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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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 · Nicomachean Ethics · 한국어 재구성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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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가야 지나친가

Han Qin (秦汉)

중용에는 자가 없다

덕은 중용이라는 말을 산술 문제로 읽기 쉽다. 두 극단의 거리를 재고 가운데를 택하면 된다는 그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그림을 반복해서 막는다. 중용은 ‘우리와 관련하여’ 정해지고 실천 이성이 판단하며, 정확한 수치를 허용하지 않는 개별 사태를 다룬다. 분노의 적절함은 격노의 절반이 아니다. 누구에게, 언제, 얼마나, 무엇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화내는지가 함께 들어간다.

2권 끝에서 그는 공식 대신 세 가지 손잡이를 준다. 더 크게 잘못된 극단을 먼저 피하라. 자신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살펴 반대쪽으로 몸을 당겨라. 특히 쾌락 앞에서는 우리가 공정한 심판관이 아님을 기억하라. 굽은 나무를 반대 방향으로 휘어 펴는 것과 같다. 이것은 편향 교정이지 자동 계산이 아니다.

측정보다 방향

같은 권고가 모든 사람을 같은 쪽으로 밀지 않는다. 무모한 사람에게는 절제가, 두려움에 갇힌 사람에게는 의도적 위험 노출이 필요할 수 있다. 중용은 타협도 편안함도 아니다. 잔혹함과 자비의 중간이 반쯤 잔혹한 상태일 리 없다. 어떤 것이 과도와 부족인지는 행동의 영역, 당사자, 사정, 이유에서 생긴다.

마지막 판단이 지각에 달렸다는 말도 자의성을 뜻하지 않는다. 보편적 자 없이 실제 경계가 있을 수 있다. 관대함이 낭비로, 신중함이 비겁함으로 바뀌는 정확한 지점을 모든 사례에 앞서 그릴 수 없다는 뜻이다. 이론은 개별자의 문턱까지 데려가고, 거기서 형성된 눈에 넘긴다.

네 갈래 감사가 하는 일

SAE는 불분명한 경계를 다른 도구로 다룬다. 한 대상이 이쪽, 저쪽, 양쪽, 어느 쪽도 아님 가운데 어디에 놓이는지 기록한다. ‘양쪽’은 즉시 오류가 아니다. 부모의 개입은 아이를 돕는 동시에 아이가 써야 할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 ‘어느 쪽도 아님’은 또 다르다. 당장 안전이 문제라면 도움/통제라는 구분 자체가 이 사건을 관할하지 않을 수 있다.

이 형식은 성급한 양자택일이 기준보다 더 많은 것을 결정하지 못하게 한다. 주소와 전제와 겹침과 나머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표가 선택하지는 않는다. 어느 층을 쓸지, 겹침이 진짜인지, 무엇을 증거로 받을지 모두 다시 판단이다. 장부를 다 채웠다는 사실은 사건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 한 치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 방향을 더 많이 준다. 자신의 반복되는 오류를 보고 반대 방향으로 교정하라고 한다. SAE는 결산 형식을 더 분명하게 준다. 하나는 움직이게 하고 다른 하나는 그 움직임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보게 한다. 어느 쪽도 명중을 보장하지 않는다.

의사는 위험 범위를 설명하고도 범주 사이의 환자를 만나며, 부모는 아이가 지금 우는 동안 개입 여부를 정해야 한다. 개별 판단이 남는 것은 이성의 수치가 아니다. 수치 뒤에 판단을 숨기거나 모호함을 지혜라고 미화하는 것이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칙은 거칠지만 바로 연습할 수 있고, SAE의 표는 명시적이지만 행동법을 약속하지 않는다.

중용은 자 위에 미리 표시된 점이 아니다. 우리는 편향을 교정하고 기준을 열고 겹침을 보일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누군가 책임져야 할 판단이 남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각에, SAE는 다음의 검토 가능한 구분에 맡긴다. 도구는 개별자에 가까이 데려가지만 개별자를 끝까지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

두 체계의 역할을 섞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길잡이는 행동 직전의 감각을 훈련한다. 내가 어느 극단에 끌리는지 보고, 오류가 작은 쪽을 택하며, 쾌락이 판단을 흐리는 순간을 경계하라는 조언이다. SAE의 네 갈래 장부는 행동 뒤에도 남는 구조를 묻는다. 누구의 목적이 빠졌고 어떤 비용이 전가되었는지를 기록한다. 전자는 실행의 기술이고 후자는 책임의 회계에 가깝다. 물론 숙련자의 지각도 오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상황을 잘 안다’는 권위는 이유를 공개하고 영향을 받은 사람의 반론을 듣는 절차와 결합되어야 한다. 중용은 숫자로 고정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경험자의 직감만으로 닫혀서도 안 된다.

결국 마지막 판단이 지각에 달려 있다는 말은 설명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각은 사례를 오래 보고 실패를 기억하며 타인의 반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길러진다.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판단일수록, 어떤 특징을 보았고 무엇을 놓쳤는지 말할 의무는 더 커진다. 중용의 유연성은 책임 없는 재량의 허가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