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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대지가 읽는 『장자』 · 제1편

그들은 은혜를 갚으러 왔다―혼돈의 죽음

좋은 뜻으로 상대를 바꾼 뒤에도, 상대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은 남아 있을까요?

Han Qin ·

『장자』 「응제왕」의 마지막 대목은 짧습니다.

남해의 임금은 숙, 북해의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은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고, 혼돈은 두 사람을 아주 잘 대접했다. 두 사람은 그 은혜를 갚으려고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 일곱 구멍이 있는데, 그에게만 없다. 시험 삼아 뚫어 주자.’ 하루에 하나씩 뚫었고, 이레 만에 혼돈은 죽었다.

남해의 임금은 숙(儵), 북해의 임금은 홀(忽), 중앙의 임금은 혼돈(渾沌)입니다. 숙과 홀은 혼돈의 땅에서 자주 만났고,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했습니다. 두 사람은 은혜를 갚자고 의논합니다. 사람에게는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 일곱 구멍이 있는데 혼돈에게만 없으니, 대신 뚫어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하나씩. 이레가 지나자 혼돈은 죽었습니다.

1. 흔한 해석은 어디에서 멈추는가

흔한 해석은 두 임금이 좋은 뜻으로 나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멋대로 나서거나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자연에 맡기자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독법에는 치명적인 결과가 있습니다. 이 일을 그저 한 번의 작업 실수로 낮춰 버립니다. 실수라면 고칠 수 있겠지요. 다음에는 친절을 베풀기 전에 더 생각하고, 사용자 조사를 더 하고, 한마디 더 물으면 됩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피해 갈 수 있는 교훈이 됩니다. 하지만 몇몇 세부 때문에 저는 여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첫째, 숙과 홀은 ‘임금’입니다. 남을 바꾸는 주도권을 지위를 가진 두 사람에게 쥐여 주었습니다. 우연한 경솔함만 그린 것이 아닙니다.

둘째, 동기에는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혼돈은 두 사람을 잘 대접했고, 그들은 은혜를 갚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보답하러 왔습니다. 침략자로 그렸다면 읽기는 쉬웠겠지만 그만큼 덜 흥미로웠을 겁니다. 동기를 하필 보은으로 둔 것입니다. 셋째, 충분해 보이는 근거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일곱 구멍이 있고 혼돈에게는 없습니다. 그 차이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반드시 메워야 할 결함으로 본 것은 이미 두 사람의 판단입니다.

넷째, 가장 중요한 점은 한꺼번에 한 일이 아니라 ‘하루에 하나씩’, 일곱째 날까지 계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은 어느 날 어떤 감각이 생겼는지, 두 사람이 망설였는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우리 앞에 놓습니다. 두 사람이 옳다고 정한 방향에서는 구멍이 하나 늘 때마다 원하는 완전함에 가까워졌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 자체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는 다시 묻지 않습니다. 제가 눈여겨보는 것은 작업상의 실수만이 아니라, 더는 질문받지 않는 방향입니다. 줄곧 고쳐 주면서, 그 ‘좋음’을 혼돈이 부정할 자리는 끝내 남기지 않았습니다.

2. 뚫는 행위보다, 그 뒤에도 남겨 두는가

‘착(凿)’, 곧 깎고 뚫는 일은 우리가 세계를 알고 바꾸는 기본 작용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 구분도 변화도 없다면 인식도 관계도 없을 테니까요. 상대에게 아무 변화도 주지 않는 것은 관계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바꾸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바꾼 뒤에도 내가 결정하지 않는 부분을 남기느냐입니다. 남기는 쪽을 저는 ‘함육’이라 부릅니다. 나는 당신을 바꾸지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미리 정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뒤에도 당신은 당신이며, 계속 스스로를 다듬을 수 있습니다. 남기지 않는 쪽은 ‘식민화’라 부릅니다. 내 기준으로 상대를 채워서, 남는 것이 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3. 그들이 만들려던 것의 이름은 ‘사람’이었다

혼돈의 죽음이 얼마나 정밀하게 그려졌는지 보려면, 두 사람이 무엇을 향해 구멍을 뚫었는지 봐야 합니다. 그들이 향한 것은 혼돈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구멍이 있다.’ 완전한 존재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구성이 두 사람의 손에 있었고, 그 구성의 이름이 사람이었습니다. ‘모두’라는 말을 보세요. 남을 대신해 정해 주는 많은 일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누구나 가진다, 누구나 필요하다, 온전한 존재라면 원래 이래야 한다. 이 ‘모두’가 생기면, 자기 취향을 강요하는 일도 객관적인 부족을 보충하는 일처럼 바뀌기 쉽습니다.

