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도 하나의 구축이다
케냐 장거리 달리기와 자메이카 단거리 달리기에서 나타나는 성과의 집중은 실재한다. 그러나 그 집중을 한 민족의 몸에 깃든 천부적 재능의 이야기로 압축하면, 선발과 제도, 그리고 측정 밖에 남겨진 사람들까지 함께 지워진다.
이 글의 목차
1. 두 곳에 실제로 집중된 성과
사실인 것이 두 가지 있다. 공식 경기 결과만 찾아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나는 동아프리카에 있다. 1964년 이후 중장거리 달리기의 성과는 케냐 리프트밸리 지역의 칼렌진족에게 놀라울 만큼 집중되었다. 연구자들이 선수의 집단 소속을 분류해 분석한 자료가 있다. 남자 800미터부터 마라톤까지 올림픽 메달과 세계선수권 메달, 마라톤 연간 상위 25위 기록을 집계한 것이다. 그중 칼렌진 선수들에게 돌아간 것은 올림픽 메달 54개, 세계선수권 메달 77개, 마라톤 연간 상위 25위 기록 206건이었다. 케냐 안에서만 보아도 주요 트랙 종목 메달의 약 84퍼센트를 칼렌진족이 차지했다.
다른 하나는 카리브해에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자메이카는 단거리에서 그에 못지않게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다. 남자와 여자, 100미터와 200미터에서 대회가 거듭될 때마다 많은 메달을 가져갔다. 자메이카 선수를 다룬 알파-액티닌-3 논문에도 나오듯, 베이징의 남녀 100미터와 200미터 개인 종목 메달 12개 가운데 7개가 자메이카에 돌아갔다.
이 두 집중은 실재한다. 너무 뚜렷해서 그저 몇몇 일화라며 넘길 수 없다. 이 글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정할 생각도 없다.
이 글이 묻는 것은 다른 데 있다. 사람들은 이 두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 두 집중을 둘러싸고 여러 설명이 자라났다. 그런데 그 설명들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맨발로 학교까지 달려가는 일, 고지대, 특정 유전자, 어느 학교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 다음 그것을 원인으로 만든다. 현상 전체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원인으로.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은 그 설명 자체도 일종의 구축이라는 점이다.
앞선 열네 편에서 다룬 구축은 모두 드러나 있었다. 규정 속에, 점수표 속에, 기록부 속에, 사람을 두 집단으로 가르는 문턱값 속에 있었다. 이번에 다룰 구축은 숨어 있다. 어느 규정에도 적혀 있지 않다. 사람들이 이 성과들을 이야기할 때 쓰는 인과의 언어 속에 있다. 몸의 한 특징이 어느 현상의 원인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앞선 모든 구축과 마찬가지로 완결되기를 원하며, 마찬가지로 끝내 완결되지 못한다.
먼저 이 글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서로 정반대인 두 극단 중 하나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몸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생물학적 차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결정론만큼이나 부정확하다. 이 설명들이 모두 편견이니 통째로 버리자는 말도 아니다. 여기서 하려는 말은 더 좁고 더 정확하다. 이 설명들에는 공통된 논리적 비약이 있다. 그 비약이 실제 관찰을 아직 증명되지 않은 인과적 단언으로 바꾸어 놓는다. 해체하려는 것은 그 비약이지 관찰 자체가 아니다. 관찰은 대체로 사실이다. 구축은 그 사이의 비약이다.
2. 먼저 구별해야 할 두 질문
이 설명들이 어디서 잘못되는지 보려면 먼저 한 가지 구별을 해야 한다. 이 구별이 이 글의 토대다.
전혀 다른 두 질문이 자주 하나의 질문으로 취급된다.
첫 번째 질문. 같은 칼렌진족 안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달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두 번째 질문. 칼렌진족이라는 집단이 세계의 다른 집단들보다 중장거리 달리기에서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둔 이유가 무엇인가.
질문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첫 번째에 답하려면 칼렌진족 내부에서 빠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유전자, 아킬레스건, 훈련 같은 것이다. 두 번째에 답하려면 집단 사이의 격차를 만들어 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 원인은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읽는다고 곧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집단 내부의 유전율로는 집단 사이 차이의 원인을 식별할 수 없다. 이 한 문장이 이 글 전체의 열쇠다.
