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이다. 원문 페이지에서는 간체와 번체를 전환해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처음에는 군사용어로 등장하는 말이 하나 있다.
AT 필드. 사도도 펼치고, EVA도 펼친다. 총알을 막고, 포탄을 막고, 다른 필드를 막는 장벽이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먼저 상대의 AT 필드를 중화해야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 말은 새롭게 정의된다.
마음의 벽. 영혼의 빛. 그리고 사도만 지닌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씩 있다.
이 벽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은 한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과 녹아들지 않는다.
보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제 이 거대한 계획의 작동 방식을 이야기하자. 바로 그것이 이 글의 주제다.
릴리스가 안티 AT 필드를 방출해 전 세계를 뒤덮는다.
그러면 인간은 개별 생명체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하나씩 LCL로 액화된다. 영혼은 검은 달에 모인다.
보완계획은 각 사람이 자기 형태를 유지하게 해 주던 그 벽을 없애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모두를 죽이는 일이 아니다. 정복도, 지배도, 절멸도 아니다. 모든 사람 사이의 경계를 거두어 모두가 같은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이다.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답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하다. 충분히 다루지 않으면 이 글 전체가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반박하는 글이 된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모두 모양이 같다.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신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다가오기를 바라면서도 다가오는 것이 두렵다.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마다 다른 말이 나온다.
아스카는 자신을 보게 만들지 못한다. 애쓸수록 사람들이 보는 것은 애쓰는 동작뿐이다.
아야나미 레이는 남에게 ‘이것이 나’라고 내보이지 못한다.
겐도가 원하는 사람은 기계 안에 있다. 십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도 닿지 못한다.
미사토와 카지 사이에는 저마다의 과거가 가로놓여 있다. 리츠코 앞에는 어머니가, 후유츠키 앞에는 자신이 하지 않은 한 가지 일이 가로놓여 있다.
이들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도, 의지의 문제도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사람마다 벽이 하나씩 있고, 바로 그 벽이 그를 그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벽을 허물면 이 고통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말할 필요가 없으니 차마 하지 못하는 말도 없다. ‘다른 사람’이 없으니 오해받을 일도 없다. 경계가 없으니 외로움도 없다.
이것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다. 그 문제를 정말로 없애 준다.
작품은 보완이 시작되는 장면을 그저 학살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녹아들 때, 어떤 얼굴은 편안하게 풀린다. 기다리던 사람을 마침내 만난 듯하다.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아오바는 다가오는 아야나미 레이들을 앞에 두고 제어대 아래에 숨는다.
이 장면에서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통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유혹도 분명히 드러난다. 두려움뿐이었다면 뒤에 이어지는 거절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작품은 경계를 잃을 때 얻는 위안도 함께 보여 준다.
여기서 무언가가 사라진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지는 동시에, 모두를 괴롭히던 무언가도 함께 사라진다.
그 안에서 신지가 본 것
신지도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초호기는 롱기누스의 창과 융합한 뒤 릴리스에게 흡수된다. 신지는 이미 인류가 보완된 세계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내면을 마주한다.
작품은 이 대목에서 신지가 처음부터 안고 있던 문제들을 모두 꺼내 늘어놓는다. 왜 기계를 조종하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남들은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자신은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그다음 아야나미 레이와 나기사 카오루를 다시 만난다.
서드 임팩트의 향방이 신지의 손에 맡겨진다.
신지가 택한 것
신지가 택한 것은 인류가 하나의 생명으로 합쳐지지 않는 쪽이다. 개개인이 따로 존재하던 원래의 세계를 원한다.
서드 임팩트가 중단된다.
이 선택의 이유는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다. 자칫 개성을 찬양하는 말로 읽히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보완된 상태에서는, 신지가 원하던 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신지가 줄곧 원한 것은 자신을 보아 주는 누군가다. 그런데 ‘누군가’가 있으려면 그 사람은 신지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모든 경계가 사라지면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도 사라진다. 더는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신지 역시 더는 누구를 찾아갈 수 없다. 누구에게 말을 걸 수도, 누구에게 거절당할 수도, 누군가 때문에 괴로울 수도 없다.
보완이 주는 것은 신지가 원하던 것의 정반대다. 고통을 없애는 방식이, 그가 원하는 것을 건네줄 수 있는 상대의 자리 자체를 없애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신지는 ‘개성은 소중하다’를 고른 것이 아니다. 그 자리를 남겨 두는 쪽을 골랐다. 그 자리에 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그 뒤 레이는 누구나 다시 사람의 형태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해변
신지가 LCL의 붉은 바다 위로 떠오른다.
눈을 뜨자 하얀 모래사장이 있다.
옆에는 붕대를 감은 아스카가 누워 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신지는 손을 뻗어 아스카의 목을 조른다.
아스카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진다.
신지는 손을 놓고 운다.
그러자 아스카가 이 작품의 마지막 말을 한다. 그 뜻은 대략 “역겨워”다.
그 말
이 연작이 도착하는 곳은 그 한마디다. 그러니 한 겹씩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 신지는 다른 사람이 여전히 자기 바깥에 있는 세계를 골랐다. 그리고 그 세계가 처음 건넨 것은 다른 한 사람이다.
두 번째. 그 다른 사람이 처음 한 일은 신지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신지는 방금, 누구도 남이 듣기 싫어할 말을 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을 거절했다.
세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 말은 아스카의 말이다.
모래사장에 누워 거의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했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만졌고, 이어 그 짧은 말을 했다.
이 두 행동은 같은 사람에게서 채 일 분도 안 되는 사이에 나왔다. 그런데 향하는 방향은 정반대다.
작품은 어느 쪽이 진심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아스카에게 한마디를 더 주지도, 눈빛을 클로즈업하지도, 음악을 넣어 감상을 이끌지도 않는다. 그저 두 일이 일어나고, 끝난다.
작품이 마지막으로 한 일
이 연작은 여기서 마친다.
다섯 글에서 본 것들을 다시 나란히 놓아 보자.
한 아이가 기계에 탄다. 거절의 대가가 다른 한 사람의 모습으로 눈앞에 놓였기 때문이다.
한 소녀에게는 수십, 수백 구의 여분이 있다. 그 소녀는 “나는 당신의 인형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떠난다.
또 한 소녀는 자신의 자리 전부를 내려갈 수 있는 숫자 하나에 건다. 그것을 막 되찾았는데 곧바로 잡아먹힌다.
한 남자는 구체적인 한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부품으로 환산한다.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 각자를 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벽을 없애는 것이다.
그 방안은 거절당한다.
그것을 거절한 사람도 곧바로 한 번 거절당한다.
신지가 선택한 세계는 바로 이런 세계다. 다른 사람이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할 수 있는 곳.
위로의 말이 아니다. 비관적인 결론도 아니다. 그 세계에 관한 설명일 뿐이다. 신지가 되찾으려 한 자리는 다른 사람이 그곳에 서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자리다.
그 자리의 가치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대로 그 자리의 위험이기도 하다.
작품은 이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인물도 나서서 정리하지 않고, 화면이 따뜻해지지도 않으며, 안도의 한숨을 쉴 만한 장면도 주지 않는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두 사람, 모래사장 하나, 거절의 한마디, 그리고 아직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누워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