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 · 영화 읽기 · 2 / 3
댄 중위는 자신의 삶을 되찾았다
이 글의 목차
어느 재향군인 병원.
두 다리를 잃은 남자를 간병인 둘이 들어 병상에서 휠체어로 옮긴다. 남자는 몸부림치고 욕을 하며 몸에 놓인 것들을 집어 던진다. 포레스트의 옷깃을 움켜쥐고 얼굴을 바짝 들이민 채, 거의 고함을 지른다.
“나는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었어야 했어. 그게 내 운명이고, 내가 맞아야 할 끝이었어. 그런데 네가 그걸 빼앗아 갔어.”
살아난 사람이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면, 우리는 대개 트라우마나 수치심,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고통으로 이해한다. 그런 것들이 모두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말 그대로이기도 하다. 그는 진심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정해진 마지막이었으며, 이제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믿는다.
1.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삶의 의미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대목에서, 포레스트의 내레이션이 댄 테일러 중위 집안의 전통을 들려준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치른 전쟁마다 테일러 집안에서는 전사자가 나왔다. 댄 중위에게 이 전통은 단순한 짐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영광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그의 문제다.
평생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하는지, 그 끝이 성공으로 인정받을지까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쓰여 있었다. 답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정해진 자리로 가서 거기서 죽으면 된다. 영광스럽고 숭고하며 존경할 만한 삶의 설계로 보인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정작 그 자신은 그 결정에 참여한 적이 없다.
댄 테일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물어본 사람은 없다. 그는 족보 속에서 태어났고, 족보는 네 쓰임새가 이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받아들였다. 철저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그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
정글에서 그는 포레스트에게 말한다. 한 가지만 기억해라, 내 밑에서 맡은 일을 잘 해내라고. 그는 성실한 장교다. 병사들을 이끌고, 지형을 잘 알며, 부하들을 책임진다. 그 모든 것은 진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받치는 의미까지 온전히 그가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건네받은 지시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의 충성심과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리 정해진 결말을 거부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2. 무너진 까닭은 다리를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댄 중위의 붕괴를 두 다리의 상실과 떼어 놓을 수는 없다. 통증,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처지, 낙인, 달라진 신체 능력은 모두 실제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에 또 한 가지를 얽어 놓는다. 이제 그는 정해진 방식대로 끝을 맺을 수 없다.
그는 살아남았고, 휠체어에 앉았다. 그때부터 족보에 ‘전사’라는 한 줄을 남기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테일러 집안에서 전장에서 죽지 못한 첫 남자가 된 것이다.
그가 잃은 것은 몸의 능력만이 아니라 의미이기도 하다. 지시서가 무효가 되었는데, 그는 평생 두 번째 지시서를 준비한 적이 없다.
이후의 행동에는 모두 지시서를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술에 절어 지내고, 성매매 여성들과 어울리며, 모든 것을 비웃는다. ‘운명’이라는 말도 욕처럼 내뱉는다.
새해를 앞둔 밤의 장면은 특히 보기 괴롭다. 성매매 여성 둘과 방 안 가득한 술병. 그중 한 명이 먼저 포레스트를 멍청이라고 부른다. 댄 중위는 곧바로 분노해 두 여성을 쫓아내고, 뒤이어 자신도 불쌍한 괴물이라는 욕을 듣는다.
포레스트는 내레이션에서 두 사람의 아픔을 연결한다. 댄 중위가 불구자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바보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과 같다고. 그 순간 드러나는 것은 모두가 결손만 본다는 사실이 아니다. 낙인 하나가 어떻게 사람 전체를 납작하게 눌러 버리는가다.
3. 포레스트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댄 중위는 포레스트의 새우잡이 배를 찾아온다. 앞서 그는 반은 비웃음으로, 반은 약속으로 말한 적이 있다. 포레스트가 정말 선장이 되면 자신이 일등항해사를 하겠다고. 그 뒤 포레스트가 편지를 보냈다. 부두에 나타난 그는 말한다. 오겠다고 했으니 왔다고.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잘 보자. 정확히는, 일어나지 않는 일을.
포레스트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느냐고 하지 않는다. 기운을 내라고도, 인생에는 아직 가능성이 많다고도 하지 않는다. 목표를 주지도, 앞날을 설계해 주지도 않는다. 댄 중위가 찾아와서 기쁘지만, 그 방문을 마침내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저 배에 올라오게 하고, 둘은 새우를 잡기 시작한다. 한참을 잡아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댄 중위는 술을 마시며 빈정대고, 포레스트는 배를 몰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 배에서 포레스트는 도덕적 요구를 새로 덧붙여, 댄 중위가 반드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정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쉽게 지나칠 수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댄 중위는 평생 남이 건넨 지시서 안에서 살았다. 그것이 무효가 된 뒤에 새 목표를 받는다면, 아무리 좋은 목표라도 지시서 한 장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일 뿐이다.