예를 들면 분명해진다. 칼렌진족 안에서 아킬레스건의 어떤 특징이 달리기 능력 차이의 일부를 설명한다고 하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칼렌진족과 다른 집단 사이의 성적 격차 중 얼마가 아킬레스건 때문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집단 사이에는 지리, 경제, 학교, 선수 모집, 훈련 체계의 차이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혈통과 얽혀 있으며,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집단 내부의 차이와 집단 사이의 차이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다.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뒤의 질문에 그대로 옮기는 것은 기본적인 오류다.
이 구별을 따라가면 곧바로 한 가지가 드러난다. 유전자에 관한 것이든 환경에 관한 것이든, 그 설명들은 거의 모두 첫 번째 질문에만 답하거나 중간에 있는 무언가만 측정했다. 그런데도 두 번째 질문의 답으로 쓰였다. 정작 설명해야 할 두 번째 문제, 곧 집단 사이의 격차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어느 한 요인이 그중 몇 퍼센트를 만들어 냈는지 식별된 바가 없다.
이 구별이 번번이 무시되는 까닭은 직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개인 사이에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면 집단 사이에도 당연히 차이를 만들 것 같다. 너무나 자명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렇게 곧장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집단 사이에는 한 집단 안의 개인들을 비교할 때 드러나지 않는 차이도 많기 때문이다. 같은 칼렌진 마을의 두 아이를 놓고 보면, 둘의 차이는 주로 그 마을 안에서도 달라지는 요인에 돌릴 수 있다. 재능이나 훈련 같은 것이다. 하지만 칼렌진족과 북유럽의 어느 나라를 비교하면 경제, 학교의 밀도, 본보기로 삼을 선수, 에이전트 인맥, 달리기를 국제적인 직업으로 만들어 주는 시스템 전체가 달라진다. 이런 조건은 집단 사이에서는 크게 달라지지만 같은 집단의 개인 사이에서는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집단 간 격차의 주된 원인은 개인 간 비교에서 작용하던 형질보다, 그 비교에서는 보이지 않던 요인들일 수도 있다.
이 점은 아주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집단 차원의 성적 격차 중 얼마가 인과적으로 설명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타당한 답은 이렇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제시된 요인 하나하나를 따로 보아도 그 몫은 식별되지 않았다.
3. 사실인 숫자가 다른 숫자 행세를 할 때
이 설명들이 특히 사람을 현혹하는 이유는 흔히 진짜 숫자를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숫자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측정한 대상은 이야기 속의 대상과 다르다.
구체적인 숫자 몇 개를 보자.
안지오텐신 전환효소, 즉 ACE와 관련된 한 변이를 조사한 연구는 그것이 혈중 효소 활성 차이의 최대 24퍼센트를 설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24퍼센트라면 작지 않은 수치다. 그러나 같은 연구들은 이 변이와 케냐의 엘리트 선수 여부 사이에서 유의한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24퍼센트는 그 변이가 혈액 속 효소 활성을 얼마나 설명하는지에 관한 숫자다. 케냐 선수들의 성적을 얼마나 설명하는지에 관한 숫자가 아니다.
알파-액티닌-3, 즉 ACTN3를 다룬 한 연구에서는 이 유전자가 그리스 청소년 남성의 40미터 달리기 기록 변이 중 2.3퍼센트를 설명하는 것으로 측정되었다. 반면 자메이카에서는 선수와 대조군 사이의 해당 유전자형 차이가 유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2.3퍼센트는 그리스 청소년들에게서 측정한 단거리 기록의 변이다. 자메이카 올림픽 단거리 선수들의 성적이 아니다.
아킬레스건 연구는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케냐 달리기 선수 32명을 조사한 연구에서 아킬레스건의 모멘트암을 측정한 값은 표본 내 달리기 경제성 변이의 30퍼센트를 설명했다. 30퍼센트라니, 상당한 숫자처럼 들린다. 그런데 같은 연구에서 달리기 경제성과 그 연구가 사용한 경기력 지표 사이에는 거의 아무 관계도 없었다. 상관계수는 -0.01이었다.
