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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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 / 108 · 삶 뒤에 남는 작업

슈뢰딩거, 그 고양이

고양이는 인간의 시선이 허락해야 사는 것이 아니다. 파동함수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까지, 슈뢰딩거는 남의 삶을 대신할 공식이 아니라 아직 풀어야 할 질문을 남긴다.

I. 그 고양이

1935년. 논문 한 편. 다섯 번째 절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강철로 된 상자 안에 들어간다.

종이 위에 마련된 장치다. 소량의 방사성 물질, 검출기, 그리고 검출기에 연결된 치명적인 장치가 있다. 정해 놓은 시간 동안 붕괴가 일어나면 장치가 작동하고 고양이는 죽는다. 붕괴가 일어나지 않으면 살아 있다. 아주 작은 사건이 차례차례 확대되어, 마침내 한 동물의 생사가 거기에 달리게 된다.

이제 양자 이론으로 물질과 장치와 고양이를 함께 기술해 보자. 어려움이 생긴다. 전체의 파동함수가 서로 연결된 두 갈래 결과를 여전히 함께 담고 있다면, 그 기술에서 우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하나의 결과로는 어떻게 건너가는가?

종이에는 두 줄을 나란히 쓸 수 있다. 고양이는 두 줄의 글이 아니다.

슈뢰딩거는 이런 사례를 우스꽝스럽다고 불렀다. 해석의 어려움을 눈앞에 가져오려는 것이었다. 기술에 담긴 불확정성을 기술되는 사물의 모습 자체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가? 미시적인 중첩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다. 실제 고양이에게 이런 실험을 하자고 제안한 것도 아니다.

그 논리의 굽이들은 동물의 모습보다 기억하기 어려웠다.

고양이 한 마리. 살아 있고 죽어 있다. 상자를 여는 사람은 그 고양이를 현실에 들여놓을 열쇠를 쥔 것처럼 보인다.

이미지는 쉽게 퍼진다. 질문이 달라지는 것도 쉽다. 이론이 관측 결과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져 묻던 이야기가, 인간의 눈이 와서 살게 해 주기를 기다리는 동물의 이야기로 바뀐다.

고양이는 논문에서 멀리 걸어 나왔다. 중첩을 대표하는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해 낸 사람은 표지 하나로 설명이 멈추기를 바라지 않았다.

누군가는 강력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 그 이미지가 나중에 쓰이는 모든 방식까지 자기 손에 쥐고 있을 수는 없다.

II. 그 사람

에르빈 슈뢰딩거. 1887년 8월 12일,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했고 식물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집에는 책이 있었고 독일어와 영어가 오갔다. 슈뢰딩거는 빈 대학교에서 공부해 191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들어선 물리학에는 볼츠만의 질문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강의와 책, 연구가 그 연결을 이어 주었다.

1921년에는 취리히에서 자리를 얻었다. 1925년 크리스마스 무렵, 그는 아로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이듬해에 파동역학 논문들이 나왔다. 그해 상반기에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고유값 문제로서의 양자화」라는 제목의 네 편에, 두 역학 사이의 관계와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다룬 글들을 더해 여섯 편으로 묶곤 한다.

종이 위에 그리스 문자 하나가 나타났다. ψ.

파동함수. 통상적인 비상대론적 기술에서 파동함수는 양자 상태의 확률진폭을 준다. 그 진폭으로 측정 결과의 확률을 계산한다. 초기 상태와 해당하는 동역학적 조건이 주어지면, 방정식은 상태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도 정한다. 그 변화를 계산하는 것과 개별 측정마다 확정된 답이 미리 적혀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그 일로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디랙과 함께 받았다. 그해 베를린을 떠나 옥스퍼드로 갔다. 1936년에는 그라츠로 옮겼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새 정권에 순응하는 편지를 썼지만, 결국 해직되었고 국외로 떠났다. 임용, 편지, 해직, 출국은 저마다 다른 기록을 남겼다. 망명의 길을 한 줄로 곧게 그을 수는 없다.

1939년 더블린에 도착했다. 이듬해 더블린 고등연구소가 설립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일했다. 1956년 빈으로 돌아갈 때까지, 생애의 긴 구간에 비교적 안정된 주소가 생겼다.

