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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동화 읽기 · 07

게르다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카이를 찾아간다―누가 다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대신 정할 수 있을까

《눈의 여왕》―옛 친구를 포기하지 않는 것과, 그 친구가 갈 곳을 평생 대신 정하는 것은 다르다.

Han Qin ·

처음에 카이가 달라지는 모습은 누군가에게 붙잡혀 간 것과는 거리가 멀다. 게르다와 여전히 지붕 위 작은 정원에 앉아 같은 그림책을 본다. 그러다 갑자기 가슴이 아프고 눈에도 무엇인가 들어간 듯하다. 게르다가 가까이 들여다봐도 이물질은 없고, 카이도 이제 괜찮다고 한다. 그 뒤로 장미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꽃은 삐뚤고 잎 사이에는 벌레가 있다며 흉을 보고, 게르다가 울면 못생겼다고 놀린다. 전에는 함께 좋아하던 것이 갑자기 우스꽝스러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두 아이보다 한 가지를 더 안다. 이야기 첫머리에서 세상을 일그러뜨려 비추는 마법 거울이 깨졌고,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눈에 들어가면 흠밖에 보이지 않고, 심장에 들어가면 마음이 차츰 얼어붙는다. 그 두 조각이 카이에게 들어가 있다. 본인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똑똑함도 그대로이고, 남을 흉내 내는 데는 오히려 더 능해진다. 이웃의 말투와 단점을 감쪽같이 따라 하며 웃음을 얻는다. 아무것도 못 하게 된 변화가 아니다. 어떤 재주는 더 많은 칭찬을 받게 된다.

새로운 즐거움도 발견한다. 소매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고, 정교하고 가지런한 모양이 진짜 꽃보다 완벽하다고 느낀다. 눈송이의 아름다움이 가짜인 것도,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인 것도 아니다. 불안한 것은 이제야 세상을 똑똑히 본다고 믿을수록,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게 하던 감각은 줄어든다는 점이다. 게르다가 슬퍼해도 멈춰 서지 않고,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도 흠잡을 거리만 찾는다.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곁의 사람을 그 설명 안에 받아들이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나중에 광장에서 자기의 작은 썰매를 큰 썰매 뒤에 건다. 시작은 스스로 끼어든 놀이였다. 점점 멀리 달려 성문을 벗어나자 줄을 풀고 싶어지지만,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눈의 여왕이 멈춰 모피로 감싸고 이마에 입을 맞추자 추위가 사라진다. 한 번 더 입을 맞추자 게르다와 할머니, 집에 있던 사람들도 기억에서 멀어진다. 아까는 무섭던 여왕이 이제는 아름답고 완벽해 보인다. 카이는 다시 자기가 산수를 얼마나 잘하고 세상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아는지 말하기 시작한다.

게르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카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만 안다. 강을 따라 찾다가 물살에 떠밀려 한 정원에 닿는다. 늙은 여인이 건져 올려 체리를 주고 머리를 빗겨 주며, 꽃이 영원히 피어 있는 곳에서 살게 한다. 눈의 여왕의 세계와는 사뭇 다르다. 따뜻하고 향기롭고 돌보는 사람도 있다. 여인은 소녀를 정말 좋아하고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금빗으로 카이를 잊게 하고, 집의 정원을 떠올리게 할 장미는 모두 땅속에 감춘다.

이 대목이 들어가면서, 게르다가 카이를 찾는 일은 냉혹한 적 하나만 상대하는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정원에서 받은 돌봄도, 게르다의 즐거움도 진짜다. 다만 그 즐거움이 계속되려면,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 더는 기억하지 못해야 한다. 여인은 날마다 문을 막고 못 나가게 하는 대신, 떠나고 싶어 할 이유를 먼저 없앤다. 예전의 바람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려놓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시 떠오를 기회 자체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여인은 모자에 그려진 장미를 미처 지우지 못했다. 게르다는 그 꽃을 보고 정원에서 빠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눈물이 땅에 떨어지자 진짜 장미도 다시 솟는다. 마침내 카이를 기억하고,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정원을 나와 보니 바깥은 벌써 가을이다. 늘 피어 있는 꽃에 가려졌던 시간이 다시 눈앞으로 온다. 그곳이 한 번도 즐겁지 않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웠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까지 접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향을 기억한 뒤에는 판단을 틀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왕궁에 들어간 젊은이가 공주의 마음에 들었다는 까마귀의 말을 듣자, 게르다는 들은 세부를 서둘러 카이의 경험으로 엮는다. 자루를 메고 있었다는 대목도 썰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나기만 하면 될 듯하고, 설명까지 벌써 갖춰진 것 같다. 그러나 등불을 들고 침대에 가 보니 다른 얼굴이다. 거의 확신이 되었던 희망을 놓고, 아직 찾지 못했다고 다시 인정해야 한다.

