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
복고질서가 눌러 두지 못한 힘들
빈체제: 혁명을 예외로 만들기
1815년의 빈회의는 단순히 옛 왕들을 복귀시키는 작업이 아니었다. 강대국 사이의 균형과 협의를 통해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국제질서였다. 혁명을 정상적인 정치변화가 아니라 억제해야 할 예외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미 등장한 국민주권·법적 평등·민족의 언어를 외교문서와 경찰만으로 지울 수는 없었다. 복고는 시간을 벌었지만 상전이를 취소하지 못했다.
1820·1830·1848: 반복되는 균열
남유럽의 입헌운동과 그리스 독립, 1830년 프랑스혁명과 벨기에 독립은 빈체제의 첫 균열이었다. 1848년에는 혁명이 파리에서 빈·베를린·부다페스트·밀라노로 번졌다.
1848년 혁명은 많은 곳에서 군주와 군대에 패배했다. 그러나 농노제 폐지, 헌법과 의회, 민족정치의 의제는 후퇴하지 않았다. 실패한 봉기는 국가가 결국 받아들여야 할 개혁목록을 남겼다. ‘실패한 승리’였다.
영국: 제도화된 감압장치
영국은 혁명 대신 점진적 선거법개정과 의회정치로 사회세력의 변화를 흡수했다. 1832년 개혁법 이후 대표범위가 단계적으로 넓어졌고, 곡물법 폐지와 노동운동의 압력도 제도 안에서 처리되었다.
갈등이 없어서 안정된 것이 아니다. 갈등을 완전히 없애려 하지 않고 규칙 안에 들이는 통로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 미국 헌법과 마찬가지로 여항을 수용하는 구조였다.
민족주의와 국가통일
민족주의는 제국과 왕조를 대신할 새로운 정치조직 원리가 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은 민족의 언어가 자유주의적 해방뿐 아니라 군사적 국가건설에도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오스만 같은 다민족제국에는 민족주의가 지속적인 압력이 되었다. 모든 민족에게 국가를 약속하면 경계가 겹치는 지역에서 새로운 소수자와 분쟁이 생긴다. 해방의 원리가 또 다른 배제를 만들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바꾼 사회의 바닥
공장·철도·도시화는 정치제도보다 깊은 곳에서 사회를 재편했다. 생산과 노동의 규모가 커지고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동했다. 부는 급증했지만 노동시간·주거·질병·불안정도 함께 커졌다.
자유주의는 법적 권리와 시장을, 사회주의는 계급과 소유를, 민족주의는 집단의 자기결정을 설명언어로 제시했다. 세 언어는 협력하기도 경쟁하기도 했다. 산업사회가 만든 여항을 누가 어떻게 대표할 것인가가 19세기 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1914년으로 향한 힘의 합류
세기 말 유럽은 의회와 대중정당, 노동조합을 발전시키면서도 군비경쟁·제국주의·동맹체계를 강화했다. 내부의 참여 확대와 외부의 팽창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빈체제는 약 한 세기 동안 강대국 전쟁을 억제했지만 그 안에서 자란 민족주의와 산업동원, 제국경쟁을 끝내 수용하지 못했다. 눌러 둔 힘들이 1914년에 한꺼번에 합류한다. 그 전에 유럽의 자유주의가 바깥세계에서 만든 가장 깊은 모순—식민제국의 이중기준—을 먼저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