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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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유라시아 제왕 시리즈 — 제03편 · 총 22편

제3편 로마 공화정 — 권력의 한 점 집중을 막는 구성체

Han Qin (秦汉)·2026년

기원전 3세기부터 1세기까지, 헬레니즘 국가들의 역사는 조금씩 줄어드는 역사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는 핵심 지역을 지켰지만, 문화가 섞인다고 해서 신분과 자원을 둘러싼 문턱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여러 지역이 떨어져 나가 마침내 시리아 일대만 남았다. 그리스 본토는 마케도니아의 패권 아래 독립을 잃었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화를 제국의 크기로 퍼뜨리는 방법에는 답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질문, 곧 제국의 크기에서 그리스 정치 전통의 핵심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는 답하지 못했다. 그리스식 도시국가의 자치는 도시 안의 제한된 질서로 남았고, 제국 차원에서는 신격화된 군주의 왕권에 자리를 내주었다.

기원전 3세기에 이르면 지중해 서부의 로마 공화국이 바다 건너로 힘을 뻗기 시작한다. 이제 막 생겨난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 제기한 질문에는 다른 답을 내놓게 된다.

로마는 눈에 띄지 않던 도시국가에서 하루아침에 지중해의 패자가 된 것이 아니다. 먼저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동맹 체계에 묶었고, 그 뒤 전쟁을 거듭 바다 너머로 밀고 나갔다. 로마의 전통적 연대에 따르면 기원전 509년에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세웠다. 기원전 450년경에는 십이표법을 만들었으며,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이탈리아반도의 대부분을 동맹 체계에 편입했다. 약 200년에 걸친 과정이었다. 꾸준했지만, 놀라울 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100여 년 동안 세 차례 포에니 전쟁을 치렀다. 상대는 그때까지 서지중해에서 가장 강한 해상 세력이던 카르타고였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꺾는 동안 헬레니즘 세계의 분쟁에도 개입해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 연맹을 차례로 물리쳤다. 기원전 146년에는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같은 해에 파괴했다. 이때부터 로마는 지중해 세계 전체의 패자가 되었다.

도시국가 하나가 제국의 크기로 커진 것이다. 그리스 세계에서 스파르타도 이런 팽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아테네도 시도했지만 스파르타에 패했다. 마케도니아는 성공했으나 그 방식은 도시국가제가 아니라 군주제였다. 로마는 팽창하는 동안 도시국가 구성체의 기본 틀을 버리지 않았고, 헬레니즘 군주국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적어도 기원전 1세기 이전까지 집정관, 원로원, 민회는 여전히 로마에서 움직였다. 그런데 그들이 결정할 일은 이미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전체에 뻗어 있었다. 영토는 더 이상 한 도시에서 바라볼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지만, 결정은 여전히 도시국가의 관직과 회의가 내렸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 글이 답하려는 질문이다.

답에는 두 면이 있다. 한편으로 로마는 팽창 속에서도 공화정의 관직과 회의를 계속 사용했고, 통치권을 헬레니즘의 왕 한 사람에게 곧바로 넘기지 않았다. 도시국가의 정치 언어가 바다 건너의 일까지 처리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 공화정도 끝내 유지되지는 못했다. 기원전 133년 그라쿠스의 개혁부터 공화정 구성체는 갈수록 빠르게 변형되었고,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원수정을 세우면서 제국 차원에서는 사실상 다른 질서로 대체되었다.

이 글은 공화정 구성체가 성숙한 시기에서 붕괴의 전야까지를 다룬다. 다음 글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언어의 차원에서 타협을 만들어 군주제를 로마에 다시 들여오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로마 공화정 구성체의 핵심 명제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권력이 한 점에 집중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관직과 임기와 거부권은 어느 하루에 완성한 설계도가 아니라, 갈등을 거치며 차츰 겹쳐진 장치들이었다. 이 연작의 독법에서 로마 공화정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에서 시작된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상전이에 새로운 표현 형식을 부여한다. 그 특징은 직접민주정의 철저함이 아니라, 어느 개인도 권력을 오래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체계적인 방어에 있다. 이렇게 보면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 도시국가가 끝까지 답하지 못한 질문 하나에 답했다. 인구가 수십만에 이르고, 영토가 이탈리아 전체에서 지중해 전체로 넓어지는 정치체에서도 시민 공동체가 최고의 정치 권위라는 원칙을 어떻게 계속 작동시킬 것인가.

1. 왕정 이후

로마의 전통은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도시를 세웠다고 말한다. 이 건국 연도는 후대의 역산이며, 이를 입증하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다만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로마가 이미 티베르강 변의 상당한 규모를 갖춘 도시였다는 점은 고고학적으로 분명하다. 초기 로마는 왕정이었고, 전설에 따르면 왕은 일곱 명이었다. 첫 왕은 로물루스, 마지막 왕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곧 ‘오만한 타르퀴니우스’였다. 로마의 전통은 그를 몰아내고 왕정을 끝내 공화정을 세운 일을 기원전 509년에 놓는다.

중요한 출발점이다. 왕정을 끝냈다는 행위가 로마 공화정 구성체의 밑바탕을 정했다. 로마인은 왕이라는 개념에 깊은 반감을 품었고, 그 반감은 500년 동안 이어졌다. 로마 시민의 언어에서 ‘왕’은 영예로운 칭호가 아니라 가장 무거운 고발이었다.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받는 정치인은 곧바로 시민 전체의 적대에 부딪혔다. 이 반감은 카이사르가 암살될 때도 작동했다. 암살자들의 핵심 명분은 카이사르가 왕 노릇을 하고 있으며,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을 만큼 큰 영예를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로마 공화정 구성체의 전체 설계는 왕정에 대한 체계적인 부정으로 읽을 수 있다. 왕은 종신이므로 공화정의 관료에게는 임기가 있어야 했다. 왕은 혼자 결정하므로 최고의 관직에도 동료가 있어야 했다. 왕은 어떤 기관에도 구속되지 않으므로 공화정의 관료는 원로원과 민회와 호민관의 겹겹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반왕정이라는 줄기가 공화정 전체를 관통했다고 해서 권력의 배분이 영원히 한 모습으로 굳은 것은 아니다. 비상시에는 공화정도 독재관에게 권력을 일시적으로 모았다. 어떻게 모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다시 거둘 것인가도 제도의 일부였다.

그렇다고 ‘왕은 안 된다’는 말만으로 나라가 움직이지는 않는다. 왕정을 끝낸 뒤에는 실제로 작동하는 정치 구성체를 세워야 했다. 로마는 기원전 5세기부터 3세기까지 약 200년에 걸쳐 그것을 만들어갔다. 그동안 내부의 큰 갈등들이 있었고, 가장 중요한 것이 평민과 귀족의 ‘신분 투쟁’이었다. 기원전 494년 평민들이 처음으로 성산에 물러나 로마를 떠나 따로 도시국가를 세우겠다고 위협하자, 귀족은 평민을 정치적으로 보호할 호민관직의 설치에 동의했다. 기원전 450년경의 십이표법은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귀족 사제들이 구전으로 간직하던 법 지식을 시민이 찾아볼 수 있는 공개된 글로 바꾸었다.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그전까지 귀족에게만 허용되던 집정관직을 평민에게 열었다.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은 사제단과 점복관단의 자리를 평민에게 개방했다.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은 평민회에서 통과된 법안이 로마 인민 전체를 구속한다고 규정했다.

하나씩 보면 자잘한 개혁처럼 보인다. 하지만 쌓이고 나면 출신과 권력의 관계가 달라진다. 평민은 귀족이 차지하던 관직과 사제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자기 회의의 결정을 모든 시민이 지킬 법으로 만들 수 있었다. 성인 남성 시민은 민회에서 선거와 표결에 참여했다. 다만 문이 열렸다는 것과 누구나 똑같이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별개였다. 가문과 재산과 정치적 관계는 계속 기회를 배분했다. 같은 시민이라도 표의 무게가 같지 않았다. 뒤에서 볼 민회의 구조에 그 차이가 드러난다.

