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 108 · 자기 자신이 되기
예수, 다리에 못 박힌 사람
돌을 쥔 손, 잠든 친구들, 십자가의 기도. 고통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상대를 그가 저지르는 일 하나에 가두지 않는다는 것.
1. 목수
예수가 직접 쓴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연작은 그런 빈자리를 여러 번 만났다. 플라톤 등의 증언으로 소크라테스에게 다가가고, 사후에 엮인 『논어』로 공자에게 다가간다. 사마천의 이야기에서 노자는 관문에 글을 남기고 떠난다. 붓다의 가르침은 긴 구전과 편집의 시간을 거쳐 왔다. 한 사람이 사라진 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를 맡는다.
예수도 물려받은 말 속에서 우리에게 온다. 네 복음서는 그가 죽은 지 수십 년 뒤에 쓰였고, 저마다 자료를 고르고 배치했다. 더 이른 바울의 편지는 이미 그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 이 글들을 돌아서 갈릴리 길가에 곧장 가 앉아 직접 듣는 길은 없다.
역사 연구는 이 증언들에서 1세기의 유대인을 알아보려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역사적 질문과 신앙 고백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모든 연구자와 신자가 반드시 맞은편 진영에 서는 것은 아니다. 이 산문은 주로 전해진 장면을 읽는다. 한 사람이 남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두려워하며, 자신을 죽이는 사람과 어떻게 마주하는가.
그는 갈릴리 출신이며 본디오 빌라도 때 로마 권력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했다. 역사 연구에서 비교적 단단한 윤곽이다. 하지만 그 안의 모든 말과 몸짓이 똑같은 확실성을 갖지는 않는다.
십자가는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었다. 로마는 처벌하고 모욕하고 겁주기 위해 사용했다. 초기 운동이 그런 죽음을 통해 구원을 선포했다는 데에는 설명해야 할 긴장이 있다. 그 긴장은 읽을 가치가 있지만, 이야기의 모든 세부에 사실이라는 도장을 자동으로 찍어 주지는 않는다.
마가는 그를 목수라 하고 마태는 목수의 아들이라 한다. 그 그리스어는 일반적인 장인을 뜻할 수도 있다. 특정한 작업장까지 꾸며 줄 필요는 없다. 이름 위에 세워진 거대한 돔을 잠깐 걷어 내고, 가족과 고향과 일의 배경을 가진 사람을 보면 된다.
나사렛. 요한복음에서 그 지명을 들은 나다나엘은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고 먼저 묻는다. 사람이 오기도 전에 출신지가 그 사람의 값을 정해 버린다.
누가는 공개 활동을 시작할 무렵의 나이를 서른쯤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3년의 사역은 주로 요한복음의 절기들에서 추정한 기간이지 정확히 잰 시간이 아니다. 어떻게 헤아리든 평생의 가르침에 비하면 짧다.
소크라테스의 거리, 공자의 여정, 붓다 전승의 수십 년 가르침. 여기 이르러 시간은 갑자기 좁아진다.
몇 해뿐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말을 마치기 전에 형틀이 기다린다.
2. 끌
이 연작의 비유를 빌리면 예수도 끌을 댄다.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정의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는가. 함께 살펴보자. 예수의 많은 논쟁에서는 물음이 조금 다르다.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눈앞의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유대 전통 밖에서 한 민족의 실패를 선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 자신이 유대인이며 성경으로 말하고, 하나님께 충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통 안에서 다툰다. 예언자들은 이미 정의 없는 예배를 비판했다. 자비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세계로 난데없이 날아온 끌이 아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마가는 제자들의 배고픔 곁에 이 논쟁을 놓는다. 삶의 자리를 마련한 규칙이 거꾸로 삶을 규칙에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다.
사람과 도구의 자리가 뒤집힌 곳에서 이 말은 사람을 앞으로 돌려놓는다. 이 글은 여기서 사람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생각과의 울림을 듣는다. 울림이 있다고 두 사상이 동일해지는 것은 아니다.
마태의 잔과 접시도 구체적이다. 겉은 닦였는데 속에는 탐욕이 남는다. 남에게 보이는 부분을 번쩍이게 하면서, 보고 싶지 않은 곳을 감출 수 있다. 경건이 전시할 수 있는 외관으로 변한다.