1961년 1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일흔세 살이었다.

방정식은 남았다. 생명에 관한 책과 철학적 글들도 남았다. 고양이에게 상당 부분 가려진 한 사람의 생애도 남았다.

III. 바닥과 도면

이 연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줄곧 바닥을 놓고 있다.

사물을 구별하고 설명을 시작할 자리를 찾는다. 거기 잠시 서서 주위를 본다. 뒤이어 패러데이가 귀퉁이를 들어 올리자 장이 나타나고, 볼츠만은 온도계의 숫자 아래로 내려가 수많은 분자의 운동을 본다. 바늘은 잠잠한데 그 아래는 생각보다 훨씬 분주하다. 마루가 사람을 받쳐 주어도, 그 밑을 들여다볼 이유는 있다.

양자역학은 또 다른 어려움을 가져온다.

우리는 작은 공을 그리고 그 경로를 긋는 데 익숙하다. 이쪽에는 위치, 저쪽에는 운동량. 두 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채워 보자. 그러나 양자 상태에서 위치와 운동량의 분포를 동시에 한없이 좁게 만들 수는 없다. 기구의 눈금을 더 잘게 새긴다고 그 관계가 물러나지는 않는다.

익숙한 기술 방식 하나가 한계에 닿았다. 예전 도면이 약속했던 모든 칸을 채울 수 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그 도면을 일상으로 가져온다. 원자를 말할 때는 추상적인 기호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고양이 앞에서는 그 기호가 숨 쉬는 몸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 요구 때문에 바닥이 없다고 선언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서 있고, 계기를 읽고, 어떤 결과와 마주칠 수 있기에 오히려 이론이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와 고양이 문제도 같지 않다. 하나는 양자적 분포의 폭을 제약한다. 다른 하나는 전체를 기술하는 중첩이 하나의 확정된 결과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묻는다. 둘을 모두 ‘불확실성’이라고 부르면 문패는 같아진다. 안에 있는 문제들은 닫힌 문 뒤로 밀려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 널판을 놓을 수 있다. 판자 하나를 내려놓는 일이 다리 아래의 모든 것을 이미 그렸다는 선언일 필요는 없다.

IV.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

종이 두 장. 두 장 모두 원자를 계산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작업은 보른, 요르단과 함께 발전하여 행렬역학이 되었다. 숫자들의 배열, 순서를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연산.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물질파에서 출발해 미분방정식으로 나아갔다. 파동은 솟고, 만나고, 겹친다. 숫자표보다 우리가 본 것을 떠올리기 쉽다.

쉽게 그려진다고 해서 그것이 사물의 궁극적인 모습인 것은 아니다.

특히 여러 입자의 파동함수에는 모든 입자의 좌표가 들어간다. 그것을 물처럼 방 안에서 출렁이는 물질의 막으로 간단히 그릴 수는 없다. 이미지는 입구를 보여 주다가도 길을 잘못 이끌 수 있다.

1926년 슈뢰딩거는 자신의 역학과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의 역학 사이의 관계를 따로 논문으로 썼다. 서로 다른 계산 사이의 연결을 보였다. 다른 표기에서도 같은 에너지값이 나올 수 있었다. 뒤이은 정식화가 그 대응을 더 완전하게 했다. 첫 논증에는 그 나름의 적용 범위와 아직 이어야 할 부분이 있었다.

‘나는 파동이 좋다’, ‘나는 숫자가 좋다’로는 끝낼 수 없었다. 계산을 나란히 놓아야 했다. 서로 대응하는 결과가 나오는가? 어떤 조건에서 그런가?

패러데이와 맥스웰도 이 연작에서 그런 만남의 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 사람의 작업을 다른 언어로 이어받으면 이전에는 적히지 않았던 것이 펼쳐진다. 닮은 것은 그 사이의 건너감이지, 네 사람을 직관 팀과 이성 팀으로 나누는 방식이 아니다.

방정식과 행렬의 대응이 드러났다고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가 이후의 물리적 의미에 모두 동의하게 된 것은 아니다.

종이 위의 계산은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종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물을 수 있었다.