이런 내부의 평등화는 몇 세기 전 아테네의 발전과 닮았다. 두 도시 모두 초기의 귀족 특권 질서에서 출발해 정치적 권리를 더 넓은 시민 집단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로마는 아테네식 직접민주정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로마의 민회는 더 크고, 조직은 더 복잡했으며, 의사결정의 경로도 더 간접적이었다. 로마의 관료는 주로 선거로 뽑았다. 아테네처럼 많은 관직을 추첨에 맡기지 않았다. 로마의 정치생활에는 처음부터 전문적인 정치계층이 있었다. 상설 고위 정치기관인 원로원은 민회가 맡기 어려운 지속적인 정책 조정에 나섰다.

이것이 로마 공화정 구성체와 아테네 민주정의 첫 번째 중요한 차이다. 아테네는 모든 시민의 직접 참여라는 길을 갔다. 로마는 귀족의 집단적 지도와 인민의 선출·승인이라는 길을 갔다. 두 길은 시민 공동체가 최고의 정치 권위라는 같은 전제 위에 있었지만, 작동 방식은 크게 달랐다.

기원전 2세기 중반, 그리스의 정치이론가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성공을 설명하는 유명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역사》 제6권에서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체로 규정했다. 그리스 정치이론은 정체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기본 유형으로 나눈다. 한 사람의 지배, 소수의 지배, 다수의 지배다. 각각 장단점이 있고, 각각 부정적인 형태로 타락하려는 경향이 있다. 군주정은 참주정으로,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기운다. 로마의 특징은 세 유형을 섞었다는 데 있었다. 집정관은 군주정의 요소, 원로원은 귀족정의 요소, 민회는 민주정의 요소를 대표했다. 셋이 서로 견제하므로 로마는 한 유형의 내리막길만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폴리비오스도 영생을 보증하지는 않았다. 같은 권의 끝에서 그는 번영과 부와 관직 경쟁이 이 공화국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 다시 묻는다.

폴리비오스의 설명은 헬레니즘 정치이론을 로마의 현실에 적용한 성공적인 시도였다. 그리스인인 그는 그리스의 정치 개념으로 로마의 성취를 이해했다. 영향도 컸다.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 정치이론가들, 18세기의 몽테스키외, 미국의 건국자들도 폴리비오스에서 출발해 혼합정체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설명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그린 로마는 지나치게 조화롭고, 지나치게 이론 모형 같았다. 실제 로마 공화정 구성체는 훨씬 혼란스럽고 모순되며 취약했다.

이제 그 핵심 부품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2. 집정관 — 동료와 한 해의 임기

로마 공화정의 최고 상임 관료는 두 집정관, consules였다. 켄투리아 민회가 선출했으며, 통상 임기는 1년이었다. 둘은 정무와 전쟁을 나누어 맡았지만, 한 사람은 로마에 남고 다른 사람은 출정하는 식으로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둘 다 밖에서 군대를 지휘할 수도 있었다. 동료의 권한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한 사람의 명령이 다른 사람의 제지에 걸렸다. 집정관에게는 권위가 있었으나,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그뿐은 아니었다. 재임 중의 행동은 퇴임 뒤에도 추궁받을 수 있었다.

이 설계 자체가 권력의 한 점 집중에 대한 방어였다. 어떤 권한을 한 사람에게 온전히 주면 그는 남용할 수 있다. 두 사람에게 주면 한 사람이 남용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이 거부할 수 있다. 둘 다 동의했다면 적어도 두 명의 독립적인 판단자가 그 결정을 지지하는 셈이다. 이중의 검토가 안에 들어 있는 장치였다.

연간 임기도 같은 방어 장치였다. 한 해가 끝나면 관직은 다시 선거와 인계의 과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책을 이어가려는 사람은 후임자, 원로원, 정치적 동맹의 협조를 구해야 했다. 다만 관직의 1년이 곧 영향력의 1년은 아니었다. 로마는 장군의 군사 지휘권을 연장해, 전직 집정관이나 법무관의 자격으로 계속 지휘하게 하기도 했다. 사람의 직함은 바뀌었지만 군대의 지휘관은 바뀌지 않을 수 있었다.

반복 재임에 대한 제한은 조금씩 더해졌고, 위기 속에서는 예외와 맞닥뜨렸다. 기원전 180년의 빌리우스 연령법, lex Villia annalis는 관직에 도전할 나이의 문턱을 규정했다. 연임과 재임 사이의 간격, 승진 순서에도 시기마다 제약이 붙었다. 마리우스라는 한 이름에 이 긴장이 모인다. 그는 기원전 107년에 처음 집정관이 되었고, 기원전 104년부터 100년까지 다시 5년 연속 당선되었다. 8년 사이 여섯 번, 그중 다섯 번은 이어진 임기였다. 선거는 여전히 매년 열렸다. 선출되는 사람은 거듭 같은 사람이었다.

집정관제에는 또 하나 중요한 구별이 있었다. 도시 안에서의 권한인 imperium domi와 군사 영역에서의 권한인 imperium militiae는 성격이 달랐다. 로마 안에서 집정관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군대를 마음대로 동원할 수 없었다. 군대의 도시 진입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은 호민관의 거부권에 막힐 수 있었고, 민회의 판결에도 구속될 수 있었다. 군사 지휘의 현장에서는 무게중심이 달라졌다. 장군은 군대를 움직이고 군율을 집행하며 전장의 즉각적인 결정을 맡았다. 그렇다고 도시의 경계인 포메리움, pomerium을 넘으면 모든 제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급이 필요했고 지휘권을 연장받아야 했으며, 승리 뒤에는 인계와 책임 추궁이 기다렸다. 로마의 제약은 전장에서 멀어졌지만,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도시 안과 밖의 구별에는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도시 안의 권위는 분산되고 제한되며 여러 겹의 감독을 받았다. 도시 밖의 군사 권위는 집중되고 유연하며 감독에서 상대적으로 멀었다. 덕분에 로마는 전쟁 중에는 군사적 결정을 집중하고, 평시에는 시민 공동체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구별이 훗날 공화정 구성체를 변형시키는 핵심 긴장이 되었다. 갈리아와 동방을 정복하는 전쟁처럼 군사행동이 더 오래, 더 멀리 이어지자 장군이 권위를 집중한 채 밖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 로마의 정치적 균형과는 별개인 힘이 차츰 쌓였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이르면 그 힘은 직접적인 정치적 위협이 된다.

집정관 아래에는 여러 관직이 있었다. 법무관, praetor는 처음 한 명에서 기원전 1세기에는 여덟 명까지 늘어났고 주로 사법을 맡았다. 조영관, aedile는 도로와 시장과 축제 같은 도시의 공공 업무를, 재무관, quaestor는 재정을 맡았다. 감찰관, censor는 5년마다 선출되어 인구와 재산의 등록, 원로 명부의 심사, 공적 도덕의 감독을 담당했다. 많은 상임 관직이 동료제와 연간 임기를 채택했지만 인원은 바뀌었고, 감찰관의 선거 주기와 임기에는 별도의 규정이 있었다.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되 모두 같은 틀에서 찍어낸 관직들은 아니었다.

이 관료 체계 전체의 특징은 높은 절차화와 분산이었다. 정책에 영향을 주려면 여러 관료의 협력이 필요했다.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려면 가문과 정치적 파벌, 개인적 후원 관계인 patronage를 통해 한 해의 경계를 넘어가야 했다. 로마 공화정에 정치권력의 집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집중은 가문, 파벌, 후원이라는 비공식 장치를 통해 이루어졌고, 관직이라는 공식 장치는 오히려 집중을 막도록 만들어졌다.

