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알렉산드로스와 헬레니즘—구성체를 수출할 수 있는가
기원전 334년 봄, 스물한 살의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 약 4만 명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전면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1년 뒤 그는 서른두 살에 바빌론에서 죽었다. 해협을 건넌 날부터 죽는 날까지, 그의 군대는 인더스강에 이르렀고 그의 지배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쳤다.
유라시아 역사에서도 유난히 빠른 깎기였다.
중국의 제왕을 다룬 시리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진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 10년에 걸쳐 여섯 나라를 없앴다. 통일에서 왕조의 멸망까지는 15년이 걸렸다. 두 정복 모두 대략 10년 단위로 셀 수 있다. 지도의 경계는 빨리 바뀐다. 새 경계 안에 들어온 사람과 제도를 함께 붙들어 둘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진의 붕괴는 통일자가 죽은 뒤에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지속 불가능한 징후를 드러냈다. 오피스의 반란, 원정군의 피로, 마케도니아 핵심 엘리트에 대한 숙청. 서른두 살의 죽음은 이미 긴장 속에 있던 시도를 앞당겨 끝냈다.
진과 알렉산드로스를 나란히 놓으면 깎기와 구성의 주기에서 되풀이되는 현상이 보인다. 아주 빠른 깎기 뒤에 취약한 구성체가 남는다. 파괴는 십수 년이면 끝날 수 있다. 부수는 속도는 얼마든지 빨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에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치체에 대한 소속감, 관성, 제도로 굳어진 작동 방식을 길러야 한다. 정복자는 십수 년 안에 모든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한 시간 안에 피정복민이 기꺼이 복종하고, 그의 제국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며, 그의 법을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이 깎기와 구성 사이의 근본적인 비대칭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자이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국의 규모에서 헬레니즘 정치 구성체를 실제로 만들려고 시도한 역사상 첫 인물이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요소와 동방 전통의 요소를 섞어 새로운 정치 형태를 만들려 했다. 시도는 일부 실패했고 일부 성공했다. 후계자들은 제국을 나누었지만 그들의 통치 아래에서도 헬레니즘의 정치적 구성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323년의 죽음부터 마지막 헬레니즘 왕국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가 기원전 30년 로마에 병합될 때까지, 거의 300년이 흘렀다.
이 300년은 유라시아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제도와 문화가 훨씬 넓은 지역에서 제국의 통치와 오래 맞물렸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셀레우키아처럼 여러 문화가 만나는 대도시는 그 결합이 눈에 보이는 형태가 된 곳이었다. 그리스어와 미술, 철학, 그리스식 동전은 새로운 도시와 통치망을 따라 지중해에서 인더스강까지 퍼졌다. 도시와 시민, 왕권을 둘러싼 난제도 뒤에 로마와 기독교, 이슬람 세계의 서로 다른 상황에서 거듭 나타날 것이다.
이 글의 중심 질문은 간단하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체는 수출할 수 있는가. 도시국가 규모에 맞추어 설계된 정치적 구성을 제국 규모로 넓히면 무엇이 일어나는가.
답은 복합적이다. 도시국가를 그대로 확대해서 제국이 된 것은 아니다. 시민총회와 추첨 공직, 직접 참여가 헬레니즘 제국 전체의 통치 방식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동방 전제정으로 단순히 되돌아간 것도 아니다. 왕의 권위와 함께 상당한 도시 자치, 그리스식 법, 시민권 제도를 유지했다. 헬레니즘 국가는 도시국가도 동방 제국도 아닌 새로운 혼합체였다. 그 내부의 긴장이 시대 전체를 규정했다.
1. 정복한 땅을 움직이는 법—계승, 분권, 책임 추궁
여기서 알렉산드로스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를 ‘그리스 문명을 동방에 가져온 문화 사절’로 보는 데 있지 않다. 정교한 통치 기술에 있다. 그가 마주한 과제는 구체적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막 정복했다. 이제 제국이 계속 움직이게 해야 했다. 페르시아 관리들을 모두 마케도니아인으로 바꾸면 행정이 즉시 무너진다. 전부 남겨 두면 실질적인 통제권을 잃는다. 그가 택한 해법은 민정과 군권과 재정을 나누어 서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기원전 331년 바빌론에서 그 배치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도시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문을 열었다. 그는 페르시아 귀족 마자이오스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군대는 아폴로도로스에게, 수입 관리는 아스클레피오도로스에게 맡겼다. 세 이름, 세 자리. 페르시아 귀족이 여전히 지방을 다스린다. 다만 그곳의 병사와 돈까지 한꺼번에 넘겨받지는 않는다.
총독과 왕실 주둔군을 분리하는 방식은 무에서 만들어 낸 발명이 아니었다. 페르시아의 통치 경험에도 그런 배치가 있었다.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가 한 일은 기존 직책을 이어받고 직책 사이의 관계를 다시 짜는 것이었다. 지방을 관리한다고 주둔군을 저절로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군대를 지휘한다고 모든 수입까지 자동으로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지방은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직책 하나만으로 전체 기계를 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도록 한다.
바빌론만의 사례는 아니었다. 페르시아 본토 페르시스에서는 귀족 프라사오르테스를 총독으로 삼고 군권과 재정을 따로 배치했다. 메디아에서는 아트로파테스, 히르카니아에서는 암미나페스를 썼다. 모두 페르시아인이었다. 소아시아에서는 마케도니아인을 총독으로 두되 그리스 도시들의 상대적 자치를 유지했다. 도시에는 자체 시민총회와 관리가 남았다. 세금을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치는 것이 달라졌다.
‘대체하지 않고 활용하기’라고 부를 수 있다. 페르시아가 세워 놓은 행정의 골격을 쓰면서, 분권과 마케도니아군의 감독을 통해 새로운 최고 권위 아래에서 움직이게 한다. 행정 기계를 부순 것이 아니다. 연결을 다시 한 것이다.
기원전 324년 인도에서 제국 중심부로 돌아온 그는 또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감사였다. 동방 원정 중 직무를 소홀히 하거나 부패와 권력 남용을 저지른 총독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아부레테스, 옥사트레스, 오르크시네스 등이 처형되거나 처벌받았다. 책임을 묻는 동시에 경고하는 일이었다. 왕은 계속 그들의 일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빌론의 인사와 수사의 처벌은 통제를 유지하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 준다. 기존 행정이 계속 일하게 하고, 최고 권위가 돌아와 추궁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그러나 낡은 기계를 쓴다고 접수가 저항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그디아나에서 스피타메네스가 마라칸다 주둔군을 포위했고, 알렉산드로스가 보낸 증원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정복자는 되돌아가 싸워야 했다. 임명장은 도착할 수 있다. 복종이 임명장과 함께 자동으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페르시아를 인수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페르시아를 그리스로 만들지 않았다. 옛 행정을 움직이게 한 다음 새로운 최고 권위에 연결했다. 도시국가의 도면을 펼치기도 전에 총독, 세금, 주둔군이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정복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순수한 새 제도가 아니었다. 내일도 돌아가는 지방이었다.
제국을 인수하는 것과 그 구성체를 통째로 갈아 끼우는 것은 다르다. 그는 우선 페르시아 왕좌에 앉았다. 그다음 어떻게 제국을 자신이 원한 헬레니즘 정치체로 만들 것인지는 아직 열려 있었다. 이것이 진짜 긴장이었다. 그는 그리스 세계 출신이었다. 정확히는 그 변방의 마케도니아, 본토 도시들이 반쯤 야만적이라고 바라보던 왕국에서 왔다. 군대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연합군이었지만, 피지배자의 대부분은 페르시아인과 다른 동방 민족이었다. 그리스식 왕이 될 것인가, 페르시아식 왕이 될 것인가.
정복 초기에는 그렇게 날카로운 질문이 아니었다. 마케도니아의 왕이자 아시아의 정복자라는 두 신분은 나란히 설 수 있었다. 통치가 깊어지면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인에게는 페르시아 왕처럼 보여야 했다. 의복과 의례, 귀족 가문과의 혼인, 귀족 자제의 친위대 편입. 마케도니아인에게는 마케도니아 왕처럼 보여야 했다. 고향의 옷, 자유로운 전우 공동체의 수평적 관계, 페르시아식 굴종 의례를 받지 않는 모습.
