 원수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전통적 영예를 간직한 집단도 그 문 앞에서 새로운 권력을 만나야 했다.

둘째는 의제와 발언이다. 원수의 제안과 태도는 토론에 압력을 가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면전에서 반대한 사람들을 기록했고, 원로원 명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라베오가 레피두스를 추천한 일도 썼다. 더 적합한 사람이 없느냐고 아우구스투스가 묻자 라베오는 각자 자신의 판단이 있다고 답했다. 라베오는 다른 의견을 바로 앞에서 말했다. 그래도 원수가 명부에 미치는 영향과 회의장 안의 권력 차이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셋째는 군권이다. 원로원은 여전히 일부 속주를 배정할 수 있었지만 주요 주둔군 속주와 더 넓은 최고 지휘권은 원수의 손에 있었다. 타키투스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에도 아프리카 총독이 군단을 지휘했다는 점을 분명히 기록한다. 이 예외가 양쪽의 힘 차이를 지워 주지는 않는다. 다시 배분된 것은 지휘 관계였다. 지도 위에 ‘군대 있음’과 ‘군대 없음’이라고 적힌 두 구역을 그리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넷째는 재정이다. 공화정에서 물려받은 공공 국고(aerarium)는 계속 운영되었다. 원수가 관리한 속주의 수입과 자신의 재산, 여러 지출도 그를 중심으로 도는 재정망을 이루어 갔다. 공공 국고, 원수의 재산, 특정 목적의 금고는 기원과 용도가 각각 달랐다. 서기 6년에는 퇴역 급부를 마련할 군사 금고(aerarium militare)가 설치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돈을 넣었고 안정적인 수입과 관리 체계도 마련했다. 디오는 전직 법무관 세 사람이 책임을 맡았다고 쓴다. 누가 돈을 내는지, 누가 관리하는지, 법적으로 누구에게 속하는지는 이 배치에서 따로 보아야 할 세 가지다.

따라서 원로원은 결정을 멈춘 것이 아니라 불균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결정을 계속했다. 권한 수여와 자문, 재판과 속주 업무는 진행되었다. 원수도 자신의 통치를 기존 질서에 연결하려면 이런 결정이 필요했다. 어떤 때는 미리 조정한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른 때는 논쟁과 협의 자체가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최고 권력의 귀속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서로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 약 40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배치는 원로 엘리트들이 관직과 영예, 공적 영향력을 얻는 환경을 바꿨다.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와 네로의 시대에 그 관계는 다시 서로 다른 충돌과 조정을 겪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서기 68년에 끝났다. 매 세대가 같은 직선을 따라 원로원을 한 칸씩 더 아래로 눌렀던 것은 아니다.

이 변화는 정치문화에도 들어간다. 경력을 쌓으려는 젊은이는 원수와 그의 가족, 측근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배워야 한다. 기회를 이 중심에 의존하면 의견 차이를 공개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러나 의존이 모든 생각을 지운다는 뜻은 아니다. 어려움은 자기 판단을 지닌 사람이 그것을 말할 때의 대가를 계산해야 한다는 데 있다.

타키투스는 servitium, 예속과 굴종이라는 말로 비판을 표현한다. 좌석과 영예와 재산은 남아 있다. 기회를 얻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일은 갈수록 권력자의 인정에 의존한다. 특권과 자유 사이에 그렇게 거리가 벌어진다. 이 낱말에는 제국 시대의 원로가 자신의 계층을 돌아보는 날카로움이 담겨 있다. 법적 신분은 여전히 원로지만, 공개적인 행동은 점점 의존 관계에 제약받는다.

이 연작의 독법에서 공화정의 상실은 법조문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집단이 그 조문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일어난다. 귀족들은 서로 달랐고 원로들은 계속 논쟁했다. 하지만 누가 권력을 잡아야 하는지, 어떻게 그에게 권력을 돌려주게 할지를 함께 결정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제도의 외형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호 견제를 떠받치던 관계가 재조직되었다. 공화정의 이름은 더 이상 공화정의 원래 자리를 보장하지 못했다.