V. 고양이와 본다는 것

보지 않을 때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먼저 내 손에 가려진 동전을 생각해 보자. 동전은 이미 떨어졌다. 어느 면이 위인지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신이 두 면에 같은 확률을 주는 것은 모르는 것을 표현한다. 그것만으로 양자 중첩의 뜻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중 슬릿 같은 실험에서는 서로 다른 경로의 진폭이 더해지고 간섭할 수 있다. 어떤 곳에는 도착할 확률이 커지고, 다른 곳에는 작아진다. 각 사건에 확정된 경로 하나를 먼저 배정한 다음, 보통의 확률 두 개를 더하는 계산과는 다르다. 두 계산이 남기는 무늬는 서로 다르다.

중첩을 아직 들여다보지 못했을 뿐 이미 결정된 결과로 줄일 수 없다. 그렇다고 반대쪽으로 뛰어가 인간의 시선이 현실 전체를 만든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실험에서 본다는 일에는 장치가 들어간다. 빛이 측정 대상과 상호작용하고, 검출기가 기록을 남긴다. 실험자가 돌아와 읽기 전에도 기록은 있을 수 있다. 방에서 인간의 주의를 빼냈다고 해서 모든 물리적 상호작용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고양이는 숨을 쉬며 체온을 지닌다. 주변에는 공기와 빛이 있다. 뚜껑을 닫는다고 환경 전체와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다. 후대의 결어긋남 연구는 이런 연결 때문에 갈래 사이의 간섭을 국소적으로 검출하기가 어떻게 극도로 어려워지는지 설명한다. 미시 실험에서 익숙한 무늬를 더는 쉽게 얻지 못한다.

하지만 간섭이 억제된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단 하나의 결과가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를 설명하려는 시도 가운데는 통상적인 상태 변화를 유지하는 것도, 동역학을 바꾸는 것도, 물리적 기술에 무엇을 더하는 것도 있다. 저마다 전제와 결과를 설명해야 한다. ‘보면 붕괴한다’는 말이 그 모든 설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

고양이는 여전히 질문 속에 있다. 그러나 우주 바깥의 누군가에게 고양이의 스위치를 맡긴 것은 아니다.

실험실을 나와 아직 뜯지 않은 편지 앞으로 돌아오면, ‘본다’는 것은 다시 일상의 일이 된다.

당신이 편지를 열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알고 답장을 쓰기로 한다. 당신의 행동은 그의 형편을 바꿀 수 있다. 그의 답장도 당신의 형편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봉투를 뜯기 전에도 그는 자기 삶을 살고 있었다. 보지 못했다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마침내 보았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대신 채워 넣을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작용하는 것은 답장과 기다림, 실제로 건네는 도움이지 양자 방정식이 아니다. 한 사람이 내 삶에 들어오면, 전에는 그냥 지나칠 수 있던 일에도 문득 봉투에 적힌 이름이 생긴다.

VI. 생명이란 무엇인가

1943년 2월, 더블린. 슈뢰딩거가 더블린 고등연구소 주관으로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생명을 주제로 강연한다. 이듬해 그 강연은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된다.

질문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한다. 유전 물질은 어떻게 어떤 형질을 상당히 안정적으로 전하는가? 세포 안의 물질도 열운동에 노출된다. 왜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다른 배열을 담을 수 있는가?

그는 ‘비주기적 결정’을 제안한다. 같은 무늬가 반복되는 벽지를 떠올리고, 이어서 부분마다 다른 무늬가 담긴 태피스트리를 생각해 보자. 벽지는 규칙적이다. 태피스트리도 구조를 지니면서 자리에 따라 다른 내용을 담을 수 있다. 책에 나오는 비교다. 독자는 두 가지 요구를 함께 붙들게 된다. 안정적일 것. 그러면서 차이를 담을 수 있을 것.

유전자를 물질 구조로 연구한 첫 사람이 그였던 것은 아니다. 책에는 델브뤼크와 동료들이 명시되어 있다. 슈뢰딩거는 이미 사람들이 일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물리학의 질문을 가져가 생물학적 사실 앞에 놓았다.

