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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동화 읽기 · 27

인형극에 울던 공주는 왜 쓰러진 사람에게 계속 춤추라고 할까

비극에 감동한 경험만으로, 예상 밖의 자리에서 닥친 진짜 고통을 알아보게 되지는 않는다.

Han Qin ·

인형극이 끝났을 때 공주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무와 색밀랍, 가느다란 실로 만든 인물들이 작은 무대에서 비극을 겪었다. 움직임은 살아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곁의 아이 하나는 사탕으로 달래야 할 만큼 울었고, 지위 높은 어른도 저 작은 나무 인형들이 저런 불행을 겪다니 가엾다고 했다.

공주의 열두 번째 생일이었다. 정원 전체가 그녀의 즐거움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와일드는 처음부터 남에게 마음이 움직일 줄 모르는 아이를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이 방금 그녀를 울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 뒤의 잔인함도 ‘원래 동정심이 없어서’라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허구의 인물 때문에 젖었던 바로 그 눈이, 가까이 있는 실제 사람의 고통은 알아보지 못한다.

키 작은 무용수가 등장하자 아이들이 크게 웃었고, 공주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전날 사냥하던 귀족 둘에게 숲에서 발견되어 궁으로 왔다. 아버지는 그를 떠나보내게 되어 기뻐했다. 이 생일에 자기 몸을 구경거리로 내놓고 싶은지, 먼저 물은 사람은 없었다. 정작 그는 행복했다. 아이들이 웃으니 함께 웃었고, 인사하며 절했다. 모두 함께하는 놀이에 들어온 듯했다.

양쪽에 웃음은 같은 뜻이 아니었다. 관객은 외모와 몸, 동작을 우습게 보았다. 그는 춤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서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여겼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몰랐고, 전신을 거울로 본 적도 없었다. 궁에 온 일이 아직 그에게는 모욕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더 웃을수록 오히려 자신이 이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고 믿었다.

공주는 머리의 흰 장미를 뽑아 그에게 던졌다. 귀부인들이 꽃으로 보상하던 모습을 흉내 낸 것이었다. 반쯤은 장난이었고, 반쯤은 엄숙한 시녀장을 놀리고 싶어서였다. 그는 온전히 진심으로 받아들여 꽃을 가슴에 대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쁨에 가득 찬 모습에 공주는 더 오래 웃고, 오후에 한 번 더 춤추라고 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특별히 좋아한다는 증거처럼 들렸다.

꽃은 진짜였고 미소도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그가 믿은 약속이 함께 온 것은 아니었다. 이 오해가 얼마나 가슴 아픈지 인정하면서도, 장미 한 송이를 공주의 사랑 고백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공주가 같은 감정을 돌려줄 의무는 없다.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오해가 나중에 사람을 아프게 했을 때, 그녀와 주변 사람들이 그것이 구경할 공연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낮의 휴식 시간, 그는 정원으로 달려가 새들에게 장미를 보여 준다. 새들은 그를 안다. 추운 겨울에 얼마 안 되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고, 숲에서는 다람쥐와 열매를 나누었다. 공주가 바라본 뒤에야 처음 내면이 생긴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자기 삶이 있었고, 다른 생명을 돌본 경험과 궁정에서 아무도 묻지 않은 능력이 있었다.

그는 새소리와 숲의 흔적을 알고, 부드러운 이끼가 어디 있는지 알며, 부모 잃은 새끼 새를 돌본 적도 있다. 그것을 모두 공주에게 주는 미래를 그린다. 함께 숲으로 가서 낮에는 종일 춤추고 밤에는 창밖을 지켜 주고 싶다. 궁정이 우스운 몸 하나만 보던 자리에서, 그는 함께 나눌 수 있는 온전한 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미래 역시 그의 상상이다. 공주는 숲을 좋아한다고도, 떠나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공주도 당연히 원하리라고 그는 믿는다. 사람들이 그를 당연히 웃기러 온 존재로 보듯, 그 역시 상대의 실제 답을 아직 듣지 않았다. 두 오해가 지닌 힘과 주는 상처가 같지는 않다. 그래도 한 사람이 미래를 아무리 완성해 두었어도 그것만으로 관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은 함께 보여 준다.

그는 공주를 혼자 찾아가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궁 안으로 들어간다. 화려한 방들이 이어지다 끝에서 갑자기 거울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이상한 다른 사람인 줄 안다. 자기가 웃으면 그도 웃고, 손짓하면 따라 한다. 다가가 손바닥이 차갑고 매끄러운 면에 닿아도 알지 못한다. 그러다 흰 장미를 꺼냈을 때, 똑같은 꽃이 저쪽에도 있는 것을 본다.

자기임을 알아본 순간, 오전의 웃음이 모두 다시 들린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한 것도, 공주가 함께 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몸을 보고 재미있어한 것이다. 그는 울며 쓰러지고 장미를 찢고, 어떤 행동이든 따라 하는 형상에서 숨으려 한다. 거울이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앞에서 직접 말해 주지 않은 멸시가, 갑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된다.

여기서는 두 발견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 모습을 알았고, 남들이 어떻게 조롱했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외모를 보았다고 조롱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사랑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증거도 아니다. 와일드의 서술은 그의 놀람과 자기혐오를 따라 몸을 거칠게 묘사한다. 오늘 이 장면을 다시 말하면서까지, 그 몸은 모욕받아 마땅했다고 궁정 대신 확인해 줄 필요는 없다.