8. 계승 — 원수정에 남은 미해결 과제

원수정에는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끝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계승이었다.

공개적으로 왕조를 내세운 국가도 계승 때문에 전쟁을 치른다. 제2편의 후계자 전쟁이 이미 보여 주었다. 로마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한 겹 더 있었다. 원수의 지위는 가문과 관직, 특별한 권한 수여와 군대의 지지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었다. 재산은 유언장에 적을 수 있고 입양으로 이름을 한 가문에 이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준 권력은 밭 한 뙈기처럼 한꺼번에 아들에게 넘길 수 없다. 계승은 이 서로 다른 것들을 다시 연결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누구를 우대하는지 공개적으로 보여 줄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자신의 아들이라 부르며 일찍부터 관직과 공적 영예를 위한 배치에 넣었다. 《업적록》에도 그 영예를 적어 후대에 보였다. 가문을 통한 계승 구상은 은밀하지 않았다. 문제는 지명받고 떠받들리는 일과 실제로 최고 권력을 받아 낼 수 있는 일 사이에 아직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인물들을 차츰 통치의 핵심 자리에 넣는 방법을 택했다. 입양과 결혼, 군권과 관직, 공적 영예가 서로 맞물렸다. 계승은 죽은 뒤에야 열어 보는 편지 한 통이 아니었다. 준비는 이미 돌아가는 정부 속에 들어가 있었다.

먼저 마르켈루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했지만 기원전 23년에 일찍 죽었다. 뒤이어 아그리파가 율리아와 결혼하고 점점 더 중요한 권력을 나눠 가졌으나, 기원전 12년에 사망했다. 아그리파가 살아 있던 기원전 17년,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율리아가 낳은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입양했다. 두 아이의 이름과 영예, 관직을 위한 조치들이 차례로 공공생활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두 아들의 미래가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서기 2년 마르세유에서 죽었다. 가이우스는 아르메니아에서 부상당한 뒤 서기 4년 리키아의 리미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준비해 둔 이름들이 미래의 명단에서 거듭 사라졌다.

이 죽음들은 기존의 준비를 반복해서 끊었다. 말년의 아우구스투스는 족보에 이름을 적는 일보다 더 어려운 문제와 마주해야 했다. 남은 사람들이 군대와 관직, 가문의 관계를 하나로 이어 붙일 수 있을까.

서기 4년, 티베리우스가 정식으로 입양되었다. 그는 리비아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났고 오랫동안 변경 전쟁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같은 해 아그리파의 막내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도 입양되었다. 티베리우스에게는 게르마니쿠스를 입양하라는 요구가 주어졌다. 가족 관계는 그다음 세대까지 이어졌고 정치적 권력은 티베리우스에게 더 많이 갔다. 그는 호민관 권한을 다시 얻었고 나중에는 속주와 군대의 관리에서도 아우구스투스와 권위를 공유했다. 서기 14년 8월 19일 아우구스투스가 죽었을 때 후임자는 이미 통치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므로 티베리우스가 시작한 곳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관직표가 아니었다. 타키투스는 계승 때의 의식을 기록한다. 집정관들이 먼저 맹세하고 다른 사람들이 뒤따랐다. 티베리우스는 이미 보유한 호민관 권한으로 원로원을 소집했다. 회의장에서는 전체 통치를 맡겠다는 제안을 사양했고, 원로들은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회의장에서 밀고 당기는 동안에도 기존 지휘권은 그대로 작동했다. 옛 절차와 원로원의 수락, 이미 통치에 참여한 후임자가 같은 장면 안에 있었다.

