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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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유라시아 제왕 시리즈 — 제01편 · 총 22편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상전이에 내놓은 두 개의 첫 답안

Han Qin (秦汉)·2026년

중국의 제왕들을 다룬 연작은 요·순·우에서 출발했다. 중국의 정치적 서사에서 선양은 세계가 처음 질서를 얻는 자리에 놓여 있다. 권력을 물려주는 그 질서는 이미 완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닫힌 듯 보이는 구성체는 이후 이천 년 동안 중국인이 정치를 상상할 때 벗어나기 어려운 중력장을 만들었다.

유라시아 연작은 그리스에서 출발한다. 그리스가 대륙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그곳부터 차례로 훑겠다는 뜻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보다 오래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시대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 유역에 초기 국가들이 들어선 때보다 훨씬 뒤에 왔다. 그리스를 첫 장에 놓는 까닭은 다른 데 있다.

그리스에서는 왕도, 사제도, 특정 가문도 아닌 시민을 핵심에 놓는 정치적 구성체가 차츰 모습을 갖추었다. 여기서 구성체란 사람과 제도, 자격과 자원의 배분이 맞물려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시민은 추상적인 신분이었다. 어떤 가문의 후손이라서, 신에게 선택받아서, 남다른 개인적 덕성이 있어서 정치적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출생, 나이, 성별, 재산, 등록이라는 자격 요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권리를 가졌다. 그 조건을 충족한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정치적으로 동등했다.

지금 읽으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부터 4세기까지의 유라시아로 눈을 돌리면 정치에는 여러 얼굴이 있었다. 페르시아, 이집트, 신바빌로니아의 왕권. 서주의 예악 질서에서 춘추시대 제후들의 패권 다툼으로 넘어가는 중국. 인도의 크샤트리아 귀족과 밧지인들의 집회.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에서는 정치가 한 가지 구체적인 물음에도 답해야 했다. 시민 명부에 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은 명령을 듣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논쟁하고, 투표하고, 공동체의 일을 결정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시민도 공동체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다.

더 정확하게는 제도로 실행했다. 철학자들도 시민을 사유했지만 그리스의 특별함은 철학이 아니라 제도에 있었다. 수백 개의 폴리스 가운데 상당수가 시민을 명부에 올리고, 수를 세고, 투표에 부를 수 있는 구체적인 법적 신분으로 만들었다. 이 신분은 서구 정치 전통 전체의 씨앗이 되었다. 이천여 년 뒤 근대 정치가 시민을 말할 때도 이 도시들로 돌아온다. 누가 들어올 자격이 있으며, 들어온 뒤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이 연작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스는 인간 자체를 정치적 구성체의 중심에 놓는 상전이의 출발점이었다. 중국 연작에서는 일곱 번째 글부터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숨은 중심축을 명시했다. 유라시아 연작에서는 첫 글부터 그 축을 드러내려 한다.

그런데 상전이는 시작하자마자 갈라졌다. 그리스에는 폴리스가 하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백 개 있었다. 저마다 세 가지 물음에 답했다. 누가 시민인가. 시민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시민은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 그 가운데 두 도시가 가장 완결되고, 가장 대조적이며, 가장 오래 영향을 남긴 답안을 내놓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다.

두 도시의 대립은 흔히 민주정과 과두정의 대립으로 설명된다. 틀리지는 않지만 얕다. 그리스에는 다른 민주정 도시도, 과두정 도시도 수없이 있었다. 그런데 왜 이 두 도시가 이후 이천 년 동안 거듭 소환되는 비교의 원형이 되었을까. 정치 제도만 달랐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도시는 인간을 목적으로 놓는 동일한 상전이를 서로 다르게 읽었다. 아테네는 시민을 참여할 권리로 이해했다. 공적인 사안에 발언하고, 표를 던지고, 결정하는 것이 시민 자격의 핵심이었다. 스파르타는 시민을 성원 자격으로 이해했다. 강하게 결속된 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사람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둘 다 시민을 구성체의 중심에 놓았다. 거기서 정반대의 형태로 나아갔다. 하나는 개방적이고 유동적이며 시끄럽고 불안정해졌다. 다른 하나는 폐쇄적이고 치밀하며 조용하고 경직되었다. 하나는 팽창하면서 잔여를 흡수했고, 다른 하나는 배제하면서 잔여를 억눌렀다. 잔여란 그 질서가 자신의 언어와 자격 조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이 글이 살펴볼 것은 두 형태가 세 세기에 걸쳐 펼쳐진 과정과, 각각 끝에 이르는 방식이다.

1. 상전이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리스 폴리스의 형성기는 대체로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까지다. 이백 년 동안 그리스반도, 에게해의 섬들, 소아시아 해안,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흑해 연안에 수백 개의 독립적인 정치 공동체가 생겼다. 하나하나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보통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이 살았다. 기원전 5세기 전성기의 아테네는 총인구가 37만에서 4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그것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극단적인 최대치였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훨씬 작았다.

그 크기 자체가 상전이의 물질적 토대였다. 수천 명이 사는 도시라면 성인 남성은 다른 성인 남성을 직접 알거나 적어도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치는 추상적이지 않았다. 오늘 표를 던져 결정한 일이 내일 이웃이나 인척,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삶에 닿는다. 이 정도 규모에서는 직접 모여 결정하는 민주정이 실제로 가능한 운영 방식이었다. 대표제는 규모의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이다.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한자리에 모일 수 없으면 대표를 뽑아 권리를 행사한다. 그리스는 아직 그 문제를 겪지 않았으므로 그 해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같은 시대 근동에도 수천 명 규모의 도시들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시민이라는 관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규모라는 조건 위에 다른 조건이 겹쳤다. 중장보병의 등장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전쟁의 주도적인 방식은 귀족 기병에서 중장보병의 밀집대형으로 바뀌었다. 중장보병은 시민병이었다. 청동 투구와 갑옷, 큰 방패, 창, 짧은 칼을 스스로 마련하고 촘촘한 대열 안에 섰다. 힘은 규율과 협동에서 나왔다. 자신의 방패는 자기 몸뿐 아니라 왼쪽 동료의 몸도 지켰다. 한 사람이 뒤로 물러나면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전열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누구의 자리도 다른 사람들의 자리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몸으로 겪은 상호 의존은 도시로 돌아오면 정치적 요구가 된다. 전장에서 우리가 동등하고 내 목숨이 당신의 목숨만큼 중요하다면, 공동체의 일을 결정할 때 우리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이백 년에 걸쳐 차츰 답했다. 정치생활에서도 우리는 동등하다. 중장보병으로 싸울 수 있는 성인 자유민 남성, 곧 장비를 마련할 만큼 재산이 있는 농민과 장인들이 정치 공동체를 이루었다. 처음에는 농민의 상층부에 국한될 만큼 경계가 좁았다. 이후 어떤 도시에서는 경계가 넓어져 아테네는 마침내 시민 혈통의 자격 요건을 갖춘 성인 남성을 포함했고, 가난한 사람도 재산이 적다는 이유로 참여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다른 도시에서는 경계가 엄격히 굳어졌다. 스파르타는 시민 자격을 더 이상 넓어지지 않는 작은 집단 안에 묶었다. 경계가 어디에 있든, 그 안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핵심 명제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상전이의 초기 형태였다. 세련되지도, 보편적이지도, 철저하지도 않았다. 노예, 여성, 외국인, 어린이는 모두 제외되었다. 사회 전체로 보면 소수인 자유민 남성 시민들이 자기들의 일을 대단히 높은 밀도로 직접 통치했다. 그럼에도 이후 이천 년 동안 거듭 돌아오게 될 명제는 이미 들어 있었다. 정치적 권위는 통치받는 사람들의 동의에 근거해야 하며, 그 사람들 자신이 결정할 권리를 가진 주체라는 명제다.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여기서 출발했다. 그런 다음 서로 갈라졌다.