잠시 멈추어 이 대목을 보자. 아킬레스건의 특성은 달리기 경제성 변이의 30퍼센트를 설명한다. 그런데 달리기 경제성과 그 표본의 실제 경기력 지표를 잇는 상관은 거의 0이다. 이 형질은 실험실의 중간 변수를 설명했지만, 그 변수를 거쳐 실제 경기력을 설명하는 경로는 그 연구에서 입증되지 않았다. 사실인 30퍼센트와 경기력 사이에, 거의 0인 연결이 놓여 있다.
숫자의 눈속임은 바로 여기서 일어난다. 반드시 누군가의 의도인 것은 아니다. 중간 표현형에 붙은 백분율에 새 이름표를 달아 국가나 민족 집단의 성적을 설명하는 백분율로 쓰는 것이다. 아킬레스건이 달리기 경제성의 30퍼센트를 설명한다는 말은 아킬레스건이 칼렌진족 성공의 30퍼센트를 설명한다는 이야기로 바뀐다. 하지만 두 30퍼센트 중 하나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측정된 적이 없다. 둘을 이어 주어야 할 고리, 달리기 경제성에서 실제 경기력으로 가는 연결이 바로 그 연구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선 몇 편과 같은 선 위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변형이다. 7편에서는 10종경기 점수 계수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 공개되지 않았다. 12편에서는 러닝화의 40밀리미터라는 선에 도출 과정이 없었다. 14편에서는 테스토스테론 문턱값이 효과 크기로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었다. 그 글들의 문제는 이유를 대지 못하는 자리에 정밀한 선이 그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필요한 숫자가 없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숫자가 있다. 게다가 진짜다. 그러나 그 진짜 숫자가 측정한 것은, 그 숫자로 설명하려는 대상과 다르다. 앞에서는 정밀함이 근거의 부재를 가렸다면, 이번에는 사실이지만 엉뚱한 대상을 잰 숫자가 존재하지 않는 인과의 숫자 행세를 한다.
이 바꿔치기를 알아채기는 특히 어렵다. 구체적인 숫자를 바라는 사람의 욕구를 채워 주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말끔히 설명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정밀한 백분율 하나는 안도감을 준다. 마침내 수량화했고 이해했다는 느낌이 든다. 듣는 사람은 그 백분율이 정확히 무엇을 측정한 것인지 좀처럼 되묻지 않는다. “아킬레스건이 30퍼센트를 설명한다”는 말은 칼렌진족 성공의 30퍼센트를 설명한다는 뜻처럼 들린다. 실제로 설명한 것은 그 연구의 성적 지표와 거의 상관이 없었던 중간 변수인데도 그렇다. 숫자의 구체성이 측정한 대상과 설명하려는 대상 사이의 어긋남을 가려 버린다. 제자리를 벗어난 진짜 숫자는 모호한 단언보다 더 기만적일 수 있다. 수량화의 권위를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4. 이야기의 근거는 이야기보다 좁다
널리 퍼진 몇 가지 결정론적 이야기를 이 잣대 위에 하나씩 올려놓으면, 각 이야기의 어디가 좁은지 보인다.
첫 번째는 맨발로 학교까지 달렸다는 이야기다.
칼렌진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날마다 먼 길을 달려 등교했고, 그래서 달리기 실력을 길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상관관계뿐이다. 엘리트 달리기 선수들과 대조군을 포함해 404명을 조사했을 때, 어린 시절 학교까지 달려갔다고 답한 비율은 대조군에서 약 22퍼센트, 국가 수준 선수에서 약 73퍼센트, 국제 수준 선수에서 약 81퍼센트였다.