어느 하나를 고르면 다른 쪽 지지자가 불만을 품는다. 알렉산드로스는 두 가지를 함께 하려 했다. 후기의 ‘융합 정책’은 바로 그 배경에서 나왔다.
2. 융합 정책인가, 통치 기술인가
기원전 330년 다리우스 3세가 죽자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왕실의 외형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디오도로스는 왕관 역할을 하는 머리띠, 흰옷, 허리띠를 썼다고 전한다. 하지만 바지와 긴소매 옷은 입지 않았다. 그리스인의 눈에는 지나치게 ‘동방적’인 옷이었다. 쿠르티우스는 왕이 친구와 고위 장군들에게도 페르시아 옷을 입으라고 했다고 쓴다. 선택은 치밀했다. 왕권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머리띠와 흰옷은 취하고, 가장 반감을 사는 바지는 피했다.
정체성의 교체가 아니라 정치적 연출이었다. 페르시아 신민이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게 하려면 왕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다고 마케도니아의 정체성을 모두 버릴 수는 없으므로 일부는 남겨 둔다. 세부 하나하나가 계산되어 있었다.
더 큰 논쟁을 일으킨 것은 프로스키네시스였다. 왕 앞에서 입맞춤을 날리는 것부터 온몸을 땅에 엎드리는 것까지 포함하는 페르시아식 복종 의례다. 페르시아인이 왕에게 이 예를 올린다고 반드시 왕을 신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종교적 숭배가 아니라 정치적 종속을 표시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사람 앞에서는 같은 동작이 다른 뜻으로 읽힐 수 있었다. 칼리스테네스의 반대는 사람에게 주는 명예와 신에게 주는 명예를 구분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누가 누구 앞에서 몸을 굽히는지는 더 이상 단순한 궁정 예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원전 327년 무렵 문제가 날카로워졌다. 아리아노스가 전하는 논쟁에서 어떤 이들은 왕에게 신성한 명예를 주자고 했고, 칼리스테네스는 사람과 신의 예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연회 이야기에서는 금잔이 그에게 돌아온다. 그는 술을 마시고 몸을 굽히지 않은 채 왕에게 입 맞추려고 다가간다. 누군가 빠뜨린 절차를 지적한다. 왕은 입맞춤을 허락하지 않는다. 칼리스테네스는 자신이 입맞춤 하나를 덜 받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 방 안의 같은 동작이 벌써 서로 다른 뜻을 갖고 있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논쟁 뒤에는 마케도니아인에게 더 이상 그 예를 권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 귀족들은 차례로 몸을 굽혔다. 알렉산드로스는 두 집단을 같은 궁정에 모을 수 있다. 그렇다고 왕을 똑같이 이해하게 만들 수는 없다. 옷은 섞어 입을 수 있었다. 의례는 아직 꿰매지지 않은 자리를 드러냈다.
집단 혼인도 그런 시도였다. 기원전 324년 봄 수사에서 큰 결혼식이 열렸다. 왕은 다리우스 3세의 딸 스타테이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딸 파리사티스와 결혼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 헤파이스티온은 다리우스의 다른 딸 드리페티스와 혼인했다. 약 80명의 마케도니아 측근도 페르시아와 메디아 명문가 여성들을 아내로 맞았다. 플루타르코스는 하객이 약 9천 명이며 한 사람씩 금잔을 받았다고 전한다. 의식은 페르시아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융합 정책의 절정이었다. 혼인의 혈연으로 마케도니아 엘리트와 페르시아 엘리트를 영구히 묶으려 했다. 그 논리가 이어졌다면, 두 집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실제로 새 제국의 지배층이 되었다면,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섞인 새로운 구성체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혼인은 제국을 한 가족으로 꿰매지 못했다. 왕이 죽자 후계자들은 동맹을 다시 짰고, 수사의 배치를 한 사람의 주인이 유지하던 시절은 끝났다. 그렇다고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가 모두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셀레우코스의 아내 아파마는 뒤에 왕조의 지도에 들어갔다. 시리아의 아파메이아가 그녀의 이름을 받았다. 혼인 잔치는 제국을 이어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의 관계는 다른 형태로 남을 수 있었다.
왜 결혼식은 제국을 꿰매지 못했을까. 쿠르티우스는 마케도니아군 내부의 말을 남겼다. 병사들은 전쟁으로 얻은 것보다 승리 속에서 잃은 것이 많다고 느꼈다. 왕이 마케도니아의 왕이 아니라 ‘다리우스의 총독’이 되었다고 불평했다. 그들에게는 왕이 고향의 전통을 버리고 동방에 물들어 타락한 것으로 보였다. 이 감정은 기원전 324년 오피스에서 폭발했다. 왕이 마케도니아 노병 1만 명을 귀국시키고 페르시아인을 군대의 핵심에 넣겠다고 발표하자 병사들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진정시키는 데 며칠이 걸렸다.
반란은 문제를 드러낸다. 마케도니아군은 제국의 진짜 토대였다. 이 군대 없이는 페르시아를 정복하지도 제국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군대가 융합을 거부했다. 병사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데 목숨을 걸었다. 기대한 보상은 페르시아를 다스리는 것이지 페르시아인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같은 자리에 올리는 일은, 승자에게 마땅한 보상을 빼앗는 것이었다.
융합 정책의 근본적 난점은 여기 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하나로 만들려 하지만, 정복자가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정복자의 지위와 이익이지 피정복자와의 평등이 아니다.
현대 역사학은 이를 다르게 읽는다. 오래된 해석은 이상을 보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시대를 뛰어넘은 세계시민주의자로서 민족의 구별이 없는 통일 제국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 특히 영국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해석이다. 그들은 영국 제국의 이상을 고대의 그에게 투영하곤 했다. 후대 연구는 이 그림을 수정했다. A. B. 보즈워스의 대표적인 연구는 ‘융합’을 일관된 강령보다 단계별 통치 기술로 읽는다. 새 정복지의 안정화, 이란 귀족의 제국 엘리트 편입, 전통적 마케도니아 귀족의 견제 약화. 조치마다 구체적인 정치 목적이 있었다. 이를 묶어 ‘융합 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은 후대의 정리다. 왕 자신이 그 통일된 개념을 가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피터 그린의 독해는 더 날카롭다. 그는 후기의 행동에서 연극성, 소외, 폭력의 징후가 커진다고 본다. 마케도니아의 동료들과 멀어지고, 페르시아 수행원에 의존하며, 자신을 보통 인간 이상의 존재로 연출한다. 그린은 낭만적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상주의자의 비극이 아니라 권력이 사람을 변형하는 과정으로 읽는다.
그 사이에 융합 정책의 실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로스는 분명 어떤 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문화적 이상보다는 지배의 필요가 더 컸다. 이란 귀족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궁정의 지위를 주고, 혼인하고, 자제를 친위대에 넣었다. 마케도니아 핵심 귀족이 자신의 권력을 지나치게 제한할 필요는 없었기에 이란 귀족을 올려 그 영향력을 희석했다. 권력의 줄다리기이지 문화적 사명은 아니었다.
그 줄다리기의 결과로 새로운 정치 구상이 생겼다. 민족을 가로지르는 엘리트 공동체다. 왕의 생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뒤의 헬레니즘 국가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부분 실현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마케도니아인과 이집트 사제가 협력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그리스·마케도니아인에 이란 토착 귀족과 바빌로니아 사제가 더해졌다. 각 국가는 자기 방식으로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를 다루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일을 끝내지 못했다. 질문을 열었다.
3. 알렉산드리아들—지도 위의 일흔 도시
왕이 죽고 수백 년 뒤,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옹호하는 글에서 70개가 넘는 도시를 세웠다고 썼다. 정복의 길을 따라 일흔 도시가 놓인다. 기억에 남기 쉬운 그림이다. 지도는 군대가 어디까지 갔는지만 아니라 그리스 문명이 어디에 뿌리내렸는지도 보여 주는 듯하다.
