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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동화 읽기 · 08

황제는 나이팅게일을 궁전에 두고 싶었다―노래가 좋다고 새의 일생까지 정해도 될까

《나이팅게일》―노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노래하는 존재의 삶까지 결정할 수는 없다.

Han Qin ·

황제는 책을 읽고 나서야 나이팅게일을 알게 된다.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들은 궁전과 정원, 진귀한 장식을 칭찬하다가, 가장 훌륭한 것은 새 한 마리라고 썼다. 황제는 놀란다. 자기 땅에 그런 보물이 있는데 주위에서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다니. 시종을 불러 그날 밤까지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못하면 궁정 사람들 모두 벌을 받을 것이다. 숲에서 자유롭게 울리던 노래는 그렇게 먼저 명령 하나가 된다.

시종들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는 이름들을 뒤지고 이리저리 묻다가, 부엌에서 일하는 소녀에게서 늘 그 노래를 듣는다는 말을 듣는다. 바닷가의 병든 어머니에게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다 지쳐 숲에 앉으면 새가 노래한다. 눈물이 나고, 어머니가 다시 입을 맞춰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황제가 책에서 제국 최고의 것을 찾는 동안, 소녀는 날마다 다니는 길에서 벌써 그 목소리와 친숙했다.

소녀가 일행을 숲으로 안내한다. 새는 황제가 부른다고 바로 궁정이 더 좋은 곳이라 여기지 않는다. 자기 노래는 나무들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게 들린다고 말한다. 그래도 황제가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가겠다고 한다. 아직 잡혀 끌려온 포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새로운 청중에게 노래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한 번 가는 데 동의하는 것과, 앞으로의 생활을 전부 그곳으로 옮기는 데 동의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궁정은 성대한 자리를 마련하고, 노래를 들은 황제는 눈물을 흘린다. 금으로 된 자기 슬리퍼를 상으로 주어 새의 목에 걸어 주려 하지만 새는 사양한다. 황제의 눈물을 보았으니 가장 귀한 보답을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내내 음악을 모르는 지배자와 이해받기를 거부하는 새의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둘이 실제로 만났다. 새는 사람의 마음에 노래를 전하고 싶었고, 황제도 시종의 표정을 보고 칭찬하는 척한 것이 아니라 진짜 감동했다.

달라지는 것은 공연 뒤다. 궁정은 새를 머물게 하기로 하고 새장을 마련한다. 낮에는 두 번, 밤에는 한 번 나갈 수 있게 정한다. 나갈 때마다 시종 열두 명이 새의 다리에 맨 리본을 하나씩 붙잡고 바짝 따라간다. 문서상으로는 외출 허가가 있다. 하지만 날아오르려면 놓지 않는 열두 사람의 손을 달고 가야 한다. 칭찬은 멈추지 않았지만, 어떻게 살지는 더는 새가 결정하지 않는다.

황제의 눈물이 진짜였듯 새장도 진짜다. 앞의 사실이 뒤의 일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아끼는 마음이 충분히 깊으면 곁에 붙잡아 두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노래하러 오고 환대와 호의를 받았다고 해서, 보호와 영예의 이름으로 정해지는 모든 일에 동의한 것도 아니다. 숲에서 어떻게 살지, 언제 노래할지, 다 부르고 어디로 갈지. '이제부터 궁전에 머문다'는 결정과 함께 그런 일들까지 조용히 남의 손으로 넘어간다.

금 슬리퍼를 거절한 장면으로 또 다른 요구를 만들 수도 없다. 눈물이면 충분하다는 것은, 이 만남에서 새가 스스로 선택한 보답이다. 앞으로 모든 청중이 감동만으로 값을 치러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노래를 선물로 주려는 것과, 남들이 노래에는 원래 보수가 필요 없다고 정하는 것은 다르다. 예술가가 이번에 건넨 것을 어떻게 평가할지까지 감상하는 쪽에서 정한다면, 돈을 받지 않는 일조차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될 수 있다.

