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 미학의 갈래 · 08 / 13 · 지각의 아름다움
어두워지자, 정원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푸른 꽃을 알아보아 더는 쓸 일이 없어도 그 파랑은 남는다.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알림 한마디만이 아니다.
해가 지려는데 정원에는 아직 불을 켜지 않았다.
낮에 가장 눈에 띄던 붉은 부분이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꽃은 제자리에 있고 꽃잎이 갑자기 다른 색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그런데 뒤의 어둠에 조금씩 섞인다. 곁의 푸른 꽃은 밝음이 조금 더 남은 것 같다.
더 기다리면 그 색들도 구분하기 어렵다. 화단의 윤곽은 알지만 오후처럼 한눈에 저 붉은 꽃이라고 가리킬 수는 없다.
정원을 몰래 바꾸어 놓은 것도, 눈이 허공에 다른 정원을 만든 것도 아니다. 빛이 바뀌었고 다른 빛에서 사물을 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눈은 낮의 그림을 비례해서 어둡게 만든 뒤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아니다.
같은 장소가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을 바꾸고 있다.
눈은 완전히 투명한 창이 아니다
밝을 때 색을 구별하는 데는 원추세포가 주로 작용한다. 빛이 약해지면 간상세포의 역할이 더 두드러진다. 어떤 조건에서는 청록 쪽이 빨강보다 상대적으로 밝게 보인다. 이 밝기 관계의 변화를 푸르키녜 효과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원은 실험실이 아니다. 황혼의 빛 자체도 성분이 바뀌며 꽃잎이 빛을 어떻게 반사하는지도 관련된다. 모든 붉은 꽃이 같은 시간표대로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다. 정원에 법칙 한 줄을 외워 주는 것보다 눈앞의 모습이 꽃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님을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
이 눈도 거기에 참여한다.
볼 수 있는 빛과 없는 빛이 있고, 여기서 두드러지는 차이도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차이도 있다. 태어나기 전에 감각기관 한 벌을 먼저 골라 놓고 세계에 어떻게 들어갈지 정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세계를 마음대로 꾸며 낼 수 있다는 말도 아니다. 화분에 손을 대면 단단한 가장자리가 막는다. 발밑 계단도 잘 안 보인다고 비켜 주지 않는다. 다 보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다르다.
저 어두운 빨강은 저기에 있는 색이다. 기분에 따라 아무 데나 놓은 색 덩어리가 아니다.
알려 주지만, 알림에 그치지는 않는다
평소 우리는 더 보기도 전에 감각을 다 쓰고 넘어갈 때가 많다.
냄비에서 지글 소리가 나면 불이 너무 센 줄 알고 줄이고, 잔이 뜨거우면 얼른 내려놓고, 멀리서 누가 부르면 돌아본다. 색과 소리, 차고 뜨거움은 생활 밖에 붙인 장식이 아니다. 어떤 차이를 우리에게 닿게 해 제때 무엇인가 할 수 있게 한다.
어떤 차이는 생물이 계속 살 수 있는지에도 관련된다. 보이고 안 보이고, 들리고 안 들리는 일이 사소하지 않을 때가 있다. 감각이 형성된 데에는 긴 내력이 있다. 하지만 정원에 서서 그 내력 전체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여기에 나타난 이 부분이다. 모든 것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타난 것도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신호는 아니다. 저기에 꽃 한 송이가 있고 여기에 계단이 있다.
그런데 일을 마쳤다고 감각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푸른 꽃인 줄 이미 알아보아 색으로 찾을 필요도 없고 무엇과 맞추려고 꺾을 생각도 없다. 그래도 그 파랑은 있다. 잎 가까이는 더 짙고 가장자리는 엷으며 저녁 바람에 살짝 흔들린다. 다음 질문에 답하게 하지 않아도 자기 모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여기에 아주 작은 머묾이 있다.
꽃은 이제 쓸모없다고 선언하는 것도, 길 찾느라 바쁘던 사람을 실용성만 따진다고 탓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무엇을 보고하라고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내게 나타난 그 모습을 곧바로 다음 일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아도 된다.
편안하지 않아도, 또렷이 볼 수 있다
이런 머묾을 들으면 쉬는 방법을 떠올리기 쉽다. 퇴근하고 꽃을 보며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일처럼 말이다.
그렇게 해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꽃을 보아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지 보는 일의 뜻 전부는 아니다.
