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 · 영화 읽기 · 2 / 3
그 명단은 구매 목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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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가 이름을 하나씩 찍어낸다. 쉰들러는 서성거리며 이름을 부르고, 스턴은 받아 친다. 한 장이 차면 빼내고 새 종이를 끼운다. 이름들 사이로 저마다의 얼굴이 거듭 끼어든다.
영화는 이 장면을 중심에 둔다. 이 서류가 뜻하는 것은 구출이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형식은 구매 목록에 더 가깝다.
사람은 먼저 자신을 지배하는 체제가 처리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체제 안에서 살 길 쪽으로 옮겨질 수 있다.
1. “내가 그들을 사는 거야”
영화의 극화된 서사 속에서 쉰들러는 스턴에게 거래 내용을 숨김없이 말한다. 자신은 돈을 내고, 아몬 괴트는 사람을 넘긴다. 브륀리츠에 세우려는 군수 공장은 이송에 행정적 명분을 준다.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구출을 기다리는 수감자가 아니라 생산에 꼭 필요한 노동자로 기재될 것이다.
괴트는 교환의 체계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왜 꼭 이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필요한 것이 노동력이라면 같은 수의 다른 사람들로 바꾸어도 될 터다. 쉰들러는 진짜 답을 말할 수 없다. 괴트의 장부에는 ‘동등한 한 단위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와 돈, 기술과 생산량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거래의 도덕적 이유를 상업적 이유 안에 숨기는 것이다.
2. 먼저 쓸모 있는 사람으로 적어 넣기
영화는 처음부터 스턴이 쓰는 이 방법을 보여준다. 교수는 서류 위에서 기계공이 되고, 노인은 필수 직종을 얻으며, 아이는 없어서는 안 될 노동자와 연결된다. 꾸며낸 쓸모가 잠시나마 방패가 된다.
브륀리츠에서는 이 허구가 공장 전체의 규모로 확대된다. 쉰들러는 수감자들이 모두 숙련된 군수 노동자라고 주장한다. 각본에서 그는 다른 곳에서 포탄을 사 와 이 공장에서 생산한 것처럼 꾸미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스턴에게, 이 공장에서 정말 쓸 수 있는 포탄이 단 한 발이라도 나온다면 자신은 몹시 언짢을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사실은 그렇게 단정적이지 않다. 공장의 생산량은 극히 적었고 생산 실적은 조작되었으며, 쉰들러는 부속 수용소를 운영하는 데 거액을 쏟아부었다. 영화는 이 복잡한 역사를 하나의 목적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벼린다. 이 공장의 진짜 필수 생산품은 ‘이 사람들은 아직 전쟁에 쓸모가 있다’는, 행정적으로 믿을 만한 설명이다.
3. 영화 속 한 장의 명단과 역사 속 여러 명단
타자기 장면은 극적 압축이다. 두 사람이 한 방에서 유일하게 결정적인 서류를 만들었다는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 아니다. 실제로는 여러 이송 명단이 있었고, 남녀는 따로 등록되었으며, 내용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수용소 직원과 서류 업무를 맡은 수감자가 작성에 참여했고, 이름은 추가되거나 지워질 수 있었다. 거래를 통해 서류에 들어가는 이름도 있었다. 쉰들러는 구출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지만, 오늘날 통틀어 ‘명단’이라고 부르는 모든 문서를 혼자 작성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사실관계를 바로잡으면 영화가 체제의 구조를 꿰뚫어 본 통찰은 약해지기는커녕 더 강해진다. 생명이 달린 것은 관료 체계 위에 떠 있는 계시 같은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그 체계 안에서 끊임없이 다투어지고 이동하는 서류들이었다. 승강장에서는 서류 어디에 이름이 놓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몸이 아우슈비츠 대신 브륀리츠로 향할 수 있었다.
영화는 수많은 행정적 싸움을 눈에 보이는 하나의 명제로 압축한다. 이 체제에서는 사람이 서류상 어떤 범주로 분류되느냐가 두 목적지를 가르는 차이가 될 수 있다.
4. 괴트의 산술
아몬 괴트를 설명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영화 속 그는 체제가 정한 분류를 가장 극단적으로 집행하는 사람이다. 발코니에서 느리거나 놀고 있는 듯한 사람을 골라 총수에서 빼버린다. 유대인 여성 기술자가 기초가 무너질 것이라고 정확히 지적하자, 그는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한 뒤 그 지적대로 다시 지으라고 지시한다.
지식은 남기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버린다. 능력이 사람에게서 떼어낼 수 있는 자원일 뿐이고 그 사람에게 쓸모 이외의 지위가 없다면, 두 명령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쉰들러는 이 산술에 맞서야 하면서도 그 기호 일부를 빌려 쓴다. 괴트가 ‘불필요한 자’를 빼는 자리에 쉰들러는 허구의 쓸모를 부풀려 넣는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두 행동이 도덕적으로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저항이 피할 수 없는 제약을 드러낸다.
5.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용서
쉰들러가 괴트의 살인을 줄이려고 호소하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라 권력이다. 죽일 수 있는데도 용서를 택해야 더 높은 주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괴트는 잠깐 이 연기를 해본다. 잘못을 저지른 노동자를 놓아주고 그 자세가 주는 맛을 음미한다. 그러더니 창문에서 총을 쏘아 그를 죽인다. 이 시도가 실패하는 까닭은 용서조차 여전히 괴트 자신의 위대함만을 비추기 때문이다. 풀려난 사람은 괴트와 별개로 자신의 요구를 내세울 지위를 얻지 못했다. 또 다른 자기 과시의 재료일 뿐이다.
상대가 한 번도 목적 자체로 나타난 적이 없다면, 죽이는 일과 용서하는 일은 똑같은 권력의 극장에서 취하는 두 가지 동작일 수 있다.
6. 카드판 위의 헬렌
영화는 명단을 치는 타자기 소리와 쉰들러, 괴트가 다이아몬드를 걸고 벌이는 블랙잭을 교차 편집한다. 이름과 얼굴들 사이에는 괴트에게 오랫동안 학대당한 가정부 헬렌 히르슈도 있다. 카드판은 거래의 조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 자신이 판돈이 되는 교환을 거쳐 안전한 곳에 도달한다.
쉰들러는 먼저 괴트에게 그녀가 사람임을 인정하게 한 다음 데리고 나올 수는 없다. 괴트가 받아들이는 규칙, 곧 소유와 내기, 지불과 이전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으로 깨끗한 방법은 아니다. 소유주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전까지 사람은 문장 속에서 여전히 목적어다.
완성된 명단을 보고 스턴은 이것이 곧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끔찍한 한계 안에서 참이다. 이름이 적힌 사람들이 더 뛰어난 노동자이거나 더 구할 가치가 있는 희생자였던 것은 아니다. 본래부터 우선권이 주어진 집단도 아니다. 고르게 미치지 못한 구출의 손길이 마침내 붙잡은 이름들일 뿐이다.
명단이 선한 것은 살인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고르는 사람의 뜻이 선하다고 해서 선별 자체가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명단 밖에는 여전히 심연이 있다. 바깥에 남은 사람들도 타자기가 닿을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이 글은 토머스 케닐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스티븐 자일리언이 각본을 쓰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1993년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다룬다. 분석의 대상은 영화가 극화한 장면과 서사이며, 역사적 배경은 별도로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과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추모관 야드 바솀의 자료를 대조해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