뒤의 권력 인계에도 가문과 군대와 원로원, 현 통치자가 남긴 배치가 관여한다. 여러 힘은 경우에 따라 앞서거나 뒤서며 작용하고 반드시 같은 사람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티베리우스식 사양은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 그래도 후임자는 각쪽의 인정을 얻어야 했다. ‘공화정 회복’이라는 말이 그 일들을 대신 해 주지는 못했다.

이 조율이 깨지면 계승은 내전의 입구가 될 수 있다. 서기 68년 네로가 통치를 잃은 뒤 서기 69년 ‘네 황제의 해’가 이어졌다. 3세기에는 여러 군대가 경쟁적으로 황제를 옹립하는 일이 거듭 나타났다. 명확한 후보가 있으면 인계에 도움이 된다. 군대와 다른 권력자들의 수락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계승법의 빈칸이 저절로 전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누군가를 받들고, 거부하고, 무기를 드는 사람들의 행동이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배치는 가문을 권력 연결의 중요한 통로로 만들었다. 입양과 혼인, 미리 부여한 영예가 여러 사람을 같은 계보에 이었다. 이 모든 일이 줄곧 숨겨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후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와 네로는 모두 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망에서 나왔다. 그래도 매번의 계승에는 고유한 과정이 있었다. 왕조가 서기 68년에 끝났다고 해서 아무 노력 없이 이어지는 자동 상속선이 그 끝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가문은 후보를 제공할 수 있다. 그 후보에게 모든 사람의 복종까지 혼자 가져다줄 수는 없다. 네로는 이미 여러 해 통치하고 있었다. 서기 68년 그의 몰락은 가문이 계승자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군대와 정치적 지지가 옮겨 갔기 때문에 일어났다. 다음 사람이 누구일지는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이 결정해야 했다. 계보는 종이에 그릴 수 있다. 충성은 군영과 도시 사이에서 달라진다.

아우구스투스에서 3세기까지 원수정은 여러 왕조를 거쳤고 반란과 내전, 재건도 겪었다. 속주 통치와 군대, 도시와 지방 엘리트를 오랫동안 하나의 제국으로 연결했지만 계승 문제는 줄곧 따라다녔다. 제2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거의 300년을 이어 갔다. 두 배치 모두 오래 존재할 수 있었고, 권력을 넘기는 방식에는 각자의 어려움이 있었다. 로마에서는 공화정의 이름과 가문의 인재 육성, 실제 권한 부여를 계승할 때마다 다시 연결해야 했다. 연결되지 않는 곳에 균열이 드러났다.

9. 상전이의 완성

이 글 첫머리의 명제로 돌아가자. 옥타비아누스는 무엇을 했는가.

이 연작의 언어로 말하면,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의 구성체에서 원수정으로의 상전이를 완수했다. 공화정의 관직과 절차는 계속 작동했다. 군대와 장기적인 권한 부여, 재정 자원은 한 사람에게 모였다. ‘공화정 회복’이라는 이름은 이 배치를 공동체에 익숙한 언어로 표현해 주었다. 이 특정한 결합을 이 글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기술’이라 부른다.

이 상전이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최고 정치 권위의 자리가 원수에게 집중되었다. 공화정의 원로원과 민회, 집정관과 호민관은 각자의 직무와 상호 견제를 통해 공적 결정에 참여했다. 원수정은 그 결정들을 모두 없애지 않았다. 그러나 군대 지휘와 장기적 권한 부여, 최고 권력의 계승을 갈수록 원수와 그 가문의 배치에 연결했다. 이 연작이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관점에서 주목하는 것은 그 관계의 변화다. 시민에게는 여전히 신분과 권리가 있었다. 권력의 중심을 어떻게 넘길지 함께 결정하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합법적인 절차도 이 집중에 참여했다. 원로원의 결의와 인민의 표결, 구체적인 권한 수여는 원수의 배치에 계속 법적 형태를 주었다. 이제 문제는 어떤 결정이 절차를 거쳤는가만이 아니다. 여러 절차가 어떻게 임기와 군권, 개입 권한을 한 사람에게 모으는가도 문제다. 절차는 물러나지 않았다. 절차 안의 권력 분포가 달라졌다.

