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얻고 가장 먼저 한 일
코티지에서 루스는 토미의 팔꿈치를 특별한 방식으로 만진다. 캐시는 그 동작이 텔레비전 속 연인이 하던 것임을 기억해 내고, 출처를 지적받은 루스는 크게 화낸다. 사소한 장면이지만 자유의 성격을 드러낸다. 보호 교사도 일과표도 사라졌지만, 이 젊은이들에게는 어른의 친밀함을 안에서 배운 가족과 사회가 없다. 후배는 선배를 흉내 내고 선배는 영화와 방송을 흉내 낸다. 루스의 감정이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진짜 감정을 표현할 몸짓마저 빌려 와야 한다는 뜻이다. 문이 열렸다고 자기 삶을 즉흥적으로 만드는 언어까지 생기지는 않는다.
원본을 찾는 얼굴들
아이들은 자신이 복제된 원본 인간을 ‘파서블’이라 부른다. 역과 상점에서 닮은 얼굴을 훑고, 캐시는 버려진 포르노 잡지 속 여성들의 얼굴을 한 장씩 본다. 부모도 출생의 기억도 없으니 폐지조차 자신의 기원을 찾는 기록물이 된다. 루스와 닮은 여성이 노퍽의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말을 듣자 다섯 명은 크로머로 간다. 유리창 너머 사무실은 루스가 꿈꾸던 평범한 직업 세계를 잠시 현실처럼 보여 준다. 그러나 가까이 따라가 보니 그 여성은 닮지 않았다. 무너진 것은 외모의 일치만이 아니라, 자기 욕망이 바깥의 정상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다.
세상의 값을 자기 입으로 말하다
실망한 루스는 클론의 원본이 마약중독자나 성매매 여성, 노숙인, 범죄자 같은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고 쏘아붙인다. 헤일셤에서 그렇게 배운 것은 아니다. 세상이 자신들을 어느 자리에 놓는지 추론하고, 그 눈금을 자기에게 적용한 결과다. 제도는 사람이 자신의 값표를 대신 읽기 시작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감시자가 없어도 스스로 기대를 낮추고, 희망을 품은 자신을 처벌하며, 그것을 현실 감각이라 부른다. 루스의 잔인한 말은 방어이기도 하다.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원할 자격이 없었다고 만들려는 것이다.
유예라는 소문
코티지에는 헤일셤 출신 연인이 진짜 사랑을 증명하면 기증을 몇 년 미룰 수 있다는 소문이 돈다. 낭만적인 희망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이미 모든 패배가 들어 있다. 기증은 반드시 일어나고, 몸은 결국 가져가며, 바꿀 수 있는 것은 날짜뿐이다.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승리는 사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늦게 사용되는 일이다. 더구나 이 상한선을 정한 것은 당국도 아니다. 어린 시절 숲의 괴담이 공포의 하한선을 만들었다면, 학생들이 스스로 만든 유예의 이야기는 희망의 상한선을 만든다. 희망을 금지할 필요가 없다. 제도 안에서만 희망하는 사람을 만들면 된다.
토미가 만든 증빙 서류
토미는 유예 소문을 들은 뒤 검은 펜으로 작은 상상 동물을 그리기 시작한다. 생물과 기계가 섞인 듯 관절과 부품이 빽빽한 그림이다. 마담이 미술품을 모은 이유가 작품에 영혼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사랑의 진위를 판단하려면 두 사람의 영혼을 봐야 할 것이라고 그는 추리한다. 어린 시절 조롱받았던 능력으로 돌아가 여러 해 노력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존엄이 있다. 그러나 그가 준비하는 것은 탈출이 아니라 신청 자료다. 권력의 조건을 거부하지 않고 더 잘 충족하려 한다. 가장 사적인 창작조차 보이지 않는 심사관에게 제출할 증거가 된다.
잃어버린 것이 모이는 곳
헤일셤 아이들은 노퍽을 영국의 ‘잃어버린 구석’, 사라진 물건이 흘러드는 장소로 오해했다. 크로머의 중고품 가게에서 캐시는 어린 시절 잃어버린 것과 같은 주디 브리지워터의 카세트를 발견한다. 토미는 캐시보다 더 기뻐한다. 소설에서 드물게 회복이 순수한 기쁨으로 남는 순간이다. 동시에 돌아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갈린다. 물건은 다른 한 개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다. 방해받은 관계와 빼앗긴 계절은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지 않는다. 작은 분실물이 돌아오기에 돌아오지 않는 세월의 크기가 선명해진다.
루스의 마지막 선물
오랜 뒤 캐시가 루스의 간병사가 되었을 때, 두 차례 기증을 마친 루스는 자신이 캐시와 토미를 일부러 갈라놓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담의 주소를 건네며 두 사람이 유예를 신청하라고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줄 수 없으니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가능한 미래를 선물하려는 것이다. 그 희망이 실제로는 없다는 사실을 루스는 모른다. 거짓 소문에 기대어 있어도 그 행위에 담긴 우정과 속죄까지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희망이 귀한 세계에서 사람은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타인을 위해 남겨 주려 한다. 캐시와 토미는 그 주소를 들고, 자신들이 아는 유일한 문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