2. 아테네: 시민의 핵심은 참여할 권리다

아테네의 시민 제도는 한 번에 발명되지 않았다. 여러 개혁이 쌓여 만들어졌다. 그 개혁들이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도 아니었다.

첫 번째 큰 개혁은 기원전 594년 솔론의 개혁이었다. 아테네는 내전 직전에 있었다. 귀족들이 토지 대부분을 차지했고, 평민은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렸으며, 사회적 긴장은 폭발을 앞두고 있었다. 솔론은 부채를 없애고 사람의 몸을 담보로 삼는 대출을 금지했다. 시민을 재산에 따라 네 계층으로 나누기도 했다. 펜타코시오메딤노이, 히페이스, 제우기타이, 테테스였다. 최상층은 가장 무거운 정치적·군사적 책임을 지는 대신 가장 높은 관직을 맡았다. 최하층 테테스의 정치적 권리는 제한적이었지만, 그들도 시민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민회에 참여하고 배심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핵심적인 혁신은 평등이 아니었다. 솔론은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시민인가’와 ‘어떤 관직을 맡을 수 있는가’를 서로 다른 문제로 나눈 것이었다. 자유롭게 태어난 아테네 남성은 모두 시민이고, 그 위에서 재산 계층에 따라 다른 정치적 역할을 맡았다. 시민이라는 자격 자체가 그 사람이 실제로 행사하는 권력의 크기와 분리되었다. 추상적인 법적 범주가 된 것이다. 작은 구분처럼 보이지만 구조적으로는 혁명적이었다. 혈연과 귀족 관계에 묶여 있던 정치 공동체가 법적 신분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큰 개혁은 기원전 508~507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었다. 솔론이 시민 자격을 따로 세웠다면 클레이스테네스는 그것을 조직했다. 원래 아테네에는 혈연에 따라 구성되는 네 부족이 있었다. 그는 이 구조를 새로운 행정 지리로 대체했다. 아티카 전역을 해안, 내륙, 도시 주변이라는 세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을 마을이나 지역 단위인 데모스로 나누었다. 세 구역에서 데모스 집단을 하나씩 가져와 섞음으로써 열 개의 새로운 부족을 만들었다.

목표는 분명했다. 혈연 공동체를 흩어놓고 지리적으로 다시 섞는 것이었다. 이제 시민은 자신이 사는 데모스에 등록되었다. 같은 부족에 속해 있어도 가문의 배경은 전혀 다를 수 있었다. 정치적 신분을 밝히는 말이 ‘나는 어느 가문 사람이다’에서 ‘나는 어느 데모스에 등록되어 있다’로 바뀌었다. 씨족은 더 이상 시민을 묶는 골격이 아니었다. 데모스가 새로운 행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열 부족은 각각 쉰 명을 내어 500인 평의회를 구성했다. 민회를 뒷받침하는 상설 기관이었다.

이 개혁의 더 깊은 의미는 시민 자격을 행정이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데모스에는 명부가 있다. 명부는 확인할 수 있다. 자격을 줄 수도, 취소할 수도 있다. 시민이라는 주장을 더 이상 가문의 기억에만 맡길 필요가 없었다. 아테네는 공적 기관을 통해 신분을 검증할 수 있는 시민 등록 체계를 갖게 되었다.

세 번째 큰 개혁은 기원전 451~450년 페리클레스의 시민권법이었다. 시민 자격은 부모 양쪽이 모두 아테네 시민인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그전에는 아버지가 아테네 시민이고 어머니가 자유민이면 되었다. 어머니가 외국인이어도 자식은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 역시 아테네 시민 신분이어야 했다. 이번에는 문을 좁히는 움직임이었다.

왜 좁혔을까. 이천 년 넘게 논쟁해온 문제다. 가장 흔한 설명은 정치경제적이다. 당시 아테네는 이미 해상 제국이었다. 시민이 된다는 것은 제국의 자원, 곧 국가의 분배, 정치 참여 수당, 해외 식민지의 토지를 함께 누리는 것을 뜻했다. 나눠 가질 사람을 엄격히 제한해야 했다는 것이다. 더 깊은 구조를 지적하는 설명도 있다. 시민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폴리스는 누가 시민인지를 명확히 정해야 한다. 외국인 거주자가 많이 들어오는 도시에서 자격의 경계까지 흐려지면 시민이라는 신분 자체의 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

어떤 이유가 더 컸든 결과는 같았다. 시민 자격은 더 혈통 중심적이고, 더 폐쇄적이고, 더 배타적으로 바뀌었다. 하나의 상전이 안에서 반대 방향의 운동이 일어났다. 참여할 권리의 실질을 지키기 위해 성원이 되는 경계를 조인 것이다.