두 사람은 개인적인 취향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 그렇다’는 공통 기준을 따랐습니다. 기준이 상식처럼 보일수록, 그 기준에 되묻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4. 일곱 상처가 아니라, 일곱 단계의 닮음

이렇게 읽으면 이레 동안의 과정에 다른 뜻이 생깁니다. 구멍을 하나 낼 때마다 혼돈은 두 사람이 정한 모습에 가까워집니다. 일이 끝났을 때 혼돈은 없습니다. 저는 이 결말에서 상처뿐 아니라 지워 버림을 읽습니다. 상대가 마침내 틀에 맞는 대신, 자기로 살아갈 가능성을 잃는 것입니다. 이런 지워 버림은 적의로만 오지 않습니다. ‘이제 기준에 맞네’라는 얼굴로도 옵니다. 식민화가 성공한 끝에 있는 것은 단지 다친 타자가 아닙니다. 틀에는 빈틈없이 맞지만, 그 안에 원래의 타자는 더 이상 없는 무언가입니다.

5. 혼돈을 죽인 것은 여항을 남기지 않는 구성이었다

그러니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된 구성을 쓴 것이 문제이니, 사람의 구멍 대신 혼돈에게 맞는 구멍을 고르면 된다는 식으로요. 더 깊은 문제는 기준을 무엇으로 바꾸든, 내가 아직 상대를 다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가입니다. ‘사람에게는 일곱 구멍이 있다’는 원래 사람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것으로 혼돈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하는 순간, 관찰은 명령이 됩니다.

이런 구성에는 자신이 포착하지 못한 것을 놓아둘 자리가 없습니다. 일곱 구멍에 들어맞지 않으면 모두 결핍으로 처리됩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이 없을 때까지 뚫는 일은 지나침이 아니라 정확한 실행입니다. 혼돈에게 더 잘 맞는 구멍으로 바꿔도 ‘여항’, 곧 그 구성에 다 담기지 않는 것을 남기지 않는다면, 조금 더 편하게 죽게 할 뿐입니다. 여항은 덜 뚫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구성 자체에 열린 곳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두 사람이 할 일은 더 적절한 구멍을 찾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라는 틀을 혼돈에 관한 하나의 가설로 두고, 혼돈이 그것을 아니라고 할 여지를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더 생각해 볼 결과도 있습니다. 혼돈이 죽자 두 사람도 자신들을 잘 대해 주었던 혼돈을 영원히 잃었습니다. 손에 쥔 구성과 달랐던 존재를 잃은 것입니다. 두 사람 역시 관계 하나를 잃었습니다. 손실이 혼돈 쪽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통제자가 이익을 얻지 못한다거나, 양쪽이 치르는 대가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6. 성과표 바깥의 사람

저는 실리콘밸리에서 거의 이십 년을 일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제대로 이해한 것은 장자를 읽을 때가 아니라 연말 성과평가, perf review를 할 때였습니다. 성과평가는 제가 아는 제도 가운데 불평이 반복되면서도 계속 쓰이는 대표적인 제도입니다. 혼돈을 읽으면 자주 그것이 떠오릅니다. 이제 말할 것은 이 이야기에 비추어 본 한 가지 위험이지, 모든 회사의 전모는 아닙니다.

평가는 흔히 사람을 돕겠다는 말로 찾아옵니다. 현재 위치를 알게 하고, 성장시키고, 기여가 보이게 하고, 보상을 공정하게 나누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많은 사람이 진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 진심이라도 그다음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구체적인 지적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팀 사이의 소통이 약하다’는 말이 사실일 수 있지요.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정한 방식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 가려면 한 걸음이 더 필요합니다. 그 한 걸음을 본인 대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평가는 거듭 돌아옵니다. 반년에 한 번, 이번에는 소통, 다음에는 자기 기여를 드러내는 일, 그다음에는 리더십과 전략적 사고를 보완합니다. 하나씩 보면 말이 되지만, 합쳐 놓으면 어느새 ‘표에서 내가 아직 못 채운 칸이 무엇인가’만 묻게 될 수 있습니다. 뚫어 가는 방향은 더 나은 당신이 아니라 그 표입니다. 직급 체계가 일곱 구멍인 셈입니다. ‘완성된 L6’의 모습을 먼저 정하고, 사람마다 대조합니다. 상사의 개인 취향도 아닙니다. ‘다들 이렇게 정한다’는 비인칭적 기준이기에 밀어붙일 힘이 생깁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구멍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할지 말지를 ‘성과평가에 도움이 되나’로만 정하기 시작하면, 표는 일을 평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가치 있는 일까지 대신 정합니다. 소통을 배우고 책임을 맡는 것은 원래 사람을 더 자유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 배워야 하는지, 배운 것으로 무엇을 할지까지 표가 대신 답한다면, 개선은 다른 선을 넘어갑니다.