군대의 충성은 원수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업적록》은 ‘나에게 맹세한’ 병사들을 통해 통치자와 군대의 관계를 서술한다. 구체적인 지휘는 원수가 임명한 장군들이 담당하고, 병사의 맹세는 자신을 원수에게 직접 잇는다. 로마 국가와 원수 개인의 이름이 군사적 선서와 지휘, 보상 속에서 갈수록 단단하게 연결되었다.

재정도 원수라는 중심으로 다시 모였다. 공공 국고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수가 관리하는 수입, 속주 지출, 개인의 출자가 군급과 퇴역 정착, 공공 공급을 갈수록 그에게 연결했다. 핵심은 어떤 돈궤의 이름을 바꿨느냐만이 아니다. 누가 이 수입을 지속적으로 동원해 사람과 제도를 자신의 배치에 묶어 둘 수 있는가다.

이 연작은 이 변화들을 함께 놓고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의 상전이로 읽는다. 옛 기관에서 모든 권한이 빠져나간 것은 아니다. 옛 기관이 스스로 최고 권력의 배치를 바꾸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군대와 장기적 권한 부여, 재정 자원이 서로를 떠받치면 한 사람이 모든 좌석을 차지하지 않고도 그 좌석들이 함께 둘러싼 중심에 설 수 있다.

이 상전이가 꼭 비밀 속에서만 완성될 필요도 없었다. 새로운 임기와 영예, 권한 수여는 공개적으로 기록되었다. 집정관과 원로원, 민회와 호민관이라는 이름도 계속 쓰였다. ‘원수’가 거절한 ‘왕’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관찰자가 권력 집중을 보지 못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의 역할은 가리는 데만 있지 않다. 새로운 관계를 공동체가 이미 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이름이다.

‘공화정 회복’은 원수가 권한을 받는 방식으로 통치하게 했고, 기존 기관은 수여자의 신분으로 통치에 계속 참여하게 했다. 군대와 자원 때문에 이 주고받음의 힘은 대등하지 않았다. 그래도 작동하는 관계였다. 관직은 채워야 했고 결의는 내려야 했으며, 지방과 군대는 이 중심에서 답을 받아야 했다.

이 배치의 지속은 전쟁 뒤 병사들의 정착, 곡물 공급, 엘리트의 관직 진출, 지방 통치와 모두 관련되어 있었다. 공화정이라는 이름은 서로 다른 요구가 익숙한 기관으로 계속 들어가게 했다. 군대와 자원은 그 기관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제한했다. 로마인들이 이름 하나에만 관심을 뒀던 것은 아니다. 그 이름이 연결하는 식량과 직위, 법과 안전도 새 질서의 일부였다.

중국 제왕 연작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나라 명호 아래 자신의 권력을 넓힌 조조는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하는 비교 대상이다. 그는 승상이 되었고 뒤에 위공, 다시 위왕에 봉해졌다. 한 헌제는 황제의 명호를 계속 보유했다. 헌제가 제위를 지키는 가운데 조조는 신하의 관직과 작위로 자기 자리를 넓혔다.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자기 위에 왕을 남겨 두지 않았다. 공화정이 부여한 관직과 권력을 자신의 몸에 결합했다. 양쪽 모두 옛 질서의 이름을 썼지만 명호의 보유자와 실제 권력자의 자리는 달랐다. 승상과 천자와 원수, 이 호칭들 뒤에서 권력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옛 이름과 새로운 권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로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몇 가지 비교를 통해 다른 제도들로 가 보자.

