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문의 논지와 세부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쓴 글이다. 작품 전체의 결말을 다룬다.
어머니가 죽었다. 그런데 이즈미 신이치는 울 수 없다.
슬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자신 안에서 그 감정을 찾아보려 한다. 그런데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
이 글은 그 일에 관한 이야기다.
그 몸이 한 일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짚자.
신이치의 어머니는 여행 중 기생 생물에게 습격당해 머리를 빼앗긴다. 그 뒤로 움직이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의 몸, 어머니의 옷이다.
그것이 집으로 돌아온다.
익숙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말을 한다. 집에는 신이치가 있다. 아버지는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있다.
낯익은 모습이 집 안으로 돌아온 일상의 외피 때문에, 이 장면은 더욱 견디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신이치를 본다. 어머니의 손으로 신이치의 몸을 꿰뚫는다.
작품은 이 장면을 몹시 차갑게 처리한다. 그것에게 악독한 말을 시키지도 않고, 극적인 전조를 깔지도 않는다. 그냥 걸어와 손을 들고 찌른다.
신이치는 쓰러진다. 죽어 간다.
오른쪽이는 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한다. 자기 세포 일부를 신이치의 심장에 나누어 준다.
신이치는 살아남는다.
그를 살린 것이 그를 바꾸었다
살아난 뒤, 그는 달라져 있다.
힘이 훨씬 세고, 빠르고, 높이 뛰며, 상처도 빨리 낫는다. 나중에 기생 생물과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동시에 다른 것들은 무뎌진다.
통증에 대한 반응이 약해진다. 피를 봐도 예전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반응은 빨라지는데, 반응하기 전의 그 잠깐 망설임은 사라진다.
그 망설임은 무엇일까? 사람이 행동에 나서기 전에 몸 안을 잠시 지나가는 저항이다. 쓸모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그저 아주 조금 늦출 뿐이다.
그 잠깐이 없어졌다.
가장 뚜렷한 변화가 있다. 울 수가 없다.
그를 살린 바로 그것이 그를 바꾸기도 했다.
하나의 행동이 낳은 두 결과다. 작품은 둘을 떼어 놓지 않는다. 오른쪽이가 나누어 준 세포는 그를 살렸고, 더는 온전히 예전의 그일 수 없게 했다.
이 대목에서 작품은 절제한다. 누구도 오른쪽이를 비난하게 하지 않는다. 오른쪽이가 사과하게 하지도 않는다. 당시 그를 살릴 수 있는 행동은 그것뿐이었으며, 부작용은 누구도 선택한 적이 없었다.
남이 먼저 알아보았다
처음에 신이치 자신은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당시 처지에서는 좋은 일이다. 기생 생물들에게 쫓기고 있으니, 싸울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무라노 사토미는 알아본다.
그의 같은 반 친구이자, 이 작품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사토미는 그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리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거듭하는 말의 뜻은 하나다. 너는 이즈미 신이치가 아니야. 어딘가 달라졌어. 예전의 너는 이러지 않았어.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증거도 내놓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한다. 다만 안다.
신이치는 반박할 수 없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나는 여전히 나야’라는 말뿐이다. 그런데 사토미에게는 그 말이 통하지 않는다.
사토미는 오래도록 그 말을 한다. 마침내 신이치 자신도 확신하지 못할 때까지.
한 사람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남이 먼저 알아보았다.
잠시 멈춰 볼 대목이다.
사람에게서 무언가가 사라져도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사라진 그 부분이기 때문이다. 울 수 없을 때는 울음을 맡던 부분이 이미 없어진 뒤다. 그러니 울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하지도 못한다.
안에서는 비어 버린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무라노 사토미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있다. 예전의 그를 기억한다. 사토미는 그를 견주어 볼 기준이다.
그녀가 끝내 놓지 않는 것
작품은 무라노 사토미에게 특별한 자리를 내준다.
싸울 힘은 없다. 기생 생물을 전혀 모르고, 오랫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른다. 누구를 구할 수도 없고, 판도를 바꿀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다.
그녀가 하는 일은 하나다. ‘이 사람은 예전의 그가 아니다’라는 말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그 주장은 앞으로 밀어붙이는 요구가 아니라 뒤를 향한 요구다. 더 강해져서 자신을 잘 지켜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이치가 조금 강해질 때마다 사토미는 더 크게 반발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망설이던, 예전의 그 고등학생이다.
아무 쓸모도 없는 요구다. 그를 되돌려 놓을 수도, 보호할 수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고집하는 방식도 점잖지 않다. 다투고, 화를 내고, 피한다. 두 사람 모두를 괴롭게 만드는 말을 한다.
그녀가 끝내 놓지 않는 것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다.
그런데 작품은 그것을 계속 남겨 둔다. 그녀가 설득당하게 하지 않고, 익숙해지게 하지도 않는다. 그가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이유로 그 문제를 접게 하지도 않는다.
그 뒤의 신이치
어머니를 잃은 뒤로 신이치는 긴 길을 걷는다.
수없이 싸우고, 많은 기생 생물을 죽이고,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본다.
그 길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그를 감지할 수 있다. 특별한 인연이라고, 운명이 맺어 준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그 감각을 따라 신이치를 찾아간다. 하지만 실제로 감지한 것은 신이치가 아니다. 그의 오른손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소녀는 죽는다.
신이치는 그 자리에 있다. 울지 않는다.
무라노 사토미와의 관계는 내내 뒤틀려 있다.
그 길을 지나는 동안, 그의 안에 무언가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작품은 그 과정을 아주 느리게 그린다. 결말에 이르기 전에 그는 다시 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히 예전의 그로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사이 작은 일들이 하나씩 일어난다. 어떤 일에는 반응하기 시작한다. 어떤 순간에는 멈춰 선다. 오른쪽이의 계산법으로는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회복인지, 다른 무언가가 새로 자란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눈물이 돌아와도 지워지지 않는 것
이 글의 끝은 해결되지 않은 일에 놓으려 한다.
어머니를 잃은 뒤, 신이치에게는 울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중의 눈물이 그 시간을 되돌려 주지는 않는다. 다시 운다고 어머니가 돌아오거나 예전의 자신이 그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눈물을 상실의 대가를 갚아 주는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사람에게서 빼앗긴 것이 반드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결말 이전에도 그는 이미 운다. 가령 22화에서는 오른쪽이를 잃은 뒤 흐느껴 운다.
그러니 마지막 옥상에서의 눈물이 처음으로 돌아온 눈물은 아니다. 달라진 사람이 그 뒤로도 걸어가는 길 위의 눈물이다.
그가 이 길을 걷는 동안, 어느 기생 생물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연구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