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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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Han Qin (秦汉) · 한국어판 · 2026-10-09

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쓴 독립 한국어판이다. 원문 페이지에서는 중국어 간체와 번체를 전환해 읽을 수 있다.

요타로는 10년을 배웠다.

10년 뒤 그는 라쿠고 예인의 최고 등급인 신우치로 승격하고, 이름을 이어받는다.

그 이름은 스케로쿠다. 스승보다 선배인 동문이자 코나츠의 아버지, 수십 년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야쿠모가 가르쳐 낸 사람이 오랫동안 비어 있던 자리를 물려받았다.

본래 비어 있던 자리

여기서는 그 일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놓아 보려 한다.

두 번째 글에서 말했듯, 야쿠모와 스케로쿠는 한 쌍의 명적, 대를 이어 전하는 예명이다. 앞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끝까지 갔고, 한 사람은 도중에 죽었다.

그날 밤 이후로 스케로쿠라는 이름은 비어 있었다.

명적이 비어 있다는 것은 그 이름에 딸린 모든 것, 이야기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과 규율과 관객의 기대를 이어받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파괴된 것이 아니다. 받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내버려 두면 없어진다.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이야기가 하나씩 끊긴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이름은 기록 속에만 등장하는 낱말이 된다.

10년이 지나고, 누군가 그것을 받았다.

전해지는 것은 자리이지 사람이 아니다

이제 이 글의 첫 번째 판단을 이야기하자.

요타로는 스케로쿠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는 스케로쿠가 아니다.

그 사람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 재능도, 그 성미도, 그 내력도 없다. 감옥에서 나와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렇게 10년을 배웠다.

그가 받은 것은 하나의 자리와 그 자리에 딸린 것들이다.

한 사람이 어떤 자리를 온전히 이어받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코나츠에게는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버지의 이름을 쓰는 사람이 다시 생겼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아닌 사람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듣는다.

작품은 듣고 있는 그녀를 보여준다.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게 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으려 하면서 10년을 가르쳤다

이제 이 연작이 도달하는 곳에 와 있다.

야쿠모가 하려던 것은 라쿠고를 자신과 함께 죽게 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한 일은 제자를 받아 10년 동안 가르치는 것이었다.

작품은 두 일이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 끝내 풀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는 분명하다.

그가 끊으려던 것이 그의 손을 떠났다.

누가 훔쳐 가지 않았다. 빼앗아 가지도 않았다. 그를 거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배워 온 사람도 없다.

그가 직접 한 자락씩 가르쳐 건넸다.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는 가르치는 이가 무엇을 의도하는지에 좌우되지 않는다.

한 겹 더 풀어 말할 수 있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과 건네주는 것은 같은 행위다. 가르치면서 자기 손에만 남겨 둘 수는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라쿠고 한 자락을 들려준다. 그 사람이 할 줄 알게 될 때까지. 그 순간 이미 일은 끝났다. 누구의 서명도 필요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사람은 가르치면서도 전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동안 그것은 실제로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 한 번 들어가면 이제 그 사람의 손에 있다. 가르친 이의 생각과는 상관없어진다.

반전도, 좌절도 아니다. 작품은 어느 장면에서도 야쿠모가 이 일에 패배하는 모습을 연출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이 저렇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행동하게 한다. 10년 동안.

무대 위에서 쓰러지다

훗날 야쿠모는 라쿠고 무대에서 〈한콘코〉, ‘혼을 불러오는 향’ 이야기를 마친 뒤 쓰러진다.

그보다 뒤에 그는 홀로 라쿠고 공연장인 요세의 무대에 돌아와 〈시니가미〉, ‘사신’을 들려준다.

한 사람이 촛불들을 보러 이끌려 가는 이야기다. 초 하나하나가 하나의 목숨이다. 긴 초, 짧은 초, 곧 꺼질 초가 있다.

그날 밤 요세에 불이 난다.

작품은 이 대목을 기묘하게 그린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죽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야쿠모는 그들과 말을 나눈다.

그 뒤로 그의 계획은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작품은 그에게 포기를 선언하게 하지 않는다. 아직도 그 생각이 유효한지 누가 묻게 하지도 않는다.

그가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다. 작품에는 그가 마침내 깨달았다는 식의 장면이 없다.

이미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벌써 요타로의 몸에 들어가 있다.

마지막 공연

마지막은 요타로가 새 이름을 잇는 습명 공연이다.

이제 그는 3대 스케로쿠가 아니다. 9대 유라쿠테이 야쿠모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세대에는 한 사람이 한 쌍을 이루는 두 이름의 자리를 차례로 거쳤다.

그 공연의 객석에, 그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야쿠모. 스케로쿠. 미요키치.

보러 왔다.

작품은 끝에서 농담 하나를 던진다. 야쿠모 곁을 평생 지킨 운전사 마츠다가 실은 무엇인지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사신이라고 한다.

아주 가볍게 그어 놓은 한 획이다. 한마디로 지나간다.

세 개의 문

이 연작은 여기서 끝난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나란히 놓아 보자. 사이에 설명은 보태지 않겠다.

첫째. 한 사람이 어떤 예술의 일부를 쥐고 있다. 그 부분은 오직 그만 할 줄 안다. 그는 건네지 않기로 한다. 그럴 권리가 있다. 건네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그런데 그가 쥔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건네준 것이다.

둘째. 한 여자가 이 예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여러 해 동안 연습했다. 그러나 이 업계의 문은 오랫동안 그녀에게 열리지 않았다. 닫은 사람은 따로 없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닫혀 있었다. 나중에 문이 열렸지만, 뒤늦게 찾아온 기회가 이미 잃어버린 세월을 지워 주지는 못한다.

셋째.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제자가 되겠다며 찾아왔다. 10년을 배웠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이름을 받았다. 그 뒤 또 다른 이름을 받았다.

마지막 공연에는 아이 하나도 앉아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속 사람에게는 손제자이고, 두 번째 이야기 속 여자에게는 딸이고, 세 번째 이야기 속 사람에게는 자식이다.

그 아이는 할아버지 세대의 라쿠고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아버지의 라쿠고를 좋아한다.

라쿠고 예인이 될 생각도 없다. 그냥 듣는 것이 좋다.

성격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작품은 말한다. 털털하고 무슨 생각이든 입 밖으로 내놓는 모습이다. 생김새는 어머니를 닮았다.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할지, 작품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 화의 화면 속에 이 아이를 놓는다. 그 자리에 앉아 듣게 한다. 그리고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