그리고 아직 던져지지 않은 돌이 있다.
나중에 요한복음으로 전해진 간음 혐의의 여성 이야기는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던지라고 한다. 이 대목은 필사본의 역사가 복잡하여 복원 가능한 가장 이른 요한 본문의 일부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깊은 영향을 준 이야기로서 움직임은 분명하다. 돌 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한가운데 여성은 잠시나마 처리를 기다리는 사건만이 아니게 된다.
모든 판단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판사는 완전무결해진 뒤에야 재판하라는 제도 제안도 아니다. 자신들은 질문받지 않아도 되는 곳에 서서 다른 한 사람을 보호 밖으로 밀어내는 집단의 몸짓을 드러낸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러 왔다. 이 글들에서 폭로와 충실함은 함께 일어날 수 있다. 겉치레를 깨는 일이 전통 전체를 버리는 뜻은 아니다. 아낀다고 말해 온 것에 전통이 다시 책임지도록 요구하는 일일 수도 있다.
여기서 고른 장면들 속 소크라테스는 당연하게 여겼던 답 하나를 흔들고 빈터에 질문을 남긴다. 예수도 몇몇 답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그다음에 듣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것을 더 건넨다.
3. 건네는 것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는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뺨을 맞아도 같은 폭력으로 갚지 않으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고도 한다. 그 말들은 익숙한 장부를 멈춰 세운다. 상대가 먼저 잘해 주면 나도 잘해 주겠다는 교환의 장부다.
이웃 사랑은 이미 레위기에 있다. 적을 돕는 일도 예수 이전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아니다. 출애굽기는 원수의 길 잃은 짐승을 돌려주라 하고, 잠언은 원수가 배고프면 먹이라 한다. 예수는 이 토양에서 말하며 그 요구를 지금 눈앞의 사람에게 바싹 가져온다.
사랑하기 가장 힘든 사람이 반드시 낯선 사람인 것은 아니다. 이미 나를 해쳤고 다시 해치려는 사람일 수 있다. 그래도 그가 ‘원수’라는 말 하나로 남김없이 설명되는가.
이렇게 읽으면 이웃과 원수 사이에 쉽게 긋는 선이 도덕적 생각을 대신 마쳐 주지 못한다. 사랑은 소속과 친밀감과 보답의 물길만 따라 흐르지 않는다.
이 글이 듣는 말은 이것이다. 원수도 여전히 사람이다. 없애야 할 물건 하나로 아무 손실 없이 줄일 수 없다.
사람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단순한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칸트의 요구는 이 말과 서로 비출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수가 18세기의 윤리학을 미리 강의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의 이유는 다른 언어로 주어진다. 아버지는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햇빛을 주고 의로운 이와 그렇지 않은 이 모두에게 비를 내린다.
설명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같은 비를 올려다본 뒤 자신이 그어 놓은 사람들의 명단을 다시 보라고 한다.
이런 사랑은 침해가 계속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같지 않다. 모든 피해자에게 화해하거나 보호를 거두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의 지위를 인정하는 일, 행동을 막는 일, 관계를 계속할지 정하는 일은 다른 물음이다. 분노한다고 그 사람의 인간 자격까지 취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하는 것과 상처가 자기 몸에 닿을 때도 놓지 않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제 그 말은 그것을 말한 사람 자신에게 돌아온다.
4. 겟세마네
체포되기 전에 밤 하나가 있다.
겟세마네.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들어간다. 마가는 놀람과 두려움, 거의 견디기 힘든 슬픔을 쓴다. 그는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 하고 조금 더 앞으로 간다.
거리는 짧다. 외로움은 짧지 않다. 친구들은 닿을 만한 곳에 있는데 고통은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엎드려 기도한다. 이 잔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움직임이 이어진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마가는 기도와 돌아옴을 번갈아 놓는다. 돌아오니 제자들이 잔다. 다시 떠나 기도하고 돌아와도 잔다. 세 번째 돌아올 무렵에는 체포가 가깝다. 마태는 세 번의 기도를 더 명시적으로 쓴다. 반복은 장식이 아니다. 두려움이 돌아오면 결심의 말도 다시 해야 할 때가 있다.
