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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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1장 · 총 81장

말할 수 있는 도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道可道也,非恒道也。名可名也,非恒名也。无,名万物之始也;有,名万物之母也。故恒无欲也,以观其眇;恒有欲也,以观其所徼。两者同出,异名同谓。玄之又玄,众眇之门。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无,名……’와 ‘有,名……’처럼 끊어 읽는 것은 이 주석이 채택한 독법입니다. 백서에 이 구두점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첫 문장

『도덕경』 첫 문장을 읽을 때 가장 괴로운 점은 노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 부를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어려운 글자는 하나도 없다. 한 자 한 자 다 아는 글자다. 그런데 이어 놓고 보면 옳은 말 같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道)라는 무언가가 있기는 한데 그것은 말로 할 수 없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아니게 된다는 이야기 같다.

이천 년 동안 독자들이 가장 먼저 걸려 넘어진 문턱이 바로 여기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막혀 책을 덮었다. 신비주의 책이라고 여기면서. 막히지 않고 넘어간 사람도 많다. 그들은 ‘도’를 언어 뒤에 숨은 오묘한 실체로 받아들이고 계속 읽어 나갔다.

훗날 노자를 형이상학으로 풀어낸 현학(玄學) 사상가들이 걸어간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은 사실 빗나갔다.

2. 상(常)이 아니라 항(恒)

먼저 ‘비상도(非常道)’, 이 세 글자에서 멈춰 보자.

1973년, 중국 창사의 한나라 무덤 마왕퇴(馬王堆)에서 비단에 쓴 『도덕경』, 곧 백서(帛書)가 나왔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통행본보다 삼백 년이 앞선다. 백서에는 ‘비상도’가 아니라 ‘비항도(非恒道)’라고 적혀 있다.

한 글자 차이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황제 문제(文帝)는 이름이 유항(劉恒)이었다. 황제의 이름자를 피해 쓰는 관습, 곧 피휘 때문에 ‘항(恒)’ 자는 모두 ‘상(常)’ 자로 바뀌었다. 이천 년 동안 전해진 판본은 모두 이렇게 고쳐진 것이다.

‘상’과 ‘항’은 비슷한 말처럼 들리지만 글자가 품은 깊이가 다르다.

‘비상도’로 읽으면 ‘그 참된 도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린다.
‘비항도’로 읽으면 ‘그 참된 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린다.

뒤에서 보겠지만 노자가 세우려는 것은 뒤쪽 뜻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은 참된 도가 어딘가에 숨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다.

3. 남김없이 거둘 수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道可道也,非恒道也)

입 밖으로 나온 ‘도’는 어느 것도 그 영원한 도가 아니다.

가장 손쉬운 독법은 이렇다. 참된 도는 언어 바깥에 있다. 언어로 그려 낼 수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진짜는 수면 아래 숨어 있다.

깊어 보이는 독법이지만, 사실은 노자를 단순하게 만든다.

노자는 ‘참된 도는 언어 바깥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은 ‘가도 비항(可道非恒)’, 곧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항’이 가리키는 것이 도가 아니라는 데 주의하자. ‘당신이 말한 그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어떻게 말하든, 얼마나 깊이, 얼마나 세밀하게 말하든, 끝내 다 거둬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다.

거둬지지 않은 그 부분은 언제나 남아 있다.

말해진 ‘도’ 뒤에 온전한 ‘참된 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 말하려던 그것 자체의 한 부분은 반드시 말 밖으로 새어 나간다.

이렇게 새어 나가 끝내 거둬지지 않는 나머지를 부르는 이름이 있다. 이 해설이 앞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올 말이다.

여항(餘項).

도는 보편적 여항이다.

‘항도(恒道)’란 바로 이것, 여항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4. 도와 덕, 두 글자

여항이라는 말을 손에 쥐면 『도덕경』이라는 제목이 비로소 읽힌다.

