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의 논의를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풀어 쓴 글이다.
1기 마지막 화.
토구사는 웃는 남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늘 쓰던 마테바 리볼버를 챙겨, 그 간사장이 있는 당 본부로 향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자신의 것이다. 그가 알기로 9과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동료들이 죽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에 분노한다.
그가 취한 행동은, 이 이야기 속 모든 사람이 했던 바로 그 행동이다.
그 자리에 섰던 사람들
먼저 그 자리에 섰던 이들을 세어 보자.
맨 처음의 사람. 협박 메일 한 통을 썼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끝내 신원이 드러나지 않았다.
아오이. 우연히 그 메일을 발견하고, 두 가지 일을 한 뒤, 6년 동안 침묵했다.
모방자들. 서로 모르는 채 각자 나섰고, 나머지 일을 전부 해냈다.
쿠사나기 모토코. 세라노에게서 정보를 끌어내려고, 그녀도 한 번 웃는 남자가 되었다.
토구사. 마지막 화에서.
그 자리는 한 번도 빈 적이 없지만, 같은 사람이 두 번 차지한 적도 없다.
하나의 자리, 다섯 부류의 사람들, 6년. 그 자리에 ‘웃는 남자 본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한 번도 서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사람은 모두 자기 이유가 있었다. 모토코는 수사를 위해서였다. 토구사는 분노해서였다. 모방자들은 각자 자기 사정이 있었다. 아오이는 그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나선 것은 아니었다.
모토코가 그랬을 때
모토코의 경우는 따로 짚을 만하다.
웃는 남자가 된 것은 전술적 행동이었다. 세라노의 입을 열어야 하는데, 세라노는 웃는 남자에게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웃는 남자로 분장했다.
줄거리상으로는 완벽하게 말이 된다. 그런데 그 구도는 영 불편하다. 어떤 현상을 추적하던 사람이, 추적을 위해 스스로 그 현상의 사례가 된다.
그 행동 뒤에 이 현상의 표본은 하나 늘어난다. 경찰이 만들어 낸 웃는 남자다.
제삼자가 나중에 웃는 남자 로고가 등장한 모든 사건을 집계한다면 모토코의 이 행동도 포함될 것이다. 그 기록에는 이번 일이 다른 사건들과 다르다는 것을 표시할 칸이 없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목적은 사건 해결이었다. 맡겨진 임무에 따라 행동했다. 진실을 대하는 입장도 아오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 모든 것은 데이터에 없다.
데이터상으로는 사건을 해결하려고 웃는 남자로 분장한 경찰과, 진실을 보고 분노한 젊은이가 똑같은 한 가지다.
토구사가 그랬을 때
토구사의 경우는 이 이야기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가장 매서운 일격이다.
앞선 글에서 보았다. 모토코가 그를 9과에 데려온 것은 같은 부류로만 이루어진 시스템은 같은 방식으로 틀리기 때문이다. 일부러 남겨 둔 다른 한 사람. 그가 바로 변수였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은 모두가 했던 바로 그 행동이다.
그녀는 그가 다르기 때문에 뽑았다. 그가 마지막에 한 일은 모두가 했던 행동이었다.
모토코의 판단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 판단은 옳았고, 두 시즌 52화에 걸쳐 거듭 입증되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다.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일과, 그렇게 나온 결정이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결정과 완전히 같은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둘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서로 다른 층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것’은 결정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말한다. ‘남과 같다’는 것은 생겨난 결정이 어떤 모습을 띠는지 말한다.
우리가 평소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만의 것이 있는지 판단할 때 쓰는 방법은, 모두 뒤쪽만 본다.
토구사의 분노는 자기 것이다. 이유는 구체적이다. 이름을 댈 수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고, 지난 몇 년간 그가 겪은 일에 직접 이어져 있다. 누군가 그에게 무언가를 심어 놓은 적은 없다.
하지만 그가 취한 행동은 서로 알지 못했던 모방자들의 행동과 같다.
왜 그 행동을 골랐는지도 봐야 한다. 그가 사는 사회에서 그것은 ‘한 사람이 바꿀 수 없는 일에 분노할 때’ 쓸 수 있는 기성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미 거기 있다. 이름도, 모습도, 선례도 있다. 무엇이든 해야 할 때, 가장 쉽게 손이 가는 것이 그것이다.
분노는 그 사람 자신의 것이다. 그 분노를 표현하는 형식은 바깥에서 가져왔다.
네 가지 질문을 나란히 놓으면
이제 다섯 편에서 다룬 것을 하나로 모아 보자.
첫째, 모방자들은 그 생각이 자기 것임을 증명할 수 없다. 각자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바로 그 확신이 이 현상의 기본 사양이다.
둘째, 고다는 이 현상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입증했다. 그 입증의 부작용은, 이후 어떤 자발적 운동도 자신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여자의 분노는 진짜이고, 이유는 스스로 생각했으며, 행동도 스스로 결정했다. 두 경우 모두에 들어맞는다.
셋째, 타치코마는 두 시즌 동안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지 묻는다. 그러다 자기 용도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사라진다. 영혼이 있었는지는 바깥에서 여전히 확인할 수 없다.
넷째, 모토코는 자신의 기억이 자기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종이학을 접던 그 소년이 정말 그곳에 있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네 질문의 모양은 같다.
바깥에서 확인할 방법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비관적인 결론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해석은 막아 두어야 한다.
가장 손쉽게 나오는 해석은 이렇다. 그러니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고, 자아는 환상이며, 사람과 복제품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작품은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작품 스스로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그 이유다.
어느 인물도 그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되지는 않는다. 모토코는 자신이 무엇인지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명료한 조직 운영의 판단을 내렸다. 토구사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전혀 증명할 수 없으면서도, 해야 한다고 여긴 일을 했다. 타치코마는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 쿠제는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자기 구상대로 나아갔다.
그들이 행동할 때, 누구의 손에도 그 증명은 없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과 행동하지 않는 것은 다른 일이다.
작품은 둘을 뚜렷하게 갈라 놓는다. ‘이것이 내 것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가 ‘그러니 하지 않겠다’로 이어지게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두 장면
이 연작은 여기서 끝난다.
마지막으로 두 장면을 나란히 놓겠다. 그 사이에는 말을 보태지 않겠다.
첫 번째. 젊은이가 카메라 앞에 서 있다. 현장에서 그를 담을 수 있는 모든 것, 방송 카메라와 감시 카메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얼굴은 같은 로고에 실시간으로 가려져 있다. 아무도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두 번째. 6년 뒤, 다른 사람이 그 옷을 입고 그 로고를 걸친다. 자신과 관련된 아주 구체적인 일 때문에 어딘가를 향해 걸어간다. 그는 이 조직이 일부러 남겨 둔, 남들과 다른 한 사람이다.
그 사이 많은 사람이 그 로고를 썼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만들어 낸 모습은 똑같았다.
그들에게 그 로고로도 가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는지는—
이 52화는 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단 하나도 내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