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 / 中文|繁體|日本語|Français|Deutsch|Español|한국어
← 위대한 삶들

003 / 108 · 자기 자신이 되기

소크라테스, 빈터에 남은 사람

답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 답이 지어 준 집마저 무너졌을 때, 한 사람이 그 자리에 남아 계속 묻는다.

I. 자연을 알고 싶었던 청년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연을 탐구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았던 젊은 날을 돌아본다. 생애 마지막 날,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천체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사물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생명은 무엇 때문에 살아 있는가. 사람들에게 정의를 묻기 전에, 그는 먼저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움직이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 물음은 당시 지적 탐구의 맨 앞에 있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에서 찾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에 중요한 자리를 주었으며, 원자론자들은 원자와 빈 공간으로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려 했다. 곧바로 오늘날의 과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열망이 거기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사물은 무엇으로 되어 있으며 어떻게 생겨나고 변하는지 직접 알아보려는 열망. 젊은 소크라테스도 그 길 위에 있었다.

그러다가 아낙사고라스가 지성을 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책을 읽었다.

만물을 질서 있게 하고 생겨나게 하는 것은 지성, 누스라는 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다. 지성이 세계를 질서 짓는다면, 그것은 세계를 가장 좋은 방식으로 배열할 터였다. 이제 설명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에서 그치지 않고, 왜 그렇게 있는 것이 가장 좋은가에 닿을 수 있었다. 땅이 우주의 가운데 있다면 왜 거기가 가장 좋은 자리인지, 태양이 그렇게 움직인다면 왜 그 운동이 더 좋은지를 듣고 싶었다.

계속 읽었다. 실망했다. 지성이 원인이라고 말해 놓고, 막상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할 때 아낙사고라스가 꺼내 든 것은 공기와 에테르와 물이었다. 여전히 물질이었다. 지성은 책의 문 앞에 세워 둔 간판 같았고, 안에서 실제 일을 하는 것은 이전과 같은 설명 방식이었다.

재료를 빠짐없이 나열해도 아직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감옥에 앉아 있는 소크라테스의 뼈와 힘줄을 설명한다고 해서, 왜 그가 그곳에 남는 편이 옳다고 판단했는지까지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설명 자체가 틀리지 않더라도, 듣는 사람이 물었던 까닭에는 닿지 않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간격이었다.

『파이돈』에서 그가 ‘두 번째 항해’라고 부르는 길은 말과 논증, 가설로 방향을 돌려 거기서 무엇이 따라 나오는지 살피는 길이다. 이 길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도 이어진다. 자연을 연구하다 그만두고 광장에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다.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설명을, 왜 그러한지에 대한 답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데서 시작한 전환이다.

그는 바깥으로 난 길을 깊이 파고들었다. 자연 속에서 만물의 근거를 찾아 내려갔지만, 그 길만으로는 자신이 가려던 곳에 닿지 못한다고 느꼈다. 물질적 조건을 아는 것과 그것이 왜 더 좋은지 아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그가 다음에 무엇을 세웠는지보다, 그 직전의 순간을 잠시 붙들고 싶다.

답을 얻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묻기로 했다. 실망을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질문이 열린 채 남을 수 있다면, 자신도 그 곁에 남을 수 있었다.

II. 신탁을 시험하다

이제 우리는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그를 만난다. 체육장 옆에서, 연회 자리에서, 길가에서 만난다. 그는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정치를 안다고 하니, 정의란 무엇인가. 전쟁을 안다고 하니, 용기란 무엇인가. 젊은이들을 가르친다고 하니, 덕이란 무엇인가.

시비를 걸려고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리함을 자랑하려고만 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물었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런 삶을 델포이에서 전해 온 말과 연결한다.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신전에 가서 여사제 피티아에게 물었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돌아온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에게 무슨 대단한 지혜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탁이 그려 놓은 사람과 자신이 아는 자신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그는 시험해 보기로 했다.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 하나를 찾으면 신에게 반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정치가들을 찾아갔다. 도시를 다스리고, 시민들이 귀를 기울이며, 중요한 결정을 맡기는 사람들이니 지혜롭지 않겠는가. 정의가 무엇인지, 잘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대답은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질문이 몇 차례 더 이어지자 대답은 처음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다고 믿었지만, 자신이 안다고 한 것을 설명해 내지 못했다.