박수를 기다리는 겁 없는 영웅이 아니다. 이 장면에서 그는 살고 싶다.
네 복음서는 이 밤을 서로 바꿔 놓아도 되는 한 그림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체로 가장 이르다고 보는 마가는 두려움을 남긴다. 마태는 갈등을 남기면서도 순종의 리듬을 펼친다.
누가의 필사 전승에는 천사가 힘을 더하고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는 유명한 두 절이 있다. 오래된 필사본들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 전승을 어떻게 판단하든, 네 책의 세부를 이어 초 단위 영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요한의 체포 장면에서 예수는 앞으로 나와 누구를 찾느냐고 묻는다. 대답을 들은 무리는 뒤로 물러나 넘어진다. 그는 제자들을 보내 주라고 하고 아버지가 준 잔을 받겠다고 말한다. 스스로 떠맡는 모습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요한이 불안을 다 지운 것도 아니다. 앞선 12장에서 예수는 마음의 괴로움을 말하며 이때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구할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서술의 차이를 후대 저자들이 두려움을 전부 삭제했다는 일직선의 이야기로 만들 수 없다.
이 글은 잠시 마가의 동산에 머문다. 가장 당혹스러운 장면이 반드시 가장 참된 역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떠맡음은 공포가 사라지는 것을 조건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살고 싶다. 죽음은 다가온다. 기도가 둘 중 어느 사실도 없던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십시오. 복음서 자체의 언어로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현대의 자율적 자기 입법으로 곧장 바꿀 수 없다. 이 글이 알아보려는 것은 두려움이 실제로 있는 동안에도 깊이 믿는 방향에 책임을 지려는 갈등이다.
소크라테스가 탈출을 거부한 이야기와 나란히 읽을 수 있지만 같은 선택은 아니다. 어느 쪽도 박해받는 모든 이에게 머무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위험에서 달아난다고 존엄을 버린 것은 아니다.
친구들은 잠들고 기도는 계속된다. 그러고는 무기 든 사람들이 온다.
그는 끌려간다.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5. 십자가
로마 병사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마가는 제삼 시부터 제구 시까지를 적는다. 보통 오전 아홉 시에서 오후 세 시로 읽지만 다른 복음서의 시간 배열은 같지 않다. 우리는 형벌의 긴 시간을 읽을 수 있다. 못이 몸 어디로 들어갔는지까지 정밀한 진료 기록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몸은 나무에 고정되어 군중의 시선에 놓인다. 조롱도 제 설명을 더한다. 남을 구할 수 있다더니 왜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가. 고통 옆에는 한 사람 전체를 실패라는 뜻으로 가두려는 눈길이 있다.
마가와 마태는 버림받음의 외침을 남긴다.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시편 22편의 시작이다. 그 시는 뒤에 찬양과 구원의 확인으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앞의 고통이 가짜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독자는 인용에서 궁극의 신뢰를 듣고, 어떤 독자는 먼저 버림받은 깊이를 듣는다. 결말로 지금 외치는 입을 너무 빨리 막지 말자.
죽어 가는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에게 부르짖는다. 고통을 부정하지도 않고, 부재하는 듯한 상대에게 말하기를 멈추지도 않는다.
누가의 전승에는 또 다른 말이 남는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이 없는 초기 필사본도 있다. 이 글은 그리스도교가 오래 들어 온 목소리로 남긴다. 십자가에서 확인된 임종 녹음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지금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파이돈』의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해 달라고 하며 의술의 신에게 진 닭 한 마리의 빚을 떠올린다. 붓다의 입멸 이야기는 조건 지어진 것의 소멸과 게으르지 않은 수행을 남은 이들에게 당부한다. 공자는 안회의 죽음에 하늘이 자신을 무너뜨린다고 운다. 각 장면은 무게를 다른 곳에 둔다. 허용되는 감정의 순위가 아니다.
누가의 말은 고통받는 이에게서 고통을 가하는 이에게 시선을 되돌린다. 살인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죄와 상처가 있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는 말이 무겁다.