1953년 『네이처』에는 DNA 구조를 다룬 논문 세 편이 나란히 실렸다. 왓슨과 크릭은 모형을 제시했다. 윌킨스, 스토크스, 윌슨, 그리고 프랭클린과 고슬링은 구조 연구를 발표했다. 그 페이지들을 함께 놓으면 이중나선은 책 한 권이 독자 두 명을 깨운 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나온 그림이 아니게 된다.

나선형 골격은 규칙적이고 염기 서열은 달라질 수 있다. ‘비주기적’이라고 분자 전체에 규칙성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슈뢰딩거가 나중의 구조를 이미 그려 놓았다는 뜻도 아니다. 책은 누군가에게 한 분야로 들어가고 싶게 할 수 있다. 입구를 지나면 실험과 자료, 모형과 여러 사람의 일이 있다.

책은 생명과 엔트로피도 다룬다. 생물은 환경과 물질 및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활동을 유지한다. 슈뢰딩거는 이를 설명하면서 ‘음의 엔트로피’라는 표현을 썼다. 이어 여섯 번째 장의 보충 주석에서 동료들의 지적에 답하며, 전문 독자에게는 자유에너지가 더 적절한 개념이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음식은 질서라는 이름의 신비한 약이 아니다. 몸이 열역학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니다.

볼츠만의 질문은 여기서 다른 입구를 얻는다. 패러데이가 건넜던 틈에도 이 연작의 다른 메아리가 생긴다.

틈은 통로일 수 있다. 다만 그 너머로 손을 뻗을 때, 맞은편은 빈 곳이 아니다. 거기서도 이미 다른 손들이 다가오고 있다.

VII. 의식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끝에는 에필로그가 있다. 유전, 물질, 몸을 다루던 이야기가 ‘나’ 쪽으로 돌아선다.

슈뢰딩거는 의식의 통일성, 베단타 사상에서 개별 자아와 전체가 맺는 관계, 쇼펜하우어를 생각한다. 그가 계속 사유하기로 택한 방향이다. 앞 장들의 실험에서 저절로 도출된 마지막 공식은 아니다.

두 사람이 창가에서 같은 나무를 본다고 하자. 한 사람은 어린 시절 정원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은 잎이 뒤집히는 모습만 바라본다. 나무는 함께 쓰는 기술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나무에 관한 정보를 몇 장 더 보태는 일만으로 지금 두 사람이 각각 겪는 경험을 다 적은 것은 아니다.

저 나무를 설명하는 일과 이 사람이 지금 나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설명하는 일 사이에는 아직 길이 남은 듯하다. 계속 연구해도 되고, 먼저 이야기를 들어도 된다. 설명이 점점 자세해지는 동안에도 나무를 보는 사람은 창가에 있다.

라마누잔은 이미 이 연작을 인도의 전통 가까이 데려왔다. 슈뢰딩거도 그곳으로 갔다. 두 사람의 출발점과 질문은 다르다. 같은 지명이 두 사람에게 같은 답을 써 줄 수는 없다.

에밀리의 황야에는 또 다른 말이 있다.

『폭풍의 언덕』 아홉 번째 장에서 캐서린은 넬리에게 말한다. “내가 히스클리프야.” 조금 전에는 에드거와 결혼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 결혼으로 히스클리프를 도우려는 계획도 들어 있다. 넬리는 듣고 고개만 끄덕이지 않는다. 친밀함과 신분, 오해와 다른 사람들의 삶이 방 안에 함께 들어와 있다.

그 말에서는 자아를 몸 안에만 가두려 하지 않는 감정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처지에 놓인 인물의 말이지, 에밀리가 제출한 의식의 정리는 아니다. 히스클리프와 에드거에게도 각자의 형편이 있다.

다시 슈뢰딩거 자신에게 돌아오자. 『아일랜드 인명사전』은 그가 개인 교사로서 미성년 소녀들에게 접근했고, 그중 한 명에게 성적 관계를 목적으로 오랜 기간 접근하고 영향을 미친 뒤, 실제로 그런 관계를 맺었다고 기록한다. 그 행동을 천재성과 연결하려 했던 이전의 설명도 짚는다. 그런 설명으로 한 소녀를 그가 영감을 얻은 자리로만 줄일 수는 없다.