공식적으로는 분산되고 비공식적으로는 집중되는 이 구조는 공화정 초기와 중기에 안정적이었다. 귀족 가문들에게 정치를 움직일 만큼의 비공식 권력을 주면서도, 공식적인 반집중 장치가 어느 한 가문이나 개인의 절대적 우위를 막았다. 그러나 후기에는 군대의 개인화, 부의 격차, 지리적 팽창이 비공식 장치의 조정 범위를 넘어서면서 이 구조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3. 원로원 — 자문의 기계

원로원, senatus는 로마 공화정에서 가장 힘이 세면서도 형식상으로는 가장 덜 눈에 띄는 기관이었다. 원로, senatores는 약 300명, 술라 시대에는 600명으로 늘었으며, 대체로 재무관 이상의 관직을 지낸 귀족들이었다. 원로 신분은 선거로 얻는 것이 아니라 감찰관이 명부에 올려줌으로써 얻었다. 일단 들어가면 종신이었다. 다만 5년마다 감찰관이 명부를 심사할 때 도덕이나 재산의 문제로 제명될 수 있었다.

원로원은 보통 민회처럼 법률을 표결로 제정하는 곳이 아니었고, 모든 관직을 직접 선출하지도 않았다. 관료에게 원로원 결의, senatus consultum을 제시해 경비와 임무, 국가의 업무를 배치했다. 이런 결의는 인민이 통과시킨 법률과 달랐다. 그렇다고 ‘자문’이라는 이름 때문에 관료가 마음대로 옆에 내려놓을 수 있는 한마디는 아니었다. 다음 돈이 나올지, 다음 원정을 누가 이어받을지가 그 말에 달려 있곤 했다.

실제로 원로원은 공화국의 작동 중심을 장악했다. 폴리비오스는 《역사》 제6권에서 그 실권을 자세히 적었다. 원로원은 국고, aerarium을 통제하고 매년 지출의 방향을 정했다. 이탈리아 안의 중대한 형사사건, 특히 공공의 안전과 관련된 사건을 처리했다. 외국 사절을 맞이하고 로마 사절을 보내는 일을 결정하며, 전쟁과 평화가 어떤 절차를 밟을지 관여했다. 집정관과 법무관에게 관할, provinciae를 배분하고 각 총독의 범위를 정했다. 개선식, triumphus도 승인했다. 어느 장군의 승리가 로마 최고의 군사적 영예를 받을 만한지 결정한 것이다.

합쳐보면 외교, 재정, 속주 배분, 군사적 영예라는 공화국의 핵심 영역이 원로원의 손에 있었다. 집정관이 전쟁을 계속하려면 누군가 돈을 내주고 군수품을 공급하며 지휘의 연속성을 마련해주어야 했다. 이 고리들을 쥔 원로원은 장군에게 로마가 여전히 자기 뒤에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원로원의 지지가 백지 통행증은 아니었다. 다른 관료나 호민관, 혹은 인민의 표결이 앞에서 기다릴 수 있었다.

형식상 자문이지만 실제로는 결정적이라는 긴장은 공화정 구성체의 핵심 특징 중 하나였다. 3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엘리트 집단에 권력을 모으되, 그 자체가 집단이므로 원로 한 명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상설 기관이어서 필요할 때 회의를 열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지만, 원로들이 서로를 설득해야 했으므로 전횡에 제동이 걸렸다. 종신 신분은 경험 많은 정치인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장했으나, 몇 년마다 명부가 심사되어 일부가 교체되므로 전통이 굳어버리는 것도 막았다.

이 긴장 역시 불안정했다. 공통의 정치문화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원로들이 자신을 ‘아버지들’을 뜻하는 patres로 여기고 공익에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였다. 공화정 성숙기에는 이 문화가 실제로 작동했고, 원로원은 공동의 정치적 판단을 가진 집단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보수파와 개혁파, 여러 파벌이 귀족 집단을 깊이 갈랐다. 그러자 원로원은 통일된 행위자로 움직일 능력을 잃었다. 파벌 간 갈등을 풀어내는 기관이 아니라 그 갈등이 벌어지는 무대가 되었다.

타키투스는 훗날 《연대기》의 첫머리에서 이 변화를 돌아보며, 권력을 다른 방식으로 모으는 과정을 썼다. 관직과 부와 지위가 살아남은 귀족들을 새 질서에 연결했다. 원로원과 관료와 법률에 나뉘어 있던 기능은 조금씩 아우구스투스에게 모였다. 공화정의 언어는 계속 쓰였다. 권력이 나뉘는 방식은 더 이상 같지 않았다.

이런 길들이기는 원수정만의 가능성이 아니었다. 공화정 구성체 안에도 이미 있었다. 귀족 집단이 내부의 다양성과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할 때, 원로원은 진정한 자문기관이었다. 어느 승자나 파벌이 그 집단을 장악하면 원로원은 그의 도구가 되었다. 원로원이라는 제도 자체로는 피할 수 없는 취약성이었다.

4. 민회 — 여러 갈래의 통로

최고의 정치 권위인 로마의 ‘인민’은 하나의 통일된 기관을 통해 말하지 않았다. 로마에는 여러 종류의 민회가 있었으며, 각각 조직 방식과 투표 단위, 주재하는 관료와 관할 업무가 달랐다.

켄투리아 민회, comitia centuriata는 가장 오래되고 군사적 성격이 가장 짙은 민회였다. 원래 시민이자 병사인 사람들의 집회였으므로 도시 경계 밖의 마르스 광장, Campus Martius에서 열렸다. 투표 단위는 켄투리아, centuria였고 각 단위에 한 표가 주어졌다. 전통이 전하는 초기 편제는 193개이며, 뒤에 조직과 투표 순서가 조정되었다. 하지만 재산 등급은 줄곧 이 분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수많은 가난한 사람이 몇 안 되는 투표 단위에 묶일 수 있었다. 따라서 부자의 표는 가난한 사람의 표보다 훨씬 무거웠다. 켄투리아 민회는 집정관, 법무관, 감찰관을 선출하고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며 사형과 관련된 상소 사건을 심리했다.

트리부스 민회, comitia tributa는 지역 부족을 기준으로 조직되었다. 성숙기의 부족 수는 35개였다. 도시 부족 넷, 농촌 부족 서른하나에 각각 한 표가 있었다. 켄투리아의 재산 등급에 따라 표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부족마다 인구가 달랐으므로 한 부족 한 표가 곧 한 사람 한 표의 동등한 무게를 뜻하지는 않았다. 트리부스 민회는 주로 입법, 벌금형에 해당하는 공적 소추, 그리고 완전한 imperium을 갖지 않는 재무관과 조영관 등의 선거를 맡았다. 로마 법률의 상당수는 이 민회에서 통과되었다.

평민회, concilium plebis에는 평민만 참여할 수 있었고 귀족은 참여하지 못했다. 호민관이 주재했으며 투표 단위는 역시 35개 부족이었지만 각 부족에서 평민만을 셌다. 그 결의를 plebiscita라고 불렀다.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귀족도 이 결정에 구속되는가는 오랜 쟁점이었다. 더 이른 로마의 전통에도 평민 결의가 인민 전체를 구속하도록 한 입법이 등장한다.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은 그 효력을 확인했다. 평민이 자기 회의에서 내린 결정이 귀족도 지켜야 하는 법이 된 것이다. 평민회는 그렇게 가장 중요한 입법기관 중 하나가 되었다.

로마의 ‘인민 의지’는 이처럼 여러 통로로 표현되었다. 같은 시민도 켄투리아 민회에서는 재산 등급에 따라 중시되거나 주변으로 밀렸고, 트리부스 민회에서는 소속 지역 부족에 따라 집계되었다. 평민이라면 호민관이 주재하는 평민회에도 참여했다. 민회마다 작동 방식이 달랐고 정치적 경향도 달랐다.