세 개혁이 쌓인 뒤에도 아테네의 제도는 계속 자랐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면 『아테네인의 정체』가 더 촘촘한 모습을 남긴다. 그 기록을 따라가면 한 사람이 어떻게 시민 공동체에 들어서고, 그 작동에 참여하는지 보인다. 시민 자격은 여전히 부모 양쪽이 아테네 시민인 것을 조건으로 삼았다. 청년은 열여덟 살에 소속 데모스에서 나이, 자유로운 출생, 부모의 신분을 심사받아 등록했다. 통과한 뒤에는 이 년 동안 청년 훈련과 수비 임무를 거쳤다. 배심원과 대부분의 관직은 서른 살부터 가능했다. 시민 수는 크게 변동했다. 전쟁이 시작된 기원전 431년에는 성인 남성 시민이 약 6만 명이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끝날 때는 약 2만 5천 명으로 줄었고, 4세기에는 약 3만 명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참여는 세 층위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민회였다. 성인 남성 시민이 직접 참석해 전쟁, 조약, 그 밖의 공적인 사안을 결정했다. 『아테네인의 정체』가 그린 4세기의 제도에서는 열 차례의 의장단 임기마다 네 번씩, 한 해 약 마흔 차례 민회를 열었다. 참석 수당도 생겼다. 기원전 403년 민주정이 복구된 뒤 차츰 더해진 제도였다. 둘째는 민중 법정이었다. 매년 시민 가운데 6천 명을 추첨해 배심원 후보군을 만들었으며, 큰 사건에서는 수백 명이 하나의 배심단을 이루었다. 셋째는 행정직이었다. 대부분의 공직은 추첨으로 배정했고, 임기는 보통 일 년이며 연임할 수 없었다.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한 일부 자리는 선거로 뽑았다. 가장 중요한 예가 열 명의 장군이었다.

이 제도의 핵심은 정치 참여가 소수 시민의 특권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시민이 일생에 한 번쯤은 겪으리라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겐스 한센의 연구에 따르면 완전한 시민이 2만~3만 명일 경우, 평범한 아테네 남성도 서른에서 예순까지 삼십 년 동안 적어도 한 차례 평의회 의원을 맡고, 한 차례 배심원으로 일하고, 여러 차례 추첨 공직을 맡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정치는 관람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리에 앉고, 책임을 떠맡는 일이었다.

이것이 아테네가 읽어낸 ‘인간은 목적이다’의 뜻이다. 인간이 목적이라는 말은 시민이 자기 공동체의 일에 직접 참여해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는 뜻이었다. 핵심은 신분을 지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신분으로 무엇에 참여할 수 있느냐였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대가가 있었다.

첫 번째 대가는 배제였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의 총인구 37만~40만 명 가운데 완전한 정치적 참여자는 약 6만 명, 15~16퍼센트였다. 나머지 약 85퍼센트인 시민 신분의 여성, 미성년자, 메토이코이라 불린 거류 외국인, 노예는 정치 참여에서 빠졌다. 아테네는 넓으면서 좁았다. 시민 공동체 안에서는 참여가 매우 넓었지만, 그 공동체 자체가 전체 사회의 소수에 불과했다. 넓음과 좁음은 한 구조의 두 면이었다.

두 번째 대가는 불안정성이었다. 민회는 큰 결정을 내릴 수도, 자기 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 결정은 곧바로 도시 전체의 동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마음을 돌린 뒤에는 이미 떠난 명령을 쫓아가야 했다. 기원전 427년 미틸레네 논쟁이 그 예다. 민회는 처음에 미틸레네의 남성을 모두 죽이고 여성과 아이를 노예로 팔기로 했다. 다음 날 다시 모여 결정을 뒤집고, 첫 배를 뒤쫓을 두 번째 배를 보냈다. 이 이야기의 긴장은 두 번째 배가 학살이 시작되기 전에 미틸레네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데 있다. 첫 번째 배는 이미 도착했고 명령도 읽힌 뒤였다. 두 번째 배는 그제야 철회 결정을 전했다. 이번에는 제때 도착했다. 그러나 언제나 제때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대가는 참여할 권리 뒤에 놓인 제국의 청구서였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민주정과 제국은 서로를 지탱했다. 식민지의 토지, 공납 수입, 해군의 일자리가 시민의 생활을 제국에 연결했다. 배심원의 일당, 노를 젓는 사람의 임금, 함대의 운용에는 모두 돈이 들었다. 이 규모의 지출을 유지하려면 그에 맞는 수입도 유지해야 했다. 도시 안의 참여권은 그렇게 도시 밖 동맹국의 탈퇴를 막는 질서와 얽혔다.

세 가지 대가가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한데 겹쳤다. 아테네는 재앙으로 향했다.

3. 소크라테스의 죽음: 구성체와 잔여의 정면충돌

그 재앙을 따라가기 전에, 재앙이 끝나갈 무렵에 일어난 한 사건을 먼저 보자.

기원전 399년의 아테네는 이미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했고, 30인 과두정의 짧은 지배를 겪었으며, 민주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패전은 404년, 민주정의 복구는 403년이었다. 도시는 다시 일어서야 했고 상처는 깊었으며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그때 일흔 살의 소크라테스가 기소되었다. 혐의는 두 가지였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 도시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적인 것들을 믿는다는 것. 고발인은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이라는 세 시민이었다.

재판은 아테네 법정의 통상적인 절차를 따랐다. 정확한 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수백 명의 시민이 배심단을 이루었다. 먼저 유무죄를 표결하고, 유죄가 나오면 양쪽이 제시한 형벌 가운데 하나를 골랐다. 소크라테스는 유죄였다. 고발인들은 사형을 요구했다. 그는 먼저 반어적으로 프리타네이온에서 평생 식사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올림픽 우승자나 큰 공을 세운 시민에게 주는 명예였다. 그 뒤에야 친구들의 지원으로 벌금을 제안했지만, 배심단은 죽음을 택했다.

