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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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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 영화 읽기 · 3 / 3

주샨은 제 몸값을 치르고 자신을 되찾았다

Han Qin (秦汉) · 한국어판 공개: 2026년 10월 7일

이 글의 목차

중국어 원작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다시 쓴 한국어판

기루 화만루의 문 앞, 눈 덮인 땅.

한 여자가 위층에서 내려와 몸에 지닌 값나가는 것을 하나씩 벗어 계산대에 놓는다. 장신구, 옷, 신발. 옆에 선 포주는 비웃으며 말한다. 한번 나가면 돌아올 길은 없다고.

여자는 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맨발로 눈밭을 가로질러 나간다.

이 여자의 이름은 주샨이다. 많은 사람은 주샨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여자로 기억한다. 쳉데이 곁에 있던 두안 샬루를 빼앗아간 여자. 세속적이고, 계산적이고, 경극을 모르는 쪽이다.

아주 큰 오독이다. 주요 인물 셋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제 몸값을 치르고 자신을 되찾은 사람은 주샨이다.

1. 몸값을 치르고 나오는 일, 가장 분명한 자기 결정

세 사람이 등장하는 모습을 나란히 놓으면 분명해진다.

두지는 어머니에게 손을 붙들린 채 손가락이 잘리고, 피 묻은 손도장을 찍은 뒤 경극 학교로 보내진다. 선택은 없었다. 그때는 너무 어렸다.

시투 역시 학교에 보내져 온 아이다. 두지보다 먼저, 어떻게 들어왔는지 영화가 보여주지도 않을 만큼 먼저 와 있었다.

주샨은 다르다. 스스로 걸어 나왔고, 값을 남김없이 치렀다. 몸에서 벗어놓은 것들은 전 재산이다. 그곳에서 살아온 세월 동안 번 것 전부다. 그것을 모두 남겨두고 단 하나를 얻는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나올 때 주샨의 발은 맨발이다. 눈은 깊다. 이 장면에는 낭만적인 포장이 없다. 주샨이 치를 수 있는 값은 가진 것 전부에, 맨발 두 짝을 더한 것이다.

이 한 걸음 뒤에 하는 모든 일은 같은 전제 위에 놓여 있다. 내가 결정한 삶을 살겠다는 것. 결혼하고 싶다. 가정을 갖고 싶다. 불안 없이 평온하게 살고 싶다. 고상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은 바람이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남이 정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토록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첫 사람이다.

2. 주샨은 데이를 돌본 적이 있다

주샨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두 말해주는 장면이 있다.

아편에 중독된 데이가 금단 증상으로 바닥을 구르고, 물건을 부수고, 온몸을 떤다. 샬루도 손을 쓰지 못한다. 그때 데이를 끌어안는 사람은 주샨이다.

아이를 안듯 가슴에 품고 계속 안아준다. 의식이 흐릿한 데이의 입에서 한마디가 나온다. 엄마.

그 한마디가 모두를 찌른다. 어린 데이는 눈 쌓인 경극 학교 문 앞에 어머니에게 남겨졌다. 그 뒤로 누구도 이렇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지금 그를 안고 있는 사람은 그가 반평생 미워해온 여자다.

주샨에게는 이래서 얻을 이익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보자. 데이는 남편과 가장 깊은 감정으로 얽힌 사람이며, 결혼 생활에 박힌 가시다. 주샨은 모른 척해도 됐다. 차라리 잘됐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무언가를 돌려받으려고 안아주는 게 아니다.

그저 고통받는 사람이 눈앞에 보였을 뿐이다.

나중에 그 검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공개 비판투쟁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무대 의상과 옛 물건들이 불 속에 던져진다. 두 남자의 평생을 얽어맨 보검도 그 안에 있다. 뛰어들어 불 속에서 검을 건져내는 사람은 주샨이다.

그 검이 주샨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상처뿐이다. 데이가 샬루에게 준 검이고,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증명하는 물건이다. 그래도 주샨은 검을 건져낸다.

3. 샬루를 극 밖으로 데려오려 하다

이제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다.

데이는 샬루에게 패왕의 자리에 남으라고 요구한다. 주샨은 그를 무대 아래로 데려오려 한다.

이 차이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데이는 무대에서 내려온 샬루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겁을 먹고, 물러서고, 살아남기 위해 비굴한 말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가 바라는 것은 극 속에서 끝까지 변함없는 패왕이다. 데이의 사랑에는 조건이 있다. 샬루가 반드시 그 배역이어야 한다.

주샨이 결혼하려는 상대는 겁을 먹고, 물러서고, 억지를 부리고, 벽돌로 제 머리를 내리치며 체면을 가까스로 세우는 남자다. 주샨은 경극을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을 꾸리자고 한다. 주샨이 구상하는 삶에는 적어도 분장을 지운 사람의 자리가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주샨도 샬루에게 공연을 줄이고 데이와 거리를 두라고 한다. 남편이라는 자리, 가정이라는 자리 안으로 그를 데려놓는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서 다른 게 아니다. 주샨이 얻으려는 것이 무대 아래의 삶이기에 다르다. 주샨 자신도 정해진 신분에 묶어두던 곳에서 막 빠져나왔다. 옛 신분만으로 자기 전부가 규정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화만루를 나오던 날 자신을 위해 했던 일을, 나중에는 샬루를 위해 한 번 더 해보려 했다.