다음으로 시인들을 찾아갔다. 그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쓴 사람이라면 분명 깊은 앎이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쓴 시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런데 시인들은 자기 작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창작이 지혜보다는 영감이나 신에게 사로잡히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힘과, 자신이 만든 것을 이해하는 힘은 꼭 같은 크기가 아니었다. 시의 아름다움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일과 그 작가에게 모든 지혜를 맡기는 일을 갈라 놓았다.

마지막으로 장인들을 찾아갔다. 이들은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를 만드는 법, 집을 짓는 법. 질문 몇 번으로 사라지는 솜씨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기술에 관한 참된 앎을 다른 중요한 일에까지 넓혀 썼다. 이것을 할 줄 안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안다는 확신으로 어느새 건너가 있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을 찾아다닌 끝에 그가 알아낸 자신의 우위는 크지 않았다. 저 사람은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모른다. 다만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바로 그만큼, 아주 조금 더 지혜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익숙한 말은 이 태도를 압축한 후대의 표현이지, 『변론』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차이는 더 작고,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여기지 않는 것. 세상의 모든 앎을 부정하는 우아한 선언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 확신을 시험한 끝에 얻은 인정이었다.

정치가에게서는 권력이 곧 지혜라는 믿음을 벗겨 냈다. 시인에게서는 영감이 곧 이해라는 믿음을, 장인에게서는 기술이 곧 모든 일에 관한 앎이라는 믿음을 벗겨 냈다. 매번 같은 움직임이었다. 당신은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말 아는지 함께 살펴보자.

결론은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었다. 목수는 여전히 집을 지을 줄 안다. 문제는 그 앎이 다른 모든 질문에까지 대답하려 할 때 생겼다. 소크라테스도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해야 했다. 내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그 너머에서 시작하는 것은 앎인가, 아니면 아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자신감인가. 신탁을 시험하러 나선 길은 결국 그에게도 돌아왔다.

III. 말이 더는 피난처가 되지 못할 때

플라톤의 짧은 대화편 몇 편을 펼치면, 소크라테스는 질문의 한가운데 있다. 『에우튀프론』에서는 경건함이 무엇인지 묻는다. 『라케스』에서는 용기가 무엇인지 묻는다. 『카르미데스』에서는 절제가, 『뤼시스』에서는 우정이 무엇인지 묻는다. 대화 한 편을 다 읽어도, 처음 찾아 나섰던 정의를 손에 넣고 편안하게 책을 덮을 수 없다.

처음에는 상대도 자신이 있다. 에우튀프론은 신에 관한 일이라면 남다른 식견이 있다고 믿는다. 라케스는 장군이다. 장군에게 용기가 무엇인지 새삼 가르쳐야 할까. 그러나 질문 앞에서는 지위가 답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그 말이 끝까지 버틸 수 있어야 한다.

경건한 것은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에우튀프론이 말한다. 그런데 신들은 서로 다툰다. 어떤 신이 좋아하는 일을 다른 신은 싫어한다면, 같은 일이 경건하면서 동시에 경건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든 신이 함께 사랑하는 것이라고 고쳐 보자. 소크라테스는 다시 묻는다.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이 사랑하는가, 아니면 신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해지는가. 모두 동의한다는 말만으로 어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그 어려움이 다른 방향에서 보일 뿐이다.

라케스에게 용기란 전장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달아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러나면서 싸우는 기병은 어떤가. 후퇴했다가 돌아서서 적을 이기는 병사들은 어떤가. 발이 뒤로 움직인다는 사실만으로 용기를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분명해 보였던 답이, 전쟁을 아는 사람에게 낯설지 않을 장면들 앞에서 흔들린다.

