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 · 영화 읽기 · 3 / 3
레드가 연기를 그만둔 날
이 글의 목차
작은 사무실. 긴 탁자 뒤에 몇 사람이 앉아 있다. 탁자에는 서류철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사진 한 장이 있다.
1947년, 20년을 복역한 레드의 머리는 아직 검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네, 저는 완전히 갱생했습니다. 잘못에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회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코 진실입니다.
화면이 서류에 찍힌 도장으로 바뀐다. 불허.
1957년. 같은 방, 같은 질문, 거의 같은 대답. 이번에는 한층 능숙하고 표현도 더 매끈하다.
불허.
1967년, 세 번째. 이번에 레드는 허리를 펴지 않는다. 뒤로 기대앉아 질문하는 젊은이를 바라본다. 이제 갱생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되묻는다. 갱생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정치꾼들이 만들어 낸 말이라고, 젊은이들이 양복을 입고 일자리를 얻도록 해 주는 말이라고 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날마다 후회한다고도 말한다. 감옥에 갇혀 있어서도, 위원회가 그런 말을 원해서도 아니다. 그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젊은 자신과 날마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한다. 타이르고, 일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들려주고 싶지만 그 소년은 이제 없다. 남은 것은 이 늙은이뿐이다. 그러니 도장이나 찍으라고, 자기 시간을 그만 낭비하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씨발, 이제 아무 상관도 없다고.
화면이 서류에 찍힌 도장으로 바뀐다. 허가.
여기서 대부분의 관객은 통쾌함을 느낀다. 마침내 가면을 벗고 진실을 말했기에 운명이 보답했다고 생각한다. 너무 선의에 찬 해석이다. 이 장면이 실제로 드러내는 것은 훨씬 차갑다. 그의 남은 인생을 결정하는 기관은 처음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고 있지 않았다.
1. 처음 두 번에 그는 상품을 내놓았다
세 번째 심사를 이해하려면, 앞의 두 번에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부터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규격에 맞는 반성문 하나를 생산하고 있었다. 심사위원회가 원하는 것을 빠짐없이 준다. 죄를 인정하는 태도, 갱생이라는 어휘, 사회에 무해하다는 보장, 거기에 하나님까지 끌어들인다.
이런 일은 레드의 특기다. 쇼생크에서 그는 ‘무엇이든 구해 주는 사람’이다. 상대의 수요를 알아낸 뒤 정확히 납품하는 것이 장기다. 이제 그 기술을 자신에게 쓴다. 규정을 충족하는 상품으로 자신을 포장해 접수 창구에 내민다.
두 번 모두 반려된다.
여기에는 놓치기 쉬운 부조리가 있다. 처음 두 번에 레드가 한 말은 바로 그 제도가 문서에 적고 홍보 책자에 인쇄해서 수감자에게 요구하는 기준이다. 그는 글자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맞췄다. 그리고 거절당했다.
영화는 심사위원회가 어떤 기준을 적용했는지, 앞의 두 번에 왜 불허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형량, 위험 평가, 관행과 재량 판단에 견주어 그의 진술이 실제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20년에 걸쳐 그는 10년마다 창구를 찾아가 물건을 내놓는다. 보기에 규격을 완벽히 맞춘 물건인데도 돌려보내진다. 이유도 받지 못한다.
2. 세 번째에는 생산을 멈췄다
세 번째의 말이 통쾌하게 들리는 까닭은 그가 마침내 납품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보자. 그는 후회를 인정한다. 다만 그 후회를 규격에 맞는 답으로 포장하기를 그만둔다. 거부하는 것은 책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서류의 빈칸에 넣을 ‘갱생했다’라는 말 하나로 압축하는 일이다. 그 단어는 당신들이 자기 월급을 타려고 지어낸 말 아니냐고.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는 더 진실한 반성을 진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문답이 요구하는 언어 자체도 거부한다. 이 문답의 실체를 드러낸다. 자신을 이해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의 절차이며, 그 절차에는 빈칸에 맞게 들어가는 말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 그는 더 이상 그 칸을 채우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허가를 받는다.
