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 · 영화 읽기 · 3 / 3
돌을 놓은 사람들
이 글의 목차
노동자들은 금니의 금으로 만든 반지를 쉰들러에게 선물한다. 반지 안쪽에는 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그는 반지를 끼고 자기 자동차 쪽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재산을 사람 수로 환산하기 시작한다. 저 차라면 열 명을 더 구할 수 있었다. 금으로 만든 당원 배지라면 두 명, 적어도 한 명은. 거래할 수 있는 시간은 끝났는데 그의 손에는 아직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이 남아 있다.
그가 무너지는 것은 죄책감 때문이다. 그러나 죄책감만은 아니다. 한 상인의 결산이기도 하다. 그에게 가장 익숙한 산술로도, 이제 마지막 거래를 마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1. 장부가 그 자신을 향한다
쉰들러는 ‘더 많이 했어야 했는데’라고 막연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 차, 이 배지, 한 사람 더라고 구체적으로 짚는다. 이런 정확함은 영화가 이미 보여준 그의 삶에서 나온다. 물건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누구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지, 협상에 얼마나 더 여지가 남아 있는지를 아는 삶이다.
그 능력이 구출을 가능하게 했다. 이별의 현장에서는 자신을 고발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그가 남겨둔 것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었다. 그런 거래를 익힌 뒤로는, 열 수 있었으나 열지 못한 탈출구로 보이게 된 재산이었다.
스턴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한다. 앞으로 태어날 세대도 보게 한다. 장부의 수지가 맞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행동을 얼마나 긴 시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바꾼다.
2. 같은 환산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영화는 끊임없이 사람을 숫자, 노동력 단위, 가격, 서류 속 이름으로 번역한다. 괴트의 방식은 뺄셈이다. 노동자의 움직임이 느려지면 몸 하나를 지워버린다. 그러면 전체가 더 효율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체제의 추상화가 사람이 사라지는 일을 일상으로 만든다.
후반부 쉰들러의 산술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자동차 한 대가 살릴 수 있었던 열 명의 생명이 되고, 배지 하나가 한 생명이 된다. 물건을 교환가치로 줄여놓음으로써 사람만은 교환가치로 줄어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계산이 자비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수단이 어떤 관계에 봉사하느냐에 따라 윤리적 방향을 얻는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것은 수를 세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그 계산이 사람을 그 안에 가두는지, 아니면 물적 자원을 사람에게로 열어주는지가 관건이다.
3. 영화는 그를 성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쉰들러는 끝내 흠 있는 사람으로 남는다. 아내에게 불충실했고, 나치 장교들과 어울렸으며, 몰수한 재산과 강제노동으로 돈을 벌었다. 점령이 안겨준 지위를 오랫동안 누리기도 했다. 훗날의 구출이 그 행위들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스필버그는 그가 왜 달라졌는지 완벽하게 풀어주는 독백도 마련하지 않는다. 빨간 외투의 소녀가 중요하고, 스턴이 끈기 있게 해온 일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사람들과 계속 접촉한 경험도, 살인의 규모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 인물을 풀어낼 유일한 열쇠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역사 속 쉰들러는 전쟁이 끝난 뒤 몇 차례 벌인 사업에서 모두 실패했다. 자신이 구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다가 1974년에 세상을 떠났다. 덕행마저 사업의 성패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듯, 구출 이후의 삶을 또 하나의 성공담으로 빚어내지는 않는다.
4. 천 명은 한 사람의 공적을 재는 단위가 아니다
‘쉰들러는 천 명이 넘는 사람을 구했다’는 말은 사실이며 꼭 필요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사람들을 쉰들러를 재는 단위로 만들 수도 있다. 숫자가 클수록 영웅도 위대해진다는 식으로.
구출된 각자에게 살아남은 것은 영웅의 총실적 가운데 작은 한 몫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남은 삶 전체다. 일과 이주, 우정과 결혼, 자녀와 슬픔, 여느 날의 아침과 늙어감이다. 후손들은 구출의 점수를 더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한 번의 강제 이송이 중단되면서 얼마나 긴 시간이 열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반지에 새겨진 말을 과장된 수사로 읽을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인 것은, 그 사람의 일생을 다른 누군가의 공적에서 차지하는 자리와 맞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5. 영화가 자기 바깥으로 걸어 나간다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흑백이 컬러로 바뀐다. 영화는 ‘쉰들러의 유대인들’과 배우들을 예루살렘의 쉰들러 무덤 앞으로 데려간다. 생존자들은 자신들과 연관된 영화 속 인물을 맡은 배우들과 함께 걸어가 무덤 위에 돌을 놓는다. 마지막 방문객은 꽃을 놓는다.
이 행동이 연기를 역사와 같게 만들지는 않는다. 배우와 생존자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채로 나란히 걷는다. 바로 그 구별이 중요하다. 세 시간이 넘는 연기 끝에 영화는 배역과 실존 인물의 관계를 드러낸다. 실존 인물의 일생은 그 배역 안에 다 담길 수 없다.
마지막 자막의 ‘6천 명이 넘는 후손’은 영화가 개봉한 1993년의 시야 안에 있는 수치다. 오늘의 인구를 실시간으로 집계한 숫자가 아니다. 이 말은 결말에서 눈에 보이는 생명의 계보를 화면 밖으로 이어가지만, 후손을 남긴 삶만이 더 가치 있다는 뜻은 아니다.
6. 돌은 그들이 직접 놓는다
결말은 쉰들러 혼자 중심에 남아 있고 이름 없는 수혜자들이 그의 선행을 보증하는 구도를 택하지 않는다. 생존자들이 추모 행위의 주체다. 스스로 걸어가고, 몸을 굽히고, 돌을 놓을 자리를 고른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과 연관된 인물을 연기했던 배우들 곁에 선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한때 명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타자수가 이름을 입력하고, 관리가 열차를 배정하고, 구매자가 이송을 확보했다.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결정적인 모든 문장 안에서 문법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만 있었다.
무덤 앞에서 마지막 동사를 행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다.
영화는 살해당한 사람들을 되돌려줄 수 없다. 고르게 미치지 못했던 구출을 공평하게 만들 수도, 쉰들러의 장부를 결산해줄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에 ‘구출된 사람들’을 더 이상 집합적인 목적어로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컬러 화면으로 들어와 명단을 넘어선다. 그리고 제 손으로 돌을 놓는다.
이 글은 토머스 케닐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스티븐 자일리언이 각본을 쓰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1993년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다룬다. 분석의 대상은 영화가 극화한 장면과 서사이며, 역사적 배경은 별도로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과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추모관 야드 바솀의 자료를 대조해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