이 상관관계는 사실이다. 하지만 설명의 방향은 둘일 수 있다. 조사한 연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연구 설계로는 둘을 가려낼 수 없다고 인정했다. 멀리 달렸기 때문에 강해진 것일까. 아니면 본래 달리기가 비교적 수월했기 때문에 달리기를 택한 것일까. 달리기가 수월한 아이가 달리기를 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방향과, 달리기가 아이를 강하게 만든다는 방향은 이 자료로 분리할 수 없다. 더 이른 시기의 면담도 있다. 소규모 엘리트 선수 집단 20명 가운데 14명은 학교에 갈 때 장거리를 달리는 일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뒷받침하는 것은 표본에 포함된 엘리트 선수들에게 달리기 통학이 더 흔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칼렌진 챔피언이 맨발로 10킬로미터를 달렸다는 것이 아니며, 하물며 그 통학이 훗날의 성공을 만들어 냈다는 것도 아니다.
두 번째는 고도가 챔피언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리프트밸리 지역의 고도는 해발 약 2,000미터다. 고지대가 생리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높은 고도는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가장 직접적인 반례로 티베트인과 안데스 주민이 있다. 훨씬 높은 곳에 살며 생리적 적응도 뚜렷하지만, 케냐와 같은 규모로 국제 중장거리 챔피언을 배출하지는 않았다. 고지대 적응은 널리 존재한다. 산업적 규모의 엘리트 중장거리 선수 생산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고도가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다. 고도 하나로 국제 성적이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증거다. 더구나 케냐를 다룬 고전적인 연구에서는, 고지대에 사는 케냐 소년이라도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지내면 최대산소섭취량이 저절로 높아지지 않았다. 집단 사이를 뚜렷하게 갈라놓은 것은 활동과 훈련이었다.
세 번째는 단거리 유전자 이야기다.
자메이카인에게는 보통 사람에게 없는 단거리 유전자가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확인되는 사실은, 자주 거론되는 ACTN3의 특정 유전자형이 드물다는 특징이 자메이카 챔피언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유전자형의 빈도는 자메이카 대조군에서 약 2퍼센트,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조군에서 약 4퍼센트였다. 케냐인과 나이지리아인에게서도 매우 낮은 빈도가 측정되었다. 다시 말해 자메이카의 평범한 사람 거의 모두가 그 드문 유전자형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른바 집단적 이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중 엘리트가 되는 사람은 극소수다. 거의 모두가 공유하는 것만으로는 왜 극소수만 성공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네 번째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선교사 코치 한 사람, 학교 운동회 하나, 또는 클럽 하나가 한 나라 전체의 현상을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시간의 순서가 곧바로 반박하고 나선다. 다음 절에서 볼 일이다.
네 이야기 모두 실제로 관련이 있는 것에서 출발한다. 통학, 고도, 유전자 빈도, 어느 기관. 그러고는 그것을 충분한 원인으로 바꾼다. 그 요인이 없었을 경우라는 반사실은 어느 쪽에서도 식별되지 않았다. 결정론적 서사의 공통 조리법은 이렇다. 진짜 상관관계를 하나 가져온다. 반사실을 지운다. 그리고 원인이라고 선언한다.
5. 시간의 순서가 동의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나 한 기관이 모든 것을 만들어 냈다는 네 번째 이야기는 아주 단단한 것에 부딪힌다. 시간의 순서다.
케냐부터 보자. 이텐의 세인트패트릭 고등학교와 그곳의 코치 오코넬은 이후 칼렌진 달리기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오코넬이 이텐에 온 것은 1976년이다. 키프초게 케이노가 1968년 올림픽에서 우승한 지 8년 뒤였고, 케냐가 첫 올림픽 육상 메달을 딴 1964년으로부터는 12년 뒤였다.
따라서 오코넬은 1960년대 케냐의 돌파구를 설명할 수 없다. 그 돌파가 그가 오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후 이 현상이 재생산된 과정, 이어진 지도자 계보, 국제 무대에서 높아진 존재감이다. 기원과 재생산은 다른 일이다. 그 자신도 자신의 역할은 선수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선발과 지도, 계승에 부합하는 말이다. 코치 한 사람이 재능을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메이카를 보면 시간의 순서는 더 선명하다.
자메이카의 중등학교 대항 육상선수권대회, 이른바 챔프스는 1910년에 시작했다. 반면 자메이카의 단거리 지배력이 뚜렷하게 드러난 기점은 2008년 베이징이다. 사이에는 약 98년이 놓여 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존재한 학교 대회만으로는 왜 하필 2008년이라는 시점에 그 지배력이 강해졌는지 설명할 수 없다.
