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력 연습과 놀이 · 도입
왜 한 번 더 놀고 싶을까
이미 들은 이야기이고 판 위의 말도 그대로입니다. 그래도 다시 하는 까닭은 새 결과를 얻기 위해서만은 아닐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다른 것을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가 책을 내밉니다. 한 번 더 읽어 달랍니다. 늑대가 언제 나오는지 이미 알지 않느냐고 말해 봅니다. 아이는 당연히 압니다. 어른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음 대사를 외치기도 합니다. 그래도 책을 덮으면 다시 이쪽으로 밀어 놓습니다.
결말이 궁금할 뿐이라면 첫 번째로 충분했을 겁니다. 다시 들을 때는 대체 무엇을 듣고 있는 걸까요.
이번에는 익숙한 대사 앞에서 잠깐 멈춰 봅니다. 아이가 이쪽을 보다가 불쑥 다음 말을 잇습니다. 이야기는 바뀌지 않았고 늑대가 다른 일을 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그 한마디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방식입니다. 아이는 다음 내용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자기가 말해도 된다는 가능성을 알아본 것입니다.
둘은 가까워도 같은 일은 아닙니다. 다음 대사를 예상하는 것은 뒤에 올 일에 대한 추측입니다. 이 대사를 이렇게 이어도 된다고 알아보는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말할지, 어떻게 외칠지는 그다음 행동입니다. 이야기가 많은 것을 정해 놓았어도 이번 두 사람 사이의 일까지 전부 정해 놓지는 않았습니다.
이 연작은 이런 발견을 판단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에게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있는 규칙이나 익숙한 설명만으로는 이번 일을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규칙을 깨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여전히 성립하는 가운데 다른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판 위에서는 여기로도 갈 수 있다는 발견이고, 춤에서는 이 박자를 이렇게 받을 수도 있다는 발견입니다. 움직였다고 반드시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알아본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발견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규칙은 한 판을 열어 주지만 대신 끝내 주지는 않는다
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도 대국자는 오래 생각합니다. 퍼즐 상자에 완성된 그림이 있다고 손에 든 조각의 자리가 이미 찾아진 것은 아닙니다. 둘이 추는 춤의 동작을 익혔어도 상대가 반걸음 더 나가면 지금 그 순간에 받아야 합니다.
규칙은 놀이 바깥에 세워 놓은 흥을 깨는 벽만은 아닙니다. 이쪽으로는 갈 수 있고 저쪽으로는 갈 수 없기에 눈앞 가능성이 모양을 갖습니다. 손으로 상대 말을 전부 집어 없애면 간단하겠지만, 그 판을 다 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규칙이 판을 성립시켰다고 매 수까지 정한 것도 아닙니다. 노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살펴볼 것이 있고 스스로 판단할 것이 있습니다.
종이에 적히지 않은 약속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저 나무까지 달리자고 합니다. 아이가 막대기를 말로 삼아 화단을 돌아 달립니다. 앞의 놀이에는 출발점과 도착점,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뒤의 놀이에서는 막대기를 말로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고, 내려놓고 그만 논다는 뜻도 있습니다. 심판석이 없다고 한 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놀이는 화면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승패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야기 듣기와 수다, 합주, 연극 보기에서도 약속은 있지만 약속만으로 다 끝나지 않은 과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길을 따라 놀이를 이야기합니다. 일상에서 게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새 이름을 붙이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 판은 다시 시작해도 노는 사람까지 초기화되지는 않습니다. 지난번 찾아낸 방법과 놓친 기회, 피로와 상처, 신뢰는 말을 다시 놓는다고 함께 사라지지 않습니다. 재시작은 새 기회를 주지만 새로운 나까지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수를 두었다고 아무 연습도 안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수를 바꾸었다고 나아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따라 했지만 이번에는 같은 길을 스스로 알아보았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냥 아무렇게나 바꾸었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만 비교해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연습에 대해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크지 않습니다. 놀이 안에서 무언가를 정말 알아보고 그 판단을 스스로 내린 것이라면, 판단력을 실제로 한 번 쓴 것입니다. 얼마나 남는지, 다음에도 가능한지, 생활로 가져갈 수 있는지는 따로 보아야 합니다. 몇 판 더 놀았다는 데서 더 똑똑하고 더 착하고 대인관계도 잘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바로 건너갈 수는 없습니다.