이천 년이 흐르는 동안 ‘도덕’이라는 두 글자의 뜻은 바뀌어 버렸다. 지금 ‘도덕’이라고 하면 누구나 윤리, 규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떠올린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치는 독자도 바르게 사는 법을 일러 주는 책을 기대한다.

그런데 노자는 이 책에서 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1장에는 윤리에 관한 말이 한 줄도 없다. 2장은 시작하자마자 ‘아름다움’이니 ‘선’이니 하는 윤리의 말을 허문다. ‘아름다움’을 내세우는 순간 ‘추함’이 함께 생기고, ‘선’을 내세우는 순간 ‘선하지 않음’이 함께 생긴다는 것이다.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라면 이렇게 시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자에게 ‘도’와 ‘덕’은 무슨 뜻인가?

도는 이 책이 가장 먼저 해체하는 글자다. 끝까지 해체하고 나면 이런 것이 남는다. 어떤 구(構)로도, 곧 경계를 그어 세운 어떤 질서로도 남김없이 거둘 수 없는 것. 도는 길도 아니고 규범도 아니며 우주의 본체도 아니다. 끌로 한 번 깎아 낼 때마다, 곧 한 번의 착(鑿)이 지나갈 때마다 그 뒤에 언제나 남는 부분, 보편적 여항이다.

덕(德)은 이 책이 뒤에서 거듭 돌아오는 글자다. 덕 역시 미덕이 아니다. 덕은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그가 몸담은 여러 구에 아직 거둬지지 않은 부분이다. 개체의 여항이다.

둘을 합치면 『도덕경』이라는 제목은 글자 그대로 이런 뜻이 된다.

언제나 구 밖으로 넘쳐 나오는 것에 대하여 — 보편적인 것(도)과 개체적인 것(덕).

오천 자 남짓한 책 한 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한 가지를 말한다.

5. 유와 무는 한 번의 착이다

1장의 다음 구절들은 구조가 가장 촘촘하다.

‘무(無)’는 만물의 시작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無,名萬物之始也;有,名萬物之母也)

이 두 구절에서 가장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시간 순서로 읽는 것이다. 먼저 텅 빈 ‘무’가 있었고, 거기서 ‘유’가 솟아났고, ‘유’가 다시 만물을 낳았다는 식으로.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

노자가 곧바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둘은 함께 나온다. (兩者同出)

유와 무는 앞뒤 관계가 아니다. 같은 한 번의 착이 낳은 두 면이다.

무슨 말인가?

흰 종이에 원을 하나 그린다고 해 보자. 선을 한 번 긋자 원이라는 있음이 생겼다. 종이 위에 모양 하나가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같은 순간 없음도 생겼다. 원 바깥에 펼쳐진 넓은 ‘원 아닌’ 영역 역시 이 한 번의 착이 갈라 낸 것이다.

원이 없으면 ‘원 아닌 것’도 없다.

원과 원 바깥은 같은 한 번의 착이 만든 두 면이다.

‘무’는 원을 그리기 전의 상태다. 아무 구분 없이 한 덩어리로 뒤섞여 있다. 이것이 만물의 시작이다. 여기서 ‘시작’은 시간의 출발점이 아니라 구조의 출발점이다. 모든 구분이 가능해지는 바탕이다.

‘유’는 원이 그려지는 그 찰나다. 구분이 생기고 사물이 모양을 얻는다. 이것이 만물의 어머니다.

‘어머니’를 ‘만들어 내는 자’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머니란 무엇인가? 낳는 일이 가능해지는 자리다. ‘유’라는 첫 자리가 있어야 그 뒤로 세계가 겹겹이 펼쳐질 수 있다. 어머니는 자리이지 손이 아니다.

여기서 잘못 보기 쉽다. 후대 주석가들은 ‘어머니’를 ‘도가 만물을 낳는다’고 할 때의 낳는 주체로 읽었고, 그 위에 ‘도는 우주의 본체’라는 형이상학을 통째로 지어 올렸다. 하지만 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이렇다. 한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부터 세계가 한 겹 한 겹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 자리를 ‘유’라고 부른다. 유는 어머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

6. 두 가지 수행

그러므로 늘 욕망 없이 그 미세한 시작을 보고, 늘 욕망을 품고 그것이 닿는 경계를 본다. (故恒無欲也,以觀其眇;恒有欲也,以觀其所徼)

이 구절은 어떻게 닦는지를 말한다.

