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왜 제도가 필요한가
모두 성숙하다면 규칙은 필요 없을까
서로를 목적 그 자체로 대하고 충분히 대화할 수 있다면 법과 절차는 차갑고 불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좋은 의도만으로는 시간의 차이, 정보의 불균형, 힘의 격차, 반복되는 갈등을 처리할 수 없다. 가장 성숙한 사람도 피곤하고 편향되며 자신의 이익을 더 잘 본다.
관계가 깊을수록 비공식적인 합의만 믿기 쉽지만, 바로 그 깊이 때문에 거절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제도는 불신의 증거가 아니라 선의가 실패해도 사람이 무너지지 않도록 만드는 바닥이다.
임시 판단에서 안정된 틀로
매번 처음부터 협상하면 힘이 큰 사람이 의제를 정하고 말이 빠른 사람이 결과를 차지한다. 반복되는 경험에서 최소 기준을 뽑아 권리와 절차로 고정하면 약한 사람도 개인적 호의를 구하지 않고 보호받을 수 있다.
좋은 제도는 모든 상황의 답을 미리 쓰지 않는다. 누가 말할 수 있는지, 어떤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지,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수정할 길이 있는지를 정한다. 결과보다 판단 과정의 공정성을 안정시킨다.
제도의 목적은 제도 자신이 아니다
기관은 오래 살아남으면서 자기 보존을 사명과 혼동하기 쉽다. 규정 준수율과 예산, 평판이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에서 조직의 최종 목적으로 바뀐다. 그 순간 사람은 다시 제도의 지속을 위한 재료가 된다.
SAE의 기준은 단순하다.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안의 사람들이 목적을 형성하고 서로 만날 조건을 지키기 위해서다. 조직의 생존이 이 조건을 파괴한다면 조직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다.
권리와 의무는 함께 생긴다
내가 목적이라는 말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타인도 목적이므로 나의 자유는 그의 기초를 침해하지 않을 의무를 포함한다. 제도는 이 상호 제한을 특정인의 호의나 힘에 맡기지 않고 공적으로 표현한다.
권리는 고립된 개인의 방패가 아니라 복수의 목적이 함께 살기 위한 문법이다. 의무도 복종 명령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지위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제도는 이 문법을 안정시키되 각자의 삶의 내용을 대신 쓰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