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안내: 중국어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이다. 원작은 같은 페이지에서 간체와 번체로 읽을 수 있으며, 설정과 시간 관계, 지나치게 단정적인 표현 일부를 다듬었다. 이 한국어판의 작품 속 대사는 별도로 옮긴 것으로, 공식 한국어 자막이나 정발본의 문구가 아니다.
아이들이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이긴 아이는 열세 해 안에 죽는다.
경쟁은 몹시 치열하다.
열세 해
먼저 이 제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명히 짚어야 한다. 제도의 작동 방식 자체에 모든 문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레는 거인의 힘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이 힘은 없던 데서 생겨나지 않는다. 엘디아인만 계승할 수 있고, 계승한 사람은 열세 해 뒤 죽는다. 힘 자체에 새겨진 조건이다. 예외도, 피해 갈 방법도 없다.
그래서 마레는 제도를 만들었다. 수용구의 엘디아인 아이들 가운데 전사 후보생을 뽑는다. 훈련을 시키고 시험을 치르게 하며 서로 성적을 비교하게 한다. 마지막에는 마레가 계승자를 결정한다.
이긴 아이는 무엇을 얻는가?
열세 해의 수명을 얻는다. 한 가지 더 얻는 것도 있다. 가족에게 ‘명예 마레인’ 신분이 주어진다. 허가를 받으면 수용구 밖으로 이사할 수 있다. 조금 더 번듯한 집에서 살고, 조금 더 잘 먹고, 길을 걷다가 남이 뱉는 침을 맞지 않아도 된다.
이 세계에서 엘디아인 한 사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죽기 살기로 경쟁한다. 탈락한 아이는 운다.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고, 가족에게 미안해한다.
수용구가 곧 군수 공장이다
지난 글에서는 벽 안을 다뤘다. 이제 벽 밖의 구조를 먼저 짚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마레를 ‘인종 차별이 좀 심한 나라’ 정도로 이해하기 쉽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마레 군사력의 중심은 엘디아인이 변한 거인들이다. 마레가 이 세계에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수용구에서 골라낸 그 아이들 덕분이다.
수용구는 마레의 팽창에 딸려 나온 부산물이 아니다. 수용구 자체가 마레의 군수 공장이다.
대외 팽창과 내부 억압은 나란히 벌어지는 두 가지 악행이 아니다. 같은 기계의 양면이다. 마레가 밖으로 쳐들어가려면 안에서 소모해도 되는 사람들을 길러 내야 한다. 사람을 소모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를 온전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온전한 사람은 이유를 묻고, 거부하고, 사람으로 대접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레가 대외 전쟁을 계속하는 한 수용구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거꾸로 수용구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마레가 멈출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이 작품의 후반부를 이해할 열쇠가 여기에 있다. 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판단하려고 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 나라 안에서 요구를 관철할 힘이 가장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충분하다.
복종시키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
이제 이 제도가 가장 교묘하게 설계된 부분을 보자.
마레가 사람을 직접 잡아간다면 어떨까. 누가 거인을 계승할지, 누가 죽을지 일방적으로 정한다면? 저항이 생긴다. 도망치는 사람이 생긴다. 증오가 생긴다. 끌려간 당사자도 가족도 누군가 자기 삶을 강탈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
마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레는 대회를 연다.
사형수 자리를 상품으로 만들어 놓고, 아이들 스스로 다투어 차지하게 한다.
끔찍할 만큼 효율적인 한 수다.
첫째, 미움이 향하는 곳이 바뀐다. 탈락한 아이는 마레를 미워하지 않는다. 충분히 강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거나, 이긴 친구를 미워한다. 경쟁은 모든 분노를 옆으로 돌려놓는다. 아이가 아이를 향하고, 가족이 가족을 향한다. 마레는 심판석에 앉아 공정하게 상을 주는 사람이 된다.
둘째,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판단을 남에게 맡겨 버린다. 아이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지 어떻게 아는가? 뽑혔는지를 보면 된다. 평가 기준도 마레가 정하고, 심사위원도 마레이며, 상을 주는 쪽도 마레다.
셋째, 이것이 가장 치명적이다. 이긴 아이는 고마워한다. 끌려간 것이 아니다. 다른 아이들을 딛고 올라갔다. 이 순간을 위해 여러 해 노력했다. 단상에 서는 순간, 아이의 가슴은 자부심으로 차오른다.
사람이 너를 미워하게 만들면, 그 사람은 아직 온전하다. 네가 내놓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 들게 만들면, 나머지 일은 그들이 너 대신 알아서 끝낸다.
라이너가 바랐던 것
라이너는 이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의 동기는 너무도 순수해서 오히려 괴롭다.
어머니는 엘디아인이고 아버지는 마레인이다. 마레에서 이 관계는 불법이다. 아버지는 둘을 가족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라이너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네가 전사가 되면 우리도 인정받을 거야. 그러면 아버지도 우리를 받아 줄 거야.