하지만 찬사 한 문장만으로 그 지도를 그릴 수는 없다.
도시 하나를 지도에 되돌려 놓으려면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새 도시를 짓는 일, 옛 도시에 이주민을 더하는 일, 주둔지 거점을 확장하는 일, 오래된 이름을 왕의 이름으로 바꾸는 일은 다르다. 나중에 생긴 도시가 제 기원을 알렉산드로스에게 가까이 붙일 수도 있다. 이름은 남았다. 첫 곡괭이를 누가 휘둘렀는지는 그만큼 선명하지 않을 수 있다.
P. M. 프레이저는 1996년 출간한 The Cities of Alexander the Great에서 도시와 건설 전승을 다시 추적했다. 그를 따라갈 까닭은 인상적인 총수 하나에서 다른 총수로 달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각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옛 취락은 어디 있었나. 새 주민은 누구였나. 어느 부분이 정복자의 것이고 어느 부분이 후계자의 것인가.
지도에 남는 도시가 줄어도 문제는 단순해지지 않는다. 요새는 곡식이 필요하고, 곡식은 농민이 필요하며, 주둔군은 길과 시장이 필요하다. 군사 거점에서 도시 생활이 자랄 수도 있다. 왕이 통제하는 도시에 그리스식 극장이 들어설 수도 있다. ‘문명의 전파’와 ‘지배의 유지’ 가운데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다. 한 도시 안에서 두 가지가 함께 일어날 수 있다.
가장 큰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 나일강 삼각주의 서쪽 끝에 세워졌다. 이 도시는 이 글에서 여러 차례 돌아오게 될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된다. 처음 계획은 전형적인 그리스식이었다. 격자형 도로, 두 항구, 물을 공급하는 운하. 그러나 처음 역할은 문화 중심이 아니라 상업과 행정 중심이었다. 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되어 고대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자랐다. 전성기 인구는 50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있다. 도서관, 무세이온, 등대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 시설들은 후대 왕조의 작품이지 알렉산드로스 자신의 작품이 아니다. 그가 정한 것은 위치와 기본 구조였다.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으로 눈을 돌리면, 지도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도시들이 더 있다. 아레이아의 알렉산드리아는 오늘날 헤라트 부근에 기원전 330년 세워졌으며, 주된 기능은 중앙아시아와 이란 사이의 교통 통제였다. 아라코시아의 알렉산드리아는 칸다하르 부근의 옛 아케메네스 요새 위에 자리 잡고 남동쪽 통로를 장악했다.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는 지금의 타지키스탄 후잔트 부근에 기원전 329년 세운 국경 요새였다.
주민은 누구였을까. 아리아노스와 후대 자료는 크게 세 부류를 보여 준다. 퇴역하거나 다친 마케도니아·그리스 병사, 군대를 따라온 용병, 그리고 현지인이다. 왕은 그리스에서 대규모 인구를 옮겨 동방을 식민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럴 인적 자원이 없었다. 이미 군대 안에 있던 사람들과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이용했다. ‘헬레니즘 도시’에는 흔히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주민들이 있었다. 병사와 이주민, 현지인이 같은 성벽 안에서 만났지만, 그 수와 권력 관계가 어느 곳에서나 같지는 않았다.
이 구성은 성벽 안에 질문 하나를 남겼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은 한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혼인과 언어의 왕래, 함께 쓰는 시장과 건물이 이주민과 현지인을 가까이했다. 그러나 가까워지는 길의 끝이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현지어를 배운다고 그리스어를 잊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지 생활에 참여하려고 먼저 그리스식 교육과 제사를 버릴 필요도 없다. 한 사람 안에서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일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도시마다 서로 다른 조합이 자라났다. 알렉산드리아는 활발한 그리스어 문화를 오래 유지했고,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그리스 전통을 또 다른 현지 생활에 연결했다. 거리가 멀어졌다고 문화가 세대마다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에게해에서 아주 먼 곳에서도 극장과 체육장, 비문은 그곳에서 온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이하눔은 그 공존을 눈으로 보게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프랑스 발굴단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이 도시를 조사했다. 극장, 체육장, 그리스어 비문은 에게해의 형태를 먼 곳까지 옮겨 놓는다. 하지만 궁전과 신전을 모두 ‘그리스식’ 한마디에 넣을 수는 없다. 건축에는 그리스와 동방의 형식이 섞여 있고, 왕조와 시기가 바뀌며 계속 달라졌다. 유적에서 보이는 것은 그리스에서 통째로 가져온 폴리스가 아니다. 궁정과 이주민과 현지 생활이 함께 차지한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에도 자기만의 단절이 있었다. 기원전 145년 무렵 아이하눔은 파괴를 겪었고, 그리스 지배 아래의 도시 생활이 끊어졌다. 그 뒤에도 터는 사용되었지만 이전과 같은 왕실의 도시로 되돌아가지는 못했다. 극장과 비문이 전통이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를 보여 준다면, 폐허는 다른 질문을 남긴다. 도시를 떠받치던 통치가 끊어졌을 때 무엇이 그다음에도 남을 수 있는가.
건설 전설과 아이하눔의 유적을 함께 놓으면 지도 속 이름 하나하나가 복잡해진다. 도시는 주둔군을 먹여 살리지만 주민에게는 자기 삶도 있다. 제도와 언어와 건물은 먼 곳에서 계속 쓰이고 변한다. 어떤 장소는 끊겼고, 어떤 장소는 처음과 다른 모습으로 남았다. 모든 것을 ‘문명의 전파’라고 하면 지배가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단지 통치 도구’라고 하면 그 안에서 살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구성체는 수출할 수 있는가. 적어도 알렉산드로스 자신의 규모에서는 부분적으로 가능했다. 수출된 것은 도시국가 전체가 아니라 옮길 수 있는 요소였다. 도시계획, 행정 기계, 엘리트 공용어로서의 그리스어. 새로운 현지 조건에서 다시 조립되며 그리스도 현지 그대로도 아닌 혼합체가 되었다.
완전한 도시국가 구성체가 도시와 함께 원형 그대로 수출된 것은 아니다. 시민총회, 추첨 공직, 직접 참여, 시민군은 실제로 조직된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헬레니즘 군주는 그런 공동체에 제국 전체의 결정권을 맡기지 않았다. 도시에 몇 명이 사는가와 시민 공동체에 몇 명이 들어가는가는 서로 다른 장부다. 도시는 자체 논의와 재판과 공직을 유지하면서도 왕권 아래 놓일 수 있다. 성벽과 함께 옮겨 가지 못한 것은 자기 운명에 대한 전면적 결정권이었다. 평의회, 관리, 법은 그리스식으로 남았지만 왕권 아래서 일했다. 더 이상 최고 정치 권위가 아니었다.
형식은 남고 실질은 달라진다. 이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핵심 구조다.
4. 후계자들—구성체의 여러 갈래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드로스는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열병으로 바빌론에서 죽었다. 현대의 의학적 추측에는 말라리아, 장티푸스, 과음에 따른 합병증 등이 있다. 명확한 후계자는 지정하지 않았다. 아내 록사네는 임신 중이었지만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이복형 아리다이오스는 지적 장애가 있어 독립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장군들이 병상을 둘러싸고 제국을 누구에게 넘기겠느냐고 물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답했다. 가장 강한 자에게.
실제로 그 말을 했는지와 무관하게, 이어지는 역사를 잘 묘사한다. 다음 40년은 디아도코이, 곧 후계자들의 전쟁이었다. 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등이 유산을 두고 싸웠다. 동맹은 되풀이해 바뀌고 세력은 커졌다 작아졌다. 기원전 280년대에 이르면 비교적 안정된 구도가 나타난다. 세 개의 큰 후계 왕국과 여러 작은 왕국, 도시 동맹이었다.