놀이가 쓸모 있다는 증명부터 할 필요는 없다
놀이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곤 합니다. 집중력을 기르고 사고력을 훈련하고 협동심을 배운다고 합니다. 효용 목록이 없으면 앉아서 노는 일을 설명하기 곤란한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그 판에서 마음을 끄는 것은 바로 그 판일 때가 많습니다. 공은 아직 움직이고 상대는 아직 받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으니 어떻게 더 이어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 연작은 놀이를 사람의 자연스러운 성향 하나로 봅니다. 놀이 밖에서 도움이 된다는 인정을 받아야만 허락되는 활동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는 사람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지 놀이 취향으로 인간임을 확인하는 검사가 아닙니다. 지금 피곤할 수도, 관심이 없을 수도, 어떤 놀이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이 판에 오지 않았다고 인간성이 한 조각 부족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력을 늘리려고 대국하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바람으로 앉아도 판을 시작한 뒤에는 눈앞의 판을 진지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나누려는 것은 노는 사람 자신의 바람과, 모든 놀이를 사실은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는 일입니다. 놀이에서 판단력을 연습할 수 있다고 매 판을 바깥 성과로 가는 도구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일에 여러 관계가 겹치기도 합니다. 프로 선수는 경기를 하고 있으며 매 동작은 그 경기 규칙 안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동시에 계약과 보수, 자격은 경기 밖에서 그의 노동과 이어집니다. 급여를 받는다는 이유로 그 경기에는 놀이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놀고 있다고 경기 밖의 업무 요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기는 또 다른 연결을 만듭니다. 판의 승패가 판 밖의 돈으로 이어집니다. 이 연작은 도박에 해당하는 부분을 논의 범위에서 뺍니다. 돈을 거는 사람은 판단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서가 아닙니다. 돈을 걸지 않고 주사위만으로 결과가 정해지는 활동도 경계에 남겨 둡니다. 무엇을 길러 준다고 증명한 것도 아니며 모든 놀이의 이름을 가리려고 끝까지 다투려는 것도 아닙니다. 참가비를 모아 상금을 만드는 경우 같은 어려움도 여기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들어오고 싶어 하며 실제로 나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이에게 협동 활동을 마련해 주었어도 거절하거나 그만둘 수 없다면, 계획표에 게임이라고 적었다고 이미 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업무 요구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업무의 몫도 분명히 설명해야 합니다.
더 눈에 띄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료 버튼은 있는데 보상과 벌이 겹겹이 쌓여 그만둘 여지를 줄입니다. 참여자는 여전히 놀고 있을 수 있고, 설계자의 선택은 여전히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두 판단은 함께 성립합니다. 왜 나가기 어려운지 물을 자격을 얻으려고 먼저 그 활동을 놀이 목록에서 지울 필요는 없습니다.
세 가지 만남이지 세 등급이 아니다
이어지는 세 편은 무엇을 마주하는지에 따라 나눕니다. 혼자 놀면 규칙과 재료를 마주합니다. 그 앞에는 체스 말과 퍼즐 조각, 블록이 있습니다. 경쟁에서는 판단하는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도 먼저 도착하고 싶고 나도 그렇습니다. 그의 다음 행동은 내가 정할 수 없습니다. 협력에서는 그 한 수가 여전히 그의 것이면서 함께 원하는 것의 일부가 됩니다.
활동에 서열을 매기는 구분이 아닙니다. 혼자 푸는 퍼즐이 함께 푸는 퍼즐보다 낮지 않으며, 이기고 싶다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함께 일을 아주 잘 마쳤다고 서로를 대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대했다고 선언할 수도 없습니다. 분담과 대응, 호흡이 훌륭해도 상대를 쓸 만한 조수로만 여길 수 있습니다.
놀이는 이런 만남의 조건을 남겨 줄 수 있어도 그 안의 두 사람을 대신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상대와 진지하게 승부하면서 그가 둔 좋은 수는 그 자신의 수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협력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맞춰 주기만 바랄 수 있습니다. 활동 이름이 아니라 지금 눈앞의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는 알기 어려울 때도 있으니 서둘러 누군가를 단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협력을 따로 이야기할 만한 이유는 귀하면서도 억지 훈련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한 수를 받아 잇되 그 수를 미리 대신 정하지 않는 일입니다.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를 내가 존중을 연습할 재료로 삼는다면 벌써 방향이 어긋났습니다. 이를 악물고 지금부터 진심으로 대하라고 자신에게 명령해도 진심이 제시간에 생긴다고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기꺼이 놀아 보고, 서로에게 시간을 주고, 다르게 반응할 여지를 남기는 것입니다. 연습을 상대에게 무언가 내놓으라는 요구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의 협력으로 인격 증서를 줄 수도 없습니다. 이런 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놀이는 판단력 연습의 한 길이지 유일한 길도, 모두에게 부과된 숙제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이가 책을 다시 밀어 놓으면 이번에 아이가 이야기를 들어서 무엇을 얻을지부터 계산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책을 펴고 그 대목에서 잠깐 기다려 봅니다. 아이가 말을 이을지, 어떻게 이을지는 아이에게 맡겨 둡니다. 이야기는 다시 할 수 있지만 눈앞의 사람까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출처와 읽기 안내
해당 SAE 논문을 바탕으로 쓴 독자용 산문이며, 기술적인 논증 전체를 문단별로 옮긴 글은 아닙니다. 영어판도 영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한국어판은 공개된 중국어 산문에서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놀이가 열어 주는 가능성을 실력 향상의 보장이나 인격 검사, 반드시 참여해야 할 과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해당 원논문으로 가는 링크도 따로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