회사도 측정하지 못하는 부분을 잃습니다. 아무도 추적하지 않던 문제를 지나가다 고친 사람, 교육 지표에는 없어도 신입 세 명을 돌본 사람, 담당이 아닌데도 ‘이 방향은 틀렸다’고 말한 사람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더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표의 점수는 남지만 표 밖의 기여는 줄어듭니다.

7. 고쳐도 바뀌지 않는 까닭

실리콘밸리에는 영리한 사람도, 고치려는 의욕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표를 고치는 것과 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제가 본 많은 개편도 항목과 평가 축, 평가를 조정하는 절차를 더하는 일이었습니다. 더 꺼내기 어려운 질문은, 애초에 표 하나가 사람 전체를 덮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평가를 없애자’는 말은 무책임하게 들리고,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할 사람에게 손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표 밖에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평가 폐지는 아닙니다. 평가가 다룰 수 있는 것만 다루게 하고, 그 때문에 사람 전체를 정의할 권한까지 얻지는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깎이고 뚫리는 것은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는 사람 자신이 목적이 아니게 됩니다. 선의로 포장한 절차가 그를 측정 가능한 기여를 생산하는 수단으로 만듭니다. 가장 알아보기 어려운 점은, 뚫는 사람 스스로 정말 은혜를 갚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돕는 거야.’ 그 말이 사실일 때가 많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두 사람이 악의적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별로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동기를 보은으로 정해 놓은 것은, ‘선의였으니’라는 방패를 맨 처음 치워 버리기 위해서라고 저는 읽습니다.

선의는 식민화를 막아 주지 못합니다. 식민화는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의하지 않는 곳을 상대에게 남겨 두었는지가 문제입니다.

8. 이 물음은 지위를 가진 사람을 향한다

이 잣대를 가져가기 전에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봅시다. 혼돈의 죽음은 「응제왕」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다스림과 개입을 거듭 이야기하는 편의 끝에 놓였기에,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특히 읽힐 만합니다. 임금은 셋인데, 다른 하나를 어떻게 바꿀지 결정하는 이는 둘뿐입니다. 혼돈이 떠날 수 있었는지는 원문에 없습니다. 쓰이지 않은 그 거절이야말로 제가 여기에서 가장 되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물음은 뚫리는 쪽을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손에 표 한 장이나 예산 하나, 다른 사람의 일정을 바꿀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당신은 숙이거나 홀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 사람의 친절에 보답할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9. 독자에게

결론 대신 이 잣대를 대어 볼 세 군데를 남깁니다.

첫째, 손에 든 표가 거기에 적히지 않은 것을 위한 자리를 남기는지 보세요. 표가 정확한가가 아니라, 표 바깥에도 무언가 있음을 인정하는가입니다. 여항을 남기지 않는 구성은 아닌지 묻는 것입니다.

둘째,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야’라고 말한 뒤, 상대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남았는지 보세요. 여기서는 선의를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이 잣대는 동기를 묻지 않습니다. 선의는 식민화를 막아 주지 못합니다.

셋째, 측정할 수 없는데도 늘 거기 있던 사람과 일들을 보세요. 지표가 없으니 대신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던 것들입니다. 숙과 홀 역시 혼돈을 잃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10. 가져갈 수 있는 잣대

이 이야기가 주는 것은 도덕 교훈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관리자와 구성원, 제품과 사용자, 부모와 아이, 교사와 학생, 플랫폼과 창작자, 그리고 우리와 우리가 훈련하는 모델 사이까지, 어떤 관계에도 대어 볼 수 있습니다. 이 잣대는 동기도, 보기 좋은 결과도 묻지 않습니다. 딱 하나를 묻습니다. 깎고 뚫은 뒤에도 저쪽에, 당신이 결정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까?

원문과 출처

이 한국어판은 Non Dubito의 중국어 산문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장자』 원전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며, 고문 인용 부분도 여기서는 그 내용을 한국어로 풀어 전합니다. 중국어 원래 페이지에는 고문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기존 영어판 역시 영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썼고,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례에 빗대거나 거기서 논의를 더 펼친 부분은 이 산문 저자의 해석이지, 원전에 그런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과 해석에 관한 설명

원문과 독법: 「응제왕」.

중국어 페이지에는 고문 인용을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기존 영어 서술은 이 판을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 이 한국어판에서는 인용의 내용을 한국어로 풀어 전합니다. 현대 사례에 빗대거나 더 펼친 생각은 저자의 해석이며, 원문에 그런 사건까지 따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