깊은 연결을 믿는다고 상대방의 동의가 생기지는 않는다. 미성년 학생을 대하는 어른에게는 경계를 지킬 책임이 있다. 소녀가 먼저 아니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며, 자신을 보호할 부담을 전부 그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

VIII.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

쇼펜하우어는 사유의 어려움 하나를 여기에 놓았다. 누구나 보는 것도 아직 충분히 생각되지 않았을 수 있다. 발견은 어느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 눈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늘, 떨어지는 사과, 식어 가는 물, 방 안의 고양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갔을까. 반 고흐는 멈춰 서서 붓을 든다. 뉴턴은 운동을 묻고, 볼츠만은 수많은 분자가 어떻게 안정적인 측정값을 만드는지 묻는다. 익숙한 것은 여전히 거기 있다. 질문이 사람을 붙잡는다.

슈뢰딩거는 종이 위 장치에 고양이를 넣어 기술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게 만든다. 거기에는 상상력이 있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질문을 붙드는 인내도 있다. 동물의 매력이 계산을 증명할 수는 없다. 계산이 성공했다고 모든 해석의 질문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서문을 다시 펴 보자.

그는 누구도 모든 분야를 직접 익혀 통달할 수는 없다고 인정한다. 지식을 연결하려면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자료를 쓰고 틀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어를 도와준 여러 사람에게 감사를 표한다. 모국어는 몸에 맞는 옷과 같아서, 갈아입으면 늘 편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가 쓴 비유다.

방정식을 쓸 줄 아는 사람도 문장 하나를 제자리에 놓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다.

감사의 말을 읽다 보면 책장 곁에 의자가 하나 더 놓이는 듯하다. 누군가 앉아 문장에 더 잘 맞는 단어를 찾고, 아직 불안한 추론을 짚어 줄 것이다. 학문 사이의 틈을 건너가면 새로운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종이를 받아 읽어 주려는 사람도 있다.

같은 것을 본다. 다른 것을 생각한다. 그런 다음 그 생각을 탁자 위에 놓는다.

누군가는 이어받을 수 있다. 다른 누군가는 아직 맞물리지 않은 곳을 짚을 수 있다.

IX. 중첩

이하의 다리 위 만남은 문학적 상상이다.

누군가 한 사람 더 왔다. 고양이를 안고 있다. 한쪽 팔 아래에는 종이 몇 장이 끼워져 있다.

동물이 몸을 움직인다. 그는 뒷다리를 받쳐 주려고 안는 자세를 바꾼다. 종이 귀퉁이가 미끄러져 나온다. 상자 그림이다. 그림 속 뚜껑은 닫혀 있다. 품 안의 고양이는 바람 냄새를 맡는다.

수염이 살짝 움직인다. 고양이는 코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그쪽 바람이 더 재미있는 모양이다.

소크라테스는 빈터에 서 있다. 플라톤은 쪼그려 앉아 설계도를 그린다. 흄은 백개먼 판을 지킨다. 쇼펜하우어는 다리 아래를 본다. 키르케고르는 이미 뛰었다. 튜링은 손에 든 사과를 바라본다. 체호프는 난간에 기대어 있다. 칸토어는 하늘을 본다. 코페르니쿠스는 책을 내려놓고 떠났다. 사르트르는 파이프를 들고 서성인다. 보부아르는 거울을 들고 있다. 콰인은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테슬라는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에디슨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를 들고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위치는 불확정하다. 보어는 보내지 않은 편지를 쥐고 있다. 톨스토이는 처방전을 들고 체호프와 마주한다. 셰익스피어는 없다. 그는 다리 아래 흐르는 물이다. 스피노자의 손에는 유리 가루가 묻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쪼그려 앉아 바닥을 놓는다. 패러데이는 널판 하나를 들어 올린다. 맥스웰은 서서 방정식을 쓴다.

