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E 의미론 · 03 / 08
그는 자신이 원한 줄 알았다
원서에 적은 전공
수첩을 발견한 그 사람에게 과거를 조금 더 주어 보자. 열여덟에 전공을 고를 때 아버지가 한 분야를 알아 왔다. 졸업하면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지 구체적인 설명이 있었다. 그는 원서에 그 전공을 적었다. 열아홉의 그에게 누가 선택했느냐고 물었다면 자신이 했다고 답했을 것이다.
스물두 살에 졸업하고 그 분야의 일을 시작했다. 마흔에 오래된 수첩을 발견했다. 마흔두 살, 그 직업으로 꼬박 이십 년을 산 뒤에 그는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 몰래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설명하기 쉬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는 그 일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고, 승진하려 애썼으며, 승진하면 진심으로 기뻐했다. 훨씬 나중에야 의문이 생겼다. 누군가 앞길을 설명해 두었다는 안도감을, 내가 그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로 잘못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권했다고 해서 그 길이 반드시 거짓 소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뜻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중에 떠났다는 사실도 그때 원한 적 없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여기서는 상상 속 그의 뒤늦은 이해가 정확하다고 놓아 보자. 그는 그것을 자기 목적이라 여기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 목적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러면 두 가지를 동시에 남겨야 한다. 그 목적은 그가 믿었던 것과 같은 뜻에서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을 중심에 놓고 살았던 이십 년은 여전히 그가 산 이십 년이었다. 어느 한쪽만 남겨서는 지금의 생활을 정직하게 이해할 수 없다.
버린 세월이라는 상자
처음 떠오르는 말은 허비했다는 말일지 모른다. 빈 상자에 이십 년을 통째로 넣고 뚜껑을 닫으면 결론이 난 듯하다. 그런데 직장에서 만난 얼굴, 동료에게 지켰던 약속, 손에 익은 기술을 떠올리면 상자가 쉽게 닫히지 않는다. 그 안에는 버렸다고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정반대의 설명도 솔깃하다. 이렇게 오래 했으니 결국 자신의 소망이었던 게 아닐까. 그 일로 먹고살았고, 잘하게 되었고, 하루하루를 짰다. 자기 삶이라는 말에 그 이상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이 설명을 택하면 그가 이제 막 발견한 일은 말할 수 없게 된다. 자기에 관한 오해도 오래 유지되기만 하면 참이 되어 버린다. 그가 십 년을 더 버텼다면, 오히려 그 결론에서 빠져나오기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오래 살아 냈다는 사실로, 어떻게 자기 뜻이라고 믿게 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막아 버리는 셈이다.
정말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던 일과, 그렇게 했다고 믿기만 했던 일에는 서로 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수첩을 두 권 둔다고 생각해도 좋다. 한 권에는 실제로 받아들이고 고치고 놓아준 일을 적는다. 다른 한 권에는 그렇게 결정했다고 여기며 살았지만 사실 그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일을 적는다. 선한 일과 악한 일,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두 권은 아니다.
그가 직업에 대해 가졌던 오해는 두 번째 수첩에 들어간다. 마흔두 살의 새 선택은, 이번에 정말 자기 뜻으로 받아들였다면 첫 번째 수첩에 놓인다. 옛일을 알아봤다는 것만으로 새 선택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 선택을 했다고 해서 옛 오해가 있었던 사실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남겨 두는 것은 자신이 자기 것이라고 믿었던 일이다. 아버지가 평생 너는 이 일을 하려고 태어났다고 말했더라도, 그가 그 말을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설명이다. 말을 반복했다고 아들의 자기 이해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 말이 압박을 주었을 수는 있다. 압박을 받는 것과 남의 계획을 자기 소망으로 잘못 여기는 것은 같지 않다.
이십 년은 하나의 결정이 아니다
그는 모두 퇴근한 뒤 옆자리에 남아 일 때문에 난처해하던 젊은 동료를 떠올릴지 모른다. 도와주기 시작했고, 차츰 제대로 가르쳐 주고 싶어졌다고 하자. 다른 사람에게 기술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빌려 온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 마음을 둘러싼 직업의 시작이 남의 계획이었다고 해도 그렇다.
이십 년 안에는 서로 다른 일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요구받았으니 맡은 일, 충분히 생각하고 한 약속, 오래 고민했지만 등록하지 않은 강좌, 생활을 바꾸었다고 믿었으나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 일. 그 시절은 전부 내 것이 아니었다는 문장은 너무 많은 것을 한 덩어리로 만든다.
알아보아야 할 것은 개별 선택과 선택했다고 여겼던 일이지, 몇 년 전체에 진짜나 가짜라는 도장을 찍는 일이 아니다. 같은 시기에 둘 다 있을 수 있다. 끝내 결정에 이르지 않은 시도도 있다. 이직을 생각만 하고 정하지 않았다면, 그 미결의 생각 자체가 이미 이직하기로 했다고 잘못 믿고 산 일은 아니다.
성과도 대신 가려 주지 못한다. 그는 한 사업을 진정 자기 뜻으로 맡았지만 끝내 실패했을 수 있다. 시간과 돈을 잃었고, 아픔도 실제일 것이다. 그러나 실패가 그 선택을 가짜로 만들지는 않는다. 반대로 명성을 안겨 준 사업이 성공했어도, 그 목적을 자신이 받아들였다는 보장은 없다.