이 작은 착각은 이야기에서 쉽게 꺼내고 싶은 결론 하나를 막는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언제나 저절로 아는 것은 아니다. 게르다의 끈기는 소중하다. 그래도 눈앞의 사실에 따라 확신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낯선 왕자에게 카이가 되라고 하지 않고, 먼 길을 고생했으니 까마귀의 말이 틀림없다고 우기지도 않는다. 새로 만난 왕자와 공주는 여정을 계속하도록 돕는다. 그 뒤에는 도둑 소녀와 순록, 북쪽의 여인들이 더 먼 곳으로 이끌어 준다.

눈의 궁전에 가까워졌을 때, 마법을 아는 여인이 중요한 사실을 설명한다. 카이의 눈과 심장에 거울 조각이 남아 있고, 지금 그곳이 최고라고 느끼는 것도 조각과 관련되어 있다. 게르다는 이제 옛 친구를 그리워하며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화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설명도 얻는다. 이 동화에서는 마법 거울과 망각, 나중에 꺼낼 수 있는 조각이 실제로 존재한다. 따라서 카이가 지금 만족한다는 것을,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이 내린 최종 결정으로 곧바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카이의 만족을 마음대로 빼도 되는 허상으로 볼 수도 없다. 하루 종일 구해 달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넓은 얼음 궁전에 앉아 얼음 조각으로 여러 모양과 낱말을 맞추려고 애쓴다. 여왕은 '영원'을 만들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온 세상과 새 스케이트도 얻는다고 약속했다. 그 일에는 목표와 미래의 자유에 대한 약속이 있다. 카이는 자신이 얼어 죽을 지경인 줄도 모를 만큼 몰두한다. 소중히 여기는 완벽함과 점점 떠나기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 겹쳐 있다.

게르다가 홀에 들어갔을 때 여왕은 없다. 카이를 빼앗아 오기 위한 결투도 벌어지지 않는다. 알아보고 달려가 안아도 카이는 그대로 앉아 있다.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게르다는 어릴 때 함께 부르던 장미와 아기 예수에 관한 노래도 부른다. 그제야 카이도 울기 시작한다. 자신의 눈물이 눈에 박힌 조각을 씻어 낸다. 게르다를 알아보고,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주위가 얼마나 차갑고 텅 비었는지 처음으로 다시 느낀다.

이 순서가 있기에, 카이를 구하는 일은 옛 친구 한 사람이 끝까지 고집한 일에 그치지 않는다. 게르다가 다가가 기억과 눈물을 가져온 뒤, 카이 자신의 반응이 생긴다. 이제 게르다가 카이를 두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카이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묻고 함께 떠난다. 먼저 옛 방에 데려다 놓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법을 익히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카이가 다시 느끼고 알아보고 대답할 수 있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와 함께 얼음 조각도 기쁨 속에 줄지어 '영원'을 이룬다. 여왕이 정한 조건이 채워졌고, 카이는 더는 여왕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이 마법의 결과를 없애고 평범한 설득의 성공으로 바꾸면 안 된다. 게르다의 기도, 눈보라 속에서 지켜 주는 천사들, 둘이 부른 종교적인 노래는 모두 안데르센이 제시한 길에 들어 있다. 동화에서는 영향이 풀리고, 기억이 돌아오고, 출구가 열리는 일이 한순간에 일어난다. 일상보다 훨씬 분명한 답을 주는 것이다.

바로 그만큼 분명한 답이므로, 여기서 그대로 가져갈 수 없는 것도 살펴야 한다. 현실의 누군가가 옛 생활을 좋아하지 않게 되고, 예전 관계를 거절하거나 우리에게 낯선 관심사를 키운다고 해서, 그 변화만으로 마법에 걸렸다고 할 수는 없다. 게르다의 이야기에는 조각을 볼 수 있는 서술자가 있고, 마법 지식에 근거한 설명이 있으며, 끝에는 조각이 빠진 뒤 카이 자신의 확인도 있다. 평범한 관계에서 옛날이 그립다는 마음은 그런 근거를 대신하지 못한다.

