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이 없는 순간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요조는 반쯤 열린 문 너머로 거래하러 온 남자와 요시코를 본다. 그는 소리치거나 들어가지 않고 ‘방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물러난다. 남편은 분노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역할은 알지만 자기 안에서 그 반응을 찾지 못한다. 늘 관객의 요구를 읽어 연기했던 사람이 아무 대본도 없는 위기 앞에서 멈춘다.
그녀는 그대로 남았다
사건 뒤 요시코는 여전히 사람을 믿고 웃으며 요조 곁에 머문다. 폭력을 겪지 않았다는 뜻도, 상처가 가볍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요조가 선언한 것처럼 그녀의 가장 좋은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술과 약물로 무너진 사람은 요시코가 아니라 요조다. 그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기보다 그녀는 끝났다고 대신 결론 내린다.
무너진 것은 누구의 믿음인가
요조는 ‘순진한 신뢰는 죄인가’라고 되묻는다. 신뢰가 사람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에서, 그러므로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면 피해자가 자기 안의 부드러운 부분을 스스로 제거해야 한다. 사건이 깨뜨린 것은 요시코의 신뢰 자체보다, 요조가 그 신뢰를 세상에 남은 안전하고 깨끗한 증거로 소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는 그녀의 경험을 세계 전체에 대한 자기 판결로 바꾼다.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
요조는 술, 수면제, 주사약에 차례로 기대며 더 깊이 추락하고, 그 수단들은 다시 타인의 손에서 건너온다. 집이 폐허가 되고 그가 가장 나쁜 상태에 이르러도 요시코는 그곳에 남아 돌본다. 수기는 그녀의 불평도 선택도 거의 기록하지 않고 자기 파멸만 말한다. 그래서 그녀의 침묵은 요조의 해석을 확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끝까지 읽지 않은 한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