이루지 못했다.

4. 비판투쟁의 자리

1966년, 거리. 데이와 샬루와 주샨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다. 얼굴은 엉망으로 덧칠되어 있고, 무대 의상에는 불이 붙었다.

샤오쓰가 사람들을 이끌고 구호를 외친다. 샬루에게 폭로하라고 요구한다.

샬루가 말하기 시작한다. 데이는 일본인을 위해 공연했고, 위안 나리를 위해 공연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데이는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누군가 주샨과의 관계를 묻는다.

샬루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샨이 창녀라고 말한다. 이제 그 여자와 선을 긋겠다고 말한다.

주샨은 바로 곁에 무릎 꿇고 앉아 그 말을 모두 듣는다.

누군가 주샨에게 묻는다. 사실이냐고.

영화 전체에서 가장 날카로운 일 초다. 샬루는 그 옛날 화만루에서, 평생 손을 잡고 놓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주샨이 가진 것 전부를 계산대에 남기고 맨발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그 말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주샨은 반박하지도, 울며 따지지도 않는다. 끌려가면서 샬루를 한 번 바라본다.

집에 돌아온 뒤, 주샨은 붉은 혼례복을 꺼내 입는다. 그리고 목을 맨다.

5. 두 죽음은 같은 일이 아니다

끝내 두 사람 모두 죽는다. 죽는 모습은 둘 다 극적이다. 한 사람은 무대 의상을 입고 검을 뽑아 목을 베고, 다른 사람은 혼례복을 입고 목을 맨다. 같은 종류의 사랑을 위한 죽음으로, 똑같이 ‘시대에 짓밟힌 사람들’로 보기 쉽다.

하나의 사건으로 합쳐서는 안 된다.

영화에서 데이는 죽음으로 남들이 가르쳐준 배역을 완성한다. 검도, 자세도, 가사도 몸속에 심어진 대본에서 왔다. 그러나 오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것은 이미 그의 진짜 예술과 욕망에 얽혀 있었다.

주샨의 죽음은 자신이 선택한 삶이 사람들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 직후에 놓인다. 그 혼례복은 맨발로 화만루를 나와 전 재산을 걸고 얻은 삶의 증표다. 주샨이 그것을 입는 모습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때 내가 택한 삶이 오늘 공개적으로 부정당했다고.

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것으로 덮여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적이 있었고, 그 뒤에 그것을 잃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영화가 결국 무엇을 말하는지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두 죽음이 같은 것이라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시대 앞에서 인간은 다 똑같고, 모두 끝장나며, 어떻게 살아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

그러나 두 죽음은 같지 않다. 주샨은 선택한 적이 있다. 값을 모두 치렀고, 한 번은 해냈으며, 다른 사람도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우려 했다. 끝내 배신당했지만, 마지막이 그렇다는 이유로 주샨이 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6. 이 영화는 좋은 소식을 주지 않는다

이 글을 따뜻한 말로 마무리할 생각은 없다. 영화 자체가 그런 것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는 평생 억지로 집어넣어진 것을 연기하다가 그 안에서 죽었다. 샬루는 비판투쟁의 자리에서 자기 아내도, 같은 문하에서 자란 동생도 모두 팔아넘기고, 끝까지 혼자 살아남았다. 주샨은 영화에서 가장 분명하게 제 발로 빠져나왔던 사람이지만 결국 혼례복을 입고 죽었다. 샤오라이쯔는 탕후루를 다 먹고 목을 맸다. 담벼락 아래 버려졌던 아기 샤오쓰는 자라서 남을 비판투쟁의 자리에 끌어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주요 인물 가운데 누구도 한결같은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저 나쁜 사람이기만 했던 이도 없다. 학교에서 두지를 감싸주던 아이가 샬루였고, 담벼락 아래에서 데이가 안고 돌아온 아기가 샤오쓰였다. 모두 같은 체계가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세 시간은 무엇을 남겼을까.

맨발로 눈밭을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남겼다.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을 까닭을 따지지 않고 안아주는 여자를 남겼다. 목을 매기 전 탕후루 한 꼬치를 끝까지 먹는 아이를 남겼다. 텅 빈 공연장에서 쉰을 넘긴 사람이 다시 부른 “나는 본래 사내아이요”라는 말을 남겼다. 마지막에 조용히 불린 “두지”라는 이름을 남겼다.

어느 것도 최후의 결말을 바꾸지는 못했다. 무력한 처지에서 일어났고, 대부분 보답이 없었으며, 당시의 제도 안에서는 성과로 환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영화는 그 장면들을 남겨놓았다.

그래도 그 일들은 일어났다.

사람을 겹겹이 깎아 정해진 모양으로 만들던 오십여 년 동안, 끝내 깎아내지 못한 부분이 이것이다. 누구도 구해내지는 못했다. 다만 깎여나가던 그 무엇이, 끝내 모두 깎여 없어지지는 않겠다고 버텼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영화가 마지막에 내놓는 전부다. 그리고 이 영화를 세 시간 동안 볼 가치가 있는 이유다.

이 글은 첸 카이거 감독의 1993년 영화 《패왕별희》를 바탕으로 한다.

중국어 원문·기존 영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