카르미데스는 절제를 일종의 조용하고 차분한 태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글을 빨리 읽는 일, 빨리 배우는 일, 씨름에서 몸을 민첩하게 움직이는 일도 훌륭할 수 있다. 좋음은 느리고 조용한 것의 전유물이 아니다. 얌전해 보인다는 인상만으로 절제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뤼시스』에서는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가 된다는 생각이 나온다. 하지만 나쁜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한결같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닮았다는 이유로 안정된 벗이 될 수 있을까. 반대로 완전히 선하고 스스로 충족된 사람에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면, 친구에게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좋은 사람들은 왜 친구를 필요로 하는가.

반례가 멀리서 온 것은 아니다. 후퇴하는 군인, 재빠르게 글을 읽는 사람, 내게 필요한 친구. 대화 전에도 곁에 있던 것들이다. 이제 그 장면들 때문에 말이 닫히지 않는다. 용기, 절제, 우정이라는 익숙한 말을 입에 올려도, 더는 그 말 속에 곧바로 몸을 숨길 수 없다.

몇 번의 문답 뒤에 상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된다. 분명 알고 있던 것 같았는데, 끝까지 설명하려 하니 무엇인지 붙잡을 수 없다. 후대에 엘렝코스, 곧 논박이라고 부르게 된 방식이다. 맞는 답을 건네주기보다, 옳다고 믿었던 답이 왜 서 있을 수 없는지 스스로 보게 한다. 당혹감은 바깥에서 내려진 벌이 아니다. 자신이 받아들인 말들을 끝까지 따라가다가 생긴다.

여기서 내가 그리고 싶은 소크라테스는 깎아 내되 곧바로 다시 세우지는 않는 사람이다. 답 하나가 무너졌다고 해서 같은 자리에 새 답을 급히 올려놓지 않는다. 벽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당신과 어려움 사이에 당장 다른 벽을 지어 주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풀리지 않은 질문은 제자를 난처하게 하려고 파 놓은 함정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그 안에 남아 있다. 물론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에게 신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길고 정교한 논증을 펼친다. 다만 이 대화들에서 정의가 실패했을 때, 그는 실패를 성공처럼 꾸며 주지 않는다. 자신도 같은 빈터에 선다.

그는 그 자리를 견딜 수 있었다. 벽도 없고 지붕도 없고, 답이라는 이름의 피난처도 없다.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온다. 그런데도 그는 거기 서서 계속 묻는다.

IV. 아테네는 견디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빈터를 견딜 수 있었다. 아테네는 견디지 못했다.

기원전 399년, 그의 나이는 일흔쯤이었다.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이 그를 고발했다. 도시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신적 존재들을 끌어들이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혐의였다. 광장에 머물던 질문들이 법정으로 들어갔다.

혐의의 표면에는 종교가 있었지만, 그 뒤에는 정치의 상처가 있었다. 다섯 해 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했다. 패전 뒤에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삼십인 정권이 들어섰다. 짧고 잔혹한 과두정이었다. 그 지도자 중 하나인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와 교류한 사람이었다. 알키비아데스도 그와 가까웠다. 전쟁 중 거듭 편을 바꾸었던 알키비아데스의 이름은 많은 아테네인에게 아직 아픈 이름이었다.

기원전 403년에 민주정이 회복되었다. 삼십인 자신 등을 예외로 두는 폭넓은 사면이 이루어졌다. 정치적 복수가 다시 복수를 낳는 일을 멈추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법으로 사면할 수 있다고 해서 기억에서도 얼굴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말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릴 법하다. 크리티아스가 당신에게 배웠다. 알키비아데스가 당신을 따랐다. 그들이 우리 도시에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 뒤에는 또 다른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은 광장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신성한 것의 뜻마저 가만두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대던 확신을 무너뜨리니, 젊은이들이 무엇을 믿고 함께 살겠는가.

이렇게 읽으면 혐의에 깃든 정치적 울림을 들을 수 있다. 모든 배심원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도시가 겪은 참상과 공동체의 도덕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서로를 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때 그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그 뒤의 모든 행위를 소크라테스의 행위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 자신은 삼십인 정권이 살라미스의 레온을 잡아 오라고 했을 때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누군가와 교류했다는 것은 그에게 복종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테네의 상처는 실제였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소크라테스의 유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는 다시 일어설 자리가 필요했다. 그때 한 사람은 사람들이 단단하다고 여기는 것을 계속 두드려 보고 있었다. 무너뜨리는 재미 때문이 아니었다. 악의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는 그 확신들이 버티지 못했고, 버티는 척해 줄 수 없었다. 아테네는 바로 그 정직함을 견디지 못했다.