늘 욕망이 없다는 것은 욕망을 억누르라는 말도, 세상을 등지라는 말도 아니다. 욕망을 일으키는 사람의 자리에 자기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나는 저것을 원한다.’ ‘나는 이게 좋다.’ ‘나는 저게 싫다.’ 문장마다 ‘나’가 주어 자리에 앉아 있다.

이 ‘나’가 곧 하나의 구다. 스스로 둘러친 경계, ‘여기까지가 나고 저기부터는 내가 아니다’라고 긋는 선이다.

늘 욕망이 없다는 것은 이 ‘나’를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한다’는 생각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그때 무엇이 보이는가?

묘(眇)가 보인다.

묘란 무엇인가? 시작하는 자리의 미세함이다. 끌로 경계를 가르기 직전, 하나의 구가 막 모양을 갖추려 하지만 아직 갖추지 않은 순간이다. 어떤 것이 막 이름을 얻으려 하지만 아직 얻지 못한 찰나다.

자신을 ‘나는 원한다’의 자리에 두지 않는 사람만이 이 순간을 본다.

왜 그런가? ‘나는 원한다’를 세우는 순간, 눈앞의 것을 ‘내가 원하는 구’ 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때 보이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나에게 주는 쓸모다. 컵을 보면 ‘물 마시는 도구’가 보이고, 사람을 보면 ‘나에게 쓸모가 있나 없나’가 보인다.

늘 욕망 없이, 곧 ‘나는 원한다’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컵’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의 컵이 보이고, 당신이 딱지를 붙이기 전의 그 사람이 보인다.

백서에는 ‘묘(眇)’, 통행본에는 ‘묘(妙)’로 되어 있다. 읽는 소리는 같지만 眇 쪽이 글자로서 더 구체적이다. 眇는 너무 가늘어서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묘하다’의 妙는 그보다 추상적이다. 노자가 말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구체적인 쪽이다.


늘 욕망을 품고 그것이 닿는 경계를 본다.

이것이 또 하나의 수행이다.

늘 욕망이 있다는 것은 욕심을 부리라는 말이 아니다. 구체적인 방향을 품고 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

앞의 ‘늘 욕망이 없음’은 ‘나는 원한다’를 내려놓아 알아차림이 드러나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평생 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일을 해야 할 때는 방향을 하나 세워야 한다. 지금 나는 이 일을 하겠다고.

그때는 무엇이 보이는가?

소요(所徼)가 보인다.

요(徼)는 경계다. 소요는 세운 방향이 가서 닿는 경계다.

무슨 일이든 실제로 해 보면 어느 지점에서 벽에 부딪힌다. ‘이쪽으로는 더 밀어도 안 밀린다.’ ‘여기 뭔가 걸려 있다.’ ‘이 길로는 못 간다.’ 이렇게 걸리는 자리가 요다.

‘소요’와 ‘요’가 같지 않다는 데 주의하자. 백서에는 ‘소(所)’ 한 글자가 더 붙어 있다. 한 글자 차이다.

‘요’는 가만히 놓여 있는 경계다.
‘소요’는 걸어가 닿아야 비로소 드러나는 경계다.

걷지 않으면 경계는 드러나지 않는다. 걸을수록 경계는 더 뚜렷해진다.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 경계는 미리 거기 놓여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해 나가면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통행본은 이 ‘소’ 자를 뺐다. 빼는 순간 문장에서 움직임이 사라진다.

노자는 여기서 도를 닦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두 가지 수행을 말한다.

늘 욕망 없이, 시작을 본다.
늘 욕망을 품고, 끝을 본다.

둘이 합쳐져야 온전하다.

