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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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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 영화 읽기 · 2 / 3

“나는 본래 어여쁜 계집아이”라는 말은 매질로 만들어졌다

Han Qin (秦汉) · 한국어판 공개: 2026년 10월 7일

이 글의 목차

중국어 원작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다시 쓴 한국어판

나쿤이 배우를 고르러 온다는 소식에 경극 학교 전체가 긴장한다. 뽑히면 공연을 할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다. 학교 전체의 살길이 걸려 있다.

두지는 속세를 그리는 비구니의 노래 《사범(思凡)》을 부르다가 이 대목에 이른다.

“나는 본래 사내아이요, 어여쁜 계집아이가 아니오.”

틀렸다. 원래 가사는 “나는 본래 어여쁜 계집아이요, 사내아이가 아니오”다.

아이는 이 구절을 이미 셀 수 없이 틀렸다. 맞고, 고치고, 다시 부르고, 또 틀린다. 이번에는 나쿤 앞에서 틀린다. 기회가 날아가고, 나쿤은 떠난다.

전에도 관 사부가 아이를 긴 의자에 눌러놓고 살갗이 터지도록 때린 적이 있다. 그래도 아이는 틀렸다.

그때 시투가 다가온다. 탁자 위에서 담뱃대를 집어 든다. 두지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담배를 담는 대통 쪽을 안으로 쑤셔 넣어 휘젓는다.

입가로 피가 흐른다.

손아귀에서 풀려난 두지는 바닥에 엎드려 숨을 돌린다. 그러고는 입을 연다.

“나는 본래 어여쁜 계집아이요, 사내아이가 아니오.”

그 뒤로는 다시 틀리지 않는다.

1. 아이가 배운 것은 가사가 아니다

많은 사람은 이 장면을 전환점으로 이해한다. 두지가 마침내 눈을 떴고, 극 속으로 들어갔으며, 드디어 쳉데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너무 온건하고, 너무 매끄럽게 앞뒤를 맞춘 설명이다.

아이가 같은 구절을 거듭 틀린다. 맞으면서도 틀리고, 맞고 나서도 틀리다가, 끝내 학교 전체의 앞날까지 망쳐버린다. 영화 속 이 반복은 기억력이 나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몸이 아직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사는 “나는 본래 어여쁜 계집아이”라고 말하라는데, 아이의 입은 매번 “사내아이”로 바꾼다. 오늘날의 정체성 명칭 하나를 붙여 그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자리를 대신 정해주는 한 문장을 몸이 여전히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에게 남은 마지막 고집이다. 그 자신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할지 모르는 고집.

대통이 파고든 곳은 바로 그 고집이다.

그러니 그 순간 일어난 일은 배움이 아니라 말 바꾸기다. 그리고 말을 바꾼 뒤에 일어난 일은 더 심각하다. 적어도 이 가사 앞에서 아이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설득당해서가 아니다. 계속 저항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몸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자리가 하나 비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2. 들어와 산 것이 유일한 소유가 되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어린 시절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 영화가 정말 매서워지는 곳은 그다음이다.

쳉데이는 명배우가 된다. 우희 역으로 당대를 울리는 배우가 된다. 그런데 그는 우희를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희가 되어 산다.

무대 밖에서 말할 때도 그 몸짓을 쓴다. 두안 샬루를 향한 감정에도 우희가 패왕을 사랑하는 방식을 가져온다. 수없이 인용된 그의 말이 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으면 평생이어야 한다고. 일 년이 모자라도, 한 달이 모자라도, 하루가 모자라도, 한 시진, 그러니까 두 시간이 모자라도 평생이 아니라고.

이것은 우희의 논리다. 우희에게는 다른 삶이 없다. 패왕을 따르는 것이 삶의 전부이고, 패왕이 패하면 자신도 죽는다.

샬루가 그런 데이를 두고 한 말이 있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구나.”

흔히 예술가의 지독한 몰입과 순수함을 드러내는 말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의 뜻을 글자 그대로 풀면 이렇다. 자신을 내주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이 말을 신조로 삼는다면, 자신에게 다른 삶의 방식이 남아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셈이다.

가장 설명하기 어렵지만 반드시 짚어야 할 지점이 여기다. 억지로 들어온 것이 나중에는 손에 남은 유일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킬 때보다 더 필사적으로 그것을 지킨다.

잘려 나간 손가락, 몸을 넘기는 계약서에 남은 피의 손도장, 날마다 이어진 매질, 장 내관이 닫은 방문. 이 모든 것이 그의 속을 비웠다. 텅 빈 곳을 채운 것은 억지로 심어진 우희뿐이었다. 달리 지킬 것이 없다. 그래서 이제 그는 떠밀려 우희를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원하고, 뜨겁게 원하며, 목숨을 걸고 지킨다.

한 사람이 가장 철저히 점령당한 모습은 아직 저항하는 모습도, 아무 감각이 없어진 모습도 아니다. 자신을 점령한 것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모습이다.

3. 그는 샬루보다 패왕을 먼저 볼 때가 많다

이 대목은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어서 흔히 건너뛴다.

데이가 샬루에게 품은 감정은 진짜다. 깊고, 평생에 걸친 감정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샬루라는 사람만이 아니다.

그는 패왕도 원한다.

샬루는 결혼하고 싶고, 살림을 꾸리고 싶고, 세상이 바뀐 뒤에도 살아남고 싶다. 모두 평범한 바람이며, 구체적인 한 사람의 바람이다. 데이는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무대에서 내려온 샬루가 겁을 먹고, 물러서고, 손익을 따지는 보통 남자라는 사실을 견디기 어렵다. 우희의 패왕은 그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자신의 말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따르는 것.

