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문의 논지와 세부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쓴 글이다. 작품 전체의 결말을 다룬다.
고등학생이 자기 오른손과 말다툼을 한다.
잠자는 시간 때문이다. 오른쪽이는 하루에 네 시간쯤 자야 한다. 그런데 그 네 시간을 신이치의 생활 리듬에 맞출 수는 없다. 자신이 잠들면 몸을 지킬 수 없으니, 신이치가 깨어 있을 때 자야 한다.
그러니 둘은 의논해야 한다. 언제 잘 것인지, 그동안 신이치는 어디에 있을 것인지,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지.
이 작품이 ‘공존’을 다루는 방식이다. 공존은 개념이 아니라 하루 일과표로 나타난다.
얼마나 자잘한 일까지 의논해야 하나
둘이 의논한 일들을 몇 가지만 늘어놓아 보자.
자는 시간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수업 중에 오른손이 움직여도 되는가. 오른쪽이가 책상 위에서 혼자 책을 읽는 장면이 있다. 몇 분이면 한 권을 읽을 만큼 빠르다. 인간의 지식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먹는 일. 오른쪽이는 따로 밥을 먹지 않는다. 신이치에게서 영양을 공급받으니, 신이치가 더 먹어야 한다.
동족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많이 의논하는 문제다. 두 쪽의 판단이 자주 엇갈리기 때문이다. 오른쪽이의 원칙은 피할 수 있는 싸움은 피하고, 달아날 수 있으면 달아나자는 것이다. 신이치는 몇 번이고 사람을 구하러 가려 한다.
남에게 들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른쪽이는 변형할 수 있고 평범한 손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다.
데이트 중에는 누구에게 오른손의 사용권이 있는가. 작품에서 여러 번 나오는 문제다. 나올 때마다 민망하다.
가족이 함께 있을 때는 오른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이치의 아버지가 하마터면 볼 뻔한 적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것인가. 이 문제에서는 한 번도 합의하지 못했다. 오른쪽이는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고, 신이치는 몇 번이나 입 밖에 낼 뻔한다.
어느 것 하나 거창하지 않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공존이라는 일의 내용은 전부 이런 것들이다.
매번 그 자리에서 정한다
이제 이 글의 뼈대를 짚자.
둘 사이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협약이 없다.
어느 날 마주 앉아 원칙을 정리한 뒤, 그때부터 규정대로 움직이는 일은 없다. ‘이제부터 우리는 동료다’라는 선언도 없고, 한 번의 화해로 그동안의 의견 차이를 통째로 해소하는 장면도 없다.
모든 약속은 그때그때 의논해서 정한다. 영구적인 약속은 하나도 없다.
어제 합의했어도 오늘 새로운 상황이 생기면 다시 의논해야 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일도 잦다. 그러면 각자 자기 판단대로 행동하고, 서로의 계획을 뒤집는다.
신이치는 오른쪽이가 강하게 반대하는데도 혼자 뛰쳐나간 적이 여러 번이다. 오른쪽이 역시 신이치가 동의하지 않는데도 곧장 손을 쓴 적이 여러 번이다.
사이가 나쁜 관계여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없앨 수 없는 둘이 한 몸에 살면서 매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다.
작품 속 또 다른 시도와 나란히 놓아 보자.
시마다 히데오라는 기생 생물이 신이치의 학교로 전학을 온다. 인간 사회에 섞여 오래 숨어 지내며 관찰하고 배우려는 생각이다. 고등학생 역할을 열심히 해낸다. 급우들과 이야기하고 활동에도 참여한다.
그 시도의 끝은 학살이다.
작품은 이 두 일을 한 이야기 안에 놓는다. 인간들 속에 섞여 살려던 기생 생물 하나는 실패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다. 같은 학교의 또 다른 기생 생물은 오른손에 붙어 살면서 매일 숙주와 잠자는 시간을 두고 다툰다.
뒤의 관계는 성립하고 앞의 시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 더 선량해서 생긴 차이가 아니다. 뒤의 관계에서는 처음부터 어느 쪽도 무엇 하나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오른쪽이의 입장은 논파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른쪽이의 입장을 충분히 펼쳐 놓아야 한다. 그쪽이 이기는 데까지 가 봐야 한다.
오른쪽이의 생각은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그 안에서는 앞뒤도 맞는다.