쇳빛 바다를 생각해 보자. 하늘이 낮고 수면에는 보기 좋은 밝은 색이 없다. 바람은 난간 사이를 소리 내며 지난다. 이 오후가 마음에 들지 않고 올 때보다 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회색이 가까운 데서 먼 데로 어떻게 펼쳐지고 파도 끝이 잠깐 밝게 뒤집혔다 사라지는지 또렷이 보일 수 있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 볼 게 없다는 말은 다르다.
반대로 추울 때 손을 따뜻한 곳에 대면 한숨이 나올 만큼 편할 수 있다. 열이 손끝에서 어떻게 번지는지 알아보지 않고 그저 편하기만 할 수도 있다. 그 편안함은 진짜이므로 깎아내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것만으로 방금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정할 수는 없다.
이 생각에서 아름다움은 좋은 기분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느껴지는 것이 충분히 구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났고, 이번에는 처리해야 할 안내 신호로만 쓰이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감상 능력을 증명하려고 거슬리는 소리나 아픔을 참으라는 요구도 아니다. 소리가 너무 크면 꺼도 되고 바람이 차면 방에 들어가도 된다. 어떤 아름다움도 네가 반드시 남아야 한다고 대신 정해 줄 수는 없다.
다시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불 켜진 방에서 정원으로 나오면 처음에는 어둠이 거의 한 덩어리다. 조금 기다리면 길가의 연한 돌과 나무줄기, 의자 등받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어둠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보이는지는 빛과 개인의 상태에도 달려 있다. 정해진 몇 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서서히 나타나는 모습에 빠져들 수 있다. 저기에 의자도 있었구나. 구멍처럼 보인 곳에도 조금씩 층이 드러난다.
하지만 구분한 뒤 바로 다음 신기한 것을 찾을 필요는 없다.
등받이는 여기 있고 돌은 저기 있다. 지금 이미 나타난 모습에도 머물러 볼 만하다. 보는 일을 유지하려고 계속 새것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주의는 자극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식욕에 그칠 것이다.
눈이 아니어도 될 때가 있다. 매끈해진 돌 표면에 손바닥을 댄다. 차갑고 단단하며 얕게 팬 데가 있다. 얼마나 무게를 견디는지 시험하는 게 아니라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인다. 눈으로 얻지 못하는 이 몫에 촉각은 자기 길이 있다.
다른 사람의 길은 또 다를 수 있다. 내가 말하는 두 색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내가 듣는 저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표준 감각 한 벌을 갖추어야 이 이야기에 들어올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서로 이야기할 때 같은 느낌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모습인지 가리켜 달라고 청할 수 있다.
이름을 아는 것은 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너무 일찍 끝내게 할 수도 있다. 푸르키녜 효과를 배우고 정원으로 돌아오면 어디에 주목할지 더 알 수도 있다. 아니면 그건 안다고 한 뒤 더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지식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이름이 눈을 대신해 여기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불이 켜졌다. 흰 빛이 화단을 비추자 사라지려던 색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정원이 마침내 유일하게 옳은 버전을 내준 것은 아니었다.
방에 들어가도 되고 조금 더 서 있어도 된다. 남는다면 꽃이 인생의 도리를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방금 그 파랑이 정원을 다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 설명하지 않았다고 파랑이 조금 모자라지는 않았다.
원논문과 참고 자료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되었으며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기술적인 원논문 전체의 번역은 아닙니다. 각 글의 집필 설명에는 논의를 위해 만든 장면과 실제 연구·사료로 확인한 내용의 구분을 남겼습니다. 이론 논문은 영어·중국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 소개는 한국어판이 있지만, ‘일상의 발견’과 예전 장문 ‘예술가는 죽었다’는 기존 영어·간체 중국어판으로 이어집니다. 그 본문까지 이번에 한국어로 다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바탕과 범위
『지각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썼다. 정원과 바닷가, 돌 표면의 장면은 논의용으로 만든 것이지 필자의 경험 기록이 아니다. 푸르키녜 효과는 밝고 어두운 조건에서 상대적인 밝기가 변하는 현상이다. 황혼과 물체의 반사, 관찰 조건이 모두 정원의 실제 모습에 참여한다. 간상세포와 원추세포가 정해진 시각에 완전히 교대한다고 쓰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쾌감의 구분은 글이 채택한 철학적 입장이며 시각 실험이 직접 증명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