규격에 맞는 답을 내놓기를 멈춘 순간과 허가받는 순간이 정확히 겹친다. 편집은 둘을 인과관계로 읽으라고 강하게 유도한다. 하지만 영화는 위원회의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다. 솔직한 말에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다. 나이와 이미 40년을 복역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을 수도 있다. 둘 다 작용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제도가 마침내 정직함에 보답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레드가 규격에 맞춘 자기소개서를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은 인생을 결정하는 절차는 여전히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도 결과가 나오기 전에, 레드는 이미 자신을 그 절차가 원하는 상품으로 만들기를 그만두었다.
따라서 이 장면의 가장 날카로운 지점은 ‘진실을 말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데 있지 않다. 다른 사실에 있다. 제도의 판단 기준은 여전히 불투명한데, 레드는 먼저 연기를 끝냈다는 사실이다.
3. 소변을 보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출소한 레드는 같은 곳으로 간다.
같은 방에 그 들보가 그대로 있다. 같은 슈퍼마켓에서 똑같이 물건을 봉투에 담는다. 점장도 그대로이고, 심하게 쏘아붙이지는 않는 그 말투도 같다.
아주 짧은 장면이 있다. 불과 몇 초지만 영화에서 가장 따끔하게 파고드는 몇 초다. 슈퍼마켓 뒤편에 선 레드가 점장에게 묻는다. 화장실에 가도 되겠습니까? 점장은 일일이 묻지 말고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한다. 레드가 걸어가며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30년이다. 허락을 받지 않고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한 사람이 허락을 받아야 소변을 볼 수 있도록 훈련되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습관이 몸의 움직임에까지 스며들었다. 자기 행동이 성립하려면 다른 사람의 승인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이 이미 받아들였다.
레드는 내레이션에서 인정한다. 어떻게 가석방 조건을 어겨 다시 들어갈 수 있을지만 온종일 생각한다고. 화면은 총포상 진열창 앞에서 잠시 멈춰 선 그의 모습도 보여 준다.
브룩스가 편지에 쓴 말과 똑같지는 않다. 하지만 논리는 거의 같다. 한 번 법을 어겨서 모든 것에 제자리가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동일한 체제에 생의 대부분을 쓰인 두 사람은 밖으로 나온 뒤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다. 우연이 아니다. 같은 상품을 두 차례 생산한 결과다.
그 방의 들보에는 한 줄이 있다. BROOKS WAS HERE. 레드는 매일 그 아래에서 자고 매일 그 글씨를 본다.
4. 그를 붙잡은 것은 희망이 아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가장 널리 퍼진 해석을 뒤집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레드를 구한 것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앤디의 “희망은 좋은 것이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몰라”라는 말이라고 한다. 영화에 실제로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추상적인 것이 레드를 붙잡았다면, 브룩스와 레드의 차이는 운에 달린 셈이다. 브룩스는 충분히 낙관적이지 못해서 죽었다는 소리가 된다.
정확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말이다.
레드를 정말 붙잡은 것은 지극히 구체적인 일이다. 벅스턴에는 건초밭이 있다. 밭 북쪽으로 긴 돌담이 있고, 담 아래에는 검은 화산석 한 덩이가 놓여 있다. 그 일대의 지질로는 그곳에 있을 수 없는 돌이다. 돌 밑에는 상자가 묻혀 있다.
앤디는 탈옥하기 전에 이 일을 레드에게 일러 두었다. 기억만으로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자세히 설명했다.
이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하자. 앤디는 자기 탈옥이 성공할지조차 모르는 때에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생각했다. 언젠가 레드가 나오게 된다면, 그날 그는 어디로 가야 할까.
격려 한마디나 돈 얼마를 남긴 것이 아니다. 주소 하나, 해야 할 행동 하나, 반드시 레드 자신이 가서 해야 하는 일 하나를 남겼다. 출소 뒤 레드의 하루하루는 텅 비어 있다. 그중 이것만이 내용이 있는 일이다. ‘누군가 내가 해 주기를 기다리는 일’은 이것 하나뿐이다.