'진짜 너를 알아'라는 말은 깊은 애정에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자기 변화를 다시는 설명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좋아하던 모습으로 돌아와야만 스스로 선택했다고 인정한다면, 그 사람을 찾는 일은 조금씩 예전 자리로 불러들이는 일이 된다. 새 삶을 아무리 또렷이 말해도, 다른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로만 취급된다. 그러는 사람은 진심으로 구하고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정원의 여인처럼 돌보는 것과 남게 하는 것을 뒤섞어, 눈앞의 사람에게는 원래 다른 곳으로 갈 뜻도 있었다는 사실을 놓칠 수 있다.

반대로 카이가 눈의 궁전이 완벽하다고 했다는 말만 듣고, 게르다는 더 찾지 말았어야 한다고 할 수도 없다. 기억을 빼앗겼고 감각은 바깥의 힘으로 바뀌었으며, 가족을 떠올릴 조건조차 잃었다. 그 순간의 만족만으로 답을 끝낸다면, 그를 바꾼 쪽에는 이득이 하나 더 생긴다. 더는 도움을 청하지 않을 만큼 깊이 영향을 주면, 바깥사람은 관심을 거두어야 한다는 이득이다. 대답을 존중하려면 여전히 기억하고 비교할 수 있는지, 하나가 아닌 대답을 만들 조건이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정원과 눈의 궁전을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다. 늙은 여인은 체리와 꽃과 온기를, 여왕은 추위를 느끼지 않는 몸과 완벽한 얼음, 미래의 자유를 준다. 둘 다 실제로 끌리는 것이 있고, 둘 다 예전 관계를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정원을 나온 게르다가 갑자기 즐거움을 원하지 않게 된 것도 아니고, 궁전을 떠난 카이가 다시는 눈송이를 좋아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풀어야 할 것은 어떤 즐거움이나 완벽함이, 당사자 대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지워 버리는 작용이다.

돌아가는 길에 게르다를 도왔던 곳들을 지나 집 앞에 이르자, 둘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다. 작은 정원과 할머니는 익숙하지만, 지나간 시간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할머니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에 관한 복음서를 읽을 때, 둘은 비로소 어릴 적 노래를 알아듣는다. 안데르센은 집으로 돌려보내면서도 성장은 남겨 둔다. 회복된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어린 시절이 아니라, 변화를 겪고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관계다.

게르다는 마침내 카이를 찾았다. 오랫동안 찾아다녔다고 앞으로 그의 일생을 대신 결정할 자격까지 얻은 것은 아니다. 카이도 다시 장미를 보고 옛 노래를 떠올릴 수 있다고 해서, 다시는 변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구해졌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결말에서 가장 소중히 여길 것은, 어쩌면 마침내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물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물을 수 있는 사람은 그저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겨진 사람이 아니다. 찾아온 사람과 나란히 걸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여전히 두 사람이 함께 걸어 나가야 한다.

출처

현재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다. 명시한 판본에 근거한 해석이며 원작 전체의 번역은 아니다. 따뜻한 정원과 차가운 궁전의 매력을 모두 실제의 것으로 남기고, 카이가 스스로 반응하고 묻고 떠나는 순서와 종교적·마법적 조건도 보존한다. 현실에서 달라진 사람을 마법에 걸렸다거나 가짜 자신이 되었다고 단정하는 근거로 쓰지 않으며, 관심을 기울이는 일과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정하는 일을 구별한다.

판본에 관한 주석

텍스트는 일곱 이야기로 이루어진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Snedronningen, 1844) 원작을 따른다. 공공 영역에 있는 《Stories from Hans Andersen》의 영어 완역을 참조하고, 안데르센 연구센터에 실린 진 허숄트의 번역과도 대조한다. 이 글은 해석이지 문장별 번역은 아니다. 마법 정원에서 게르다가 잊는 일, 왕궁의 젊은이를 잘못 알아보는 일, 카이 자신의 눈물이 조각을 씻어 내는 일, 얼음으로 '영원'을 맞추는 일, 집에 돌아온 두 사람이 이미 자랐다는 사실을 보존한다. 게르다와 카이는 친한 놀이 친구이지 혈연 남매가 아니다. 마법 거울은 이야기에서 명시된 사실이지만, 현실의 성격이나 관계 변화를 진단하는 데 가져다 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