포레스트는 새 지시서를 주지 않았다. 그가 준 것은 배 한 척, 그 위의 자리 하나, 그리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4. 폭풍이 몰아친 밤
허리케인이 닥친 그날 밤, ‘제니호’는 바다에서 폭풍에 휩쓸린다. 폭풍이 지나간 뒤 뉴스는 지역의 새우잡이 어업이 거의 전멸했고, 살아남은 배는 이 한 척뿐이라고 전한다.
댄 중위는 돛대 위로 올라간다.
폭우와 번개 속에서 배가 종잇장처럼 뒤집힐 듯 요동친다. 그는 돛대에 매달려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이게 폭풍이야? 와 봐! 와서 나를 죽여 봐! 여기서 끝장을 내자고!”
영화에서 가장 거친 장면이다. 조금만 잘못 찍어도 엉망이 되기 쉬운 장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힘을 갖는 이유는 그가 마침내 자기 운명을 정해 놓은 그 무언가와 정면으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저 죽여 달라는 말만은 아니다. 신에게 승리한 순간으로 단순화할 필요도 없다.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하다. 내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정해 놓았다면 지금 해 보라는 것이다. 하지 않겠다면, 나도 더는 그 지시서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폭풍이 지나고 바다가 잔잔해진다. 해가 뜬다.
이윽고 댄 중위는 뱃전을 넘어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혼자 헤엄쳐 간다. 포레스트는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본인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내 생각에는 신과 화해한 것 같아요.”
화해란 그가 누군가를 용서했다는 뜻이 아니다. 더는 그 지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5. 그는 남은 삶을 다시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폭풍이 지난 뒤, 바다 위에서 댄 중위는 포레스트에게 목숨을 구해 준 일에 아직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로부터 여러 해 뒤 결혼식에는 티타늄 합금 의족을 하고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찾아와, 약혼녀 수전을 소개한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이전의 모든 일을 정산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병원에서는 포레스트가 자기에게 정해진 마지막을 훔쳐 갔다고 했다. 이제는 고맙다고 한다. 그 두 말 사이에 놓인 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그가 이 목숨을 다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과정이다.
미리 주어진 삶은 그에게 죽으라고 했다. 그는 죽지 못해 여러 해 괴로워했고, 돛대에 올라 신과 한바탕 싸운 뒤, 스스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함께할 사람을 만나고, 의족을 하고, 잘 살아간다. 전부 평범한 일이다. 너무 평범해서 영화의 결말 같지도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그가 자기 삶으로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이다. 그저 족보 앞에 내놓을 실적이 아니다.
두 시간이 넘는 이 영화에서 댄 테일러의 여정은 유난히 온전한 선을 그린다. 남에게 받은 삶에서 출발해, 아직 살아 있는 자신을 다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이른다.
포레스트가 마주한 기대와 요구는 다른 종류였다. 어머니와 팀, 군대와 언론은 모두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반드시 완수해야 할 영웅적 결말을 써 준 사람은 드물었다. 이 차이 때문에 그는 낮게 평가받기도 했지만, 뜻밖에도 가문의 신화를 실현할 의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댄 중위에게는 정해진 길이 있었다. 너무나 번듯하고 숭고해서 거절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는 인생의 반을 들여 그것을 해체했다.
6. 그가 번 돈과 그가 원한 것
끝으로 많은 사람이 놓치는 세부가 하나 있다.
댄 중위는 새우잡이 회사가 번 돈을 포레스트 대신 관리하며, 애플 컴퓨터를 골라 투자한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고 ‘과일 회사’라고 부르는 쪽은 포레스트다. 이 투자 덕분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
웃음거리나 또 한 번의 행운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이 일은 다른 사실도 보여 준다. 새우잡이 회사가 안정된 뒤에도 댄 중위는 포레스트의 돈을 계속 관리하고 투자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미 크게 성장한 사업에 활용했다. 그렇다고 부를 새로운 영웅 신화로 포장하지는 않았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의 돈을 잘 관리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생활도 안정시켰다.
한때 ‘전장에서 죽는 것’을 삶의 의미 전부로 삼았던 사람이 마지막에 누리는 일상은 이렇다. 배 한 척이 있고, 함께할 사람이 있고, 친구의 돈을 챙겨 주고, 그 친구의 결혼식에 간다.
어느 족보에도 한 줄 남길 수 없는 생활이다.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그는 마침내 어떤 족보에도 적힐 필요가 없는 날들을 살게 되었다.
이 글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4년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바탕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