모른다는 것이 자동으로 무죄가 되지는 않는다. 제도가 그 사람의 일을 명령 수행일 뿐이라 불러도 못 박힌 몸이 덜 아프지는 않다. 책임을 물으면서도 가해자가 영원히 그 행위 하나만일 뿐이라고 정하지 않을 수 있다.
원수 사랑이 가장 무거운 질문을 만난다. 상대는 아직 뉘우치지 않았다. 폭력도 계속된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지금 하는 일보다 더 많은 존재임을 볼 수 있는가.
피해자를 대신해 그 응답을 결정할 사람은 없다. 말없이 견뎌야 통과하는 도덕 시험으로 바꾸는 순간, 고통받는 이는 다시 남의 도구가 된다.
이야기가 건네는 것은 고통 가운데 주어진 선물이다. 구경하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 낼 권리가 아니다.
6. 바울
예수가 죽는다.
수난 이야기는 제자들의 도주와 베드로의 부인을 쓴다. 그러고는 부활의 선포가 사람들을 다시 모은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받았다는 믿음을 전한다. 그리스도는 죽고 묻혔으며 사흘째 살아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 목록에는 오백 명이 넘는 이들에게 나타났다는 말도 있다.
복음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빈 무덤과 만남을 쓴다. 증언들에는 차이가 있다. 이 글은 부활 신앙의 선언을 판결하지 않는다. 묻는 것은 스승을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계속하느냐다.
말을 전하고, 모여 먹고, 그 뜻을 두고 다툰다. 더는 얼굴을 마주해 되물을 수 없는 사람이 여러 해석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 유산에 모양을 준 가장 중요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울이다.
그는 예수와 갈릴리를 걷던 제자가 아니다. 현존 자료는 예수 생전 두 사람이 알던 관계였음을 확립하지 못한다. 스스로는 교회를 박해하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후대의 사도행전은 전환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의 만남으로 그린다. 본인의 편지와 나중의 서술을 따로 들어야 한다.
대체로 친서로 인정되는 편지들은 1세기 중반 무렵에 쓰여 현존 복음서보다 앞선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자신들을 길게 설명하는 첫 목소리에는 이미 그가 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가 거듭 돌아가는 중심이다. 그러나 수신인은 삶 바깥에 둥둥 떠 있는 영혼이 아니다. 결혼하고 먹고 다투며 파벌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함께 먹는 자리에서 부유한 사람은 먼저 먹고 가난한 사람은 배고프다. 편지는 이런 현실에 답해야 한다.
혼인을 말하며 주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공동 식사를 말하며 마지막 만찬의 전승을 건넨다. 박해하는 이를 축복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굶주린 원수에게 먹이라고도 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믿음과 사랑은 따로 난 선로가 아니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 일한다.
예수는 사는 법을 가르쳤는데 바울은 삶을 전부 죽음의 공식으로 바꾸었다는 대비로 이 역사를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이동은 더 복잡하다. 예수의 이야기, 유대의 성경,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이 새로운 상황으로 넓어지는 해석 안에 들어간다. 사람이 의롭다 여겨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방인은 어떻게 함께하는가. 다른 관습에서 자란 사람들이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가.
바울은 이방인이 참여하는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는 데 반대한다. 운동의 범위를 바꾸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유대교를 그리스도교로 개조했다는 뜻은 아니다. 구별된 정체성은 다른 전도자와 공동체도 참여한 긴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빌리엄 브레데는 그를 그리스도교의 두 번째 창시자라 불렀다. 논쟁적인 이름이다. 건설의 힘을 잡아내지만, 바울 자신이 받았고 전했다고 강조한 유산을 가릴 수도 있다.
이 연작의 비유에서 바울을 플라톤 옆에 놓을 수 있다. 뒤에 온 사람이 스승의 유산에 새 모양을 준다. 다만 플라톤은 대화편을 쓰고 바울은 주로 구체적인 공동체에 편지를 쓴다. 어느 쪽도 스승을 배신한 건축가 한마디로 줄일 수 없다.
예수의 비유와 명령과 행동에는 이미 나름의 질서가 있다. 바울 역시 사람의 사정에서 떠 있는 체계가 아니다. 건설할지 말지가 문제가 아니다. 만들어진 것 안에서 눈앞의 사람이 여전히 보이는지가 문제다.