V. 동정을 청하지 않는 변론

재판 날 소크라테스는 진지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그가 거부한 것은 변론 자체가 아니라, 변론을 동정의 호소로 바꾸는 일이었다. 혐의에 답하고, 멜레토스에게 질문하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했다. 다만 아이들을 법정에 데려와 그들의 눈물로 배심원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능숙한 수사와 가족들의 탄원에 익숙했다. 플라톤의 『변론』 속 소크라테스는 다른 목소리로 말한다. 실제 발언을 속기한 기록은 아니지만, 플라톤이 전하는 그 목소리의 성격은 선명하다. 나를 불쌍히 여길지가 아니라,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판단해 달라는 목소리다.

그는 오래된 고발자들부터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등을 통해 퍼진 소크라테스는 하늘과 땅속의 일을 캐묻는 괴짜이고, 약한 논변을 강한 논변처럼 만들며 그 기술을 돈 받고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편견은 오늘 법정에 나온 고발보다 맞서기 어렵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적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앞에서, 대체 누구를 불러 세워 반박해야 하는가.

그는 신탁과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찾아다닌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왜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는지, 왜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여기는지 설명한다. 델포이의 신이 맡긴 일은 이 도시를 깨우는 것이었다. 크고 둔해진 말에게 달라붙는 등에처럼, 만족한 채 잠들려는 아테네를 찌르고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

묻는 일을 그만두겠다는 조건으로 무죄를 얻을 수 있더라도, 그는 그런 약속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돌아보지 않는 삶은 자신에게 살 만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를 죽이면 도시 쪽에서도 잃는 것이 있다. 그런 등에를 다시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목숨을 구걸하라는 기대 앞에서, 그는 오히려 도시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겨 두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첫 번째 투표에서 유죄가 결정되었다. 흔히 약 280 대 220이라는 수치로 재구성한다. 플라톤은 완전한 집계표를 주지 않는다. 서른 표만 반대편으로 옮겨 갔어도 무죄였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있을 뿐이다. 정확한 숫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차이가 아주 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테네 전체가 한목소리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형벌을 정하기 위한 별도의 판단이 남았다. 고발 측은 사형을 요구했다. 소크라테스는 그에 맞서는 제안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사는 일과 망명하는 일을 따져 보았다. 다른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잘 견뎌 줄까. 어디서든 입을 다물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삶일까.

그렇다면 자신에게 실제로 마땅한 대우는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프리타네이온에서 국가가 대 주는 식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올림픽 우승자보다 도시에 더 큰 일을 했으니, 공로자처럼 식사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승자는 시민들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지만, 자신은 시민들이 더 잘 살도록 애쓴다. 이 말의 대담함과 익살, 그리고 법정에 번졌을 불쾌함을 함께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무료 식사가 그의 마지막 제안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형편으로 낼 수 있는 한 므나의 벌금을 제시했고, 이어 서른 므나를 제시했다. 플라톤, 크리톤, 크리토불로스, 아폴로도로스가 보증을 섰다. 실제로 돈을 내겠다는 구체적인 대안이 있었다. 그럼에도 배심원들은 사형을 택했다. 훨씬 뒤의 기록에는 그에게 불리한 표가 여든 표 더 늘었다고 나오지만, 두 번째 투표의 정확한 집계를 확정된 점수처럼 적기는 어렵다.

그는 자신을 변호할 줄 몰랐던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법정이 기대했을 법한 방식으로 안심시켜 주지 않았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내 질문으로 당신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다. 그 약속으로 밖에 나올 수 있더라도, 자신이 거짓임을 아는 벽을 빈터 위에 세우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VI. 독배

재판 뒤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형의 집행을 기다렸다. 친구 크리톤이 탈출 계획을 가지고 찾아왔다. 돈은 구할 수 있었다. 도와줄 사람들도 있었다. 테살리아에는 그를 받아 줄 친구들이 있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잃는 것이 두려웠고, 구할 수 있었는데도 재산을 아끼느라 친구를 버렸다는 말을 듣는 것도 두려웠다. 제발 떠나자고 청했다.