선택이 진짜였음을 지키려고 사업이 성공한 척할 필요는 없다. 사업이 실패했다고 그 선택마저 없었던 것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진지한 결정과 실망스러운 결과는 한 삶 안에 함께 남을 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다른 쪽의 사실을 덮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천천히 이루어지는 선택
그 동료를 돕는 일이 언제부터 자신의 소망이 되었을까. 그는 날짜를 말하지 못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자기도 사무실에 남아 있어서 잠깐 봐 주었다. 다음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게 되었다. 나중에는 상대가 매번 자신을 바보처럼 느끼지 않고도 일을 배울 수 있는지가 자기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마음이 다 정해져 있지 않았다고 해서 그전의 저녁을 모조리 가짜로 취급할 수는 없다. 어떤 선택은 얼마간 그렇게 살아 보는 동안 이루어진다. 그때의 망설임은 선택이 자라는 과정일 수 있다. 반드시 나중에 들통날 자기 기만이 먼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경우도 있다. 수년 동안 어떤 일을 선택했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고, 그 말을 더는 믿지 않게 된 뒤, 한참 후에 같은 일을 진심으로 맡게 되는 경우다. 그렇다고 처음의 오해가 하나의 긴 선택을 준비한 시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같은 일을 두고 벌어졌어도, 먼저 오해가 있었고 나중에 새로운 선택이 있었다.
지금도 결정이 이루어지는 중인 일은 이루어지는 중인 채로 둘 수 있다. 인생 이야기를 깔끔하게 만들려고 아직 진행 중인 일의 결말을 미리 쓸 필요는 없다. 며칠 멈추었거나, 한동안 망설였거나, 일주일 동안 진전이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과정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없다.
퇴근할 때 가져 나오는 것
그 직업을 떠날 때 가져 나오는 것은 서류 상자 하나가 아니다. 스물두 살에는 못 하던 일을 이제 손으로 할 줄 안다. 함께 일한 사람들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만났다. 몸에도 일을 하던 자세가 배어 있다. 그 일로 이십 년을 먹고살았다.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처음의 목적이 정말 자기 뜻이었다고 증명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다시 쓸 수 있는 기술, 이어 갈 수 있는 관계, 정리해야 할 약속으로 지금의 생활에 남는다. 다만 이 모든 결과 하나하나가 당시에 따로 내렸던 결정인 것은 아니다.
그는 그 기술 중 하나를 새 일에 쓰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 결정이 이번에는 진짜 자신의 것이라면, 오늘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기술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과거의 직업도 줄곧 자기 목적이었다고 소급해서 확인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할 줄 안다는 것과 그것을 삶의 어디에 두고 싶은지는 서로 다르다.
정말 원했던 게 아니었다는 말로 남들이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다 없앨 수도 없다. 그동안 한 행동에는 그가 응답해야 할 결과가 있을지 모른다. 목적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낸 것이, 그 목적의 이름으로 한 모든 행동의 책임까지 정산해 주지는 않는다.
바뀌는 것은 그 세월이 오늘의 판단에 들어오는 방식이다. 내 꿈이었으니 계속해야 한다고만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기술은 쓸 수 있다고, 저 사람에게 아직 설명할 일이 있다고, 이 우정은 지금도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가 침묵하게 된 것은 아니다. 하나의 빌린 목소리로만 말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옛 글씨 옆에 오늘의 글씨를
마흔두 살의 그는 열여덟에 벌어진 일을 편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지금 어떻게 설명하는지 고치고 있다. 그때 그 직업을 자기 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오늘 알아차렸기 때문에 과거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전부터 그러했던 사실을 더 잘 알아보게 된 것이다. 새 설명이 여전히 틀릴 가능성도 있다. 과감하게 떠났다는 사실이 정확히 보았다는 보증은 아니다.
그때 정말 선택했다는 문장도 지금의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같은 분야를 이십 년 만에 떠나는 다른 사람은 그때는 원했고 지금은 다른 것을 원한다고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과거다. 근속 연수와 사직서가 같아도 하나가 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 내 것인지 잘못 알았다. 그렇지만 그 오해 속에서 산 삶은 여전히 나의 삶이다. 두 종류의 과거를 함께 남기면 이 말을 끝까지 할 수 있다. 앞부분을 없애면 오래 견딘 것이 모든 물려받은 목적의 증명이 된다. 뒷부분을 없애면 정직한 발견 하나가 이십 년을 도려내고 빈칸으로 돌려준다.
그는 수첩을 다시 연다. 그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한 줄이 그대로 있다. 이 년 전에 단번에 알아본 그 글씨다. 읽히지 않도록 새까맣게 칠할 필요는 없다. 더할 말이 있다면 옆에, 오늘의 글씨로 쓰면 된다. 예전 종이가 원래 백지였다고 꾸미지 않아도 새로 알게 된 것을 놓을 곳은 있다.
바탕이 된 학술 논문: Qin, Han (2026). What Kind of Relation Meaning Is (SAE Meaning Theory, Paper 1). self-as-an-end.net ↗ · DOI: 10.5281/zenodo.22652134
바탕이 된 학술 논문: Qin, Han (2026). The Finite Bearer's Carrying-Forward (SAE Meaning Theory, Paper 2). self-as-an-end.net ↗ · DOI: 10.5281/zenodo.2271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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