더 뒤에 생긴 클럽은 어떨까. 자국 육상 클럽인 MVP는 1999년 9월에 설립되었다. 베이징보다 약 9년 앞선다. 학교를 졸업한 선수가 성숙할 시간을 생각하면 납득할 만한 간격이다. 설립은 구체적인 병목을 겨냥하기도 했다. 선수와 코치가 꼭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대신 자메이카에 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밀스가 이끄는 또 다른 클럽의 지도자 계보는 볼트의 도약보다 앞서지만, 그 클럽이 정식으로 재출범한 2009년은 베이징 이후다.
이 시간의 순서들을 함께 놓으면 양쪽의 단일 원인론이 모두 반박된다. 먼저 기관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무너진다. 중등학교 대항 선수권대회는 거의 한 세기 앞서 있었고, 그것만 존재하던 시절 자메이카의 성적은 훨씬 덜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유전자만으로 설명하려는 주장도 도전을 받는다. 국제 성적은 수십 년 만에 급성장했다. 집단의 대립유전자 빈도가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유전자풀이 불과 서너 세대 만에 그 성장을 설명할 만큼 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시간이 제기하는 이 반박은 이 글에서 가장 우회하기 어려운 대목 중 하나다. 그 힘을 따로 강조할 만하다. 생물학적 변화에는 속도의 한계가 있다. 성적의 격변을 설명할 만큼 집단의 유전적 구성이 달라지려면 여러 세대에 걸친 선택이 필요하다. 그런데 칼렌진족과 자메이카의 국제 성적은 수십 년, 한두 세대 만에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시간 규모는 그 폭발을 오로지 유전자 구성의 급격한 변화로 설명하려는 주장에 치명적이다. 그렇게 짧은 동안 유전자가 그만큼 달라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던 유전적 차이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그 차이가 새로운 조건과 만나 작용했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다만 폭발의 직접적인 추진력은 그 수십 년 사이 달라진 시장, 코치, 이동 경로, 유인에서 찾아야 한다. 시간의 반박이 겨누는 것은 몸의 모든 기여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성장을 유전자풀의 변화 하나에 맡기는 설명이다.
더구나 자메이카는 1999년에야 비로소 단거리 강국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다. 이 클럽보다 훨씬 전부터 중요한 올림픽 단거리 전통이 있었다. 1948년의 세대가 있었고, 뒤이어 쿼리와 오티가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기관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야기든 그 기관 이전에 이미 존재한 성적과 부딪힌다.
6. 양쪽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한 논증
이 글은 유전과 제도 가운데 어느 쪽이 주된 원인인지 판정하지 않는다. 양쪽의 가장 강한 논증을 나란히 놓는다. 해체하려는 것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결정론이라는 서사의 형식 자체다.
먼저 가장 강한 유전 논증을 보자.
가장 강한 형태의 논증은 단 하나의 속도 유전자를 말하지 않는다. 논증은 이렇다. 이 집중은 지리적으로 너무 좁은 곳에 몰려 있어 국가 정책이나 고도만으로 손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성적은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하는 극단적인 표현형이다. 엘리트 선수가 수백 명 참여한 연구라도 수천 가지 작은 효과의 조합을 포착하기에는 검정력이 부족할 수 있다. ACTN3는 경기력과 관련된 기능적 변이가 실제로 존재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성적이 성장하는 시기에 유전적 기여 자체가 바뀔 필요는 없다. 이미 존재하던 분포도 시장과 코치, 이동 경로가 더 많은 사람의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게 해 줄 때 비로소 드러날 수 있다.
이 논증은 자신의 한계도 인정한다. 그것이 세우는 것은 개연성이지, 추정된 인과적 몫이 아니다. 가장 강한 형태로도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한다는 가설이다. 이를 검증하기에 충분한 아프리카와 카리브해의 유전체 자료, 발달 자료, 제도 자료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제도와 선발에 관한 가장 강한 논증을 보자.