소크라테스는 떠나지 않았다. 『크리톤』에서 그는 선택을 다시 하나의 질문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빠져나가는 것이 옳은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부당한 일로 갚아서는 안 된다. 그는 법률들이 자신 앞에 서서 말을 거는 장면을 그린다. 평생 우리의 보호 아래 살고 자녀들을 기른 사람이, 이제 사적인 약속으로 판결을 무효로 만든다면 법은 어떻게 서 있을 수 있겠는가. 크리톤은 이번 탈출이 정당하다는 데까지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

그 결정을 법 앞의 복종으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다. 평생 이유를 따져 온 사람이 이제 누구도 대신 정해 줄 수 없는 선택 앞에 서 있다. 밖에서 보면 구해야 할 몸이 먼저 보인다. 그에게는 자신이 옳지 않다고 판단한 일을 해서 그 몸을 구한다는 문제도 보였다. 두려워하면 더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자신이 믿게 된 것에 책임 있게 답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그런 뜻에서 나는 그의 거절을 자신을 도시에 내주는 일만이 아니라, 자신으로 남으려는 시도로 읽는다. 몸은 버려도 그만인 껍데기가 아니다. 바로 그 몸을 잃으면 이 삶을 잃기 때문에 결정은 무겁다. 살아 있는 것을 가볍게 보아서 생긴 평온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의 죽음이 위험에 처한 모든 사람에게 내려진 규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앞서 부당한 체포 명령에 저항했다. 『크리톤』을 읽어도 그 저항은 지워지지 않는다. 양심과 도시 사이의 긴장은 남는다. 여기서 나를 붙잡는 것은 더 좁고 구체적인 사실이다. 치러야 할 값이 자기 목숨이 되었을 때에도, 그는 자기 이유가 여전히 버티는지 물었다.

마지막 날의 차분함은 거기서 자라난다. 나를 살려 줄 논리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논리라고 부르지는 않겠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편리한 답을 의심해 보라고 요구했다. 이제 자신의 답이 불편해졌을 때, 그 불편함을 자신도 견뎌야 했다.

『파이돈』은 그 마지막 하루로 우리를 데려간다. 소크라테스와 친구들은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문제를 토론한다. 그는 상당한 논증을 제시하고, 심미아스와 케베스는 반론을 내며, 그는 다시 답한다. 그날 그가 한 일은 자기 주장들을 하나씩 취소하다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자리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끝에 가까워져서는 논의를 통해 얻은 확신과, 자신이 들려주는 저승 이야기의 세세한 풍경을 구별한다.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이 방금 말한 모습 그대로라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희망에 걸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마지막 순간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한마디로 앞선 토론 전체를 없애 버린 것이 아니다.

꿈 없는 잠과 호메로스와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다른 장면에 속한다. 『변론』의 법정에서, 사형 판결 뒤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두 가능성을 생각했다. 아무 감각도 없는 꿈 없는 잠이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여행이거나. 여행이라면 그곳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오래전의 영웅들과 이름난 죽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서 나는 두 가지를 듣는다. 하나는 그가 호메로스를 존중했다는 사실이다. 시인들이 자기 창작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시 자체가 훌륭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위대했다. 소크라테스는 그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물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쓴 것을 알고 있는가. 감탄하는 일과 묻는 일은 함께 갈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끝까지 같은 일을 하고 싶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저편의 행복은 단지 쉬는 일이 아니었다. 대화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한평생 물었으니, 저세상에도 아고라가 있다면 거기서 다시 누군가를 붙들고 묻고 싶었다. 그만두지 않았고,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법정에서의 희망과 감옥에서의 논증은 서로 다른 장면이다. 그러나 두 장면 사이로 익숙한 바람 하나가 이어진다. 죽음이 무엇이든, 거기에도 이야기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저녁이 가까워졌다. 감옥의 관리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얼마나 온화하게 대해 주었는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었는지 말했다. 그러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나갔다. 판결을 집행하는 쪽에 서 있던 사람도 이 방에서는 한 사람을 잃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크리톤은 조금 더 기다리자고 했다. 아직 언덕에는 햇빛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형수들은 늦게까지 시간을 끌고, 먹고 마시며 남은 시간을 누리기도 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그렇게 하면 무엇인가 얻는다고 생각해서 기다린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에게는 조금 늦춘다고 무슨 이익이 있을지 보이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나갔다. 독약을 준비한 사람이 잔을 들고 들어왔다.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자, 다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걷다가 누우면 된다고 했다.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잔을 받았다. 조금 덜어 신에게 바치는 술처럼 땅에 부어도 되는지 물었다. 준비한 것은 필요한 양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길을 잘 건너가게 해 달라는 기도는 할 수 있겠다. 그는 기도하고, 잔을 입에 대고, 주저하지 않고 마셨다.