각 민회는 ‘인민’을 서로 다른 투표 대열로 편성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옮겨 다니며 대신 쓸 수 있는 회의들은 아니었다. 누가 소집할 수 있는지, 어떤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에는 각각 경계가 있었다. 법률 하나를 추진하려면 찬성하는 사람만 찾아서는 안 되었다. 그것을 제안할 수 있는 관료와 맞는 절차도 찾아야 했다. 정치적 경쟁은 표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문제를 어떤 형태로 먼저 인민 앞에 내놓을 것인가.

로마의 민회에는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제약이 있었다. 스스로 모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당 권한을 가진 관료가 소집해야 했다. 켄투리아 민회와 트리부스 민회는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평민회는 호민관이 소집했다. 의제도 소집자가 정했다. 일반 시민은 개인 자격으로 민회를 공식 소집하거나 혼자 법안을 표결에 부칠 수 없었다. 정식 표결로 들어가는 입구는 관료가 쥐었다. 시민은 요구하고 지지하고 반대할 수 있었으며, 정치인이 계획을 바꾸도록 압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견을 법적 효력이 있는 표결로 바꾸려면 여전히 소집하고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을 거쳐야 했다.

아테네의 민회 전통과 구별되는 중요한 대목이다. 로마의 표결에서 시민이 마주한 것은 관료가 정식 제출한 의안이었다. 누구나 현장에서 자기 안을 표결에 올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공개 연설, 의견을 듣는 일, 정식 투표 사이에도 절차상의 구분이 있었다. 목소리는 군중에게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의안으로 만들고 표결에 부치는 힘은 모두에게 골고루 주어지지 않았다.

이 문턱은 시민의 정치적 힘을 제한했지만, 표를 빈껍데기로 만들지는 않았다. 관료가 당선되려면, 법률이 통과되려면, 전쟁과 조약에 관한 결정이 이루어지려면 인민이 필요했다. 제안자는 무엇을 물을지 정할 수 있었지만, 원하는 답을 받으리라는 보장까지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의제와 표는 서로 다른 자리에 놓인 두 힘이었다.

공화정 후기에는 귀족 내부의 경쟁이 이 문턱을 거듭 가로질렀다. 원로원의 권위에 기대는 사람도, 인민 앞에서 지지를 구하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 방법을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옥타비우스의 해임, 마리우스의 반복 당선, 나아가 카이사르에게 종신 독재관 권한을 주는 일에도 이런 정치적 동원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지자는 지도자가 소지품처럼 데리고 다니는 재산이 아니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훗날 알게 된다. 한 문제에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도 다른 문제에서는 떠날 수 있다는 것을.

5. 호민관 — 공화국의 비상 브레이크

호민관, tribuni plebis는 로마 공화정 구성체에서 가장 특이한 관직이었다.

기원에는 전설의 빛깔이 묻어 있다. 전통에 따르면 기원전 494년 귀족의 압박에 불만을 품은 평민들이 로마 근처의 성산, mons sacer으로 집단 철수했다. 로마를 떠나 별도의 도시국가를 만들겠다는 위협이었다. 귀족은 양보했고, 평민을 전담해 보호하는 관직을 세우는 데 동의했다. 이것이 호민관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다. 후대 역사가들이 세부를 다양하게 꾸몄으므로 모든 대목의 신뢰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호민관이 평민과 귀족의 투쟁에서 나온 특별한 관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호민관은 처음에 두 명이었다가 뒤에 열 명으로 늘었다. 평민회가 매년 선출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관료와는 달랐다. 몇 가지 매우 특별한 속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intercessio, 거부권이다. 로마의 정치 절차에서 호민관은 직접 나서 관료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고, 다른 호민관이 추진하는 사안도 막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반대만으로 진행 중인 절차가 멈출 수 있었다. 강력한 힘이지만, 먼 곳의 군단에 무슨 명령이든 보내 곧장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현장에 나와 개입하는 일, 다른 사람들이 그 제지를 인정하는 일에 의존했다.

둘째는 auxilium, 개인에 대한 보호다. 어떤 관료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여기는 시민은 호민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호민관은 직접 개입해 그 처분을 막을 수 있었다. 개인에게 닿는 즉각적인 보호였고, 법정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었다.

셋째는 sacrosanctitas, 신성불가침이다. 호민관의 몸은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그를 해친 사람은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었고, 죽인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종교적 힘이 실린 보호였다. 호민관을 해치는 것은 공동체가 세운 금기를 넘는 일이었다. 하지만 금기는 갑옷이 아니다.

세 속성을 합치면 호민관은 공화정 구성체 안의 비상 브레이크였다. 권한이 미치는 범위에서 관료의 행동을 멈추고, 개별 시민에게 내려지는 처분에 개입하며, 그 개입을 신성불가침으로 지켰다. 각각 intercessio, auxilium, sacrosanctitas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호민관 한 명만 반대해도 원로원은 회의조차 열 수 없었다.

이 비상 브레이크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었다. 첫째는 평민의 보호였다. 귀족 집단이 원로원과 집정관을 통해 평민을 압박하려 하면 호민관이 제때 개입해 막을 수 있었다. 둘째는 급진적인 결정에 제동을 거는 일이었다. 거부권이 가능한 사안에서 제안자는 반대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나서지 않도록 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하나를 바꾸려면 더 많은 조정이 필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부권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과 모두 찬성했다는 것은 같지 않았다.

호민관의 강한 힘 자체가 취약성이기도 했다. 장치는 호민관들이 적어도 대체로 평민의 이해와 같은 편에 선다는 전제 위에서 움직였다. 어떤 귀족 파벌이나 개인이 호민관을 매수하면 거부권은 그 파벌이나 개인의 도구가 되었다. 공화정 후기에는 이런 매수가 일상화되었다. 특정 귀족을 위해 노골적으로 일하는, 이른바 ‘귀족 파벌의 호민관’도 있었다. 그들은 평민이 아니라 그 귀족의 이익을 거부권으로 보호했다.

더 깊은 긴장은 호민관들 사이에 있었다. 한 사람이 개혁을 밀면 다른 사람이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 사안에서 갈렸다는 이유로 다른 모든 사안이 정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브레이크가 관료의 처분을 막기도 하고, 다른 호민관이 꼭 추진해야 한다고 여기는 법을 막기도 했다. 공화정 후기의 잦은 분열은 호민관제를 ‘평민을 대표하는 비상 브레이크’에서 ‘귀족 파벌 싸움의 도구’로 퇴화시켰다.

가장 치명적인 취약성은 거부권 자체도 군중 동원에 압도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6.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 절차를 돌파한 선례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Tiberius Gracchus가 토지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배경에는 로마 사회의 깊은 불평등이 있었다. 이탈리아와 서지중해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막대한 공유지, ager publicus를 얻었다. 그 땅은 분배되고 점유되어 경작과 방목에 쓰였다. 고대의 서술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제한 하나는 개인의 공유지 점유가 500유게라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iugera는 로마의 토지 면적 단위다. 실제로는 부유한 귀족과 기사계층이 오랫동안 공유지를 모아 법정 상한을 크게 넘겼다. 반면 가난한 시민들은 긴 군복무로 농사를 돌보기 어려웠다. 지중해 전쟁이 복무를 길게 늘였고, 대농장은 소농을 밀어냈으며 수입 곡물은 농업을 압박했다. 자기 땅을 잃은 사람들이 도시 빈민으로 내려앉았다.

