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밖, 혹은 또 다른 동굴
동굴은 교육의 장면이다
동굴의 비유는 세계가 모두 환상이라는 독립된 우화가 아니다. 『국가』가 통치자의 교육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온다. 그림자만 알던 죄수 한 명이 풀려나 몸을 돌리고 빛으로 끌려간다. 반복되는 핵심어는 강제다. 플라톤에게 교육은 보지 못하는 눈에 지식을 부어 넣는 일이 아니다. 보는 능력은 이미 있고, 영혼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SAE는 플라톤과 가깝다. 답을 전달하는 것과 배우는 사람 쪽에서 시선이 바뀌는 것은 다르다. 다만 플라톤의 길에는 정해진 바깥이 있다. 실제 사물과 마지막의 태양이 상승의 방향을 보증한다.
출구가 만드는 새 경계
SAE는 앎을 하나의 구분으로 본다. 구분은 실제로 무언가를 얻지만, 같은 순간에 거두지 못한 나머지를 남긴다. 옛 동굴에서 나오는 일은 진짜 성취다. 그러나 안과 밖을 가르는 바로 그 선이 새 동굴의 벽도 그린다. 우리는 옛 동굴 밖이면서 새 경계 안에 선다.
이 말은 지식을 허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요리를 배우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 동시에 전에는 모르는 줄조차 몰랐던 영역이 보인다. SAE가 거부하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종점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무도 끌지 않을 때 누가 일어서는가
플라톤은 SAE에 되물을 수 있다. 선이 영혼을 끌지 않고 나머지도 명령하지 않는다면, 죄수는 왜 처음 일어서는가. ‘주체의 우연한 능동성’은 누가 행동했는지를 말할 뿐 왜 시작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플라톤 자신도 여백을 남긴다. 소크라테스는 동굴을 해석한 뒤, 그 해석이 참인지는 신만이 안다고 말한다. 가장 단단한 출구의 그림 안에 저자도 비추지 못하는 곳이 있다. 두 틀이 만나는 자리는 최종 출구보다 지금 보이는 것을 전부라고 적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