얼마 뒤 황제는 인공 나이팅게일을 받는다. 보석으로 꾸민 새는 태엽을 감으면 정해진 곡조를 부르고 꼬리가 박자에 맞춰 반짝인다. 둘이 함께 부르게 해 보지만 맞지 않는다. 살아 있는 새는 자기 방식대로 변화를 주고, 기계 새는 톱니바퀴가 정한 대로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계 새가 혼자 부른다. 몇 번이고 계속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진짜 새를 다시 듣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진짜 새는 이미 그 소란을 틈타 창밖으로 나가 숲에 돌아간 뒤였다.

기계로 만든 이 작품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보기 좋고 안정적이며, 듣고 싶은 만큼 태엽을 감아 줄 수 있다. 곡조가 어떻게 되풀이되는지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궁정 음악가가 부품 하나하나를 설명할 수 있는 장치에 흥미를 갖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분해하고 설명하고 다시 부르게 할 수 있는 음악이 중심을 차지할수록, 스스로 달라지고 떠날 수도 있는 가수가 갈수록 불편해 보인다는 것이다. 다른 두 존재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 기준을 정한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둘을 손안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진짜 새는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을 받고 추방된다. 황제를 울린 일, 성대한 대접을 받은 일이 이제 마음대로 떠나면 안 되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한 번 환영받으면 그 뒤로 반드시 남아야 한다면, 환대와 억류를 어떻게 뚜렷이 구별할 수 있을까. 궁정 사람들이 아쉬워한다고 해서, 새가 노래를 마치고 숲으로 날아갈 자격을 잃지는 않는다. 노래는 선물이지, 자기 몸을 넘겼다는 증서가 아니다.

기계 새는 나중에 닳아 고장 나고, 수리한 뒤에도 가끔밖에 쓸 수 없게 된다. 황제가 위독해지자 시종들은 뒤를 이을 사람에게로 가고, 침상 곁에는 스스로 태엽을 감지 못하는 새만 남는다. 죽음이 황제의 가슴 위에 앉아 왕관과 칼과 깃발을 들고 있다. 주위에는 평생 행한 선한 일과 악한 일도 나타나 말을 건다. 황제는 익숙한 소리로 그 과거를 덮고 싶어 급히 음악을 찾지만, 기계 새는 잠잠하다. 은혜를 갚으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장치의 작동을 넘어 스스로 행동할 능력이 없다.

그때 창밖에서 노래가 들린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살아 있는 새가 스스로 돌아왔다. 죽음마저 더 듣고 싶어질 만큼 노래하여 왕관과 칼과 깃발을 하나씩 되찾는다. 이어 조용한 묘지와 꽃과 나무, 사람들의 눈물을 노래하자 죽음은 자기 정원을 떠올리고 병상에서 떠난다. 이 노래는 황제가 잠시 두려움을 잊게 할 뿐 아니라, 죽음을, 귀 기울일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게 한다. 황제는 다시 잠들고, 깨어났을 때 힘을 되찾는다.

돌아왔다고 예전의 새장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새는 통제를 거절하면서도 황제를 걱정할 수 있다. 진짜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도 열두 개의 리본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자유에 영영 떠나야 한다는 뜻만 남는다면, 오히려 예전 관계가 앞으로는 정반대 행동만 하도록 끝없이 결정하게 된다. 이번에 돌아오기로 한 것은 지난번에 떠난 이유를 철회한 것이 아니다. 두 번 모두 자신의 판단에서 나올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상처 입은 사람이 모두 따라야 하는 길도 아니다. 황제가 위험해졌다는 사실만으로, 추방된 새에게 그를 살려야 하는 빚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 새는 오는 쪽을 선택했다. 선택이기에 무게가 있다. '정말 착하다면 반드시 돌아온다'로 바꾸면, 창은 또다시 들어가기를 거절할 수 없는 문이 된다. 나중의 독자가 그 너그러움을 내세워, 떠난 모든 사람에게 다시 베풀어 원망이 없음을 증명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감사한 황제는 자기가 추방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 보답할지 묻는다. 이제 곁에서 살며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라고 한다. 기계 새를 부숴 버리려 하기도 한다. 예전보다 느슨한 제안이고, 정해진 공연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새가 여전히 거절하는 것은 거처가 이곳이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자유롭게 노래해도 된다고 하면서, 어디서 살지는 주인이 정한다면 새에게 필요한 자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기계 새를 부수는 데도 찬성하지 않는다. 그 새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말한다. 목숨을 구한 공을 대가로 자기 대신 놓였던 것에 복수하지 않는다. 이야기 역시 기술의 실패를 기술 자체의 죄로 만들지 않는다. 기계 새는 많은 공연을 했고 사람들이 실제로 좋아한 것을 주었다. 다만 황제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갑자기 마음을 쓰고 스스로 돌아와 어떻게 노래할지 정하는 생명으로 변할 수는 없다. 대신하라고 요구받은 것이, 원래 줄 수 있는 범위를 넘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새는 다른 왕래를 제안한다. 자신은 바깥에서 살다가 오고 싶을 때 창가에 앉아, 황제를 기쁘게도 하고 생각하게도 하는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이다. 어부의 오두막과 농부의 밭을 날아다니며, 궁정 밖의 기쁨과 슬픔, 선과 악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황제는 자기를 불안하게 하는 목소리를 음악으로 덮으려 했다. 이제 새는 평소 듣지 못하는 일을 가져오려 한다. 사랑받는다는 것이 편안한 곡을 반복한다는 뜻만은 아니게 된다. 편안하지 않은 삶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 주는 일이다.