논증은 이렇다. 국제 성적은 수십 년 만에 급성장했다. 집단의 대립유전자 빈도가 실질적으로 변할 수 있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성공한 지역에는 촘촘한 자기강화적 시스템이 발달했다. 눈에 띄는 어린이 대회, 전문 학교, 훈련 캠프, 지도자 계보, 본보기로 삼을 선수, 에이전트, 국제 이동망, 그리고 막대한 국제적 보상이 있다. 이 시스템은 수천 명의 참가자를 거듭 선별한다. 규모가 크고 집중적으로 선발되는 인재 풀에서는 처음부터 집단 평균에 큰 차이가 없더라도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자메이카에서는 선수와 대조군의 유전자 검사에서 유의한 차이가 나오지 않았고,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한 지구력 유전체 연구의 결과도 약했다. 이는 가장 널리 알려진 변이들로는 챔피언과 그들이 속한 지역 인구를 구분해 낼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논증 역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기관 자체가 이미 성공이 있던 곳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인과의 방향이 거꾸로일 수도 있다. 자메이카나 이텐에 견줄 시스템을 조건이 비슷한 집단에 무작위로 배정하고 한 세대 동안 지켜본 연구는 없다.
두 논증은 모두 성립할 만하다. 각자 정직하게 인정하는 한계도 있다. 이 글은 둘 사이에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판결에 필요한 증거, 곧 원인별 몫을 분해해 줄 연구가 없기 때문이다.
해체할 대상은 이 논증들이 아니다. 어느 한쪽을 결정론으로 밀어붙이는 동작이다. 유전의 기여가 크든 작든, 제도의 역할이 주되든 부차적이든, 확률적 경향을 필연적인 결과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어느 집단에 평균적인 경향이 있고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집단의 모든 개인에게 무엇인가가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더구나 그 현상에 원인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결정론의 오류는 유전을 골랐느냐 제도를 골랐느냐에 있지 않다. “가능성이 더 높다”를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로 바꾸어 말하는 데 있다.
이것이 이 글이 지키려는 선이다. 결정론을 비판한다고 해서 반대편으로 건너가 모든 것은 환경이며 몸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면 결정론 하나를 다른 결정론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생물학적 결정론 대신 환경결정론을 세우는 일도 복잡한 시스템을 단일 원인으로 압축하기는 마찬가지다. 지켜야 할 입장은 몸도 작용하고 환경도 작용하며 제도도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몫은 분해되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중 하나를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선언할 자격이 없다. 어떤 맛의 결정론이든 잘못은 ‘결정’이라는 말에 있다.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인과적 몫을 이미 알고 있는 척한다는 데 있다.
7. 측정 밖에 남겨진 사람들
결정론적 서사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다.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구조다. 그것은 추론의 방향 속에 숨어 있다.
이런 서사는 다음과 같이 만들어진다. 연구자가 성공한 선수에게서 출발해 그 몸에 있는 한 특징을 관찰한다. 그러고는 그 특징이 성공의 원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방향이 뒤집혔다.
어디가 뒤집혔는가. 결과에서 원인을 거슬러 찾으면서, 같은 특징을 가졌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의 비교하지 않은 채 설명을 끝낸다는 데 있다.
맨발로 학교까지 달리는 아이는 수없이 많지만 국제 수준의 달리기 선수가 되는 아이는 극소수다. 그 아킬레스건 특징을 가진 사람은 동아프리카 곳곳에 있지만 챔피언이 되는 사람은 극소수다. 자메이카에서는 그 드문 유전자형을 갖지 않는 흔한 양상을 거의 모두가 공유하지만, 올림픽 선수가 되는 사람은 극소수다. 원인으로 이야기되는 각각의 특징은 그것을 가지고도 성공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에게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 서사의 측정 밖에 남는다.
서사는 성공한 사람에게서 한 특징을 읽어 내고, 그것이 원인이라고 선언한 뒤 멈춘다. 같은 특징을 가지고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보지 않는다. 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 인과 이야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 대다수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특징은 성공의 충분원인일 수 없다. 결정론적 서사가 성립하려면 바로 이 비교를 하지 않아야 한다.
이들이 이 글의 잔여항이다. 이 연재에서 이전에 없던 모습의 잔여항이다.