분열 자체가 깎기와 구성의 주기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통일된 제국을 남기려 했다. 그러나 사후의 계승 합의와 장군들 사이의 전쟁은 하나의 중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일부 장군은 여전히 전체를 두고 다퉜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서로 다른 왕조였다. 통일 제국을 이어 간다는 목표에서 보면 실패였다. 왕이 죽은 바로 그날 제국이 산산조각 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연결해 놓은 권력을 다음 통치자에게 안정적으로 넘겨주지도 못했다.
인치의 전형적 문제다. 창시자의 능력과 위신에 완전히 의존하는 구성체는 창시자 없이 지속되지 못한다. 진도 그랬다. 운영이 시황제 개인에 묶여 있었기에 그의 죽음 뒤 빠르게 무너졌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제도화할 시간마저 더 적었다. 시황제는 통일 후 11년을 살며 군현제,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 도로를 정비했다. 페르시아 본토를 정복한 기원전 330년부터 죽은 323년까지 알렉산드로스에게는 7년뿐이었다. 대부분 중앙아시아와 인도 원정에 보낸 시간이다. 정복지에 견고한 제도를 세우기에 부족했다. 이 체제 역시 최고 권력자의 조정에 크게 의존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계승을 둘러싼 합의와 장군들 사이의 전쟁을 거치면서도 공통의 중심은 유지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권력의 배분도 달라졌다.
후계 왕국들은 그가 풀지 못한 질문에 대한 여러 답이다. 각 후계자가 마주한 문제는 대체로 같았다. 여러 민족을 담은 땅을 어떻게 오래 다스릴 것인가. 답은 달랐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를 택했다. 중앙집권의 역사가 수천 년이고, 사막과 바다라는 자연 경계가 있으며, 인구는 상대적으로 동질적이었다. 그는 최상층에 그리스·마케도니아인을 놓되 이집트의 사제 체계와 지방 통치를 유지했다. 철저히 문서화된 관료국가를 세웠다.
셀레우코스 1세는 아시아를 택했다. 메소포타미아, 이란, 소아시아 동부, 박트리아. 이전 제국의 가장 큰 부분이지만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고 주민은 지극히 다양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 이란 귀족, 바빌로니아 사제, 유대인, 아랍 부족, 중앙아시아인. 이동하는 궁정과 ‘왕의 친구들’의 망을 통해 유연한 협상으로 통치하려 했다.
안티고노스 1세가 다툰 곳은 아시아의 넓은 영토였다. 아들 데메트리오스도 이집트로 전쟁을 가져갔다. 손자 안티고노스 2세에 이르러 왕조의 무게중심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쪽에 차츰 자리 잡았다. 알렉산드로스의 고향이지만 그는 그리스를 정복한 뒤 제대로 통치하지 않았다. 계속 밖에서 싸웠다. 왕조가 해결할 일은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마케도니아의 통제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였다. 요새, 주둔군, 일부 도시와의 동맹이 그 방법이었다.
세 전략은 세 가지 구성 방식이다. 이제 이집트와 셀레우코스를 먼저 보고 더 먼 박트리아로 나아간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군주의 신격화를 다룰 때 다시 등장한다. 그 전에 하나를 짚어야 한다. 후계자들이 처음부터 각자의 몫에 만족한 것은 아니다. 기원전 306년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왕을 칭하고 육지와 바다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를 공격했다. 기원전 301년 안티고노스는 입소스에서 패해 죽었고, 승자들이 영토를 나누었다. 나중 지도에 남은 왕국들은 처음 합의한 경계가 아니다. 서로 빼앗고 서로 더 빼앗지 못하게 한 결과다.
제국이 나뉘었다고 모든 곳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총독구, 도시, 군대와 세금을 서로 다른 궁정이 이어받았다. 하나의 중심이 처리할 관계가 여러 중심으로 분산되었다. 규모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해법이 여러 개로 바뀌었다.
하나의 통일 제국은 남지 않았지만 몇 개의 왕국은 남았다. 알렉산드로스의 통일이라는 목표에서는 여전히 실패다. 영토를 넘겨받은 왕조에는 자기 손에 들어온 부분을 어떻게 단단히 연결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하나의 중심을 향하던 도시와 군대, 세금이 여러 궁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깎기와 구성의 주기로 보면 구성체의 규모가 다시 조정된 것이다. 그러나 새 지도의 모든 조각이 똑같이 다스리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일강 유역과 아시아에 걸친 영토는 앞으로 서로 다른 난제를 내놓을 것이다. 후계자들이 적절한 규모에 먼저 합의하고 경계를 나눈 것은 아니다. 그들이 다툰 것은 영토였다. 다툼 끝에 남은 범위가 나중에 다스려야 할 땅이 되었다.
5. 프톨레마이오스—문서국가의 극단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세운 이집트 왕조는 헬레니즘 국가들 가운데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기원전 305년부터 282년까지 재위했다. 그의 나라는 유라시아 역사에서 문서가 사회 깊숙이 스며든 국가의 하나였으며, ‘그리스·마케도니아 지배층과 동방의 토착 구조’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기원전 4세기의 이집트에는 이미 수천 년의 중앙집권 전통이 있었다. 파라오, 사제, 관료, 부역, 세금, 토지 배분. 이런 제도들은 삼천 년 넘게 작동해 왔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를 부수지 않았다. 최상층의 파라오 자리에 자신을 넣었다. 스스로 파라오라 칭하고 이집트 전통에 따라 대관했다. 상층 관료조직에는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을 배치하되 이집트의 사제 체계와 지방 통치는 남겨 두었다.
이집트는 노모스라 불리는 약 서른 개의 주로 나뉘었고, 그 아래에 구와 마을이 있었다. 어느 층위에나 관리, 문서, 기록 보관소가 있었다. 기록의 대부분은 파피루스에 적혔다.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상당수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현대의 이집트학자들은 이를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작동 방식을 다른 어느 헬레니즘 국가보다 세밀하게 복원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는 ‘문서국가’였다. 토지 측량, 인구 명부, 종자 대여 장부, 수확과 납세 기록이 농촌을 겹겹이 왕실 문서에 연결했다. 어느 땅을 누가 경작하는지, 종자를 얼마나 빌렸는지, 무엇을 심고 세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지. 관리들은 그것을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파피루스가 생활 전체를 감싸지는 못했다. 소액 거래는 여전히 구두 약속과 증인에 기대어 이루어질 수 있었고, 매번 계약서를 남길 필요는 없었다. 궁정은 농촌경제를 따져 물을 수 있는 장부로 만들려 했다. 마을은 장부 속에서만 살아가지 않았다.
경제 속으로 왕실의 손은 깊이 뻗어 있었다. 기원전 259년의 기름 원료 규정은 매입자가 마을 책임자에게 인장을 찍은 영수증을 남겨야 한다고까지 정했다. 그 규정에 따르면 영수증이 없으면 물건은 마을을 나갈 수 없었다. 궁정의 요구가 기름 원료 한 묶음이 마을 어귀를 통과하는 방식에까지 닿았다. 왕실 토지만 있던 것도 아니다. 신전 토지, 군인에게 배분한 땅, 상속하거나 사고팔 수 있는 부동산이 있었다. 땅을 가진 사람, 경작하는 사람, 세금을 거두는 사람이 늘 같지는 않았다. 왕실의 힘은 모든 땅에 자기 이름을 쓰는 데만 있지 않았다. 더 흔히는 어떤 종류의 땅이든 무엇을 내야 하는지 알아내는 데 있었다. 기름 원료, 암염, 파피루스 제조, 일부 수출입 품목 같은 중요 부문은 왕실이 독점했다. 화폐 체계도 닫혀 있었다. 이집트 안에서 쓰는 은화와 바깥의 은화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았다. 들어오는 외국 은화는 이집트 은화로 바꿔야 했다. 왕실은 교환에서 수익을 얻었고, 나라 안의 화폐 흐름도 더 정확히 통제할 수 있었다.