10. 옛 이름과 새로운 권력

옥타비아누스는 서기 14년, 일흔여섯 번째 생일을 35일 앞두고 죽었다. 그가 남긴 원수정은 이후 여러 세기를 거쳤다. 공화정의 관직이 어떻게 일을 계속하고, 군권과 임기와 수여가 어떻게 한 사람에게 모였는지는 앞에서 속주와 명부, 돈궤와 계승 준비를 따라 살펴봤다. 로마 밖으로 눈을 돌리면 옛 명호에는 또 다른 행선지가 있다.

여기서는 옛 명호와 실제 결정권 사이의 몇 가지 관계를 비교한다. 군사·행정 권력이 종교 지도자와 나뉘어 있는 경우, 제위가 선제후의 선거를 거치는 경우, 왕위가 의회에 제약받는 경우, 복고의 명분이 새 국가의 창설과 함께 가는 경우다. 각각의 내력이 있다. 옛 이름을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옥타비아누스의 기술’이라 부를 수는 없다.

10세기 바그다드는 다른 풍경을 보여 준다. 군사적 실권자가 대아미르의 자리를 얻고 칼리프는 계속 명호를 내린다. 서기 945년 부와이 왕조가 도시에 들어왔다. 부와이 통치자는 군대와 정무를 장악했고, 아바스 칼리프의 명위와 칭호 수여 기능은 남았다. 이름을 주는 사람과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자리에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여러 공화정 권력을 원수에게 거둬들였다. 여기서는 실제 군사·행정 권력이 원래의 명호 보유자에게서 바깥으로 옮겨 갔다.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라는 이름을 다른 조직 안으로 가져갔다. 제위가 주장하는 보편적 권위는 제후와 주교, 도시들이 보유한 실질적 권리와 오랫동안 공존했다. 1356년의 금인칙서는 선거 절차를 구체적으로 적었다. 선제후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미래의 황제가 될 로마왕을 선출하며, 과반수로 선거를 마칠 수 있었다. 로마라는 이름은 광대한 권위를 가리켰다. 그 이름에 이르는 길은 자기 영지와 권리를 지닌 몇 사람을 통과했다. 황제는 실권 없는 장식이 아니었고, 제후도 통일된 행정 지도 속 평범한 부하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변화가 다른 방향으로 갔다. 1689년 권리장전은 왕위를 없애지 않았지만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의 효력을 정지하거나 돈을 거두는 군주의 행위에 분명히 반대했다. 이후 왕권과 내각, 의회의 관계는 계속 바뀌었고 정부의 구성과 유지에서 하원의 역할이 점차 커졌다. 국가 업무에는 여전히 왕실의 이름을 썼다. 그 이름의 보유자 혼자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이는 로마의 권력 집중과 반대 방향이다. 옛 칭호는 중심에 남아 있어도 결정권은 다른 기관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메이지 유신의 ‘왕정복고’에서는 회복과 창설이 나란히 놓였다. 1868년 이후 새 중앙정부는 천황의 이름으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은 천황의 통치권을 명시하면서 의회의 입법 참여와 대신의 보필도 규정했다. 천황이 위에 모셔 놓은 빈 상징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 결정은 관료와 군대, 권력자들의 관계를 통해서도 이뤄졌다. ‘복고’라는 이름은 새 제도를 공개적으로 만드는 일을 막지 않았다. 그 창설을 정통으로 돌아가는 일이라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옛 이름이 지속된다는 사실만으로 권력의 방향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집중과 함께 갈 수도 있고, 권력의 분리나 의회로의 이동과 함께 갈 수도 있다. 부와이의 바그다드, 선제후가 들어서는 회의장, 의회의 제약을 받는 왕위는 각기 다른 권력관계에 명호를 놓았다. ‘옥타비아누스의 기술’의 범위는 더 구체적이다. 실제로 작동하는 공화정의 관직과 절차를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통치로 잇는 것이다. 비교는 이 특징을 더 선명하게 한다. 서로 다른 길을 모두 그 지류로 바꾸지는 않는다.