앞선 글들에서 잔여항은 명단에 들지 못한 이름이었고, 계산할 수 없는 원인이었고, 비교할 수 없는 성적이었고, 존재하지 않는 몸이었고, 자리를 찾지 못하는 연속성이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이번 글의 잔여항은 이야기 속의 특징을 지녔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 이야기의 측정과 비교에서 빠져 버린 사람들이다. 서사가 성립하려면 무시해야 하는 대조군이다.
앞선 글들의 구축이 완결되지 못한 까닭은 담으려는 것을 다 담을 수 없거나, 계산할 수 없거나, 답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루는 서사적 구축은 완결된 듯 보일 수 있다. 빠짐없고 앞뒤가 맞는 인과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바로 그 이야기를 무너뜨릴 사람들이 시야 밖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해서 얻은 완결이 아니다. 허점을 드러낼 대조군을 보지 않아서 얻은 완결의 외양이다. 구축은 닫힌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 이야기를 무너뜨릴 집단을 체계적으로 자신의 측정과 비교에서 제외한다.
이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널리 퍼져 있다. 따로 짚을 만하다. 이른바 생존자 편향의 극단적인 형태다. 사람들은 성공한 이들을 보고 공통점을 뽑아낸 뒤, 그것을 성공의 비결로 삼는다.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도 실패한 사람을 보는 일은 잊는다. 다른 분야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오류다. 그런데 몸과 민족 집단을 다루는 서사에서는 유난히 끈질기다. 읽어 낸 특징이 몸에 있고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특징은 바로 그것이 원인이라는 직관을 준다. 가늘고 긴 종아리, 달리기에 알맞아 보이는 체격. 눈에 보인다는 이유로 이런 것들은 손쉽게 원인 자리를 차지한다. 똑같이 가늘고 긴 종아리를 가졌지만 어느 결승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했기에, 그 서사가 고르는 사진에도 표본에도 이야기에도 좀처럼 들어오지 못한다.
노예제를 동원한 서사가 왜 성립하지 않는지도 여기서 드러난다. 노예무역 과정의 선택, 플랜테이션에서의 생존, 어느 서아프리카 기원 집단이 오늘날의 자메이카 단거리 선수를 생물학적으로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입증된 연결 고리가 없다. 역사적 선택압에서 측정된 대립유전자 빈도의 변화로, 다시 현재의 단거리 성적으로 이어지는 연결이다. 이는 결과에 맞춰 역사를 사후에 각색하는 일이지 확립된 집단유전학이 아니다. 구조는 다른 결정론적 이야기와 같다. 그 특징을 수백 년 전으로 옮겼을 뿐, 그 사이 고리들을 이어 줄 인과의 전체 사슬은 측정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8. 시스템을 몸 안에 욱여넣는 이야기
이제 논의를 정리해 보자.
확인된 사실은 세 가지이며 이 글은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첫째, 칼렌진족과 자메이카에 엘리트 선수가 집중되는 현상은 실재한다. 둘째, 측정된 생물학적 차이는 실재한다. 집단의 유전자형 빈도, 팔다리 형태, 아킬레스건의 기하학적 구조, 고지대 적응, 달리기 경제성에는 실제 차이가 있다. 생물학적 변이를 부정하는 것도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는 것만큼 부정확하다. 셋째, 측정된 제도적 차이는 실재한다. 이텐의 학교와 훈련 캠프, 국제 에이전트, 자메이카의 중등학교 대항 선수권대회, 클럽과 코치 인맥은 누가 훈련하고, 얼마나 오래 훈련하며, 어떤 지원을 받고, 누가 국제 무대에 도달하는지를 실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미결이다. 원인별 몫이다. 유전자가 칼렌진족이나 자메이카의 지배력을 몇 퍼센트 설명한다고 확립한 연구는 없다. 체형이 몇 퍼센트를 설명한다고 확립한 연구도 없다. 고도, 달리기 통학, 중등학교 대항 선수권대회, 훈련 캠프, 클럽, 경제적 유인, 훈련을 위한 이주가 각각 몇 퍼센트를 설명한다고 확립한 연구도 없다. 중간 표현형의 백분율에 이름표를 바꿔 달아 국가나 민족 집단의 성적을 설명하는 백분율로 만들 수는 결코 없다.