티베리우스는 상한을 넘게 점유한 공유지를 회수해 땅이 없거나 적은 시민에게 나눠주려 했다. 오래된 제한을 근거로 삼을 수 있었지만, 바꾸어야 하는 것은 눈앞의 실제 점유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처음에는 점유자에게 보상하는 안이 있었으나 갈등이 커지자 그 양보도 철회되었다고 썼다. 종이 위의 오래된 규칙을 다시 땅 위에 적용하려 하면, 이미 그곳에서 살고 경영하며 수익을 계산하는 사람들과 부딪혔다.

그런데 개혁의 절차가 파국으로 향했다.

티베리우스는 법안을 평민회에 내놓고 표결로 토지 분배를 추진하려 했다. 이를 가로막은 것은 동료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Marcus Octavius의 거부권이었다. 로마의 전통에서는 호민관 한 사람의 거부만으로 법안을 멈출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에게 법안도 지지자도 있었다. 그러나 옥타비우스가 물러서지 않는 한 지지자들은 그것을 투표로 법으로 만들 수 없었다.

교착 속에서 티베리우스도 중재를 받아들여 원로원에 가서 논의한 적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 모두 이 결실 없는 시도를 기록했다. 회의 장소는 바뀌었으나 의견 차이는 문밖에 남아주지 않았다. 여전히 유효한 거부권 앞으로 돌아온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개혁을 포기하거나, 옥타비우스를 설득하거나, 다음 해에 더 우호적인 호민관 집단이 들어서기를 기다리는 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네 번째 길을 골랐다. 옥타비우스의 해임을 제안했다.

거부권을 행사 중인 호민관을 해임하자는 순간 논쟁의 위치가 달라졌다. 이 관직은 다른 권력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보유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는 아니라고 말한 사람이 그 자리에 남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법적 논증도 그 직무에서 출발했다. 호민관은 평민을 보호해야 한다. 평민에게 유익한 법안을 거부한 옥타비우스는 그 직무를 저버렸다. 그러므로 평민은 그를 해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티베리우스의 동원 아래 평민회는 옥타비우스를 해임하는 표결을 했다. 이어 토지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다.

플루타르코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전》에서 이 일을 둘러싼 논란을 기록했다. 원로원은 충격을 받았고, 평민 지지자들 중에도 티베리우스가 너무 멀리 갔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법안은 통과되었고 토지개혁 위원회가 일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다시 당선되려 했다. 즉각적인 연임이 관행상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이것도 논쟁적인 행보였다. 선거 당일 원로원 쪽 의원들과 지지자들이 선거 현장에 들이닥쳤다. 혼란 속에서 원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Publius Cornelius Scipio Nasica가 앞장서 티베리우스를 공격했다. 티베리우스와 약 300명의 지지자가 몽둥이와 돌에 맞아 죽었다. 그의 시체는 티베르강에 던져졌다.

그래서 기원전 133년은 후대에 공화국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현직 호민관이 정치 집회에서 살해되어 강에 버려졌다. 그 뒤에는 가이우스와 지지자들의 죽음이 왔고, 더 뒤에는 마리우스와 술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전쟁이 시민 사이의 갈등에 군대를 끌어들였다. 단계마다 필연적으로 더 격해지는 직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력이 정치적 상대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반복될수록, 공화정의 절차는 원래 바깥에 두려던 힘과 다시 맞서야 했다.

왜 기원전 133년이 분수령인가? 티베리우스 사건이 공화정 구성체의 두 핵심 전제를 손상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절차를 함부로 돌파할 수 없다는 전제였다. 공화정 구성체의 가치는 절차로 권력을 제한하는 데 있었다. 호민관의 거부, 원로원의 자문, 민회의 표결은 마음대로 우회해서는 안 되는 절차였다. 옥타비우스를 해임한 티베리우스의 행동은 그 전제를 깼다. 거부를 설득해 거둔 것이 아니라, 거부권을 가진 사람을 자리에서 치웠다. 길을 막는 사람을 먼저 옮긴 다음 막혀 있던 법안을 통과시키는 길이 열렸다. 뒤에 남은 것은 원용할 수 있는 선례였지, 이제 모든 절차가 건드리기만 하면 무너진다는 사실은 아니었다.

둘째는 정치적 충돌을 공동체가 인정하는 절차 안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전제였다. 그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모두 폭력을 고른 것은 아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집정관 스카이볼라는 무력을 쓰라는 나시카의 요구를 거절했다. 나시카는 이어 사람들을 이끌고 뛰쳐나갔다. 호민관을 죽인 것은 논쟁적인 표결에 자동으로 뒤따른 반응이 아니라, 별개의 행동이었다. 절차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벌써 몸과 무기로 논쟁을 꺼낸 사람을 끝내려 했다.

두 돌파는 후대 정치인들이 인용할 새로운 선례가 되었다. 절차는 여전히 움직였고, 사람들은 여전히 표와 관직과 법적 근거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 행동을 기존 절차가 막을 수 있는가는 갈수록 문서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규칙에는 지키는 사람이 필요했다. 자기 목표가 막혔을 때 멈출 줄 아는 사람도 필요했다. 기원전 133년에 그 요구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해의 죽음은 더 깊은 균열을 남겼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살육에서 칼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일부러 적었다. 흉기는 몽둥이와 돌, 그리고 사람들이 달아나면서 부서진 긴 의자의 다리였다. 회의 때 앉던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되었다.

7. 가이우스 그라쿠스 — 개혁의 확장과 파괴

티베리우스가 죽고 10년 뒤, 동생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Gaius Gracchus가 호민관이 되었다. 기원전 123년과 122년에 연속으로 재임하며 개혁을 토지에서 곡물, 사법, 군역, 동맹자의 자격으로 넓혔다. 형이 남긴 하나의 문제가 동생의 손에서 더 많은 사람의 생활로 이어졌다.

토지개혁은 계속되었다. 가이우스는 중단된 형의 토지 분배 위원회를 다시 움직여 더 많은 공유지를 가난한 시민에게 나누었다. 해외 식민시도 세웠다. 가장 중요한 곳은 카르타고 근처의 유노니아였으며, 토지개혁의 연장이었다. 국가가 군인에게 옷을 무상 지급해 더 이상 군급에서 빼지 못하게 했고, 17세 미만 청년의 징집을 금지했다.

개혁은 땅에 그치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정해진 낮은 가격으로 시민에게 곡물을 팔도록 추진했다. 곡물을 사는 가격이 정치생활의 지속적인 제도가 된 것이다. 사법권의 배분도 바꾸었다. 원로원 계층은 아니지만 부유한 기사계층, equites가 속주 관료의 수탈 등을 재판하는 배심에서 핵심 지위를 얻었다. 피고는 원로 계층일 수 있었지만 판단하는 사람이 더 이상 같은 울타리 안의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는 속주 운영도 개혁해 아시아 속주의 징세 청부권을 로마의 징세 회사인 publicani에 넘겼다. 지켜야 할 사업상의 이익을 가진 새로운 정치세력이 생겨났다. 또 라틴인과 다른 이탈리아 동맹자의 자격과 권리를 넓혀 시민권의 경계를 더 바깥으로 옮기려 했다.

전체 범위는 티베리우스보다 훨씬 넓었다. 귀족과 평민, 로마와 이탈리아, 도시와 농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는 체계적인 정치개혁이었다. 그는 형의 실패에서 배운 듯했다. 한 가지 의제만의 개혁은 고립되고 패배하기 쉬웠다. 여러 이해집단이 들어오는 넓은 연합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넓은 연합이 실패의 원인이기도 했다. 평민과 기사계층과 이탈리아 동맹자를 함께 만족시키려면 원로원과 보수적인 집정관, 로마 도시의 배타적인 시민층을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적은 형보다 많았고, 전선은 형보다 넓었다.