로마로 돌아오자. 옥타비아누스의 배치에는 지속을 가능하게 한 조건도, 대가도 있었다.

그 배치는 새로운 질서에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었다. 익숙한 관직과 의식과 언어를 계속 사용하면 매번 공동체가 누구인지를 처음부터 답할 필요는 없다. 카이사르는 왕관을 거절했지만 암살되었고, 공화정의 이름을 보존한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도 음모와 저항이 일어났다. 형식의 지속은 통치에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었다. 군대와 공급, 여러 집단의 수용은 계속 뒤따라야 했다. 이름은 질서를 이어 줄 수 있지만 혼자 질서를 유지할 수는 없다.

대가는 옛 규칙이 새로운 권력 차이와 함께 작동한다는 데 있었다. 원로원은 토론할 수 있고 관원은 직권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다. 부여된 군권에는 범위가 있었으며 계승자는 해당 지위를 얻어야 했다. 이런 배치가 충돌하면 주요 군대를 장악한 사람에게는 다른 기관이 상쇄하기 어려운 힘이 있었다. 제한을 절차 안에 적는 것은 절반을 마친 일이다. 그것을 집행하게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더 깊은 대가는 입을 열기 전에 생긴다. 말하려는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마주할 수 있다. 자신은 어떻게 판단하는가. 권력의 중심은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가. 좌석과 표결은 그에게 발언할 자리를 준다. 관직의 앞날과 인간관계는 대가를 헤아리게 한다. 타키투스는 제국 시대에서 돌아보며 이 의존을 굴종으로 썼다. 라베오는 면전에서 반대할 수 있었다. 그런 목소리가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워질수록 공동체가 자신을 공개적으로 판단할 능력도 더 손상된다.

이 연작은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관점에서 이 상전이를 이해한다. 시민이 주체로 서는 자리는 결정에 참여하고 권력을 제한하며 권력자를 바꿀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공화국이라는 이름이 남았다는 사실은 그 이름이 여전히 사용된다는 것만 증명한다. 공동체의 주체적 지위는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힘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름은 이어졌다. 인간의 자리는 따로 지켜야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죽은 뒤 신격 아우구스투스(divus Augustus)로 받들어졌다. 시신은 화장되었고 유해는 그가 세운 영묘에 안치되었다. 그의 숭배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이후에도 제국의 공공생활에 들어갔다. 생전의 수여와 사후의 기념이 이어지자 뒤의 통치자들도 이미 형성된 정치적 유산에 다가갈 수 있었다. 내전을 끝낸 사람, 공동체를 회복한 사람, 로마를 돌보는 아버지라는 유산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한 사람의 칭호에서 훗날 권력자들도 쓸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칭호와 기념, 공적 이미지 바깥에서도 제국은 군대와 세금, 도시와 속주 행정을 세대마다 이어 가야 했다. ‘로마의 평화’에는 이런 실제 버팀목이 있었고 계승 다툼과 내전은 그 지속을 끊기도 했다. 뒤이어 비잔티움과 신성 로마 제국, 모스크바의 ‘제3의 로마’라는 주장도 로마를 서로 다른 정치 세계로 데려갔다. 같은 이름을 구하는 사람들이 세우는 제도는 서로 다를 수 있었다. 유해는 영묘에 남았다. 로마의 이름은 계속 먼 길을 갔다.

다음 편: 로마, 파르티아, 쿠샨, 한 — 네 제국이 공존한 유라시아. 시야를 로마 내부에서 대륙 전체로 옮긴다. 서기 1세기부터 3세기 사이, 여러 대규모 통치가 한동안 함께 펼쳐졌지만 리듬과 경계, 조직 방식은 달랐다. 그것들을 한 지도 위에 놓고 보려는 것은 똑같은 왕조 연표가 아니다. 같은 규모의 문제를 서로 다른 사람과 제도가 어떻게 감당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