서구는 이 일을 이천 년 넘게 이야기해왔다. 민주정이 철학자를 재판했다. 다수가 진리를 억눌렀다. 아테네가 가장 위대한 아들을 죽였다. 이 비극적 서사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 읽으면 사건은 도덕 이야기로 단순해진다. 기존의 틀을 끌로 깎아 열고, 새로운 구성체가 서고, 그 안에서 다시 잔여가 생기는 주기로 보면 다른 사건이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테네 구성체와 그 내부의 잔여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아테네의 핵심 작동 원리는 시민 공동체가 최고 권위라는 것이었다. 민회가 결정한 것은 폴리스의 의지였고, 시민 법정이 내린 것은 폴리스가 인정하는 사법적 판결이었다. 이 장치는 대개 잘 작동했다. 수백 년 동안 정치적 분쟁을 처리하고 수많은 법률적·군사적 결정을 내렸다. 정당성은 넓은 참여에서 왔다. 어느 군주가 혼자 정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정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도시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숨어 있는 전제가 있었다. 공적 사안을 판단하는 각 시민이 공동체의 윤리적 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다. 개별 정책에서는 의견이 달라도 된다. 다만 무엇을 옳다고 할지에 관한 공동의 틀 안에서 판단해야 한다. 누군가 그 바깥으로 나가 공동체가 이해할 수 없는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은 구성체 안에 있으면서도 구성체에 들어맞지 않는 잔여가 된다.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런 잔여였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혐의는 날마다 이어진 질문들과 얽혀 있다. 젊은이들은 그가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캐묻는 모습을 듣고 자신들도 따라 했다. 말문이 막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원망했다. 하지만 그는 질문을 신이 자신에게 맡긴 소명으로 이야기했다. 델포이의 신탁도, 어린 시절부터 어떤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가로막던 신적인 신호인 다이모니온도 그의 변론에 등장한다. 그는 가정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질문을 멈추는 것이 석방의 조건이라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여기서 구성체와 잔여가 충돌한다. 시민 공동체의 판결이 한 사람이 포기할 수 없는 신성한 소명을 만난다. 양심이라는 말로 이 충돌을 이해한다면 물음은 여기에 있다. 도시는 한 사람을 판결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끝까지 지킬 가치가 있다고 여겨야 하는지도 대신 결정할 권리가 있는가.

아테네의 제도는 소크라테스를 재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의 표결로 그가 질문을 버리게 하지는 못했다. 형을 정하는 자리에는 벌금이라는 다른 안도 올라와 있었다. 배심단이 끝내 고른 것은 사형이었다. 구성체는 질문한 사람을 처리했다. 질문은 처리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깊은 역설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었지만 도시의 판결이 마지막 판결이 되지는 않았다. 그의 죽음은 후세에 날카로운 모습을 남겼다. 개인은 도덕적으로 옳으면서 정치적으로 패배할 수 있다. 도시는 한 사람의 삶을 끝낼 수 있지만, 그 판결을 향한 질문까지 끝낼 수는 없다. 판결에 복종하면서도 그 판결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점은 거부할 수 있다. 친구들이 마련한 탈옥을 거절하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는 복종과 동의를 갈라놓았다.

이 분리는 서구 정치사상의 핵심 구조가 되었다. 개인의 양심은 정치적 권위와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 자기 기준으로 권력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한 지적 태도가 될 수 있다.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나누는 기독교의 말, 자기 이성으로 판단할 권리를 주장한 계몽주의,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명제. 그 모든 것의 초기 씨앗이 여기에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구성체의 잔여였다. 구성체는 그를 없앴다. 그러나 없애는 행위 자체가 그 잔여의 가치를 증폭했다. 죽음은 이천 년 동안 개인의 양심이 정치적 권위에 맞서는 원형의 이야기가 되었다. 억눌린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담론 속에서 더 강한 형태로 돌아왔다. 중국 연작에서 여러 차례 나타났던 주제가 유라시아의 첫 글에 이미 나타나는 것이다.

시점도 중요하다. 399년의 아테네는 패전, 과두정의 정변, 민주정의 복구라는 격변을 막 통과했다. 공동체의 결속을 해친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강하게 대응한 것은 상처 입은 도시의 반응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450년, 페리클레스 시대의 번영하고 자신감 있는 아테네에 있었다면 기소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성체는 자신감이 있을 때 더 많은 잔여를 견딘다. 상처를 입으면 더 경직되고, 더 배타적이고, 더 폭력적으로 변한다. 모든 구성체에 공통된 성질이다.

4. 스파르타: 시민의 핵심은 성원으로 남는 것이다

스파르타는 다른 길로 갔다.

시민 제도의 중심은 정치 참여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 자격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스파르타 시민인 스파르티아타이는 호모이오이, 곧 ‘동등한 사람들’이라고도 불렸다. 그들의 자격은 한 번 주어지면 평생 유효한 법적 지위가 아니었다. 여러 조건을 계속 함께 충족해야 하는 복합적인 자격이었다.

첫째, 부모 모두가 스파르타 시민인 가정에서 태어나야 했다. 둘째, 일곱 살에 시작해 스무 살까지 이어지는 엄격한 군사교육인 아고게를 모두 마쳐야 했다. 셋째, 서른 살 전에 공동 식사 집단인 시시티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넷째, 그 집단에 매달 정해진 식량을 계속 내야 했다. 곡물, 포도주, 치즈, 올리브, 고기 같은 것들이었다. 다섯째, 매일 공동 식사에 참여하고 군사훈련을 받으며 중장보병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어느 하나라도 실패하면 시민 자격을 잃었다. 교육을 중도에 그만두면 잃는다. 공동 식사 집단이 받아주지 않아도 잃는다. 가문의 토지가 부족해지거나 빼앗겨 식량 분담을 낼 수 없게 되어도 잃는다. 이렇게 내려간 사람들을 히포메이오네스, ‘열등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여전히 자유인이었고 스파르타에 살았다. 그러나 더 이상 동등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없고 군사 지휘도 맡을 수 없었다.

매우 정밀한 장치다. 시민 자격을 고정된 지위에서 움직이는 과정으로 바꾸어놓는다. 시민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민으로 ‘계속 있어야’ 한다. 그 신분을 이루는 조건들을 더 이상 모두 유지하지 못하는 날, 완전한 시민이기를 멈춘다.

정치 제도 전체도 시민 공동체의 내부 결속을 지키도록 조직되었다. 왕은 둘이었다. 두 왕가가 세습하며 서로를 견제했고, 전쟁에서는 지휘관이 되었다. 원로원인 게루시아는 예순 살 이상의 원로 스물여덟 명과 두 왕으로 이루어졌다. 원로 스물여덟 명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다섯 명의 에포로스, 곧 감독관은 시민들 가운데서 매년 선출되었다. 일 년 동안 폭넓은 행정·사법·감독 권한을 행사했으며 왕을 기소할 수도 있었다. 완전한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도 있었지만 아테네의 민회보다 권한이 훨씬 작았다. 주된 역할은 원로원과 감독관들이 내놓은 제안을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것이었다.