그래서 라이너는 영웅이 되려 한다. 공을 세우고, 이야기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머니가 긴 세월 겪은 설움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히 라이너가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영웅’은 그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가 자란 세계에서 엘디아인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마레를 위해 죽는 것이다. 눈앞에 두 번째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손이 닿는 유일한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뒤 라이너는 벽 안에서 오 년 동안 인간인 척하며 살았다. 죽여야 할 사람들과 오 년 동안 동료로 지냈고, 인격은 거의 갈라질 지경이 되었다. 자신은 전사라고 거듭 말하다가, 또 거듭 병사라고 말했다. 두 신분이 그의 입에서 번갈아 나왔다. 이제 자기 자신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역할에 갇혀 있으면, 그 역할과 자신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가비가 집어 든 잣대
가비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기 어려운 인물이며, 이 장치가 빚어낸 가장 순수한 산물이다.
그녀의 믿음에는 빈틈이 없다. 엘디아인에게는 정말 죄가 있다. 섬의 사람들은 정말 악마다. 그리고 악마를 충분히 많이 죽이면 자신은 증명할 수 있다. 세상에는 ‘착한 엘디아인’도 있다는 것을. 자신과 가족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말을 할 때 가비는 진심이다. 눈은 반짝인다.
이 시도로는 처음부터 이길 수 없다.
체제의 잣대를 가져다가, 그 잣대로 자신을 그렇게 재서는 안 된다고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잣대를 집어 드는 순간 이미 그 기준에 동의한 셈이다. 그다음의 모든 노력, 더 많이 죽이고, 더 용감해지고, 더 충성하는 일은 전부 자신이 뒤집고 싶은 전제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착한 엘디아인이다’를 필사적으로 증명할수록, ‘엘디아인은 원래 나쁘지만 예외는 있다’를 인정하게 된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도록 설계된 경주다. 가비는 거기에 온 마음을 쏟으며 달리고 있다.
팔코가 서 있는 자리는 조금 더 아프다.
그도 그 자리를 놓고 경쟁하지만, 명예 때문은 아니다. 가비보다 먼저 갑옷 거인을 차지하려 한다. 계승자는 열세 해 뒤 죽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가비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죽지 않게 하려고 사형수 자리를 다투는 것이다.
아마 이 작품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일 것이다. 동시에 한 가지 사실도 드러낸다. 팔코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법 가운데 ‘우리 둘 다 가지 않는다’는 없다. 그 길은 그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그녀 대신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들은 그곳을 낙원이라 부른다
처음 나올 때는 그저 세계관 설정으로 보고 넘기기 쉬운 대목이 있다.
마레에서는 죄를 지은 엘디아인을 ‘낙원으로 보낸다’.
그 낙원이란 약물을 주사해 지성이 없는 거인으로 만든 뒤 파라디섬에 내던지는 것이다. 거기서 죽을 때까지 떠돌게 한다. 벽 안의 사람들이 백 년 동안 마주한 괴물 가운데 많은 수가 이렇게 생겨났다.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일’을 가리켜 그들이 쓰는 말은 ‘낙원’이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잔재주가 아니다. 이 기계에 꼭 필요한 부품이다. 해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모습을 온 사회가 태연하게 지켜보게 하려면, 입 밖에 내도 괜찮은 이름을 붙여 줘야 한다. 이름만 잘 붙이면, 그 일이 무엇인지 더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 흐름 위에 또 한 사람이 있다. 지크다.
부모는 엘디아 복권파였다. 그들은 어린 지크를 국가 재건 계획의 실행 도구로 훈련했다. 전사가 되어야 하고, 시조의 거인을 되찾아야 하며, 부모 세대가 끝내지 못한 일을 완수해야 했다. 그것은 양육이 아니라 투자였다.
훗날 지크는 부모를 마레에 고발한다.
그 뒤 그가 생각해 낸 구원의 방안은 이렇다. 모든 엘디아인에게서 생식 능력을 없애, 이 민족을 조용히 멸종시킨다.
철저하게 도구로 쓰인 사람이 끝내 떠올릴 수 있었던 가장 자비로운 일은, 사람이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안다고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양쪽을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다.
지난 글에서 본 벽 안 체제의 핵심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역사가 지워졌다. 밖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니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벽 밖의 방식은 정반대다.
마레의 엘디아인은 전부 안다. 자기 혈통도, 백 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왜 수용구에서 살아야 하는지도 안다. 팔의 완장이 무슨 뜻인지,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낙원’이 무엇인지도 안다. 감춰진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끝없이 반복해서 알려 준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거리의 연설에 이르기까지, 백 년 동안 가르쳐 왔다.
그런데 그들 역시 떠나지 못한다.
기억할 만한 말이 있다. 안다고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벽 안의 체제는 생각을 빼앗는다. 벽 밖의 체제는 생각은 남겨 둔 채 나머지 전부를 빼앗는다. 신분, 움직일 여지, 발언할 자격,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것. 그들을 위해 죽는 길 말고는 모든 길을 없앤다.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꿰뚫어 보면서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수 있다. 가비는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이 엘디아인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똑똑히 안다. 그러고는 그 자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린다.
명료하게 안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는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이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할 뿐이다.
다음 글에서
벽 안에서는 생각을 지우고, 벽 밖에서는 나갈 길을 막는다. 장치는 둘이지만 결과는 같다.
그 두 장치 사이에 첫 화부터 ‘자유’를 외친 사람이 서 있다.
다음 글에서는 에렌을 다룬다. 작품 전체에서 거의 정면으로 논의되지 않은 문제를 짚을 것이다. 평생 자유를 외친 그 사람이,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선택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일 수 있다는 문제다.
이 연작은 만화와 TV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을 텍스트로 삼는다. 결말이 창작 기법상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평가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이야기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