이것들을 함께 보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는 매우 현대적인 의미의 ‘행정국가’였다. 전문 관료, 세밀한 문서, 계획경제, 화폐 통제, 독점 산업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중세 유럽의 국가보다 더 ‘현대적’이었다.
그러나 이 체계의 핵심 운영자는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이었다. 최상층 관리, 특히 재정·군사·궁정과 직접 연결된 관리는 대다수가 그리스인이나 마케도니아인이었다. 중하층 관리로는 이집트인도 일할 수 있었지만 그리스화가 필요했다. 그리스어를 말하고 그리스어 문서를 쓸 수 있어야 했다. 언어와 문화라는 이중 문턱이었다. 그리스어는 정부, 상업, 상층 문화의 언어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집트 문자가 신전 안의 목소리만 남긴 것은 아니다. 민중문자로 쓰는 이집트어는 여전히 재산 계약에 사용되었다. 집을 지분으로 나눌 수 있었고, 그 지분을 상속하거나 넘길 수도 있었다. 그리스어가 행정에 들어왔다고 이집트인의 거래와 가산이 자기 문자를 잃지는 않았다.
이집트 사제층은 이 체계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졌다. 왕조는 처음부터 그들과 협력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2세는 사제들에게 많은 토지, 특권, 면세를 주었다. 사제들은 그 대가로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왕조의 정당성을 떠받쳤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적법한 파라오이며 이집트 신들의 대리자라고 말했다. 로제타석은 이 관계를 돌에 새겼다. 기원전 196년 멤피스에 모인 사제들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더 많은 영예를 바치기로 의결했다. 비문은 먼저 왕조가 신전에 베푼 혜택을 열거하고, 이어 왕의 상을 어떻게 모실지, 축일을 어떻게 기념할지 정했다. 이집트어와 그리스어라는 두 언어를 상형문자, 민중문자, 그리스 문자라는 세 가지 문자 체계로 새겼다. 같은 돌 위에서 왕의 은혜와 사제들이 왕에게 돌려준 신성한 영예가 앞뒤로 이어졌다.
또 하나의 특별한 고안은 왕조 숭배의 제도화였다. 도시들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 신성한 영예를 준 적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를 국가의 제사와 연대 표기 속에 더 깊이 연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를 이집트로 옮기고, 그를 모시는 신전을 국가 최고 제사의 중심으로 삼았다. 2세는 죽은 아버지인 ‘구원자 신’과 재위 중인 왕실을 함께 국가 제사에 넣었다. 알렉산드로스와 왕실 숭배를 담당하는 연대 표기의 사제는 왕조를 문서의 날짜에 연결했다. 이 형식을 따르는 문서는 날짜에 왕의 재위 연도와 연대 표기에 쓰이는 사제의 이름을 함께 적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누이이자 아내인 아르시노에 2세는 이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이었다. 기원전 270년 죽은 뒤 신격화되었고, 그녀의 숭배는 이집트 전역으로 퍼졌다. 중심에는 아르시노에 신전이 있었다. 새로 이름 붙인 아르시노이테스 주에도 그녀의 이름이 들어갔다. 해마다 특정 세입이 그녀의 제사에 따로 배정되었다. 동전, 신전, 미술품에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죽은 왕비가 세금을 받을 수 있고, 전담 사제가 있고, 자기 신전이 있는 신이 되었다.
깊은 변화였다. 그리스 폴리스 전통에서 최고의 정치 권위는 시민공동체였다. 헬레니즘 이집트에서는 왕실이었고, 왕실은 신격화를 통해 도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시민공동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그리스식 제도를 가진 도시였으며 시민 등록과 그리스식 법이 있었다. 다만 시민공동체가 최고 권위는 아니었다. 그 자리는 파라오이자 국왕이자 신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것이었다.
이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핵심 역방향 운동이다. 그리스 폴리스의 상전이는 ‘인간’을 정치적 구성체의 중심에 놓았다. 헬레니즘 이집트는 ‘신격화된 국왕’을 다시 중심에 놓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이전 근동의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돌아간 셈이다. 파라오는 신의 아들이거나 신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단순한 복귀는 아니었다. 그리스어, 그리스식 도시, 법과 관리 체계 등 그리스에서 가져온 많은 요소가 남았다. 동서의 혼합체이지, 과거 그대로의 귀환은 아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는 기원전 30년까지 작동했다. 마지막 통치자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의 정복 속에서 죽으면서 거의 삼백 년의 왕조가 끝났다. 삼백 년은 짧지 않다. 중국 제왕 시리즈의 전한, 기원전 202년부터 서기 8년까지의 이백십 년보다 길다. 그리스·마케도니아 지배층, 토착 사회와 깊이 결합한 관료제, 정당성의 근거인 왕조 신격화. 이 조합이 오래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결합에도 대가는 있었다. 그리스어와 그리스·마케도니아계 배경은 궁정과 고위 관직, 자원 분배에서 여전히 유리했다. 그러나 그 우위가 사람들의 삶을 오갈 수 없는 두 세계로 가르지는 않았다. 가족 문서고에는 그리스어 문서와 민중문자로 쓴 이집트어 문서가 나란히 놓일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두 이름을 쓰기도 했고, 이주민과 현지인이 가족을 이루기도 했다. 문화의 경계를 넘었다고 관직과 자원을 얻는 문턱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말부터 2세기에 걸쳐 왕조는 지속적인 지방의 저항도 겪었다. 교류와 혼합은 실제였다. 통치 속의 불평등과 갈등도 실제였다.
가장 깊이 문서화되고, 가장 깊이 현지와 결합하고, 가장 오래 이어진 방식.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는 헬레니즘의 한 판본이었다. 유일한 판본은 아니었다.
6. 셀레우코스—유연한 제국의 한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가 헬레니즘의 가장 안정된 판본이라면, 셀레우코스 제국은 가장 크고 복잡하며 관리하기 어려운 판본이었다.
셀레우코스 1세는 기원전 312년 바빌론을 다시 장악했다. 뒤에 쓰인 왕조의 연대 계산은 이 귀환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왕의 칭호를 채택한 것은 기원전 305/304년이었고, 통치는 기원전 281년까지 이어졌다. 그가 점차 장악한 영토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가장 큰 부분이었다. 소아시아 동부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란고원을 지나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유역까지. 약 사천 킬로미터에 걸친 영토에는 그리스어, 아람어, 페르시아어, 바빌로니아어, 히브리어, 여러 중앙아시아 언어를 쓰는 지역이 들어 있었다. 수십 민족, 수십 종교 전통, 수백 도시와 촌락공동체가 함께 들어 있었다.
이런 영토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표준 방식’은 없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일종의 ‘유연한 제국’을 고안했다. 이동하는 궁정과 왕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망이 그 핵심이었다.
궁정은 움직였다. 그렇다고 권력이 가는 곳마다 처음부터 새로 세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안티오키아와 티그리스강의 셀레우케이아 같은 도시는 오래 공들여 만든 중심이었다. 왕은 이 중심들과 더 먼 지역 사이를 오갔다. 도시는 그 자리에 남고, 궁정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나타나야 했다. 궁정이 있는 곳이 국가 권력의 중심이었다. 왕이 지역별 긴급 사안을 직접 처리할 수 있었고, 여러 지역의 엘리트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한 지역의 엘리트에게 오래 둘러싸여 영향을 받거나 통제당하는 일도 피할 수 있었다.
‘보는 통치’였다. 현대 통신이 없는 시대에 먼 지방의 총독은 자기 구역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기 쉬웠다. 중앙에 머무는 왕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웠다. 셀레우코스의 해법은 왕이 중앙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왕 자신이 움직여 각 지역을 보았다. 물론 모든 구석을 끊임없이 방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궁정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느 지역도 ‘왕은 오지 않는다’고 가정할 수는 없었다.
궁정의 핵심 조직은 ‘왕의 친구들’, 필로이였다. 왕이 직접 고른 엘리트 집단으로 군 지휘관, 행정관리, 사절, 문화 인사가 들어갔다. 이 자리는 세습되지 않았다. 왕마다 자기 친구를 골랐다. 전왕의 친구가 새 왕의 친구라는 보장은 없었다. 왕은 필요에 따라 핵심 집단을 다시 짤 수 있었다. 최대한의 유연성이 생겼다.