혼합정체였다. 왕에게는 군주정의 요소가, 원로원에는 과두정의 요소가, 민회와 감독관에는 민주정의 요소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집단이 권력을 나누는 일이 정체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감독관과 원로원, 재산 제도의 결함도 비판했다. 혼합은 안정을 지탱할 수 있지만 제도를 실패에서 면제하지는 않는다. 스파르타의 정치 구조는 기원전 7세기에서 4세기까지 거의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리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안정성이었다.

다만 그 안정을 떠받치는 바닥이 몹시 좁았다.

완전한 시민은 처음부터 적었고 계속 줄었다. 페르시아전쟁이 벌어진 기원전 480년에는 약 8천 명이었다.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 무렵의 추정치는 2천 5백~5천 명이다. 정확한 숫자를 놓고 연구자들의 견해가 크게 갈린다. 테베가 스파르타를 꺾은 371년 레욱트라 전투 때에는 완전한 시민이 천 명도 되지 않았다. 기원전 480년부터 371년까지, 한 세기 남짓한 사이에 완전한 시민의 수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스파르타사의 가장 깊은 구조적 문제다. 현대 연구는 서로를 배제하기보다 보완하는 몇 가지 설명을 내놓았다.

첫째는 전쟁의 소모다. 완전한 시민들이 많은 전투 임무를 떠맡았고, 한 전투마다 손실이 났으며, 그것이 오래 쌓였다. 둘째는 자연재해다. 기원전 464년의 큰 지진으로 많은 스파르타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진은 헤일로타이의 대규모 봉기를 촉발했고, 스파르타는 이를 진압하는 데 거의 십 년을 썼다.

셋째, 구조적으로 가장 깊은 설명은 토지와 부의 집중이다. 처음에 스파르타 시민은 각자 클레로스라는 토지 몫을 배정받았다. 헤일로타이가 경작했고, 그 산출물로 가족을 부양하며 공동 식사의 분담을 냈다. 이론상 토지는 고르게 나뉘어야 했고 시민은 평등해야 했다. 그러나 상속, 혼인 지참금, 증여를 통해 땅은 점차 한쪽으로 모였다. 스티븐 호드킨슨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에는 토지가 소수 가문에 크게 집중되었다. 큰 땅을 가진 집들이 있는 한편, 많은 시민 가정은 공동 식사 비용을 충당할 만큼의 토지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히포메이오네스로 내려갔다.

넷째는 가족이 이어질 조건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젊은 남편들이 동료들과 살면서 아내를 몰래 찾아가는 모습을 기록했다. 가족생활과 공동생활이 서로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그 기록만으로 보통 몇 살에 결혼했는지 알 수는 없으며, 시민 수가 줄어든 이유도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출산 장려와 토지 분배 사이의 모순을 지적했다. 땅이 소수의 손에 집중된 채 자녀만 늘어나면 다음 세대가 시민 자격을 유지하기는 더 어려워질 수 있었다.

설명들을 함께 놓으면 한 가지 공통된 구조가 드러난다. 시민 자격을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높았다. 토지 기반, 가문의 계승, 군사훈련, 공동 식사 분담, 정치적 의무를 동시에 유지해야 했다. 하나만 실패해도 강등이 일어났다. 조건들은 자원이 부족해졌다고 조금씩 줄여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형편이 어려우니 이번 달에는 조금 덜 내겠다고 할 수 없었다. 정해진 몫을 다 내거나, 밖으로 나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테네와의 핵심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아테네의 구성체는 팽창적이었다. 시민 자격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서 더 많은 사람을 담을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 때 문이 좁아졌다고 해도 스파르타에 비하면 훨씬 넓었다. 스파르타의 구성체는 수축적이었다. 조건은 지나치게 엄격했고 새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시민 공동체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팽창해 잔여를 흡수하는 길을 택했다. 스파르타는 배제해 잔여를 억누르는 길을 택했다. 맨 아래에는 헤일로타이를 두었다. 그 위에는 라코니아와 메세니아의 자유민이지만 시민은 아닌 주변 주민, 페리오이코이를 완충층으로 두었다. 맨 위에는 언제나 소수인 완전한 시민의 공동체를 놓았다. 물질적으로는 효율적인 세 층 구조였다. 헤일로타이는 농사를 짓고, 페리오이코이는 상공업과 지방의 통치를 맡고, 시민은 전쟁과 정치만 했다. 그러나 인구 구조로 보면 매우 취약했다. 꼭대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피라미드 전체가 흔들렸다.

시민 신분을 지킬 압력은 모두 시민 개인에게 실렸다. 질서를 유지할 폭력은 모두 헤일로타이에게 실렸다. 고밀도 구성체의 두 얼굴이다. 안의 사람에게는 극단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밖에 놓인 사람에게는 극단적으로 강한 폭력을 가했다.

헤일로타이의 처지는 따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헤일로타이는 노예 상태에 있었다. 다만 그 노예제에는 고유한 규칙이 있었다. 스트라본이 전하는 규정에 따르면 보유자는 그들을 마음대로 해방할 수도, 국외에 팔 수도 없었다. 한 사람을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자유를 돌려주었다는 뜻은 아니다. 해방되지 않은 헤일로타이는 여전히 토지에 묶여 그 땅의 스파르타인 소유자에게 수확의 절반을 바쳐야 했다. 수는 시민보다 훨씬 많았다. 대략 일곱 배에서 열 배였다고 추정된다. 라코니아와, 스파르타가 기원전 8세기에 정복한 메세니아에 집중적으로 살았다.

지배는 지속적인 폭력 위에 서 있었다. 감독관은 해마다 취임하면서 헤일로타이에게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래야 스파르타인이 헤일로타이를 죽여도 종교적으로 살인의 오염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었다. 자국 영토 안에서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국가가 절차로 만들고, 종교적으로 정리하고, 합법화한 극단적인 사례다.

그 폭력을 실행하는 구체적 장치가 크립테이아였다. 스파르타 청년은 성인이 되는 훈련의 일부로 칼을 받아 들고 시골로 나갔다. 너무 강해 보이거나, 너무 영리하거나, 남들을 이끌 자질이 있어 보이는 헤일로타이를 숨어서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지도력이 싹트는 단계에서 없애는 체계적인 장치였다. 저항을 이끌 사람이 헤일로타이 가운데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한 사건을 기록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전공을 세웠으며 자유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헤일로타이에게 선발을 받으라고 알렸다. 약 2천 명이 뽑혔다. 그들은 화관을 쓰고 신전들을 돌며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했다. 얼마 뒤 스파르타인들은 그들을 죽였다. 투키디데스는 그들의 죽음은 남겼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답은 남기지 않았다.