친구들은 더 버티지 못했다. 파이돈은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소크라테스에게 닥친 일만이 아니라, 그런 친구를 잃게 된 자기 자신 때문에 울었다. 크리톤은 눈물을 억누를 수 없어 이미 밖으로 나갔다. 오래 울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큰 소리를 내자, 방 안의 거의 모든 사람이 무너졌다.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해 달라고 했다. 이런 통곡을 피하려고 여자들을 먼저 보냈으며, 죽을 때에는 상서로운 침묵 속에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그 말에는 그 방과 시대의 관습이 묻어 있다. 동시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건네는 부탁도 들린다. 이렇게 소란스럽게 슬퍼하지 말고, 내 곁에 함께 있어 달라는 부탁이다.

그는 걸었다. 다리가 무거워지자 등을 대고 누웠다. 독약을 가져온 사람이 발을 세게 누르며 감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다리를 따라 위쪽을 확인했다. 차가움과 굳어짐이 올라왔다. 소크라테스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차가움이 아랫배 쪽에 이르렀을 때, 얼굴을 드러내고 말했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꼭 갚아 주게. 잊지 말게.

크리톤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달리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조금 뒤 몸이 움직였다. 그 사람이 덮인 얼굴을 드러냈을 때 눈은 고정되어 있었다. 크리톤이 그의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어 주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치유의 신이다. 병에서 나은 데 감사하며 수탉을 바칠 수 있었다. 니체는 이 마지막 말을 삶 자체가 병이었고 죽음이 그 치유라는 뜻으로 읽었다. 삶을 부정하는 소크라테스, 마지막에 삶을 향해 유죄를 선고한 소크라테스. 강렬한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빚의 뜻을 최종적으로 확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독법도 가능하다. 죽음 앞에서 그는 마지막 체계를 남기지 않았다. 수천 년을 내려다볼 장엄한 가르침도, 자기 삶의 총결산도 말하지 않았다. 함께 갚아야 할 것이 있으니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 빚을 갚는 일, 감사하는 일, 다른 사람과 함께 지고 있는 의무를 기억하는 일. 죽음의 높은 자리에서 말이 다시 일상의 높이로 내려온다.

그가 정확히 어떤 치유를 뜻했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우리가 듣는 것은 죽어 가는 사람이 친구에게 무언가를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목소리다. 해석이 끝나지 않아도 그 부탁의 크기는 느낄 수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작은 일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광장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연회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법정에서 자신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고 익살스럽게 말하던 사람. 그는 일상 속에서 질문했다. 일상 속에서 남의 확신을 깎아 보았다. 마지막 말도 일상의 말이었다. 죽음은 거대했지만, 빚은 한 문장 안에 들어왔다.

그는 땅을 떠난 적이 없었다.

VII. 내가 기다리는 웃음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들은 울었다. 플라톤은 그 자리에 없었다. 파이돈은 플라톤이 병중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죽음을 수많은 독자에게 전해 준 글 안에, 글쓴이 자신의 부재가 조용히 남아 있다.

그날 하루 내내 웃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이돈은 웃음과 눈물이 번갈아 찾아오는 이상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크리톤이 장례를 어떻게 치러 주면 좋겠느냐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미소를 짓기도 한다. 눈앞에서 말하는 자신과, 곧 묻게 될 몸을 크리톤이 이미 같은 것으로 여기는 듯해서다. 지금 살아서 말하는 사람이 잠시, 미래의 시신과 자신을 구별한다.

