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와 스파르타
하나의 상전이에 대한 두 가지 초기 답
왜 그리스에서 시작하는가
유라시아의 역사를 그리스에서 시작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가 가장 오래된 문명이어서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국가는 훨씬 먼저 존재했다. 결정적인 차이는 정치의 주어였다. 왕도 사제도 혈연집단도 아닌 시민이 공동체의 결정을 내리는 주체로 등장한 곳이 그리스였다.
물론 그 시민은 오늘날의 보편적 시민과 거리가 멀었다. 여성·노예·외국인·미성년자는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자유 성인 남성이 추상적인 자격을 통해 정치적 동등성을 얻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전이였다. 인간을 통치의 대상에만 두지 않고 정치적 판단의 중심에 세운 변화였다.
아테네: 참여할 권리
아테네의 시민제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솔론은 부채노예를 폐지하고 혈통 중심의 질서를 법적 신분으로 바꾸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씨족을 행정구역으로 재편해 시민 등록을 가능하게 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민회·배심법정·추첨 관직이 결합하면서 평범한 시민도 생애 여러 차례 국가 운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
아테네가 이해한 시민의 핵심은 말하고, 표결하고, 공적 결정을 내릴 권리였다. 이 체제는 놀라운 동원력과 개방성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충동적인 결정과 제국 팽창에 대한 의존도 낳았다. 내부의 폭넓은 참여는 외부의 좁은 경계와 함께 움직였다. 제국의 조공과 해군 고용이 민주정의 물질적 토대를 떠받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공동체가 수용하지 못한 여항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아테네 민주정의 약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냈다. 시민 공동체가 최종 권위라면, 공동체보다 높은 기준—진리·양심·덕—을 주장하는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다수의 결정이 곧 옳음은 아니라고 말했다. 아테네의 제도는 이 질문을 설득이나 타협으로 흡수하지 못하고 사형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사람은 죽고 질문은 남았다. 정치적 판결과 도덕적 옳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서양 정치사상에 각인되었다. 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의 언어로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구(構)가 제거했지만 없애지는 못한 여항(餘項)이었다.
스파르타: 소속될 자격
스파르타는 같은 상전이에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시민은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개인이기보다 규율을 공유하는 동등자 집단의 구성원이었다. 공동식사, 군사훈련, 토지와 노예노동에 기초한 생활은 시민 내부의 강한 평등과 결속을 만들었다.
그 대가는 폐쇄성이었다. 시민 수는 계속 줄었고, 헬로타이와 페리오이코이의 노동과 복종 없이는 체제가 유지될 수 없었다. 아테네가 외부로 팽창해 여항을 흡수하려 했다면 스파르타는 경계를 굳게 닫고 여항을 억눌렀다. 정교하고 강한 체제였지만 손실을 보충할 통로가 없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보여준 것
두 질서의 충돌은 단순한 민주정 대 과두정의 대결이 아니었다. 바다와 동맹망에 기대어 확장하는 아테네, 육상군과 내부 규율에 기대어 현상을 유지하는 스파르타가 맞섰다. 스파르타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승리 뒤의 패권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아테네 역시 패배했지만 제도와 사상의 영향은 다시 살아났다.
전쟁의 승패와 구(構)의 지속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불안정했지만 다시 구성될 수 있었고, 스파르타는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한 번의 큰 손실을 회복하지 못했다.
두 개의 유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후 정치사상이 되풀이해 불러낸 두 원형이 되었다. 참여와 개방, 결속과 규율. 어느 한쪽이 완전한 답은 아니다. 두 체제 모두 배제와 폭력을 품었고, 자신이 만든 여항을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전이는 이미 일어났다. 그리스 이후의 정치 질서는 시민을 받아들이거나, 억압하거나, 다른 형태로 변형해야 했다. 인간을 정치적 판단의 중심에 놓는 가능성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다. 도시국가 규모에서 생긴 이 구(構)는 대륙 규모로 옮겨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