더 불안한 것은 선발의 기준이었다. 투키디데스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먼저 자유를 요구하며 나서는 사람들이 반란에도 가장 쉽게 나설 이들로 여겨졌다. 전공은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오히려 골라내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같은 책에는 브라시다스와 함께 출정한 헤일로타이가 나중에 실제로 자유를 얻고 다른 곳에 정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두 집단의 결말은 달랐다. 잔혹함은 어렵지 않게 보인다. 더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그 선발에서, 왜 감히 자유를 요구한다는 사실이 위험하다는 증거가 되었을까.

깎기와 구성의 주기로 보면, 이것 역시 구성체와 그 내부 잔여의 충돌이다. 헤일로타이는 공동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을 제공하면서도 동등한 사람들의 공동체 밖에 서 있었다. 스파르타는 한 무리의 사람을 해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가 여전히 아래에 눌려 있는 한 균열은 남았다. 피라미드 위층이 원래 자리를 지키려면, 아래층을 원래 자리에 계속 붙들어두어야 했다.

소수의 완전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순도 높은 공동체를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그 공동체의 물질적 토대는 다수에게 가하는 지속적인 폭력이다. 둘은 서로의 전제다. 시민 공동체의 순수한 결속은 밖을 향한 순수한 배제 위에 서 있다. 그것이 스파르타 구성체의 역설이었다.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몇 세기는 갈 수 있었다. 다만 해마다 안을 소모했다. 자격을 감당하지 못해 내려가는 시민이 늘었다. 헤일로타이와 시민의 비율은 시민에게 더 불리해졌다. 질서를 지키려는 폭력이 다음 폭력의 원인이 될 원한을 쌓았다. 변하지 않도록 설계된 구성체였지만, 그 안의 사람도 그 밖의 사람도 계속 변했다. 설계가 변화 자체를 멈출 수는 없었다.

기원전 371년, 완전한 시민이 천 명도 남지 않은 스파르타는 레욱트라에서 테베의 에파메이논다스에게 패했다. 테베는 뒤이어 메세니아의 헤일로타이를 해방했다. 사백 년의 억압이 끝났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패권국 자리에서 떨어졌고 다시 올라서지 못했다. 도시국가로서는 이후에도 몇 세기 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형태로서는 레욱트라의 그날에 끝났다.

5. 펠로폰네소스전쟁: 두 구성체의 정면충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두 형태가 총력으로 맞붙은 것은 기원전 431~404년의 펠로폰네소스전쟁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복잡했다. 도시국가 사이의 분쟁,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동맹의 대치, 아테네 해상 제국의 팽창이 불러온 공포, 코르키라와 포티다이아의 위기, 메가라 법령이 겹쳤다. 투키디데스는 이 사건들 밑에서 더 깊은 구조를 찾았다. 아테네의 힘이 커지자 스파르타가 두려움을 느꼈고, 그것이 전쟁을 피할 수 없게 했다는 설명이었다.

후대 국제관계 연구는 떠오르는 세력과 기존 지위를 지키려는 세력이 어떻게 전쟁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이 물음에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거듭 인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깎기와 구성의 주기로 보면, 이 전쟁의 더 깊은 의미는 ‘힘의 이동’에 있지 않다. 두 정치적 형태가 전쟁으로 서로의 대립을 처리했다는 데 있다.

아테네는 열려 있고 유동적이며 팽창하는 구성체였다. 기원전 5세기, 그 참여의 규모는 해상 제국의 자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델로스동맹의 동맹국 대부분은 가입을 강요받았거나 탈퇴를 금지당했다. 아테네가 자기 시민에게 내세우는 자유와 명백히 모순되었다. 도시 안의 자유와 도시 밖의 복종은 같은 재정·군사 체계에 연결되어 있었다.

스파르타는 닫혀 있고 경직되며 방어적인 구성체였다. 중심에 놓인 일은 기존의 시민 공동체와 지배 질서를 지키는 것이었다. 동맹국이 아테네로 기울고 펠로폰네소스동맹의 결속이 풀리는 것은 그 질서를 위협했다. 현상을 지키려는 군대도 경계를 넘어갔다. 두 구성체가 각자의 세력권 안에서 움직일 때는 공존할 수 있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자기 범위로 끌어들이려 하면 그 조건이 사라졌다.

아테네가 넓어질수록 스파르타는 포위된다고 느꼈다. 바닷길, 그리스 각지의 동맹, 심지어 자신의 동맹국들까지 흔들렸다.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의 개전 결정을 아테네의 힘이 커지는 데 대한 두려움으로 설명했다. 원래의 세계를 지키는 일이 군대를 보내 그 세계를 바꾸는 이유가 되었다.

전쟁의 과정은 굴곡이 많다. 여기서는 두 구성체의 작동 방식이 드러난 몇 가지 지점만 보자.

첫 단계인 기원전 431~421년에는 양쪽이 서로를 소모했지만 결정적인 결과는 없었다. 그때 아테네에 예상하지 못한 재난이 닥쳤다. 430~426년의 역병이었다. 발진티푸스, 천연두, 출혈열 등이 원인으로 제시되었지만 병원체에 관한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정치적 결과는 분명했다. 많은 주민이 죽었고 429년에는 페리클레스도 목숨을 잃었다. 아테네는 가장 뛰어난 지도층을 잃었다. 클레온, 알키비아데스, 니키아스는 저마다 능력이 있었지만 페리클레스처럼 여러 힘을 하나로 묶지는 못했다. 그 뒤의 정치는 더 흔들렸다.

두 번째 단계의 결정적인 사건은 기원전 415~413년 시칠리아 원정이었다. 아테네는 서지중해를 장악하려고 시라쿠사에 대규모 함대를 보냈다. 위험도 예상 수익도 큰 도박이었다. 투키디데스의 서술에는 비극의 긴장이 흐른다. 민회는 알키비아데스의 설득에 움직였다. 출정 전에는 신상이 훼손되는 종교적 불길함이 나타났다. 원정 중에는 알키비아데스를 재판하기 위해 소환했고, 그는 끝내 스파르타로 달아났다.