그러나 독배 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친구들이 울고,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해 달라고 한다. 내가 다른 웃음 하나를 상상하게 되는 곳은 여기다. 역사 기록에서 빠진 사실을 보충하려는 것이 아니다. 읽고 나서도 마음 한편에 남는 가능성이다. 눈물 곁에서,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터지는 웃음.

그들이 울었다고 해서 스승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답 하나를 잃는 것과 다르다. 이해하고도 울 수 있다. 그래도 그의 죽음은 어려운 질문 하나를 남긴다. 우리 스스로 묻도록 도와주었던 사람이 이제 대답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계속할 것인가.

내가 그린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을 빈터에 남겨 둔다. 어떤 신념도 가질 수 없게 만들어 놓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버티지 못하는 것을 피난처라고 우길 수 없게 한다. 바람은 여전히 사방에서 분다.

그날 한 사람쯤 웃을 수 있었다면. 비웃음이 아니라, 슬픔을 이긴 척하는 용감한 연기도 아니라. 당신이 해 오던 일을 조금은 알겠습니다. 당신이 떠나도 나까지 묻기를 그만두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뜻의 웃음이 있었다면.

나는 그 웃음을 생각하다가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장자를 떠올린다. 두 사람의 생애나 철학이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슬픔을 없애지 않고도 웃음이 그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웃음으로 소크라테스를 붙잡아 둘 수는 없다. 대신 남은 사람이 새 확신으로 서둘러 빈자리를 메우지 않고, 잠시 더 거기 서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웃음이 들리기를 자꾸 기다리게 된다.

한편 플라톤은 『국가』를 썼다. 달라지고 다투어지는 정의로운 것들 너머에 정의 자체를, 아름다운 것들 너머에 아름다움 자체를 두었다. 그리고 앎과 가치를 가능하게 하는 선을 말했다. 질문은 건축물을 얻었다. 사례 하나가 무너질 때마다 우리가 찾던 대상까지 함께 사라질 필요는 없었다. 서로 닮은 것들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 척도가 생겼다.

이것은 인류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 하나다. 깊고 정교하며, 이천 년에 걸친 서양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빈자리를 견디지 못한 나약함 정도로 줄여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의 풍경 속에서는, 빈터 위로 높이 올라가는 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버티지 못하는 것을 깎아 내고, 빈터에 서서 모른다고 말했다. 플라톤이 죽음에 빼앗긴 것을 위해 집을 지었다고 상상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 상상은 독자의 것이다. 플라톤 철학의 심리적 원인을 밝혀냈다는 뜻은 아니다.

더구나 정의를 얻지 못한 채 끝나는 대화편들을 쓴 사람도 바로 플라톤이다. 『파이돈』에서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이데아에 기대어 논증한다. 허무는 사람과 세우는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말끔히 갈라져 있지는 않다. 질문과 건축은 이미 같은 저자의 책들 안에 함께 들어 있다. 그 긴장을 지우면,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너무 단순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와서 이데아론의 문제를 찾고 일부를 걷어 내며 범주의 체계를 세운다. 이후의 세기를 아주 멀리서 압축해 바라보면, 스콜라철학이 짓고, 데카르트가 해체하고 다시 시작하며, 흄이 이음매마다 의심을 밀어 넣는다. 칸트는 세 비판서를 세우고, 헤겔은 정신이 자신을 알아 가는 역사를 펼쳐 보인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이 한 장면에 담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럼에도 앞선 답이 가리고 있던 것을 다시 물을 길은 번번이 열렸다.

벽들은 장엄했다. 허물고 다시 세우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앞으로 밀어 갔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늘 빈터가 있었다. 우리가 기대는 것이 정말 버틸 수 있는지 묻는 자리. 익숙한 표현으로 말하면,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자리다. 모든 벽이 그 위에 세워졌다.