그것은 극의 가사이지 생활이 아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가사 한 구절대로 살라고 요구한다.

훗날 샬루가 “너는 진짜 우희지만, 나는 가짜 패왕이야”라고 하는 것은 자조가 아니다. 감춰진 사정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한 배역을 살아내라는 요구가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 더는 그 배역을 해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아픈 일은 이것이다. 남의 손에 떠밀려 배역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그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나빠서가 아니다. 다른 방식의 관계를 바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평생 그가 받은 훈련은, 사람이 정해진 모양대로 자라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자신이 배역 밖의 한 사람으로 꾸준히 대접받은 적이 드물기에, 다른 사람도 배역 밖에서 이해하기 어렵다. 그에게 이것은 저절로 일어나며, 스스로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더욱 벗어나기 어렵다.

4. 시대는 요구만 바꿀 뿐, 방식은 바꾸지 않는다

1937년 일본군이 오자 일본인을 위해 공연해야 한다. 샬루가 감옥에 갇히고, 데이는 아오키 앞에서 한 편을 공연해 그를 풀려나게 한다.

1945년 국민당이 돌아오자 그 공연은 적에게 협력한 죄가 되어 법정에 서게 한다.

1949년 인민해방군이 들어온다. 이후 경극에도 변화가 요구된다. 현대의 인물이 무대에 올라야 하고, 예전의 제왕과 장수와 재상들은 문제시된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닥치자 고쳐볼 여지조차 없다. 의상은 불타고, 얼굴의 분장은 엉망으로 뭉개지고,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죄를 인정해야 한다.

사십여 년 동안 정권과 정치 운동이 차례로 무대 위의 사람들에게 말한다. 오늘부터 너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어느 쪽도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묻지 않았다. 바뀌는 것은 틀뿐이다. 공정은 한 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해진 모양을 주고 거기에 맞추라고 한다. 맞지 않으면 때린다. 맞아 들어갈 때까지 때린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역사는 배경처럼 보이지 않는다. 겹겹이 쌓이며 위에서 짓누르는 것처럼 보인다. 경극 학교가 대통으로 했던 일을, 뒤이어 오는 시대들은 도구만 바꾸어 되풀이한다. 평생 남이 지정한 배역이 되라는 요구를 받은 데이는, 거기에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를 어린 시절부터 배웠다. 너무 잘 배웠다. 나중에는 요구에 맞추는 것과 스스로 몰입하는 것마저 깔끔하게 가를 수 없을 만큼.

5. 남이 써놓은 죽음으로 자신을 끝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때로부터 열한 해가 흘렀다. 텅 빈 공연장에 선 두 늙은 배우는 다시 의상을 입고 대사를 맞춰본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부르던 《사범》의 한 구절을 이어 부른다.

샬루가 “나는 본래 사내아이요”로 시작하자, 데이가 “어여쁜 계집아이가 아니오”로 잇는다.

틀렸다. 어린 시절 틀리던 바로 그 구절로 돌아갔다.

샬루가 웃으며 말한다. 틀렸어. 또 틀렸어.

데이는 그 옛 가사를 다시 부른다. “나는 본래 사내아이요, 어여쁜 계집아이가 아니오.”

그 뒤 두 사람은 다시 《패왕별희》를 연습한다. 데이는 그 검을 뽑아 우희의 자세로 제 삶을 끝낸다.

이 결말은 흔히 순교처럼 읽힌다. 예술을 위해 죽고, 사랑을 위해 죽으며, 단호하고 아름답게 죽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오해다.

그가 어떻게 죽는지를 똑바로 보자. 그는 우희의 방식으로 죽는다. 검은 패왕의 검이고, 자세는 극 속의 자세다. 그는 다시 우희의 극 속으로 돌아와 있다. 그는 쳉데이로 죽지 않는다. 우희로 죽는다.

어린 시절 대통에 떠밀려 입속으로 들어온 것이, 마지막에는 그의 끝을 정하는 데에도 함께한다. 오십여 년을 그 안에 살면서 예술과 욕망과 상처에 엉켜 자라다가, 대본을 따라 그를 종점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 틀린 가사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아픈 대목이다.

오십여 년이 지난 뒤,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때리지 않는 텅 빈 극장에서, 객석에 관객 하나 없는 그곳에서, 그가 이어 부르고 다시 반복한 말은 여전히 그 아이의 말이었다. “나는 본래 사내아이요.”

그 아이는 줄곧 있었다. 밑에 눌리고, 매에 꺾이고, 오십여 년 동안 다른 것으로 덮였어도 목소리까지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한 번, 소리를 냈다.

그러고 나서 쳉데이는 다시 우희의 극 속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샬루가 달려가 먼저 데이라고 부른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조용히 부른다.

두지.

영화의 마지막 대사다. 두지라는 이름이 한 번도 다치지 않은 순수한 원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이름은 명성과 마지막 배역 바깥에서, 어린 시절의 이름으로 존재했던 아이를 가리킨다.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아이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살아남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줄곧 그 아래에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주샨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뚜렷하게 제 몸값을 치르고 자신을 되찾은 여자다. 샬루도 극 밖의 삶으로 데려가려 했다. 주샨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 글은 첸 카이거 감독의 1993년 영화 《패왕별희》를 바탕으로 한다.

중국어 원문·기존 영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