따라서 실제 풍경은 몸의 한 특징이 하나의 현상을 일으키는 모습이 아니다. 되먹임을 거듭하는 시스템이다. 크지 않거나 크기를 알 수 없는 개인차가 선수 모집, 훈련, 경제적 보상을 둘러싼 경쟁, 이동 통로, 코치의 지식, 반복되는 선발을 거치며 층층이 증폭된다. 개인 쪽의 차이는 불확실하며 어쩌면 작을 수도 있다. 시스템은 그것을 눈에 보이는 집중으로 키운다.
결정론적 서사가 하는 일은 이 시스템 전체를 몸 안에 욱여넣는 것이다.
달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 타고난 단거리 선수, 천부적 재능을 지닌 부족, 속도 유전자. 이런 말은 여러 단계의 선발 시스템을 몸의 한 특징으로 압축한다. 수십 년 동안 학교와 훈련 캠프, 시장과 이주를 가로지르며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무언가로 바꿔 말한다. 이것은 압축이다. 그 압축 속에서 시스템이 사라지고, 시간이 사라지고, 같은 신체적 특징을 지녔으나 그 시스템을 끝까지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라진다.
서사도 하나의 구축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서사는 규정, 점수표, 문턱값처럼 스스로를 완결하려 한다. 몸의 한 특징으로 현상 전체에 대한 설명을 닫으려 한다. 그러나 닫을 수 없다. 그 특징과 그 현상 사이에서 원인별 몫은 식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설명해야 할 결과를 슬쩍 원인으로 바꾸고, 사실이지만 대상을 잘못 짚은 중간 숫자에게 인과의 숫자 행세를 시키고, 확률적 경향을 필연으로 말한다. 그렇게 매끈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까닭은, 그 이야기를 들춰낼 사람들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축은 한 사람의 아킬레스건이 얼마나 긴지 측정할 수 있다. 어느 유전자형의 빈도가 얼마인지, 한 집단이 메달을 몇 개 땄는지도 셀 수 있다. 그러나 그 메달 중 얼마가 그 아킬레스건 덕분인지, 얼마가 그 유전자 덕분인지, 얼마가 그 학교와 훈련 캠프와 에이전트와 수십 년의 선발 덕분인지까지는 측정해 내지 못한다. 그 몫이 분해된 적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분해되지 않은 자리에 서사가 조용히 답을 채워 넣는다. 몸의 모양으로 답을 채운다. 그 몸은 실재하며 몸의 차이도 실재한다. 하지만 이 실제 몸에서 저 실제 현상까지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 전체와 각 원인의 몫은 밝혀지지 않았다. 서사는 그 사슬을 건너뛴 채 양 끝을 곧장 이어 붙인다. 그러고는 말한다. 보라, 이 몸 때문이라고.
그리하여 이 글은 더 깊은 자리에서 연재 전체와 이어진다. 앞선 열네 편의 구축은 제도의 층위에 있었다. 규정, 점수표, 기록부, 문턱값처럼 사람이 의식적으로 세운 것들이었다. 이번 글의 구축은 인식의 층위에 있다. 사람이 세계를 이해할 때 저도 모르게 만들어 내는 인과의 이야기다. 설명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사람은 설명이 없다는 상태를 거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를 지어낸다. 가장 쉽게 지을 수 있는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 몸에 원인을 놓는 설명이다. 이런 구축도 제도 차원의 구축과 마찬가지로 완결을 향한다. 미결로 남은 일에 끝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완결되지 못한다. 그 완결을 떠받쳐야 할 인과의 사슬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슬이 존재하는 듯 보이는 까닭은 양 끝, 실재하는 몸과 실재하는 현상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다. 진짜인 두 끝 사이에 전체로서 측정되지 않았고 어쩌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슬이 걸려 있다. 서사는 그 사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이 연재에서 가장 조용한 구축이다. 어느 규정에도 쓰여 있지 않다. 다만 사람들이 “그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때, 그 문장의 어조 속에 쓰여 있다.
자는 아직 정확히 재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