지방에서는 대체로 페르시아의 총독제를 이어받아 약 서른 개의 총독구로 제국을 나누었다. 다만 알렉산드로스 때의 분권 배치를 더 세분했다. 민정, 군사, 세무를 맡는 비교적 독립적인 관리들이 서로 견제했다. 그 위에서 왕이 이동하는 궁정과 친구들의 망을 통해 계속 감독했다.
더 복잡한 것은 그리스식 도시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도시, 후계자가 세운 도시, 더 오래된 그리스 식민도시가 제국 안에 많았다. 이론상 자치도시였고 시민총회, 평의회, 관리, 법을 갖추고 있었다. 왕조는 타협했다. 형식적인 자치를 남기되 국왕의 ‘은혜’와 서신으로 실제 행동을 이끌었다. 왕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면세, 토지, 교역 특권을 주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 은혜는 사라졌다.
이 ‘은혜의 정치’는 그리스식 도시를 다루는 핵심 도구였다. 존 마의 연구서 《안티오코스 3세와 소아시아 서부의 도시들》은 그 움직임을 자세히 분석한다. 왕과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 사이에는 협상이 계속되었다. 왕은 충성, 병력, 세금을 원했다. 도시는 여러 특권과 보호를 원했다. 남아 있는 왕의 서신과 도시의 비문을 통해 이 왕래를 글로 추적할 수 있다. 지금도 곳곳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비문은 왕권과 지방 자치가 끊임없이 교섭했다는 물질적 증거다.
왕이 원하는 것은 도시의 충성, 병력, 수입이었다. 도시가 원하는 것은 왕의 보호, 토지, 특권이었다. 오가는 것은 명령만이 아니었다. 요구, 약속, 항변도 오갔다. 대등한 왕복은 아니었다. 왕권은 군대를 쓸 수 있었고, 도시는 그 압력 아래서 자기 조건을 말해야 했다. 궁정이 시민총회로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시에도 명령을 듣는 것 말고 다른 동작이 남아 있었다. 여전히 의논했고, 사절을 보냈고, 자기 요구가 왕의 결정 안에 들어가도록 애썼다.
결합 자체에 취약성이 있었다. 영토가 너무 넓고 구성 부분이 너무 다양해 하나의 중심이 진정으로 통합할 수 없었다. 각각 자기 방향으로 당겼다. 이란 귀족은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고, 박트리아의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은 자기 나라를 원했다. 유대인은 종교 자치를, 폴리스는 더 큰 특권을 원했다. 왕은 계속 협상하고 베풀고 위협하고 진압해야 했다. 어느 왕의 장악력이 부족하거나 궁정이 전쟁 하나에 묶이면, 원심력은 독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후기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박트리아 총독들은 자기 이름으로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독립을 향한 분명한 신호였고, 차츰 독립된 박트리아 왕국이 되었다. 이란 북부의 파르티아도 비슷한 길을 갔다. 셀레우코스에서 벗어나 이란을 가로지르는 파르티아 제국을 세웠다. 훗날 로마의 상대가 된, 중국 기록의 안식이다.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도 차례로 독립했다. 기원전 2세기 중엽이면 제국은 사실상 시리아와 레반트로 줄어 있었다. ‘아시아 제국’은 여러 조각이 되어 있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기원전 64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될 때까지 이어졌다. 셀레우코스 1세의 기원전 312년부터 계산하면 약 이백오십 년이다. 이집트보다 조금 짧지만, 관리해야 할 어려움은 훨씬 컸다. 그 조건에서 이백오십 년은 상당한 지속이었다.
두 나라를 나란히 놓으면 헬레니즘의 두 전략이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상대적으로 작고 자연 경계가 뚜렷하며 문화적으로 비교적 균질한 핵심 지역을 깊이 다스렸다. 셀레우코스는 크고 흩어져 있고 문화가 극도로 다양한 영토를 유연하게 관리했다. 둘 다 부분적으로 성공했고, 둘 다 대가를 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대가는 문화적 교류와 혼합으로도 사라지지 않은 권력과 지위 획득 기회의 불평등이었다. 셀레우코스의 대가는 끊임없는 원심력과 영토 축소였다.
이 대가들은 헬레니즘 방식의 한 긴장을 드러낸다. 정복자의 후손은 현지어를 배우고 현지인과 혼인하고 현지 생활에 참여하면서도, 통치에서는 여전히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협력과 혼합이 권력을 저절로 다시 나누어 주지는 않는다. 모든 왕조가 같은 질문을 마주했다. 지방사회의 참여를 필요로 하면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자리를 줄 것인가. 통치에 필요한 관계 속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과, 그 관계를 동등하게 결정하게 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7. 가장 먼 끝—박트리아와 메난드로스
헬레니즘 국가들의 동쪽 끝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에 있었다.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정복이 가장 멀리 뻗은 곳이며, 그 방식이 현지로부터 가장 큰 압력을 받은 곳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 남부에 걸친 박트리아는 원래 셀레우코스의 총독구였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왕조가 서쪽의 내전과 위기에 빠졌을 때, 총독 디오도토스 1세는 자기 이름으로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략 기원전 255년이다. 고대에 주화 발행권은 주권을 뜻했다. 독립의 첫걸음이었다. 그는 뒤에 정식으로 왕을 칭하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 그다음 세대의 에우티데모스 1세, 대략 기원전 230년부터 200년까지 재위한 왕을 현대 학자들은 흔히 이 나라의 진정한 창건자로 본다. 기원전 208년 안티오코스 3세가 박트리아를 되찾으려고 벌인 원정을 막아 냈기 때문이다.
특별한 나라였다. 실크로드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시대에 유라시아의 중심에 자리했다. 이미 중국 서부에서 페르시아와 지중해로 이어지는 동서 교역은 있었다.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 이란 토착 주민, 중앙아시아 유목민, 인도 이주민이 뒤섞여 살았다.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지만 일상에는 여러 언어가 쓰였다. 동전에는 그리스 문자를 새겼으나, 도상에는 그리스 신과 동방의 신이 함께 나타나곤 했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이 왕국은 인더스 유역으로 남진해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다. 가장 널리 알려진 왕은 메난드로스 1세로, 대략 기원전 165년부터 130년까지 재위했다. 그의 동전에는 눈여겨볼 점이 있다. 그리스어와 카로슈티 문자로 적은 프라크리트어가 함께 새겨진 경우가 많다. 제국의 화폐가 두 언어를 쓰는 초기 사례다. 그리스어 명문은 그리스·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화된 주민을 향했다. 카로슈티 문자 쪽의 명문은 인도 현지인을 향했다. 하나의 왕, 두 언어, 두 독자였다.
편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정치적 표현이었다. 메난드로스의 왕권은 헬레니즘과 인도라는 전혀 다른 두 문화공동체를 동시에 향해야 했다. 한 언어만 쓰는 왕은 다른 독자를 잃게 된다. 그는 어렵지만 더 포용적인 방식을 택했다. 양쪽을 모두 향하는 것이었다.
메난드로스는 인도의 문학 전통 안으로 들어갔다. 불교 경전 《밀린다왕문경》은 그와 승려 나가세나, 한역 이름으로 나선의 대화를 전한다. 밀린다는 메난드로스의 인도식 이름이다. 이 경전의 정확한 성립 시기와 역사성에는 논란이 있다. 그가 죽고 수십 년 뒤, 혹은 더 늦게 쓰였을 수 있다. 대화는 실제 기록이 아니라 문학적 구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다. 그리스·마케도니아 혈통의 왕이 인도 불교의 정전에 들어가 불법에 관심을 갖고 고승에게 묻는 왕으로 그려졌다.