시작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일을 할 수가 없다.
끝만 보아서도 안 된다. 이름 붙기 전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둘 다 있어야 한다.

7. 현

둘은 함께 나오되, 이름은 달라도 가리키는 것은 같다. (兩者同出,異名同謂)

다시 유와 무라는 두 이름으로 돌아가자. 둘은 같은 한 번의 착이 낳은 두 면이다. 그래서 함께 나온다.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같은 하나다.

노자는 여기서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일부러 밝히지 않는다. 뜸을 들인다.

다음 구절에 가서야 밝힌다.

현이 겹치고 또 겹치니, 뭇 묘가 나오는 문이다. (玄之又玄,衆眇之門)

그것을 이렇게 부른다.

현(玄).

현은 착구 순환(鑿構循環) 그 자체다.

무슨 뜻인가? 이런 것이다.

경계를 한 번 가르면 유와 무가 동시에 생긴다. 유가 나와 펼쳐지기 시작하고, 하나의 구조로 자란다. 구조가 끝까지 펼쳐지면 그것이 다시 경계를 새로 가를 바탕이 된다. 그 위에 다시 선을 그으면 새로운 유와 무가 생긴다. 또 펼쳐진다. 또 끝까지 간다. 또 한 번의 가름을 위한 바탕이 된다.

한 겹. 또 한 겹. 멈추지 않는다.

‘현이 겹치고 또 겹친다’는 말이 이것이다. 한 겹 위에 또 한 겹이 얹히며 순환이 끝없이 위로 밀고 올라간다.

현이라는 글자가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신비롭고 오묘하다는 뜻의 ‘현’이 아니다. 겹겹이 쌓이며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이 운동 자체다.

이 순환은 어째서 멈추지 않는가?

여항이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경계를 어떻게 가르든, 그렇게 세운 구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늘 조금은 넘쳐 나온다. 그렇게 넘쳐 나온 것이 다음 착, 곧 새로 경계를 가르는 일의 출발점이 된다. 한 번의 가름으로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다면 순환은 거기서 멈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가름도 모든 것을 담아낸 적이 없다.

그래서 다시 시작할 자리는 언제나 남는다.

‘뭇 묘가 나오는 문’. 모든 묘가 이 문에서 나온다. 이 문은 여항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보장하는, 끝없이 낳고 또 낳는 원리다.

여항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묘는 끊임없이 솟아난다.
묘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한, 세계는 한 겹 한 겹 펼쳐진다.

이것이 이 장이 세우려는 큰 틀이다.

8. 첫 장은 구체적인 일을 하나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 1장은 구체적인 일을 하나도 말하지 않는다.

1장이 말하는 것은 모든 구체적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다.

뒤의 여든 장은 성인(聖人)을 말하고, 물을 말하고, 전쟁과 나라 다스리기와 몸 닦기와 삶과 죽음을 말한다. 그 모든 이야기가 이 전제 위에서 돌아간다. 전제는 이렇다.

착구 순환은 언제나 돌아간다.
여항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경계를 한 번 가를 때마다 시작하는 곳과 끝나는 곳이 있다.
늘 욕망이 없는 사람은 시작을 본다.
늘 욕망이 있는 사람은 끝을 본다.

책 전체를 떠받치는 조건을 노자는 이 첫 장에서 한 구절도 빠뜨리지 않고 다 세웠다. 그러고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2장으로 넘어간다.

『도덕경』을 읽을 때 가장 흔한 잘못은 그 언어를 신비주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는 말로 할 수 없는 오묘한 무엇이고, ‘현이 겹치고 또 겹친다’는 말은 어쩐지 고상하게 들리니 틀림없이 헤아릴 수 없이 깊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노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것은 구조로 보면 아주 분명한 이야기다. 이름을 하나 세우면 반드시 무언가가 넘쳐 나온다. 이것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곧 현이다.

노자가 ‘현’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이것을 부를 다른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이것은 곧장 그 이름을 넘쳐 버린다. 그러니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현.

현은 신비가 아니다. 현은 이 책이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