VIII. 다섯 사람, 아직 놓이지 않은 다리

상상 속의 강으로 돌아가 보자. 다리 입구에는 칸트와 왕양명이 서 있다. 니체는 반대편 끝에서 그들을 향해 걸어온다. 장자는 다리 아래, 물속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있다.

소크라테스는 어디에 있는가.

다리 위에도, 다리 아래에도, 물속에도 없다. 다리 이전에 있다. 빈터에 있다. 아직 아무도 공사를 시작하지 않은 자리에 있다.

다리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이데아, 범주, 세 비판서, 마음이 곧 이치라는 말. 이 상상의 풍경에서 그 사상들은 저마다 강을 건너갈 길을 내 준다. 건너가려면 발을 받칠 곳이 있어야 하고, 내 몸의 무게를 감당할 것이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첫 돌을 놓기 전의 순간에 남는다.

그가 묻는다.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알고 있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여러 세기가 같은 강둑에 서 있다. 칸트는 목적의 왕국을 본다. 왕양명은 환하게 밝은 마음을 본다. 니체는 아직 걷는다. 장자는 물속에서 아직 깎이고 나뉘지 않은 전체, 혼돈과 함께 있다. 이 만남을 연표 위에 배치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장면 안에서만 가능한 만남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들보다 앞에 있다는 말은 다른 뜻이 된다. 여기에는 반드시 다리가 있어야 한다는 확신보다 앞에 있다는 뜻이다. 역사상 최초의 질문자라는 자격증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모르는 채로 서 있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이 초상은 그를 빈터에 남겨 둔다.

버티지 못했던 답은 깎여 나갔다. 우리에게 남은 그의 마지막 하루에는 조용한 미소가 있고 독배가 있다. 그를 우리 눈에서 가려 줄 건물은 올라가지 않는다.

곁의 사람들은 운다.

그는 기다린다. 웃는 사람 하나를 기다린다.

읽기 안내와 출처

빈터, 아직 놓이지 않은 다리, 기다리는 웃음은 이 글의 문학적 이미지다. 깎아 내되 곧바로 세우지 않는다는 표현은 질문 중심의 대화편에서 드러나는 한 면을 비춘다. 소크라테스의 모든 사상에 대한 요약도, 플라톤의 철학을 낳은 심리에 대한 역사적 설명도 아니다. 장자와의 연결 및 마지막 강가 장면 역시 두 철학의 동일성이나 실제 만남을 뜻하지 않는다.

주요 대목은 플라톤 『변론』 20e–23b, 32c–d, 36a–38b, 40c–41c, 『크리톤』 43–54, 『파이돈』 58e–59b, 96a–100b, 114d, 115c–118a에 근거한다. 꿈 없는 잠과 시인들을 만날 가능성은 마지막 날의 감옥 대화가 아니라 법정 발언에 나온다. 표 수는 재구성된 수치이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2.41–42는 훨씬 뒤의 기록이다. 죽음의 장면은 플라톤의 철학적·문학적 서술이며 의학적 관찰 기록으로 다루지 않았다.

네 대화의 질문과 반례는 『에우튀프론』 6–11, 『라케스』 190–199, 『카르미데스』 159–176, 『뤼시스』 214–223을 따른다. 니체의 수탉 해석은 『즐거운 학문』 340절과 『우상의 황혼』의 「소크라테스의 문제」 1절에 나온다. 여기서 제시한 감사와 일상의 독법도 가능한 해석이지, 마지막 말의 확정된 뜻은 아니다. 고대 인물의 말은 대화편의 뜻을 따라 이 글에서 한국어로 풀어 옮겼다.

Plato, Apology (20e–23b; 32c–d; 36a–38b; 40c–41c) · Plato, Phaedo (58e–59b; 96a–100b; 114d; 115c–118a) · Plato, Crito (43–54) · Plato, Euthyphro (6–11) · Plato, Laches (188–192: definitions and examples of courage) · Plato, Charmides (158–162: quietness and quickness) · Plato, Lysis (214–223) · Diogenes Laertius, Lives of Eminent Philosophers, book 2, Socrates (2.41–42) · Friedrich Nietzsche, Twilight of the Idols, The Problem of Socrates, §1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ocrates: sources and political setting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