현지 문화와 만난 구성체가 거꾸로 다시 빚어진 초기 사례다. 헬레니즘의 구성체가 인도로 들어갔지만, 인도 문화는 그 군주를 자기 이야기의 틀 안에 받아들였다. 메난드로스는 ‘그리스 정복자’가 아니라 ‘불법을 묻는 왕’으로 기억되었다. 정복당한 쪽의 문화가 정복자의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로 다시 썼다. 깊은 역방향 영향이다.
이는 ‘메난드로스가 실제로 불교에 귀의했는가’와는 다른 문제다. 여기서 다루는 정치와 문화의 차원에서는 그가 정말 불교를 믿었는지, 정말 나가세나와 대화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표한 정치적 구성체가 인도에서 이런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외래 정권이 인도에 뿌리를 내리려면 어떤 식으로든 인도 문화 체계에 수용되어야 했다. 그 방법의 하나가 통치자를 자기 종교 문헌에 써 넣는 것이었다.
인도 미술에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에서도 이 재구성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조각 기법과 불교 주제를 결합한 간다라 미술은 흔히 그리스·인도 문화 융합의 산물로 설명된다. 다만 시간을 구별해야 한다. 성숙한 간다라 불교 미술은 주로 기원전 1세기 말부터 서기 첫 몇 세기에 나타난다. 이미 메난드로스 이후다. 메난드로스와 인도·그리스 왕국 시대에 성숙한 간다라 미술이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 기법, 그리스어, 그리스·인도 장인들의 이동, 여러 문화가 만나는 종교 환경이라는 조건은 마련되었다.
역방향의 영향은 헬레니즘 정치 구성체의 내부에도 미쳤다. 아이하눔으로 돌아가 보면 그리스어 비문과 동방식 배치의 궁전이 한 도시에 있다. 인도·그리스 동전을 다시 보면 서로 다른 언어가 한 왕을 가리킨다. 집단 사이의 혼인과 두 언어를 쓰는 생활이 반드시 어느 한쪽의 정체성을 잃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현지에 뿌리내린 사람도 그리스 전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 현지 생활은 헬레니즘 세계를 바꾸었지만, 그 세계를 ‘겉은 그리스, 속은 현지’라는 두 층으로 말끔히 나누지는 않았다.
가장 먼 끝에서 구성체가 다시 쓰였다고 그리스 이름만 남았다는 뜻은 아니다. 한 도시는 그리스어를 계속 쓰고 체육장과 그리스식 관직을 유지하면서, 현지의 건축 형식을 받아들이고 현지의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남은 것과 바뀐 것이 같은 도시 안에서 얽혔다. 혼합이란 그리스 형식 속에 완전히 현지의 내용만 담긴 상태가 아니다. 형식 자체도 현지 생활 속에서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왕국 내부의 다툼, 영토 상실, 북방 유목집단의 진출이 박트리아의 그리스 지배를 점차 끝냈다. 남쪽 인도·그리스 왕들의 통치는 별도의 시간표를 따라갔다. 일부 왕명과 동전은 서기 1세기 초까지 이어졌고, 그 뒤에는 다른 통치자들이 주조와 통치의 장소를 넘겨받았다. 헬레니즘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월지가 서기 1세기에 세운 쿠샨제국은 이를 흡수했다. 쿠샨 동전에는 그리스 신, 이란 신, 인도 신과 부처가 함께 나타났다.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자의 후일담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 쿠샨 시대에는 그리스 문자로 박트리아어를 적기도 했다. 글자의 모양은 남았지만 읽히는 언어는 달라졌다. 그리스식 도시계획과 건축 기술 역시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의 유적에 흔적을 남겼다.
헬레니즘의 구성체는 가장 먼 끝에 온전한 모습으로 수출되지 않았다. 대신 현지 문화가 받아들여 다시 쓸 수 있는 요소들을 옮겼다. 요소들은 흡수되며 현지의 미술, 도시, 화폐를 바꾸었다. 동시에 현지 문화는 그 요소들에 자기 내용과 뜻을 담아 바꾸었다. 구성체와 구성체가 오래 접촉한 끝에 서로를 빚은 것이다.
뒤에서도 반복해서 만날 현상이다. 십자군 시대 유럽과 이슬람 세계가 주고받은 영향은 제10편에서, 식민지 엘리트가 유럽의 언어로 식민 지배를 반박한 일은 제19편에서 다룬다. 모두 오랜 접촉 속에서 구성체가 거꾸로 다시 빚어지는 연속된 사례다. 메난드로스는 유라시아 역사에서 그 현상의 초기 본보기였다.
8. 군주의 신격화—폴리스 구성체의 역방향 운동
헬레니즘 시대에는 깊은 정치적 혁신이 있었다. 그러나 방향은 그리스 폴리스 전통과 반대였다. 군주 신격화의 제도화였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원래 신에게 바치던 영예를 얼마나 줄 수 있을까? 경계가 움직인 것은 알렉산드로스 이후만이 아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 도시들이 뤼산드로스에게 제사를 지내고 찬가를 불렀으며, 사모스 사람들은 헤라 축제를 뤼산드로스 축제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이름이 축제 달력 안으로 들어갈 때, 영예를 주는 주체는 여전히 도시였다. 뒤에 왕조는 영예를 더 길게 이었다. 한 번의 구원이나 승리를 기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음 해와 다음 왕까지 잇는 것이었다.
헬레니즘 시대는 이런 영예를 왕조의 일상에 연결했다.
가장 이른 전환은 알렉산드로스 자신에게서 나타났다. 신으로 존숭받으려 했지만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기원전 331년 이집트 시와 오아시스에서 아몬의 사제에게 ‘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얻었다. 이집트에서 신의 아들로 인정받을 근거였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지위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같은 신성한 지위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자 저항을 만났다. 칼리스테네스의 프로스키네시스 거부는 그 표지였다. 사후에는 그리스 전통이 허용하는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그를 숭배하는 일은 헬레니즘 세계 전체의 중요한 현상이 되었다.
후계자들은 이를 각기 다른 정도로 제도화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멀리 나갔다. 1세는 알렉산드로스 숭배를 알렉산드리아에 정착시켰고, 자신도 신격화되었다. 생전인지 사후인지는 논쟁이 있다. 2세는 죽은 ‘구원자 신’과 재위 중인 왕실을 함께 국가 제사에 넣었다. 2세 때부터 왕조 숭배는 이집트 국가 최고의 제사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와 왕실 숭배를 맡는 연대 표기의 사제가 왕조를 문서의 날짜에 연결했다. 이 형식을 따르는 문서는 날짜에 왕의 재위 연도와 연대 표기에 쓰이는 사제의 이름을 함께 적었다. 아르시노에 2세도 사후 신격화되었고, 그녀의 숭배 중심은 이집트의 새 주에서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에서는 조금 늦고 약했다. 셀레우코스 1세와 안티오코스 1세는 주로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기원전 193년 안티오코스 3세는 기존의 국왕 숭배 옆에 왕비 라오디케 숭배를 붙였다. 그는 편지로 고위 여사제를 추가할 것을 요구했다. 여사제의 금관에는 왕비의 초상이 있어야 했고, 여사제의 이름은 고위 사제들 이름 다음에 놓여 계약의 연대 표기에 들어가야 했다. 금관에는 왕비의 얼굴이, 문서에는 사제의 이름이 들어갔다. 왕조는 축제에만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떤 일에 날짜를 붙이는 방식에도 들어갔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달랐다. 마케도니아 본토에서는 정례화된 왕조 숭배가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다. 전통 속 왕은 ‘제1시민’이자 군대의 지도자이지 신격화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 폴리스들은 때로 이 왕조의 왕에게 일시적인 신성한 영예를 주었다. ‘도시 공격자’라는 별명을 가진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는 기원전 307년부터 290년 사이 아테네에서 두드러진 영예를 받았다. 초기 헬레니즘 군주 신격화의 상징적인 사례다. 아테네인들은 그를 구원자 신, 소테르로 제사 지냈고, 아테나의 신전인 파르테논에 머물게 했으며, ‘살아 있는 신’이라 불렀다.