가이우스는 몇 가지 전술적 실수를 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기원전 122년 이탈리아 동맹자의 정치적 권리를 확대하려 한 일이었다. 로마 안의 많은 평민이 반대했다. 동맹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옅어질까 두려워한 것이다. 그의 상대이자 동료 호민관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Marcus Livius Drusus는 실질적으로 원로원이 내세운 반가이우스 인물이었다. 그는 3,000명씩 들어갈 식민시 열두 곳을 세우자는 더 급진적인 ‘대중영합적’ 제안으로 지지자를 빼앗았다. 가이우스의 정치연합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121년이 되었을 때 가이우스는 이미 퇴임한 상태였다. 세 번째 호민관 임기를 얻지 못했다. 관직의 신성불가침도 더는 그를 보호하지 않았지만, 개혁을 둘러싼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새 집정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 Lucius Opimius와 동맹 세력은 그의 법률 일부를 폐지하려 했다. 카르타고 근처의 식민 계획도 공격받았다. 가이우스와 동맹자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지지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 이미 이룬 개혁을 지키려 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법을 폐지하려던 그 집회 날, 양쪽 사람들은 새벽부터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모였다. 집정관이 제사를 마친 뒤, 수행원 안틸리우스, Antyllius가 제물의 내장을 나르다가 풀비우스의 지지자들에게 도발적인 말을 했다. 이어 가이우스 쪽 사람들에게 찔려 죽었다. 가이우스는 추종자들을 꾸짖었고, 오피미우스는 죽은 이를 위한 복수를 요구했다. 비가 내려 그날 집회는 흩어졌다.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오피미우스는 원로원을 소집했다. 안틸리우스의 시체를 들것에 실어 광장을 지나 원로원의 회의 장소 앞까지 옮겼다. 울음소리가 전날의 유혈을 회의 중인 원로들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어 원로원은 보통 ‘원로원 최종결의’라 불리는 비상 결의, senatus consultum ultimum을 통과시켜 집정관에게 국가를 보전하라고 요구했다. 강제력을 쓰는 데 정치적 지지를 제공하는 결의였다. 그러나 ‘국가를 보호한다’는 이유가 시민을 죽인 행위를 추궁에서 벗어나게 하는지는 여전히 다툴 문제였다.

오피미우스는 곧 무장 병력을 동원했다. 가이우스와 지지자들은 평민의 전통적 거점인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물러났다. 무력 충돌이 터졌다. 가이우스는 도망쳐야 했고, 마침내 티베르강 근처의 작은 숲에서 노예에게 자신을 죽이게 했다. 지지자 약 3,000명도 처형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가이우스의 죽음은 정치적 대립을 깊게 했고, 인민의 지지를 구하는 방식과 원로원의 권위를 지키는 방식이 더 날카롭게 부딪히게 했다. 뒤에 흔히 쓰이는 populares와 optimates는 이런 정치적 자세와 동맹 방식을 가리킨다. 그날부터 구성원이 고정되어 다시는 바뀌지 않은 두 정당이 아니었다. 다음 논쟁이 오면 어제 함께 섰던 사람도 갈라질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가 위험하다’는 말이 이후 반복해서 원용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비상 결의는 관료에게 국가를 보전하라 했다. 관료는 또 다른 물음에 답해야 했다. 누구의 국가를 보전하는가, 어떤 행동이 그 이름으로 변호될 수 있는가. 오피미우스도 나중에 시민을 죽인 일로 소추당했다. 구국의 명분은 법적 문제를 없애지 않았다. 도리어 법적 논쟁의 일부가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사건은 더 깊은 구조적 문제도 드러냈다. 로마 공화정 구성체 전체는 귀족 집단이 자제할 수 있는 통치계층이라는 전제 위에 세워졌다. 집정관의 동료제와 연간 임기, 호민관의 거부권 같은 반집중 장치는 귀족이 자발적으로 제한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했다. 특정 정책보다 공화정의 지속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가정이었다.

형제의 운명은 그 자제를 갈등 한가운데 놓았다. 티베리우스는 법을 막은 동료를 해임했고, 나시카는 사람들을 이끌고 살육에 나섰으며, 오피미우스는 국가를 보전한다는 이름으로 무력을 썼다. 이들은 같은 종류의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함께 하나의 물음을 남겼다. 각자가 공동체를 지킨다고 말할 때, 지금 벌어지는 일을 누가 멈출 수 있는가.

권력자가 제한을 인정해야 움직이는 구성체는 그들이 제한을 거부할 때 상처를 입는다. 그렇지만 형제가 죽은 뒤에도 로마는 선거와 입법과 협상을 멈추지 않았다.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 방법들은 여전히 작동했고, 그것들을 우회하고 눌러버리는 방법도 이미 선례로 남았다. 다음 이야기는 오래전에 멈춘 기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계속 그 기계를 사용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한계까지 밀어붙였는가의 이야기다.

8. 마리우스 — 군대의 개인화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 뒤 로마에는 비교적 평온하지만 밑바닥에서는 흐름이 거센 시기가 왔다. 기원전 113년부터 101년까지 이어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위기는 군사체계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북쪽에서 온 게르만 부족들이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에스파냐에서 치른 전쟁들, 그중 유명한 누만티아 포위전도 많은 인력을 소모했다. 재산을 가진 시민이 자기 장비를 마련하는 전통에 기반한 로마의 병역제는, 멀리서 오래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 시기에 등장한 핵심 인물이 가이우스 마리우스, Gaius Marius였다. 그는 전통적인 원로원 귀족이 아니라 기사계층 출신이었으며 군사적 능력으로 올라왔다. 기원전 107년 집정관에 선출되어 북아프리카의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할 임무를 받았다.

기원전 107년 유구르타 원정을 준비하면서 마리우스는 지원자들을 모집했다.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그는 재산 등급에 따라 징집하지 않았고, 대부분은 capite censi였다. 재산이 거의 없어 주로 인원수로만 등록되던 시민들이다. 병사 명부의 변화는 재산이 별로 없는 사람도 이번 원정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이것이 후대에 말하는 ‘마리우스 개혁’의 핵심이다. 그러나 통일되고 철저한 하나의 마리우스 개혁은 근대 역사학이 구성한 그림이지, 고대 사료에 분명히 기록된 단 한 차례의 체계적 개혁은 아니다. 더 이른 살루스티우스와 뒤의 플루타르코스 모두 가난한 시민을 모집한 일을 전한다. 설명은 서로 완전히 같지 않으며, 어느 쪽도 후대의 ‘군제 개혁 목록’ 전체가 한꺼번에 공포되었다는 문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무기와 장비의 통일, 군단 조직의 변경, 독수리 군단기의 사용 등 흔히 그 이름 아래 묶이는 변화들은 서로 다른 시점에 차츰 일어났다. 마리우스 개인의 일관된 강령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 변화는 복무 이후의 삶을 더 눈에 띄는 문제로 만들었다. 재산이 거의 없는 지원자에게 전리품과 땅은 고향에 돌아간 뒤의 처지를 바꿀 수 있었다. 재산 있는 병사 역시 손실과 보상을 계산했다. 시민의 의무가 군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삶에 대한 기대가 또 하나의 질문을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군대를 떠나면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런데 땅은 어디서 오는가? 장군 한 사람의 약속이 저절로 병사의 손에 들어가는 밭 한 조각이 될 수는 없다. 로마의 정치 절차를 거쳐야 했다. 방안을 내고, 동맹을 구하고, 표결을 얻고, 누군가 집행해야 했다. 마리우스 퇴역병의 토지 문제도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추진한 입법에 들어갔다. 장군이 전장 밖에서 기대를 실현할 수 있는가는 로마에 돌아와 무엇을 더 얻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렇게 장군과 병사 사이에는 후원자와 수혜자라는 관계가 한 겹 더 생길 수 있었다. 국가와 시민을 한 획으로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에 구체적인 한 사람이 끼어드는 것이다. 함께 싸웠고, 약속을 지켜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가 로마의 다른 권력과 충돌하면 병사 자신의 미래도 그 싸움에 말려들 수 있었다.