생물이 다른 생물을 먹는 것은 흔한 일이다. 동족이 사람을 먹는 것과 인간이 돼지를 먹는 것 사이에는 구조적인 차이가 없다.
누군가 인간의 목숨은 귀하다고 말할 때, 실은 ‘내 목숨은 귀하다’에서 출발해 그 범위를 바깥으로 넓히고 있다. 오른쪽이는 그 확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귀한 것은 오직 자기 목숨이라고 생각한다.
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대략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인간의 잣대로 정한 일일 뿐,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나중에 대의를 말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는 더 매서운 말도 한다. 입만 열면 ‘지구를 위해서’라고 하는 인간들이 싫다는 것이다. 지구는 애초에 울지도 웃지도 않으니까.
인간에게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무엇인지도 직접 밝힌다. 자기희생이다. 인간의 행동 가운데 가장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이 ‘어리석다’가 아니라 ‘알 수 없다’라는 점을 눈여겨보자. 오류로 분류하지 않는다. 자신이 읽어 내지 못하는 현상으로 분류한다.
이 말들은 작품 안에서 단 한 번도 논파되지 않는다.
신이치는 반박한다. 힘겹게 반박하고, 자신도 힘겹다는 사실을 안다. 작품은 오른쪽이를 설득해 내는 인물도, 오른쪽이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는 사건도 마련하지 않는다.
자기 체계 안에서 오른쪽이는 옳다. 신이치에게는 바깥에서 그 체계 자체를 뒤엎을 능력이 없다.
착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오른쪽이는 왜 달라졌을까?
가장 쉽게 얼버무리고 지나칠 수 있는 대목이므로 정확히 말해야 한다.
오른쪽이는 착해진 것이 아니다.
처음의 행동 원칙은 ‘내 목숨만 지키면 된다’였다. 마지막까지도 그 원칙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적은 없다. 동족에게 먹힌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으며, 사람의 목숨이 귀하다고 여기는 존재로 바뀌지도 않았다.
달라진 것은 따로 있다. 이 일에 관심이 생겼다.
자신이 사는지 죽는지만 신경 쓰던 존재가 오른손 하나에 오래 머물다 보니, 인간이라는 생물 자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왜 저런 일을 할까. 왜 자신과 상관없는 존재 때문에 슬퍼할까. 왜 저들의 몸에는 살아남는 일과 무관한 행동이 그토록 많을까.
관심이 생기는 것과 착해지는 것은 다른 일이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차이를 지킨다. 오른쪽이에게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다’는 말을 한 번도 시키지 않는다. 대신 이런 말을 하게 한다. 모르겠다. 이해가 안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다’는 상태는 ‘설득당했다’는 상태와 완전히 다르다.
신이치도 기생 생물이 되지 않았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신이치의 몸은 변한다. 능력도 성격도 변한다. 그 일은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그래도 신이치는 오른쪽이 편에 속하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
사람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귀한 것은 자기 목숨뿐’이라는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을 구하러 되돌아가고,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앞에 나서는 일. 작품 내내 신이치가 벌이는 이 명백히 손해인 행동들은 오른쪽이의 계산법으로 보면 전부 틀렸다. 그래도 그는 한다.
오른쪽이는 매번 반대하고, 매번 따라 나서며, 일이 끝날 때마다 비합리적이었다고 말한다.
이 몸 안에는 상관이 없다.
한 몸에 두 잣대
이제 정리해 보자.
하나의 몸 안에 두 주체가 있다. 각자 판단 기준이 있고, 많은 문제에서 두 기준은 정반대의 답을 낸다.
작품은 둘을 합치지 않는다. 절충한 제3의 기준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한쪽이 서서히 다른 쪽을 덮어쓰게 하지도 않는다.
두 기준을 끝까지 나란히 남겨 둔다. 매일 구체적인 일에서 한 번씩 부딪치고, 부딪친 뒤에는 다시 하루를 이어 간다.
듣기만 해도 피곤하다. 작품도 실제로 몹시 피곤한 일로 그린다. 신이치는 그 때문에 숱하게 고생하고, 오른쪽이는 자신이 보기에 전혀 필요 없는 골칫거리에 거듭 휘말린다.
서로의 존재를 없앨 수 없는 둘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작품이 내놓는 답은 이것으로 전부다. 한 번에 끝나는 해결은 없다. 매일 다시 의논할 뿐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도중, 신이치의 어머니가 죽는다.
다름 아닌 어머니 자신의 몸, 그 몸의 손에.
다음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