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의 논지를 한국어 독자에게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이다. 원문 웹페이지에서는 간체와 번체를 전환해 읽을 수 있다.
열두 살 아이 다섯이 야외에서 무언가를 붙잡는다. 하얗고 길쭉한 몸을 보아서는 동물 같다. 하지만 정체는 천 년 전에 남겨진 도서관 단말이다. 말을 하고, 질문에 답하고, 영상까지 보여준다.
아이들이 묻자, 그것이 답한다.
《신세계에서》가 처음으로 감춰 둔 진실을 꺼내는 순간이다. 그 답이 드러내는 것은 이 사회가 서 있는 토대다.
천 년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단말이 들려주는 역사는 대략 이렇다. 천 년쯤 전, 인간 가운데 ‘주력’을 지닌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각만으로 물체를 움직이고, 변형하고, 파괴하는 염동력이다.
한 사람이 이런 힘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사람을 죽이는 데 도구도, 준비도 필요 없다는 뜻이다. 가까이 다가갈 필요조차 없다. 생각 한 번이면 된다.
사회는 무너졌다.
그 뒤 인류는 여러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노예제를 택한 사회도 있었고, 소규모로 모여 사냥하며 사는 집단도 있었으며, 그 밖의 형태도 있었다. 단말의 영상이 하나씩 보여준다. 극소수의 주력 보유자가 주력 없는 다수를 노예로 부리는 곳, 작은 무리가 산속으로 숨어든 곳, 또 다른 곳들. 아이들이 사는 마을은 그중 한 갈래에서 이어져 왔다.
여기서 이 영상이 무엇인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역사 기록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지금까지 그 내용을 단 한마디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 마을에서 열두 해를 살며 숱한 것을 배웠지만, 이 역사는 배운 적이 없었다.
그들의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을까. 이 글은 그 해법 하나를 끝까지 들여다보려 한다.
몸 안의 장치
그 이름은 괴사 기구다. 두 겹으로 작동한다.
첫째는 공격 억제다. 동족을 공격하려 하면 손을 들 수가 없고, 그런 생각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는 괴사다. 그래도 공격이 일어나면 공격한 사람이 죽는다. 심장이 멎고 호흡이 끊긴다.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규범도, 도덕 교육도, 종교의 계율도 아니다. 당사자가 동의하거나 기억하거나 지켜야만 효력이 생기는 어떤 규칙도 아니다. 유전공학과 조건반사를 통해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몸에 넣어 둔 생리적 장치다.
장치가 심어지는 시기는 태어나기 전과 어린 시절이다. 자기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들어가 있다. 누구도 동의한 적이 없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어느 날 마음을 바꿔 꺼내 버릴 수도 없다.
이들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마음을 한 사람 안에서 자라나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부품으로 만들어 몸에 집어넣었다.
효과가 있었던 해법
이 대목은 충분히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의 네 편은 그저 이 사회를 고발하는 글로 읽히게 된다.
그 해법이 해결한 문제는 실제로 존재했다. 극단적인 문제였고, 달리 풀 길이 없었다. 누구나 생각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이 장치마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작품은 이미 답을 보여준다. 천 년 동안 등장했던 다른 생존 방식들은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
가미스 66정은 살아남았다.
이곳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책을 읽는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운다. 일상은 조용하고 질서가 있으며 폭력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강가에서 놀고 어른들은 들에서 일한다. 밤이면 불이 켜진다. 작품은 이런 풍경에 적지 않은 시간을 쓴다. 초반 몇 화는 밝고 목가적이며, 거의 달콤하게까지 느껴진다.
장치가 가져다준 것은 실재한다. 천 년 동안 그 파국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회를 순전히 폭정으로만 읽으면 이 층위가 통째로 사라진다. 더 중요한 사실도 있다. 어느 폭군 한 사람이 고안한 해법이 아니다. 천 년에 걸쳐 여러 세대가 거듭 실패한 끝에 남은, 실제로 가능한 해법이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어쩌면 당시 유일하게 진지한 대책을 찾고 있던 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장치를 작동시키는가
이제 작동 방식을 보자. 뒤에서 이어질 세 편을 읽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공격 억제와 괴사 기구에는 공통으로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상대가 ‘동족’이어야 한다.
이 조건은 꼭 필요하다. 사람은 먹고살아야 한다. 닭도 잡고 물고기도 잡아야 하며 해충도 없애야 한다. 사냥을 하고, 치울 것을 치우고, 사람을 위협하는 생물을 처리해야 한다. 모든 생물에게 장치가 반응한다면 이 사회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구별해야 한다. ‘저것은 동족이다’라고 판단할 때만 작동해야 한다.
그 구별에 쓰이는 것은 염색체도, 유전자 검사도, 어떤 객관적 지표도 아니다.
기준은 당사자의 인식이다. 그가 상대를 무엇으로 여기느냐에 달려 있다.
작품의 끝에 이르면 이 조건은 몹시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다만 지금 이 글에서는 기술적인 세부 사항으로 남겨 두자. 장치를 쓸 수 있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덧붙인 제한 조건이다. 이런 장치를 설계하는 엔지니어라면 누구나 넣었을 조건이기도 하다. 이 조건을 빼면 쓸 수 없는 장치가 된다.
심어 놓는 것과 자라나는 것
끝으로 두 말의 차이를 따져 보자. 한 사람이 살인을 할 수 없게 되는 데에는 서로 다른 두 경로가 있다.
하나는 자라나는 것이다. 자라는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만날 때마다 상대도 자신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본다. 그러는 사이 마음속에 차마 할 수 없다는 거부감이 조금씩 생긴다.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다. 의문을 제기할 수도, 남과 논의할 수도, 극한의 상황에서는 스스로 뒤집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뒤집을 수 있는데도 하루하루 뒤집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하나는 심어 놓는 것이다. 어떤 생각도 품기 전에 이미 자리 잡고 있다. 동의를 구하지도, 이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매일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다. 심장이 뛰듯 그저 거기에 있다.
밖에서 보면 둘의 행동은 같다. 어느 쪽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차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때는 하나다. 누군가 ‘동족’이라는 말의 경계를 옮겨 놓았을 때다.
스스로 자란 거부감은 그 사람의 판단을 따라간다. 전에 보지 못한 존재를 만나면, 그는 자기 눈으로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보려 한다. 반면 몸에 심어진 장치는 정해진 판정 기준을 따른다. 그 기준을 누가, 무엇을 근거로 정했는지, 바꿀 수는 있는지. 정작 그 장치를 몸에 지닌 사람에게는 어느 것도 결정할 권한이 없다.
분류에 의존한다고 해서 공격 억제와 괴사 기구의 실제 효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지켜 낸 평화는 진짜다. 계속 물어야 할 것은 그 보호가 어디까지 미칠지 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다.
마을에는 이 거대한 역사보다 작고, 일상에는 더 가까운 비밀도 있다. 어떤 아이들은 갑자기 사라진다. 남은 아이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잃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이 연작은 기시 유스케의 2008년 소설을 바탕으로 이시하마 마사시가 감독하고 A-1 Pictures가 제작한 TV 애니메이션 《신세계에서》(2012–2013, 전 25화)를 중심으로 읽는다. 소설은 보충 맥락으로만 참조하며, 만화판은 다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