브룩스와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브룩스에게도 출소 때 마련해 준 것들이 있다. 직장 하나, 방 하나, 출석 확인표 한 장. 빈틈없고 올바른 조치들이다. 하지만 ‘가석방된 사람’에게 주어진 조치이지, 브룩스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일흔 살의 다른 출소자로 바꾸어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앤디가 레드에게 남긴 것은 레드에게만 성립한다. 돌 아래의 편지는 레드에게 썼고, 돈은 레드를 위해 남겼으며, 그 주소는 레드만 안다.
브룩스는 자신과 같은 부류에 적용되는 처리 방안을 받았다. 레드는 누군가 오직 자신 한 사람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를 받았다. 전자는 사람을 살아 있게 해 준다. 후자는 살아갈 이유를 준다.
5. 그가 새긴 한 줄
레드는 결국 그 방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일을 한다.
의자를 가져와 올라선 뒤, BROOKS WAS HERE 아래에 새긴다.
SO WAS RED. 레드도 여기 있었다.
이 문장은 아무 쓸모가 없다. 집주인은 그를 모르고 다음 세입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 한 줄 때문에 누가 레드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해 주지는 않는다. 그는 새기자마자 떠나고, 다시는 이 방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반드시 새겨야 한다.
앞 글에서 앤디가 유용한 물건이기를 가장 공개적으로 거부한 순간은 교도소 전체에 오페라를 들려주고 그 대가로 2주를 어두운 방에서 보낸 때였다. 평생 쓰이며 산 브룩스가 마지막에 남긴 것은 공적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었다”는 한마디였다. 이제 레드는 같은 들보, 같은 문장 아래에 영어 단어 세 개를 보탠다.
세 사람, 세 가지 처지가 마지막에는 한 가지 일로 모인다. 아무것과도 맞바꾸지 않을 흔적을 조금 남기는 일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정말로 하는 이야기다. 영리한 사람이 19년에 걸쳐 벽을 뚫는 방법은 줄거리다. 그 안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수십 년 동안 쓰이고, 번호를 받고, 배치되고, 평가받고, 불허당하고, 허가받고, 화장실에 갈 때조차 보고하도록 훈련된 사람. 그 모든 일을 겪은 다음에도 그는 의자 위에 올라서 작은 칼로 나무에 자기 이름을 새긴다.
그 이름을 새기게 하는 무언가는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6. 마지막의 바다
마지막 장면은 멕시코의 지와타네호다. 레드가 해변을 따라 걸어간다. 앤디는 배를 손보고 있다.
이 장면을 떠받치는 것은 행복한 결말 자체가 아니다. 앞에서 쌓아 온 모든 빚을 이 장면이 갚아 주기 때문이다.
앤디는 배를 고친다. 더는 누군가의 회계사가 아니다. 그 배도 다른 누군가의 계획에 속해 있지 않다. 레드가 걸어온다. 파견된 것도, 물건을 납품하러 온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다.
쓸모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은 아니다. 앤디는 편지에서도 일을 성사시킬 줄 아는 사람이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고 썼다. 다만 여기서는 쓸모가 관계의 전부가 되지 않는다. 레드는 와도 되고 오지 않아도 된다. 그의 안전과 존재할 자격은 더 이상 앤디를 위해 일한다는 조건에 매이지 않는다.
앞 글에서 탈옥은 하나의 공사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제 그 말을 마저 해야겠다. 쇼생크에서 진정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은 500야드의 하수관을 빠져나오는 일만이 아니다. 이 해변의 길을 걷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능력을 지닌 채 다른 사람을 찾아가되, 받아들여질 자격을 그 능력으로 먼저 사지 않아도 되는 것.
이 글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1994년 영화 《쇼생크 탈출》을 다룬다. 중국어 원문은 통용되는 중국어 자막의 제목과 대사를 참고했다. 여기 실린 대사는 원문의 뜻을 한국어로 독립적으로 옮긴 것으로, 공식 한국어 자막을 인용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