군대의 개인화는 기원전 107년에 선을 그어 이쪽은 전부 시민, 저쪽은 전부 사병이라고 나누는 일이 아니다. 오랜 지휘, 함께한 전투, 보상과 정착에 대한 기대가 장군과 병사를 한 번의 인계로 끊기 어려운 관계에 묶었다. 술라의 내전을 거쳐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이르면 공화국의 문제는 누구를 임명할 것인가만이 아니었다. 임명한 사람이 실제로 그 군대를 인수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에서 100년 사이 여섯 번 집정관을 지냈다. 107년, 104년, 103년, 102년, 101년, 100년이다. 그중 104년부터 100년까지의 다섯 차례 연임은 매년 바꾸는 관직과 지속적인 지휘 사이의 긴장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전쟁의 위험, 이전의 승리, 정치적 동원이 합쳐져 같은 이름을 거듭 표결로 돌려보냈다. 위기라는 말 아래 공화정의 절차적 제한은 여러 차례 돌파되었다.

기원전 88년에는 다툼이 한 지휘권에 모였다. 미트리다테스와 싸울 동방 전쟁을 술라에게 맡길 것인가, 마리우스에게 맡길 것인가. 로마는 지휘관을 바꾸기로 했다. 술라는 이미 집결한 군단을 데리고 방향을 돌려 로마로 향했다. 바다 건너로 가야 할 군대가, 누가 자신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는지를 결정하러 오게 되었다.

9. 술라 — 치명적인 선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Lucius Cornelius Sulla는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국면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은 기울었다. 그는 군사적 능력, 특히 유구르타 전쟁에서 마리우스의 부하로 보여준 활약과 영리한 정치활동으로 올라왔다. 기원전 80년대에는 마리우스 세력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기원전 88년 집정관으로서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울 동방 전쟁의 지휘를 맡았으나, 호민관 술피키우스가 이를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일을 추진했다. 회의를 중단하는 일, 제안과 표결을 둘러싸고 거리에서는 이미 폭력이 벌어지고 있었다. 통수권 변경은 인민의 절차를 거쳤다. 그 절차가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도 양측의 분쟁 일부가 되었다.

술라는 지휘관 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병사들은 동방 전쟁의 수확을 기대했고, 마리우스가 다른 병력을 데려올까 걱정했다. 그들은 술라에게 자신들을 이끌고 로마로 가라고 요구했다. 반면 고위 장교들은 재무관 한 명을 빼고 모두 그를 떠났다. 여섯 군단이 도시로 향했다. 군대 안에서도 이미 경계가 생겼다. 똑같이 로마에서 명령을 받는 사람들이었지만, 누군가는 지휘관을 따랐고 누군가는 군대를 자기 도시로 데려가기를 거부했다.

로마를 점령한 술라는 마리우스를 비롯한 반대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다. 일련의 법률로 자신의 법적 지위를 손본 뒤 동방 전쟁을 위해 떠났다. 기원전 87년에는 마리우스와 킨나의 세력이 로마에 들어왔고, 살육은 반대쪽을 향했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86년에 죽었다. 술라가 동방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것은 기원전 83년이었으며, 새 전쟁을 거쳐 82년에 승리했다. 그를 맞아 싸운 상대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늙은 마리우스가 아니었다.

기원전 82년 술라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독재관, dictator에 임명되었다. 로마 전통의 독재관은 비상 관직이었다. 임기는 최대 6개월이며, 전쟁 지휘나 반란 진압 같은 구체적인 긴급 사안을 처리하도록 한 장군에게 권한을 주었다.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기한이 없었다. 그가 받은 과제는 자신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법을 만들고 국가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기한 없는 절대권을 부여한 셈이었다.

술라는 이 권력으로 두 가지를 했다. 첫째는 숙청이었다. 프로스크립티오 명단을 공표해 이름이 오른 사람을 공개적인 사냥의 대상으로 삼고, 죽인 사람에게 상금을 주었다. 재산은 별도로 몰수하고 처분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상금은 한 사람에 2탈란톤이었다. 이름이 표에 오르면 생명이 수령할 수 있는 상금으로 환산되었다. 이런 제도화된 정치적 숙청은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수천 명의 반대자, 특히 기사계층과 마리우스파 원로들이 죽었다. 둘째는 개혁이었다. 술라는 공화정을 ‘수리’하겠다고 했다. 원로원을 약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리고, 호민관을 규율할 법을 정해 권한을 제한하며 그 자리를 거의 정치적 막다른 길로 만들었다. 법정의 통제도 원로 계층에 돌려주었다.

술라는 죽을 때까지 독재관직을 간직하지 않았다. 기원전 80년에 집정관으로 한 해를 보낸 뒤 공직에서 물러나 사인으로 살았다. 기원전 78년에 죽었다. 군대로 질서를 다시 쓴 사람이 나중에는 공직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장치들은 함께 퇴장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술라의 이야기는 ‘공화정의 구원자’처럼 보인다. 비상한 수단으로 공화정을 위협하는 세력인 마리우스파와 기사계층을 치우고, 원로원을 강화한 뒤,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공화정으로 돌아왔다. 로마의 전통에는 그를 ‘공화정의 충복’으로 그린 서술도 남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공화정에 끼친 손상은 그 ‘수리’보다 훨씬 깊었다.

술라는 치명적인 선례를 만들었다. 장군이 군대로 국가를 차지한 다음 ‘옛 질서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옛 질서를 다시 쓸 수 있었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는 뒤에 이 선례를 반복했다. 반복될 때마다 먼저 군대로 점령하고 나중에 적법한 절차로 확인받는 길은 더 일반적인 정치의 경로가 되었다.

그가 원로원을 ‘강화’한 결과는 원로원이 술라 파벌에 장악된 기관이 된 것이었다. 추가된 원로 300명은 주로 기사계층과 군대에서 뽑은 술라의 지지자였다. 원래 원로원은 내부의 다양성을 가진 귀족 집단이었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 이미 갈라졌다고 해도 그 분열 자체가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술라 이후 원로원은 오랫동안 승리한 쪽에 길들여진 기관이었다.

호민관을 약화한 일에도 반작용이 따랐다. 술라는 호민관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고 더 높은 관직으로 갈 수 없게 하여 정치적 막다른 길로 만들었다. 공화정 구성체의 비상 브레이크가 약해졌다. 그러나 약해진 호민관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기원전 70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함께 집정관을 맡았을 때 호민관의 권한이 회복되었다. 술라가 막으려던 길을 새 정치연합이 다시 열었다.

가장 깊은 손상은 언어의 차원에 있었다. 술라의 ‘공화정 회복’ 선언은 공화정이라는 말을 도구로 만들었다.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화정을 회복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공화정은 더 이상 구체적인 제도적 배치가 아니라, 어느 승리자든 새로 해석할 수 있는 구호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뒤에 이 유연성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의 원수정 전체가 ‘공화정 회복’이라는 언어 위에 섰지만, 그 회복이 실제로 세운 것은 새로운 정치 구성체였다.

술라가 죽고 약 18년 뒤인 기원전 60년경,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훗날 제1차 삼두동맹이라 불린 정치적 연합을 맺었다. 새로운 내전은 아직 뒤에 있었다. 그 과정은 다음 글에서 살펴본다. 하지만 술라는 이미 다음 단계에서 다시 사용할 몇 가지 방법을 남겼다. 장군은 군대를 데리고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고, 승리자는 명단을 발표해 적을 숙청할 수 있었다. ‘공화정 회복’은 어떤 정치적 변화도 정당화하는 구호가 될 수 있었고, 비상시의 특별한 권력은 정식 관직으로 합법화될 수 있었다. 술라에서 옥타비아누스까지 50여 년은 이런 도구들이 반복해 쓰이고 더 정교해지는 과정이었다.