예수가 바울을 들었다면 어떤 말을 긍정하고 어떤 말에 되물었을까. 대신 대답해 줄 수는 없다. 답이 미리 마련되지 않은 그 자리에 계승의 책임이 있다.
7. 다시 한 번
『한비자』는 유가가 여덟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플라톤 이후 학원도 새로운 갈림길로 갔다. 불교 여러 부파가 생겨난 역사도 길고 복잡하다.
같은 유산을 받아도 모두 같은 집을 짓지는 않는다.
바울 자신의 편지가 갈라진 틈을 식탁에 올린다. 갈라디아서에는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와 부딪친 일이 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뒤로 물러섰다. 할례와 소속과 율법이 큰 배경이다. 그래도 눈앞의 물음은 아주 일상적이다. 앞으로도 같이 밥을 먹을 것인가.
야고보서는 행위 없는 믿음이 죽었다고 강조하고,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둘의 관계는 계속 논의된다. 두 편지를 바울과 역사 속 야고보가 얼굴을 마주해 소리 지르는 녹취로 만들 수는 없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정체성 등에 관한 논쟁을 공동 신경으로 다루려 했다. 예수의 죽음에서 거의 삼백 년이 지난 뒤였다. 그 회의가 모든 차이를 끝내지도 않았다.
동서 교회의 소원해짐은 오랜 기간 진행되었고, 1054년이 분열을 가리키는 관례적 표지가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다시 길을 열었다. 정치와 언어와 신앙의 사정은 각각 다르다. 스승의 사후 곧바로 똑같은 사건이 거듭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도 서로 다른 역사 속에서 질문은 돌아온다. 스승이 부재할 때 무엇이 스승에게 충실한 것인지 누가 결정하는가.
원문을 보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말은 새 도시와 새 언어와 새 곤경으로 들어간다. 해석, 함께 사는 규칙, 기관은 유산을 돌보는 데 필요한 일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것들이 문을 좁히기도 한다. 한때 이웃을 돌아보게 했던 가르침이 먼저 이웃의 소속 증명부터 검사하라는 요구가 되지는 않는가.
예수는 사랑을 원하고 바울은 믿음만 원했다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바울의 믿음 역시 사랑에 요구를 건넨다. 어떤 충실한 해석이든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그 요구를 살려 낼 수 있는지가 시험이다.
해석 없이 말은 멀리 가기 어렵다. 해석을 너무 가득 채우면 한때 듣는 사람을 멈춰 세운 순간이 단단히 포장되어 꺼낼 수 없게 된다.
바울은 갈릴리의 목소리를 도시를 가로지르는 편지와 공동체로 옮겼다. 그 변형에는 창조와 선택이 있다. 그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고, 그의 일이 유산을 바꾸지 않은 척할 수도 없다.
전승은 손실 없는 운송이 아니다. 뒤에 오는 독자들이 계속 물을 수 있어야 하는 일이다.
8. 다리에 못 박힌 사람
이제 연작의 몇 사람을 같은 상상의 풍경에 놓아 보자.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독을 마신다. 공자는 자신을 아는 하늘을 향한다. 노자는 전설 속 관문을 지나 떠난다. 장자의 이야기에서는 울음이 동이 두드리는 소리로 바뀐다.
칸트의 마지막 한 모금 곁에는 Es ist gut라는 말이 있다. 병이 니체의 글쓰기를 끊지만 생은 더 이어진다. 양명의 연보는 마음의 밝음으로 끝난다. 붓다의 입멸 이야기는 게으르지 말라는 당부를 남은 이들에게 건넨다.
누가 더 용감하고 더 초연한지를 매기는 순위가 아니다. 두려움도 슬픔도 병도 사람의 목적 지위를 가볍게 하지 않는다.
이 풍경에서 예수는 못 박혀 있다.
형벌을 부과한 것은 로마 권력이다. 소크라테스도 국가의 판결로 죽는다. 잔이 고요해 보인다고 처형이 비폭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모습에는 또 다른 노출이 있다. 몸이 공개된 자리에 매달렸고 모욕은 계속된다.
이 글이 귀를 기울이는 것은 누가를 통해 전해진 용서의 기도다.