결과는 참혹했다. 아테네 함대는 시라쿠사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고 육군은 후퇴 중 무너졌다.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처형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포로가 적어도 7천 명은 되었다고 추산했다. 채석장에는 몸을 가릴 곳이 없었다. 낮에는 햇볕이 내리쬐고 가을밤에는 추위가 밀려왔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곳에 뒤엉켰고, 굶주림과 갈증은 끝나지 않았다. 약 칠십 일이 지나자 포로 일부는 팔려갔고, 나머지는 계속 남았다. 이 원정에 떠난 사람은 많았고 돌아온 사람은 적었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 구성체의 약점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두 번째 회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첫 결정 닷새 뒤 민회는 다시 열렸고 니키아스는 여전히 원정을 포기시키려 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설득이 통하지 않자 그는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요구했다. 그 규모를 보고 사람들이 물러서기를 바랐다. 그의 연설은 동시에, 정말 떠나려면 안전을 확보할 만큼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아테네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대한 준비에서 자신감을 얻었고, 더 많은 배와 더 많은 사람을 내주려 했다. 알키비아데스의 독려는 막히지 않았다. 반대자의 경고마저 원정의 장비가 되었다. 설득했다고 판단까지 정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의 재논의는 잘못을 막지 못했다. 잘못에 장비를 더 갖춰주었다.

세 번째 단계인 기원전 413~404년의 핵심 변수는 페르시아였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페르시아가 해군 건설 자금을 주고,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그리스의 자유를 지키는 세력으로 자신을 내세워온 스파르타로서는 큰 타협이었다. 하지만 돈이 필요했다. 페르시아의 돈으로 처음 아테네 해군에 맞설 함대를 갖게 되었다.

최후의 결정적 전투는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벌어졌다.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가 헬레스폰토스, 오늘날의 다르다넬스해협에서 아테네 함대를 무너뜨렸다. 흑해 지역에서 곡물을 들여오는 길이 끊겼다. 몇 달 동안 포위된 뒤 아테네는 404년에 항복했다.

항복 조건은 아테네와 피레우스항을 연결하는 장성을 허물고, 해외 영토를 포기하고, 함선 대부분을 넘기고, 펠로폰네소스동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민주정이 무너졌다.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30인 과두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30인의 지배는 몇 달에 그쳤다. 403년 아테네의 민주파가 봉기하여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정을 복구했다. 스파르타가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리산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네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방침이 달랐다. 파우사니아스는 군사적으로 개입한 뒤 양측의 화해도 추진했다. 아테네 민주정의 복구는 스파르타가 완전히 손을 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군사 개입과 스파르타 내부의 방침 차이, 정치적 중재가 얽힌 가운데 이루어졌다.

아테네는 전쟁에 졌지만 구성체는 죽지 않았다. 403년에 복구한 민주정은 마케도니아가 아테네의 독립성을 끝내는 322년까지 팔십 년 넘게 이어졌다. 스파르타는 전쟁에 이겨 그리스의 패권국이 되었지만 그 지위는 삼십여 년밖에 가지 않았다. 371년 레욱트라에서 패권은 끝났다. 스파르타 구성체는 그 패배에서 되살아나지 못했다.

왜 이긴 쪽이 잃고, 진 쪽이 살아남았을까.

아테네가 잃은 것은 전쟁이지 구성체를 재생할 가능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민 참여, 추첨 공직, 민회, 민중 법정은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성인 남성 시민 약 3만 명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인구 기반이 남았다. 농업, 해상무역, 은광이라는 물질적 기반도 회복할 수 있었다. 전쟁은 아테네를 더 작고 가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더 작은 규모와 달라진 자원 조건에서도 그 내부 논리는 계속 작동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가 얻은 것 역시 구성체의 재생이 아니라 전쟁의 승리였다. 완전한 시민 공동체가 전쟁 한 번에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줄고 있던 사람들을 전쟁이 더 소모했다. 한 번 이길 때마다 시민 수십 명이 죽었다. 그 손실을 채울 수는 없었다. 외부인은 스파르타 시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승리가 오히려 안쪽의 수축을 앞당겼다.

레욱트라에 나간 중장보병 가운데 완전한 시민은 천 명 미만이었다. 나머지는 페리오이코이와 해방된 헤일로타이였다. 시민 공동체를 대표해 싸우는 군대의 대부분이 비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광경 자체가 이미 구성체의 속이 비었음을 보여주었다.

구성체의 강약은 한때의 승패로 결정되지 않는다. 지속할 수 있는가, 손실을 받아낼 수 있는가, 다시 세울 수 있는가, 규모가 바뀌어도 작동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아테네는 그럴 수 있었다. 스파르타는 정밀하고 폐쇄적이며 취약했다. 성공할 때마다 원래도 부족하던 자원을 더 써버리는 구성체였다.

6. 상전이가 남긴 두 유산

기원전 4세기 말이면 독립된 도시국가의 시대는 실질적으로 끝났다.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반도를 통합해 거대한 군주제적 제국 질서에 넣었다. 폴리스는 정치적 단위로서 이후에도 몇 세기 동안 존속했다. 그러나 더 이상 독립된 정치적 주체는 아니었다.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셀레우코스 왕국, 로마 같은 더 큰 정치체의 일부가 되었다.

시대는 지나갔다. 유산은 지나가지 않았다. 서로 다른 두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첫째는 담론의 생존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천 년 넘게 두 정치적 형태의 원형으로 인용되고, 비교되고, 비유되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스파르타적인 정체를 분석했다. 물론 그가 설계한 이상국가와 실제 스파르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두 도시를 정체 분류의 핵심 사례로 삼았다. 공화정 시대 로마인들도 자신들을 두 도시에 비추어보았다. 규율과 공공의 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스파르타와 닮았다고 여겼고, 동시에 아테네적인 개방성도 가졌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의 피렌체와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공화국은 자신들을 그리스 도시국가의 새로운 계승자로 이해했다. 미국 건국의 주역들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스』에서 아테네 직접 민주정의 약점과 스파르타 안정성의 대가를 거듭 논의했다. 프랑스혁명의 자코뱅파는 근대의 스파르타인으로 자신들을 상상했다. 19세기 유럽의 역사가들은 이 두 도시를 계속 다시 썼다.

이 대조가 왜 그렇게 오래 힘을 유지했을까. 시민을 정치적 구성체의 중심에 놓을 때 갈 수 있는 두 기본 방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참여를 넓히고 문을 열어 유동성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와 함께 소음과 불안정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성원 자격을 좁히고 결속과 질서를 지킬 것인가. 그와 함께 폐쇄와 경직도 감수할 것인가. 모든 정치체가 두 끝점 가운데 하나에 정확히 놓인다는 뜻은 아니다. 두 끝점이 누구도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긴장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시민 공동체의 경계를 열 것인가, 넓힐 것인가 하는 긴장이다.