그렇다고 결말이 완벽한 통치 방안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새는 자기가 모든 소식을 전한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다. 둘은 여전히 특별하고 사적인 신뢰로 이어질 뿐, 누구나 검증할 수 있는 공적인 통로를 세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관계에서 바뀐 한 가지는 분명하다. 황제는 새를 붙들어 두어 언제나 들을 수 있다는 보장을 얻을 수 없다. 다시 노래가 창가에 오기를 바란다면, 황제는 노래하는 존재에게 창밖의 자기 생활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부엌 소녀에게서 궁정으로, 금 새장에서 다시 숲으로 옮겨 가는 동안 새는 줄곧 노래하지만 듣는 방식은 계속 달라진다. 소녀는 지쳐 쉬면서 위로받았다고 새를 데려가지 않는다. 황제는 처음 감동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찬사를 통해 새의 미래까지 결정할 자격을 얻은 듯 행동한다. 마지막에 돌아온 새는 둘을 다시 나눈다. 노래해 주고 싶고 황제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감사와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영원히 여기 살고 싶지는 않다.

다음 날, 황제가 죽어 있을 줄 알고 들어온 궁정 사람들은 그가 건네는 아침 인사를 듣는다. 밤을 바꾼 새는 그렇다고 다시 새장에 살 필요가 없다. 황제는 보석으로 된 가수를 가졌고, 살아 있는 새를 열두 리본으로 보호하려 했다. 끝내 그를 구한 목소리는 묶이지 않은 새가 창밖에서 전한 것이었다. 창과 새장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창은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새장은 다음 만남에는 더는 상대의 결정이 필요 없도록 보장받으려 한다.

출처

현재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이다. 명시한 판본에 근거한 해석이며 원작 전체의 번역은 아니다. 처음 방문하기로 한 선택, 떠나기로 한 선택, 다시 돌아오기로 한 선택을 구별하며, 감동과 환대에서 새의 일생을 정할 권리가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 돌아옴을 모든 피해자의 의무로 바꾸지 않고, 기계 새의 실제 가치와 한계, 비밀스러운 왕래에는 공적인 검증 통로가 없다는 점도 남겨 둔다.

판본에 관한 주석

텍스트는 안데르센의 〈나이팅게일〉(Nattergalen, 1843)을 따른다. H. W. 덜켄의 공공 영역 영어 번역을 참조하고, 안데르센 연구센터에 실린 진 허숄트의 영어 번역과 대조한다. 숲에서 듣는 일, 황제의 눈물, 열두 개의 리본, 기계 새의 기능과 마모, 죽음과 선악의 지난 일들, 진짜 새가 자유롭게 돌아오는 일, 기계 새를 부수기를 거절하는 일, 몰래 찾아오는 결말을 보존한다. 이야기의 '중국'은 작가가 만든 동화적 공간이며, 현실의 중국 궁정 문화를 입증하는 자료가 아니다. 새의 떠남과 돌아옴에 대한 해석 역시 복제나 기술, 예술에 대한 보수를 부정하는 뜻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