죄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아픔이 가치 있다는 주장도 아니다. 모든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연기도 아니다. 죽이는 이들이 자신을 처분 가능한 물건으로 대하는 동안 그들의 인간성 전체를 증오에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는 이 글의 상상 안에서 다리가 된다. 어귀에 선 사람도, 안전한 건너편에 도착한 사람도 아니다. 다리에 못 박힌 사람이다.
미움에서 용서로, 폭력에서 사랑으로. 다리는 쉬운 건넘을 약속하지 않는다. 우선 보여 주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폭력과 다른 방향도 여전히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천 년 동안 사람들은 다른 믿음과 불신을 안고 다가왔다. 삶을 바꿀 힘을 얻는 이가 있고, 질문할 수 없는 해석의 집을 짓는 이가 있고, 여전히 의심하는 이가 있다. 종교의 상징은 돌봄을 전하며 강제에도 쓰였다. 이 다리는 자기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래도 기도는 남는다.
소크라테스의 빈터, 노자의 떠남, 건넌 뒤 내려놓는 붓다의 뗏목. 이 비유의 풍경에는 어떤 가벼움이 있다. 그들이 고통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떠날 여지가 풍경에 남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나무가 몸을 붙잡는다. 무게는 그가 떠날 수 없다는 데 있다.
떠날 수 없다고 가해자에게 붙들어 둘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수난에서 사랑을 읽는 일이 강요된 형벌을 추구할 만한 운명으로 바꿔 부르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은 살육을 무해하게 만들지 않는다. 죽임당하는 한 사람이 죽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만이 아닌 가능성을 남긴다.
이 글이 읽으려는 사랑은 그것이다. 구경꾼의 이론이 아니라 고통이 아직 이어질 때도 거두어지지 않은 선물이다.
읽기 안내와 출처
이 글은 전해진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읽는 산문이다. 역사적 예수의 전기를 재구성하거나 부활 신앙을 판정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서로 다른 글로 읽으며 한 편의 연속 녹화로 합치지 않는다. 이른바 당혹성 기준은 논의할 역사적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도 이야기를 자동으로 사실 인증하지는 못한다.
장인과 나이는 마가복음 6:3, 마태복음 13:55, 누가복음 3:23에 나온다. 안식일, 잔과 접시, 원수 사랑, 황금률은 마가복음 2:23–28, 마태복음 23:25–26, 5:38–48, 7:12를 따른다. 적을 돕는 유대 경전의 배경은 출애굽기 23:4–5, 잠언 25:21–22에서 읽는다. 말들은 산문의 맥락에서 옮기거나 풀어 썼으며 특정 현대 성경 번역을 인용한 것이 아니다.
간음 혐의 여성 이야기인 요한복음 7:53–8:11, 천사와 핏방울 같은 땀을 전하는 누가복음 22:43–44, 십자가의 용서인 누가복음 23:34에는 중요한 필사본 이문이 있다. 출처로 연결한 USCCB 주석에서 차이를 설명한다. 오랜 수용사에서 중요했다는 사실과 가장 이른 본문에 논란 없이 속한다는 주장은 다르다.
동산과 수난은 주로 마가복음 14–15, 마태복음 26–27, 누가복음 22–23, 요한복음 12:27 및 18–19를 읽는다. 버림받음의 외침은 시편 22편 첫머리다. 아버지에게 순종함을 현대적 자율 입법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용서는 책임 추궁, 보호, 관계를 떠날 자유를 없애지 않는다.
바울의 자기 증언은 갈라디아서 1장, 안티오키아의 충돌은 2장,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은 5:6에 있다. 고린도전서 7·11·15장은 예수의 가르침과 식탁 전승과 부활 선포를 전하며 로마서 12장은 비보복과 적의 돌봄을 요구한다. 브레데의 『바울』에 나오는 두 번째 창시자라는 이름은 논쟁적인 해석이다.
빈터, 떠남, 뗏목, 다리는 연작을 잇는 문학적 상상이지 실제 만남도 용기·평정·고통의 순위도 아니다. 사람을 목적으로 본다는 것은 비교의 관점이며 서로 다른 전통을 같은 학설로 만들지 않는다. 피해자에게 용서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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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