10. 공화정 구성체의 한계

이 글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로마 공화정 구성체는 어떻게 도시국가의 틀을 지중해의 크기로 넓혔는가?

답은 두 층에 있다.

첫째는 정교한 제도다. 동료제와 연간 임기, 혼합정체와 호민관의 거부권, 관직 경로인 cursus honorum의 절차화와 상설 원로원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귀족 집단의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이면서 어느 한 개인이나 파벌이 권력을 오래 독점하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빠른 결정도 내릴 수 있는 정치적 기계였다. 공화정 성숙기, 대략 기원전 3세기부터 2세기 중반까지 이 기계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세 차례 포에니 전쟁을 치르고 헬레니즘 세계에 개입하는 동안 로마는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내부 조정을 유지했다. 장군들도 전쟁이 끝나면 공화정의 질서 안으로 돌아왔고, 헬레니즘식 개인 통치자가 되지 않았다.

둘째는 문화의 내면화다. 작동은 제도만이 아니라 깊이 내면화된 정치문화에 의존했다. 핵심은 mos maiorum, 조상들의 전통이었다. 로마의 귀족은 자신을 독립된 한 개인이 아니라 조상들이 현재까지 이어져온 고리라고 배웠다. 정치적 행동은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했고, 후손에게 좋은 유산을 남겨야 했다. 공화정의 절차와 원로원의 권위, 왕에 대한 반감은 바깥의 규칙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핵심 가치였다. 이 문화 덕분에 로마 귀족들은 오랫동안 자제할 수 있었고, 어떤 구체적인 정책보다 공화정의 지속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었다.

두 층이 합쳐져 기원전 3세기부터 2세기 중반까지 한 도시국가가 이탈리아의 패자에서 지중해의 패자로 커지는 과정을 떠받쳤다. 도시국가 구성체가 밖으로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그 한계다.

공화정 구성체의 설계는 도시국가의 크기를 전제로 했다. 동료제는 두 집정관이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했다. 로마 안에서는 가능했지만, 둘이 서로 다른 먼 속주에서 싸우면 어려워졌다. 관직은 매년 바뀌었으나 전쟁은 오래전부터 한 해를 넘겼다. 지휘권 연장은 원래 로마가 전쟁을 이어가는 방법이었다. 갈리아와 동방 같은 먼 전장에서 같은 사람이 여러 해 지휘하면, 인계는 로마에서 이름 하나를 바꾸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먼 군대도 그 사람을 받아들여야 했다. 원로원의 자문은 원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토의할 수 있어야 했다. 로마에서는 가능했다. 그러나 먼 장군이 답신을 기다릴 수 없는 즉각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면, 실제 권위는 원로원의 자문 권위를 넘어섰다.

지중해 크기의 영토는 군사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 문제도 가져왔다. 정복의 부는 불평등하게 배분되었다. 속주 운영의 수입을 통해 귀족에게, 징세 청부를 통해 기사계층에게 흘렀고, 나머지는 시민에게 제공하는 여러 혜택을 포함한 로마 도시의 공적 지출로 갔다. 빈부 격차는 깊어졌다. 땅을 잃은 시민이 로마로 몰렸고, 곡물 공급과 토지 분배, 삶의 안전이 자신의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이런 필요는 그들을 동원할 수 있게 했지만, 그들 자신의 요구도 만들었다. 가이우스는 곡물과 땅에서는 지지를 얻었으나 동맹자의 권리를 넓히려 하자 일부 평민의 반대를 만났다. 지지는 지도자가 한번 얻어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 시민에게 곡물 가격과 토지와 시민 자격은 공화정과 무관한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공동체에 요구를 내놓는 바로 그 자리였다. 물질적 처지는 판단에 영향을 주지만 판단 자체를 없애지는 않는다. 어려움은 요구를 법적 효력이 있는 결정에 넣으려면 여전히 관료의 제안과 정치적 동맹의 협력, 여러 이해의 교환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입구를 쥔 사람은 중간에서 결과를 좌우할 힘도 얻었다.

시민 공동체가 커지면 오래된 조직 방식도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여야 했다. 동맹시 전쟁 중과 그 뒤, 이탈리아 여러 지역의 더 많은 주민이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이들을 어느 부족에 넣을지, 기존 표의 분포를 어떻게 바꿀지가 곧바로 새로운 다툼이 되었다. 명부에 이름이 들어갔다고 해서 로마 정치에서 즉시 동등한 자리를 얻는 것은 아니었다. 공동체는 넓어졌지만 목소리를 배분하는 방식은 다시 협상해야 했다.

공화정 구성체의 한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도시국가의 크기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이탈리아 동맹의 크기에서도 일할 수 있었다.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크기에서는 심각한 긴장이 생겼다. 집정관을 바꾸거나 새 법 하나를 통과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먼 전쟁을 계속 지휘하게 하면서도 로마가 지휘권을 거두어올 수 있어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을 시민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목소리가 결정에도 들어가게 해야 했다. 이 요구들은 서로를 건드렸다. 구조적 긴장은 거기에 있었다. 역사가 이미 모두에게 유일한 출구를 정해두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건들은 이 구조적 긴장이 구체적인 정치 갈등으로 불붙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갈등은 공화정 구성체의 한계를 거듭 드러냈다. 당장의 해결책 중에는 다음 협상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도 있었다. 술라가 죽은 기원전 78년, 공화정의 형식은 여전히 남았지만 내부 조정 장치는 이미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여기서 현대 역사학의 두 판단을 볼 필요가 있다. 에리히 그루엔은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세대》(1974)에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결과를 거꾸로 투사해 후기 공화정의 붕괴를 필연으로 판정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기원전 1세기에도 공화정의 언어와 절차는 활발했으며, 당시 정치인들은 그 틀 안에서 움직였다. 그들은 자신이 공화정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널드 사임은 《로마 혁명》(1939)에서 반대 방향으로 갔다. 아우구스투스의 ‘공화정 회복’을 사적인 관계망, 파벌의 결합, 승리자의 재편이 중심이 된 혁명으로 읽었다.

두 판단을 함께 놓으면, 기원전 1세기의 공화정 구성체는 형식상 유효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갈수록 떠받치기 어려워지는 상태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언어는 진지하게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cursus honorum을 따라 승진했고, 원로원은 모였으며 민회는 관료를 선출했다. 절차도 부분적으로 지켜졌다. 자주 돌파되었지만 돌파한 사람조차 뒤에 그것을 합법화하는 데 힘을 들여야 했다. 그런데 내부 조정 장치와 정치문화의 토대는 이미 깊이 손상되어 있었다. 작동은 제도 자체의 안정성보다 구체적인 실력자들 사이의 타협에 점점 더 기대었다.

이 상태는 상당히 오래 갈 수 있었다. 기원전 60년대와 50년대 제1차 삼두동맹처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사적으로 권력을 나누면서 겉으로는 공화정인 배치도 가능했다. 공화정 구성체의 뒤틀림이었지만, 아직 그 죽음은 아니었다.

기원전 44년 이후의 내전에서 기원전 27년의 정치적 배치에 이르기까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권력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호를 되살린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집정관과 원로원과 공화정의 이름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권력관계를 오래된 명칭 안에 놓았다. 뒤에 권력을 물려주는 일도 가족의 배치와 입양, 정치적 수여를 거쳐야 했다. 이미 완성된 왕관 하나를 아들에게 곧장 넘기는 일이 아니었다. 로마는 공화정이라는 말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름은 남았다. 한때 나뉘어 있던 권력은 점점 한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다음 편: 카이사르에서 옥타비아누스로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상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