거울이 진실을 알려 주어 사랑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고 써 버리면, 관객의 판단을 거울의 광학적 기능으로 바꾸는 셈이다. 거울은 얼굴과 팔다리, 뒷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 누가 관계를 맺을 자격이 있는지는 선고하지 못한다. 이 발견이 끔찍한 것은, 그가 오전 내내 받은 환영이 자신만 모르던 모욕 위에 서 있었음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공주와 친구들이 창문으로 들어온다. 바닥에 누워 바닥을 치고, 울음마저 점점 약해지는 그를 보고 아이들은 다시 웃는다. 공주는 춤도 재미있지만 연기는 더 재미있다며, 아까 인형극만큼 훌륭하지만 덜 자연스럽다고 한다. 부채를 흔들고 박수도 친다. 오전에 그녀를 울린 작은 무대를, 이야기는 무너지고 있는 사람 바로 옆으로 옮겨 놓는다.

너무 가짜로 연기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관객을 즐겁게 하는 자리에 놓여 있다. 무슨 동작을 해도 계속 공연으로 돌아간다. 웃어도 공연, 울어도 공연이고, 쓰러지면 더 뛰어난 공연이 된다. 보는 사람들이 그 방식을 잠시 내려놓지 않는 한, 그는 어떤 반응으로도 배역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인형의 슬픔에는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이 있다. 무대와 줄거리, 비극이라는 형식이 지금은 가엾어해야 한다고 알려 준다. 그러나 이 무용수는 처음부터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소개되었기에 관객은 계속 웃고 싶어 한다. 공주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미 정해 둔 기대를 바꾸게 두지 않는 것이다. 진짜 사람이 실로 움직이는 인형보다 고통의 진실을 믿게 하기 어려워진다.

허구에 흘린 눈물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예술이 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공주는 실제로 마음이 움직였고, 비극도 제대로 무엇인가를 표현했다. 다만 그 감동이 다음 만남의 판단까지 자동으로 해 주지는 않았다. 비극 한 편을 보고 감동을 경험했다고 해서, 예상과 다른 현장에서도 관객으로 바라보는 일을 멈춰야 할 순간을 알아보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가 더는 움직이지 않자 공주는 조금 기다린 뒤, 일어나 계속 춤추라고 한다. 대답이 없으니 삼촌을 부른다. 어른은 장갑으로 그의 뺨을 두드리며 공주가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나중에는 사람을 불러 채찍질하자고까지 한다. 개입할 사람이 궁정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되돌리려는 것은 공연의 진행이지,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아보는 일이 아니다.

공주는 열두 살이다. 그렇기에 주변 어른들이 장면에서 사라져서는 더더욱 안 된다. 데려오기, 관람을 마련하기, 웃음을 칭찬하고 공연을 재촉하기에 어른들도 참여했다. 그렇다고 환경을 인정하기 위해 아이의 모든 행동을 지울 필요는 없다.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알면서 지금은 즐거움을 계속 요구한다. 이야기가 보여 주는 차이가 여기에 있다. 평생을 단죄할 필요도, 지금의 냉혹함을 면책할 필요도 없다.

마침내 시종이 몸을 굽혀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이제 춤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 확인에도 아쉬움이 따른다. 우울한 왕을 웃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목숨이 끝날 때까지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직 해내지 못한 쓸모다. 새들이 알던 그 사람, 나누고 싶던 숲, 방금 전까지 왜 찢어진 꽃을 쥐고 있었는지를 묻는 이는 없다.

공주는 왜 더 춤추지 않느냐고 묻는다. 마음이 부서져 죽었다는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리고, 앞으로 자기와 놀 사람에게는 마음이 없게 하라고 한 뒤 정원으로 달려간다. 와일드는 뒤늦은 뉘우침을 보태지 않는다. 비극이 관객을 반드시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보장하지도 않는다. 새 사실을 알았지만, 공주가 고친 것은 다음 놀이 상대의 조건뿐이다. 아프지 않는 사람이면 즐거움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부서져 죽는다는 결말은 문학의 극단적인 맺음이지, 특정한 몸의 차이가 어떤 운명을 만든다는 의학 설명이 아니다. 오히려 더 좁은 질문을 선명하게 한다. 남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고통이 자기 일을 어떻게 방해하는지만 신경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 구경하는 것이 꼭 몰라서만은 아니다. 그 감정이 원래 자기의 공연 계획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는 공주의 사랑을 얻지 못해도 바닥에서 일으켜 세울 만한 사람이었다. 숨겨진 귀족 신분을 나중에 증명해야만 공연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관객 모두를 바꿀 비밀 신분은 없었다. 진짜 상처받은 마음 하나가 있었다. 공주는 인형을 보고 울었지만, 사람이 쓰러졌을 때 공연에서 그 사람으로 시선을 옮기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다. 가장 서늘한 것은 슬픔을 모른다는 점이 아니다. 자신이 가엾어할 준비를 한 자리에서만 슬픔이 슬픔으로 인정된다는 점이다.

출처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체를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춰 다시 썼다. 원작의 모욕적인 시선을 인물의 객관적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감동, 사랑에 답할 자유, 눈앞의 고통을 진지하게 대하는 일은 서로 구별하며, 공주의 회심을 덧붙이지 않는다.

판본에 관한 주석

텍스트 기준은 오스카 와일드의 1891년 문학동화 「The Birthday of the Infanta」로, 『A House of Pomegranates』의 완전한 영어 전사를 따른다. 공주가 인형 비극에 먼저 우는 장면, 흰 장미의 장난과 오해, 무용수의 숲속 돌봄과 지식, 거울 속 자기 인식, 고통을 다시 공연으로 보는 관객, 어른들의 재촉과 뉘우침 없는 결말을 남긴다. 스페인 궁정은 우선 문학적 공간이다. 외모를 사람의 가치로 환산하지 않고, 공주가 사랑을 돌려주지 않은 것을 잘못으로 삼지 않으며, ‘마음이 부서져 죽었다’는 말로 의학 판단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