그 뒤의 시민과 공동체에 관한 상상은 이 긴장으로 거듭 돌아왔다. 세 번째 글에서 다룰 로마 시민권의 확대는 아테네 방향의 극한이었다. 한 도시 내부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로 신분을 넓혔다. 기독교의 영혼의 평등은 다른 종류의 개방이었다. 정치적 경계를 넘어 모든 신자에게 인간을 목적으로 놓는 지평을 펼쳤다. 중세 도시의 시민 자격은 스파르타 방향의 축소판이었다. 닫힌 성원 자격, 엄격한 심사, 외부인 배제의 형식이었다. 근대 국가는 이 긴장을 다른 규모로 가져갔다. 시민 자격은 넓어질 수 있었지만, 자격을 얻을 조건은 여전히 법이 정했다. 누가 시민이 될 수 있고 누가 문밖에 남는가. 개방과 배제가 같은 신분 제도에 함께 쓰여 있었다.

그 긴장이 새로 움직일 때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도 돌아왔다. 독립된 도시로서의 삶은 끝났지만, 비교의 언어로서의 삶에는 같은 방식의 끝이 오지 않았다.

둘째는 철학적 생존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남긴 그 균열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되살릴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목숨은 되살릴 수 없었다. 제도가 다시 돌아가도 그 판결이 남긴 충돌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개인의 양심과 정치적 권위는 갈라질 수 있다. 한 사람 안에서도 갈라질 수 있다.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옳은 채 정치적으로 패배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그 분열을 자신의 저술 전체에 새겼다. 그의 철학 아래에는 한 물음이 움직인다. 소크라테스가 옳고 아테네가 틀렸다면, 무슨 기준으로 정치 제도를 판단해야 하는가. 철인왕, 이데아론, 『국가』라는 그의 답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수정되고, 기독교에 흡수되고, 계몽주의에 의해 다시 작동했다. 그러나 그 모든 답은 하나의 전제 위에 있다. 정치 제도 자체를 정치 너머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다.

소크라테스가 재판받기 전, 아테네의 무대에는 이미 다른 불복종이 나타나 있었다. 『안티고네』의 주인공은 왕이 오빠의 매장을 금지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묻었다. 그녀가 지킨 것은 글로 쓰이지 않은 신성한 법이었다. 왕의 명령도 그 의무를 그녀에게서 거두어가지 못했다. 정치적 권위는 명령을 어긴 사람을 벌할 수 있다. 하지만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판단의 척도까지 없앨 수는 없다.

이것이 인간을 목적으로 놓는 상전이의 가장 깊은 층위다. 인간을 정치적 구성체의 핵심 부품으로 놓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 자체를 구성체를 판단할 기준으로 삼는다. 아무리 강력하고 효율적이며 안정적인 정치체라도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다룬다면 틀렸다. 그 ‘틀렸다’는 판단은 더 강한 다른 정치 권력에서 오지 않는다. 이성과 양심과 존엄을 가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게서 온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언어를 쓰지 않았다. 훗날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요구를 원칙으로 세웠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 원칙을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속에 놓으면 물음이 구체적이 된다. 자기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공동체는 어떻게 대하는가. 한 사람의 죽음과 하나의 원칙이 이천여 년을 사이에 두고 여기서 같은 균열을 비춘다.

그리스에서 그 관념은 아직 거칠고, 제한적이며, 배제로 가득했다. 자유민인 성인 남성 시민에게만 적용되었다. 노예, 여성, 외국인, 어린이는 밖에 있었다. 문을 좁히는 일은 위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페리클레스가 시민 자격을 강화했을 때 아테네는 뒤에 닥칠 펠로폰네소스전쟁과 역병을 아직 겪지 않았다. 패전과 민주정 복구를 거친 뒤에는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보내졌다.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 억압은 공동체를 날마다 유지하는 일에 스며 있었다. 확장과 배제는 차례로 교대하는 두 막의 연극이 아니었다. 같은 구성체 안에 함께 밀집해 있었다.

그럼에도 상전이는 시작되었다. 시민, 성원, 판단할 권리라는 물음을 따라가면 로마, 기독교, 헬레니즘 군주들, 후기 로마와 절대왕권은 이 긴장을 서로 다른 규모로 옮겨간다. 이슬람의 움마, 르네상스, 계몽주의와 소비에트는 다시 그 형태를 바꾼다. 누군가는 안으로 들어오고 누군가는 밖으로 밀려난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판단하도록 허용하는 구성체가 있고, 복종을 요구하는 구성체가 있다. 공동체는 사람을 어떻게 조직하며, 그 사람에게 공동체를 판단할 여지를 얼마나 남겨두는가. 이후의 글들은 이 물음을 거듭 따라갈 것이다.

그리스를 이 연작의 출발점에 놓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서구 문명의 기원’이어서가 아니다. 그 이야기는 너무 민족주의적이다. 이곳에서 시민이 정치적 구성체의 핵심이 되었고,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판단을 정치적 판결 앞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 실행에는 결함과 폭력과 대가가 있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도 있었다. 이후 이천여 년의 유라시아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상전이가 서로 다른 조건 아래서 펼쳐지고, 넓어지고, 반대 방향의 운동을 만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다.

7. 다음 물음: 구성체는 수출할 수 있는가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와 테베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을 물리쳤다. 도시국가 시대는 실질적으로 끝났다. 그리스반도는 마케도니아의 패권 아래 놓였고, 도시의 독립은 명목상으로만 남았다.

그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334년 동방 원정을 시작했다. 십이 년 안에 군대는 마케도니아에서 출발해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본토, 중앙아시아를 지나 인더스강에 닿았다. 에게해에서 인더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한 것이다.

기존의 틀을 깎아 여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무엇을 세울 것인가.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한 땅 위에 새로운 구성체를 만들려 했다. 그리스어, 신전, 도시 설계라는 폴리스의 요소를 페르시아 왕권, 행정 체계, 지방 귀족이라는 동방의 전통과 결합하려 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들을 세우고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과 현지인을 함께 살게 했다. 자신도 페르시아 옷을 입고 페르시아 귀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며, 신하들에게 페르시아식 궁정 의례를 요구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체를 훨씬 더 큰 규모로 내보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구성체는 수출할 수 있을까. 수천에서 수만 명을 위해 설계된 질서를 대륙을 가로지르는 제국의 규모로 늘릴 수 있을까.

다음 글은 알렉산드로스와 헬레니즘, 구성체는 수출할 수 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