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의 논지를 한국어 독자에게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이다. 원문 웹페이지에서는 간체와 번체를 전환해 읽을 수 있다.
마을 아이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돈다. 어느 고양이에게 찍히면 그 아이는 사라진다고. 아이들은 그것을 ‘거짓고양이’, 네코다마시라고 부르며 무서운 전설처럼 서로에게 전한다.
어른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한다.
고양이는 실재한다
부정고양이는 실제로 있다. 마을의 제도가 그것을 관리한다. 교육위원회는 아이들을 선별하고 처분하는 일을 맡고, 그 위의 윤리위원회는 마을의 존속을 책임진다. 아사히나 토미코가 훗날 사키에게 설명하는 구조가 이것이다.
용도도 분명하다. 주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고 판정된 아이, 악귀나 업마가 될 조짐이 있다고 판단된 아이를 처분하는 것이다. 여기서 처분은 말 그대로다.
이 절차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재판도 통지도 없다. 당사자인 아이에게 왜 처분되는지 공식적으로 설명하는 자리도 없고, 남은 사람들에게 그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 주는 자리도 없다.
그저 어느 날부터 그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는다.
또 하나. 처분되는 아이는 대개 자신이 왜 골라졌는지도 모른다. 근거는 ‘조짐’이다. 어른들이 관찰하며 쌓아 온 징후들인데, 정작 아이에게는 한 번도 알려 준 적이 없다. 끌려가는 순간까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를 수도 있다. 실제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라진 다음에는 기억을 바꾼다
이제 이 글의 중심에 닿는다. 한 아이가 사라지면 같은 반에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보통이라면 묻고 슬퍼할 것이다. 서로 소식을 알아보고 선생님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다 어른들이 무언가를 감춘다는 것을 눈치채고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마을은 그들의 기억을 바꾼다. 사라진 아이를 기억 속에서 지운다. 전학 갔다고 알려 주는 것도,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도 아니다. 기억 속에 그 사람이 아예 없다.
아이들은 상실을 참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여기서는 잠시 멈춰야 한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서늘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사람은 슬퍼한다. 슬픔은 신호다. 그 사람 안의 무언가가 저항하고 있다는 신호, 아직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신호다. 그것은 쓸모가 있다. 그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마을은 그 신호 자체를 없앤다. 슬픔을 억누르는 것보다 훨씬 철저하다. 표현하지 못하게 해도 슬픈 사람은 여전히 슬프다. 이곳에서는 슬퍼하지 않게 만든다. 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원인이 된 사건을 그 사람에게서 없애 버린다.
억눌린 사람에게는 저항할 가능성이 남는다.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에게는 저항할 대상이 없다.
사키의 언니
사키에게는 요시미라는 언니가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처분된 사람이다. 사키의 기억도 수정됐다. 다만 완전하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설명할 수 없는 인상,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 특정한 순간이면 불쑥 떠오르는 무엇들이 파편처럼 남았다.
작품은 이 흔적을 아주 가볍게 건드린다. 어느 한 화에서 사키가 언니를 떠올리며 오열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파편들이 가끔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사키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한 사람 안에 설명할 수 없는 조각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조각이 누구에 관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토미코의 자리에서 보면
여기서는 토미코의 사정도 충분히 말해야 한다. 윤리위원회의 책임자인 아사히나 토미코는 이백 살이 넘었다. 이 마을의 여러 세대가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훗날 사키에게 하는 설명을 궤변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녀의 뜻은 이렇다. 자신들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악귀의 혈통은 끊어야 한다. 악귀 하나만 나타나도 짧은 시간 안에 마을 전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정이 아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실제 사건이다.
문제는 악귀와 업마를 조기에 가려낼 믿을 만한 검사법이 없다는 데 있다. 지금의 아이를 검사해 장차 무엇이 될지 알아낼 수 없다. 불안정한 주력, 감정의 이상, 특정한 행동 양상 같은 징후만 있을 뿐이다. 그마저 정확도가 높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차라리 틀리는 쪽을 택한다. 잘못 골라 한 아이를 처분하면 대가는 아이 하나다. 악귀 하나를 놓치면 대가는 마을 전체다.
이 계산은 가능하다. 그리고 계산 결과는 그들의 선택을 뒷받침한다.
이 층위를 쓰지 않으면 이 글은 값싼 비난에 그친다. 토미코는 잔인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 역시 다른 선택지가 없는 계산법 안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다. 그 무게를 이백 년 동안 짊어져 왔다.
계산에 없는 항목
그런데 이 계산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마을의 존속을 단위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 단위 안에서 아이 하나는 변수 하나가 된다. 죽음은 분자나 분모에 넣을 수 있는 수치다.
‘이 아이 자신’이라는 항목은 그 계산법 어디에도 자리가 없다. 값을 낮게 매긴 것이 아니다. 그런 칸 자체가 없다.
어떤 계산법은 자신이 다루는 범위 안에서 완벽하게 옳을 수 있다. 하지만 누가 그 범위를 정했는지는 그 계산에 들어 있지 않다.
작품은 이 문제를 보여주기 전에 관객을 아이들 곁에서 십수 화 동안 살게 한다. 학교에 가고, 다투고, 연애하고, 함께 강가에서 노는 모습을 먼저 보게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이 아이들이 마을의 장부에서는 무엇으로 기재되어 있는지 알려 준다.
기억이 바뀐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아직 한 겹이 더 남는다. 기억을 수정당한 아이들도 자란다. 마을의 어른이 되어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위원회에 들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차례가 온다.
그때 그들에게는 ‘곁에 있던 아이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에 관해 자기 삶에서 나온 기록이 하나도 없다. 그 기록은 이미 지워졌다.
이 절차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자신에게 반대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경험을 바로 자신이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어릴 때 친구가 갑자기 사라졌고, 어른들은 말해 주지 않았으며, 자신은 오래 슬퍼했다는 기억이 있다면 어떨까. 어른이 되어 그 자리에 앉았을 때 잠시 망설이게 할 무엇이 손에 남아 있을 것이다. 마을은 그것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부정고양이가 하는 일은 절반이다. 고양이는 아이 하나를 데려간다. 기억 수정은 여러 사람에게서 그 아이를 잃은 경험을 가져간다. 뒤의 절반 덕분에 제도는 세대마다 새로 의심을 억눌러야 할 수고를 덜게 된다. 의심이 싹틀 자리까지 함께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 보호와 처분은 모두 같은 말에 기대고 있다. 동족. 마을 밖에는 말을 하고, 조직을 만들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생물들이 산다. 그들은 바로 이 말의 바깥에 놓여 있다.
이 연작은 기시 유스케의 2008년 소설을 바탕으로 이시하마 마사시가 감독하고 A-1 Pictures가 제작한 TV 애니메이션 《신세계에서》(2012–2013, 전 25화)를 중심으로 읽는다. 소설은 보충 맥락으로만 참조하며, 만화판은 다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