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는 왜 의무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근거와 대응 관계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대응한다’는 말은 권리를 엄밀한 청구권으로 쓸 때 맞다. 호펠드가 보여 주었듯 일상어의 권리에는 청구, 자유, 권능, 면제가 섞여 있고 각각 다른 상대 지위를 가진다.
노예가 되지 않을 권리는 누군가가 먼저 노예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해서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 청구가 되면 타인에게 불침해 의무가, 국가에 보호와 구제 의무가 생길 수 있다. 의무는 권리의 원천이 아니지만, 구체적 청구권은 의무를 낳거나 의무와 대응한다.
의지 이론과 이익 이론
의지 이론은 권리자가 주장하고 포기하고 집행하는 규범적 통제를 잘 설명한다. 그러나 영아, 장기간 의사표현이 어려운 사람, 포기할 수 없는 권리는 보유와 행사를 구분하라고 요구한다. 의지는 행사를 설명할 수 있어도 보유의 근거 전부를 떠맡을 수 없다.
이익 이론은 아이와 동물, 독립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진지하게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중요한 이익만으로는 누가 주체의 위치에 서는지, 포기할 수 있는지, 어떤 종류의 권리인지까지 결정되지 않는다.
교차하는 두 구분
소극적 권리와 적극적 권리는 의무가 불개입을 요구하는지 행동을 요구하는지 보여 준다. 기본적 권리와 인정 기반 권리는 도덕적 근거가 제도에 의존하는지 묻는다. 표현의 자유는 불개입과 적극적 사법 보호를 함께 요구할 수 있고, 사회권은 생존의 기본 근거와 제도 절차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권리의 역사도 깔끔한 세 세대의 직선이 아니다. 시민적·사회적·집단적 권리는 겹친다. 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는 국가보다 앞선 주체적 지위가 현실에서는 타인과 정치공동체가 맡는 의무를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