이 사례는 중요한 점을 드러낸다. 왕이 신격화를 요구하고 도시가 강제로 받아들이는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도시가 먼저 신격화로 정치적 의존을 표현하고 왕의 은혜를 얻으려 했다. 왕은 이를 정당성의 근거로 받아들였다. 양방향 과정이었다.
헬레니즘 연구자 앙겔로스 하니오티스는 이 점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군주 신격화는 단순히 왕을 신으로 여기는 일이 아니다. 생전의 왕을 테오스, 곧 신이라 부르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다. 더 흔한 것은 ‘신성한 영예’였다. 전담 사제, 전용 제사, 특별한 축일과 신전. 왕은 상징적으로 신에게 가까워졌지만 반드시 올림포스 신들과 같은 본질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죽은 왕은 정식으로 신격화되기 더 쉬웠다. 살아 있는 왕이 주로 누린 것은 완전한 신격보다 신성한 영예였다.
구별이 중요하다. 헬레니즘의 군주 신격화가 ‘왕이 곧 신’인 동방 전제 방식으로 단순히 돌아간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향성은 있었지만 혼합이었다. 영웅 숭배, 특별한 영예, 신전 제사라는 그리스 종교의 자원을 살아 있는 왕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대상에 적용했다.
혼합이라고 해도 폴리스 전통에서 크게 거슬러 간 것은 분명하다. 시민공동체가 최고의 정치 권위를 갖는 것이 폴리스 전통의 중심이었다. 군주 신격화는 그 권위를 공동체에서 군주 본인에게 옮겼다. 생전에 완전한 신이 아니더라도, 신에게나 바칠 제사와 영예를 누리는 왕의 정치 권위에는 신성함이 붙는다. 필멸의 시민공동체는 가질 수 없는 신성함이었다.
상전이의 부분적 후퇴다.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상전이는 그리스 폴리스에서 시민공동체가 최고 권위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 권위를 신격화된 군주에게 거두어들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시기의 ‘정치적 구성체 중심에 있는 인간’이 일부 뒤로 밀리고, ‘중심에 있는 신격화된 통치자’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분적 후퇴이지 전면적 후퇴는 아니었다. 폴리스 구성체의 많은 요소가 남았다.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시민권 제도가 있는 도시였다. 안티오키아와 셀레우케이아에도 시민총회와 평의회가 있었다. 모든 헬레니즘 도시에 그리스식 법이 작동했다. 군주 신격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도 도시 차원에서 시민공동체는 존재했고, 시민 신분에는 법적 의미가 있었다.
가장 깊은 긴장이 여기 있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제국 규모에서는 신격화된 군주가 최고 권위였다. 도시 규모에서는 시민공동체가 여전히 의미 있는 정치적 실체였다. 두 층위는 공존했다. 완전히 충돌하지도, 완전히 화합하지도 않았다. 도시에 산다고 곧 그 도시의 시민은 아니다. 시민 자격이 있는 사람은 동시에 왕조의 통치를 받을 수도 있다. 도시 안에서는 한 묶음의 권리를 갖고, 궁정 앞에서는 다른 묶음의 의무를 진다. 두 층위가 한 사람에게 겹쳐 있어도 자동으로 하나의 신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국 규모에서 폴리스의 요소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헬레니즘의 답은 이 이중 구조였다. 완전한 답은 아니었다. 폴리스 구성체는 제국 차원에서 취소되고 도시 차원에만 남았다. 그래도 하나의 답이었고 상당히 오래 지속된 답이었다. 로마에서는 지방공동체와 더 큰 통치 범위의 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진다. 로마는 시민권을 넓히면서 누가 그 공통된 지위를 가질 수 있는지를 바꾸어 간다. 공화정과 제정을 가로지르는 긴 길이다. 제3편은 먼저 공화정에서 시작한다.
9. 구성체는 수출할 수 있는가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리스 폴리스의 구성체는 수출할 수 있는가?
헬레니즘 시대 삼백 년의 실험을 거치면 층위를 나누어 답할 수 있다.
온전한 폴리스 구성체는 지도를 넓히는 것만으로 그대로 수출되지 않는다. 시민총회, 추첨 공직, 직접 참여, 시민군을 함께 묶으려면 그리스 이름 몇 개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함께 결정하고 그 결과를 함께 떠안을 정치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헬레니즘 군주들은 제국 전체를 하나의 확대된 폴리스로 조직하지 않았다. 도시들을 왕국에 연결했다. 제국의 전쟁, 왕위 계승, 통치의 중심은 여전히 궁정에 있었다.
일부 요소는 수출할 수 있다. 엘리트의 공통어인 그리스어, 그리스식 도시계획과 법, 법적 개념으로서의 시민 신분, 그리스식 관리 체계. 헬레니즘 국가들은 이를 널리 남겨 썼다. 지중해에서 인더스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화의 표지가 되었다. 옮겨 간 요소들은 대개 현지 요소와 섞여 새로운 혼합체를 낳았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아이하눔이 그 예다.
가장 깊은 상전이는 지워지지 않았다. 이 시리즈의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상전이는 그리스 폴리스에서 제한된 제도적 형태를 얻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왕의 권위가 그 표현을 일부 밀어냈다. 도시에는 여전히 시민 신분과 법이 있었고, 교실과 책에서는 이성, 덕,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계속 논의되었다. 도시가 자기 운명을 결정할 권한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자리를 묻는 언어까지 함께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깎기와 구성의 주기가 드러내는 깊은 발견이다. 상전이가 한 번 일어나면 구체적인 표현은 바뀌고 억압되고 뒤틀릴 수 있다. 그러나 핵심 명제가 한 번 말해진 뒤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모습으로 문화 속을 계속 이동한다. 이 틀로 헬레니즘 시대를 돌아보면 제도의 후퇴와 문화의 확산이 함께 일어났다. 그리스 철학의 말과 질문이 그리스어와 함께 지중해에서 인더스까지 퍼졌다. 궁정은 도시의 권력을 제한했지만, 새로운 도시와 길과 통치망을 따라 그리스어가 더 멀리 가도록 하기도 했다.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와, 그 말들로 인간의 자리를 계속 물을 수 있는가는 같은 문제가 아니다.
퍼져 나간 것은 이성과 덕, 좋은 삶에 관한 논의였고, 시민 신분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언어였다. 이미 완성되어 모두가 동의하는 현대적 존엄과 권리의 선언은 아니었다. 로마의 저자들은 그리스 철학을 빌려 다시 썼고,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 질문 가운데 일부를 자기 신학으로 가져갔다. 서로 다른 시대에 그리스 저작들은 시리아어와 아랍어로도 번역되었고, 새로운 독자들이 그것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 길들을 지난 것은 글자 하나 바뀌지 않는 선언이 아니라, 다시 사용하고 다시 논쟁할 수 있는 사유의 자원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적 의미는 어쩌면 여기에 있다. 그리스 문명의 끝이 아니라 확산이다. 이 시리즈의 언어로 말하면 상전이의 죽음도 아니다. 폴리스의 정치적 실천은 왕권에 압축되었지만, 그와 연결된 개념과 문헌, 교육 전통은 더 넓은 세계로 들어갔다. 대가 없는 확산은 아니었다. 제도적 참여가 줄어들 수 있었고, 퍼져 나간 언어를 통치자가 다시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뒤에 온 사람들은 그 자원을 집어 들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계속 물을 수 있었다.
다음 큰 시도는 로마다. 제국 규모에서 ‘시민’과 ‘광대한 영토’를 어떻게 함께 둘 것인가. 헬레니즘 국가들이 풀지 못한 문제에 로마는 시민권 확대라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아테네의 시민은 폴리스 내부의 소수였다. 먼저 시간을 서기 212년으로 옮겨 보자. 이미 제정 시대다. 카라칼라의 칙령은 제국 안의 거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한 도시의 지위가 거의 제국 전체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음 편은 먼저 공화정으로 시계를 되돌린다. 그 확장의 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보기 위해서다.
다음 편: 로마 공화정—한 점에 의존하지 않는 구성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