잔 다르크는 다리 위쪽에서 불을 지닌다. 와일드는 아름다운 자세로 서서 그 문장을 들고 있다. 라마누잔은 틈새로 몸을 반쯤 내밀었다. 오펜하이머는 재를 짊어지고 앞으로 간다. 샬럿은 펜을 들고 있다. 에밀리는 다리 밖 황야에 있고, 바람은 그쪽에서 불어온다. 볼츠만은 방정식이 새겨진 돌을 안고 있다. 반 고흐의 몸에는 물감이 묻어 있고 붓에서는 아직 색이 떨어진다. 디킨스는 균열 위에 서서 펜과 성냥갑을 쥐고 있다. 처칠은 어깨에 깃발을 얹고 여전히 펜을 든다. 루스벨트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두 잉크가 든 펜이 손 닿는 곳에 있고, 완만한 경사로가 다리로 이어진다.

슈뢰딩거는 아리스토텔레스 옆에 선다.

패러데이는 마루 귀퉁이를 들고 있다. 볼츠만이 안은 돌 위에서는 글자들이 잠잠하다. 하이젠베르크가 선 자리에는 눈길이 한 번 더 간다. 자기 종이가 미끄러지자 팔꿈치로 꼭 끼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널판을 수평으로 맞추고 손으로 이음매를 쓸어 본다.

고양이는 내려가고 싶어 한다. 슈뢰딩거가 쪼그려 앉아 먼저 앞발을 뻗게 한다. 널판은 그 무게를 받친다. 고양이는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가 틈 옆에서 멈추고, 물 쪽으로 귀를 돌린다.

널판이 작게 삐걱거렸다. 고양이는 발을 단단히 딛고 틈 위로 꼬리를 스친다.

슈뢰딩거는 흘러내리는 종이를 모은다. 상자 그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설명되지 않은 부분도 사라지지 않았다.

멀리 칸트가 서 있다.

슈뢰딩거가 칸트를 올려다보고 다시 자기 종이를 본다. 아직 다리를 조금 더 건너야 한다. 종이 끝을 가지런히 맞추고 건너갈 채비를 한다.

흄이 말 하나를 움직인다. 디킨스의 발밑에서 종이가 작게 소리 낸다. 고양이는 루스벨트의 경사로를 조금 걷다가 돌아와 슈뢰딩거의 신발에 몸을 비빈다.

그는 종이를 주머니에 넣어 두 손을 비운 뒤 고양이를 안아 든다.

칸트를 향해 걷는다. 고양이는 하품을 하고 굽힌 팔 안쪽에 머리를 기댄다. 몇 걸음 더 가자 작은 몸의 무게가 조금씩 풀린다.

바람이 주머니 속 종이 귀퉁이를 넘긴다.

질문은 아직 깨어 있다. 고양이는 잠든다.

읽기 안내와 출처

고양이의 정식 대목은 1935년 논문 5절에 있다. 확률진폭은 보통의 확률과 다르며 불확정성, 결어긋남, 확정된 결과는 서로 다른 문제다. 관측에는 물리적 상호작용이 개입하지, 인간의 시선이 세계의 존재를 허가하는 것은 아니다.

1926년의 같은 제목 논문 네 편과 관련 연구 여섯 편은 집계 범위가 다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1943년 강연에서 나왔다. 비주기적 결정은 DNA의 완전한 구조를 미리 제시한 것이 아니며, 1953년 나란히 실린 세 논문의 여러 연구진을 함께 다룬다.

의식 논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후기, 캐서린의 말은 『폭풍의 언덕』 9장에 근거한다. 미성년 소녀에게 한 행위는 저자가 명시된 DIB 전기의 기록으로 제시하며 천재성을 면책 이유로 삼지 않는다.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관한 말은 추적 가능한 출처에 따라 쇼펜하우어에게 돌리고 슈뢰딩거의 직접 인용으로 쓰지 않는다.

9절은 문학적 상상이다. 고양이와 널판, 칸트는 물리 실험이나 서로의 증명이 아니다. 이론의 미해결 문제가 다른 사람의 삶과 경계를 대신하지도 않는다.

번역문과 원 발표 정보 · 아일랜드 인명사전 · MacTutor 전기 · 취리히 중앙도서관의 기록 전시 · 연구문 · 1–5~1–7절 · 2–1절 · 저자 공개본 · 다시 조판된 영어 본문 · 원 지면 · 영어 원문 · 인용문 역사 조사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