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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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05 / 25

제5편 춘추: 천자는 남았지만 구축은 이미 텅 비었다

기원전 770년, 주 평왕은 제후들의 호위를 받으며 호경에서 동쪽 낙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물리적 이동의 정치적 의미는 지리적 의미를 훨씬 넘어섰다. 이제 천자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지 못했고, 옛 도읍 풍경과 호경 주변의 비옥한 땅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제후들 위에서 실질적인 중재자 노릇을 하지도 못했다. 그는 여전히 천자였다. 하지만 ‘천자’라는 두 글자의 값어치는 천도한…

기원전 770년, 주 평왕은 제후들의 호위를 받으며 호경에서 동쪽 낙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물리적 이동의 정치적 의미는 지리적 의미를 훨씬 넘어섰다. 이제 천자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지 못했고, 옛 도읍 풍경과 호경 주변의 비옥한 땅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제후들 위에서 실질적인 중재자 노릇을 하지도 못했다. 그는 여전히 천자였다. 하지만 ‘천자’라는 두 글자의 값어치는 천도한 그날부터 돌이킬 수 없는 하락세에 들어섰다.

춘추시대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로 구분한다. 이 시대의 본질은 어떤 새로운 구축이 옛 구축을 대체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옛 구축의 속이 서서히 비어 가는 과정, 그것이 본질이다. 주공의 체계는 한 차례 전쟁으로 부서지지도, 한 차례 혁명으로 뒤집히지도 않았다. 안에서부터 증발했다. 형식은 남아 있었다. 천자는 여전히 낙읍에 있었고, 제후들은 갈수록 뜸해지기는 해도 여전히 조근했으며, 예식 역시 갈수록 원형을 잃기는 해도 계속 쓰였다. 그러나 그 형식 아래 있던 실질은 수분처럼 소리 없이 말라 버렸다.

이런 죽음은 폭력에 의한 파괴보다 더 분석할 만하다. 폭력으로 파괴되었다면 구축이 자신보다 강한 외력을 만났다는 뜻이다. 속이 천천히 비어 갔다면 구축이 자기 안의 잔여항에 소모되었다는 뜻이다. 춘추는 살해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사의 이야기다. 자연사에도 부검은 필요하다.

1. 동천: 구축의 무게중심이 옮겨 가다

평왕의 동천은 단순한 지리적 사건이 아니었다. 권력 체계 전체의 물리적 배치를 바꾸어 놓았다.

서주의 권력은 방사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천자는 중심인 호경에, 제후들은 그 주변에 있었고, 권력은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 나갔다. 천자는 주족의 근거지인 관중평원을 장악했고, 육사(六師)라는 직속 군대를 거느렸으며, 물자도 풍부했다. 제후와 천자 사이의 힘의 격차는 체계 자체에 내장되어 있었다. 천자는 이름만 최고 권위자가 아니라 실제로도 가장 강한 자였다.

동천 뒤에는 이 구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낙읍은 상징적인 도읍이었을 뿐, 주변에서 장악할 수 있는 땅이 매우 좁았다. 천자의 직할령은 관중의 천 리 땅에서 낙읍 근처 사방 수백 리의 손바닥만 한 땅으로 줄었다. 그 땅마저 계속 잠식당했다. 육사는 전쟁으로 망가졌고, 재건할 힘도 없었다. 재정 수입원은 크게 쪼그라들었다.

그동안 제후국들은 200여 년에 걸친 봉건체제 아래에서 이미 덩치를 키웠다. 제나라는 산동반도의 소금과 철 자원을 장악했고, 진(晉)나라는 황하 중류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했다. 초나라는 남쪽으로 장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진(秦)나라는 서주의 옛 땅을 이어받았다. 이 강대국들의 인구와 군대, 경제 규모는 이미 왕실을 훨씬 앞서고 있었다.

권력 구도는 ‘강한 중심 하나와 약한 주변 여럿’에서 ‘약한 중심 하나와 강한 주변 여럿’으로 바뀌었다. 중심은 남아 있었다. 다만 이제 그 중심이 체계에서 가장 약한 연결점이었다.

명목상 최고 권위자가 실제로는 가장 약한 자인, 대단히 특이한 권력 구조였다. 이름과 실질이 갈라진 것이다. 이런 분리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서주 말기에 이미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동천이 그것을 굳혀 놓았다. 이후 290년에 걸친 춘추의 역사는 대체로 명실이 분리된 상태에서 각 세력이 벌인 힘겨루기의 전개였다.

2. 패정: 구축을 대신한 임시방편

주 천자에게는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힘이 없었다. 그래도 질서는 누군가 유지해야 했다. 국제체제가 무정부 상태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 시대에는 그랬다. 주변의 이른바 만이, 곧 융적과 남방의 초나라가 중원 여러 나라의 안전을 끊임없이 위협했기 때문이다. 질서 없는 중원은 제대로 힘을 모을 수 없는 중원이었고, 외부의 위협 앞에서 지극히 취약했다.

패주 체제는 바로 이 공백에서 자라났다.

첫 패주는 제 환공이었다. 그는 천자가 마땅히 해야 하지만 이제는 할 수 없게 된 일을 했다.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열고, 연합 군사행동을 조직하며, 제후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했다. 내건 구호는 ‘존왕양이(尊王攘夷)’였다. 주 천자의 명목상 권위를 받들고, 만이의 실질적 위협을 물리친다는 뜻이었다.

이 구호 자체가 정교하게 짜인 정치적 언어였다. ‘존왕’은 천자의 실권을 정말로 되살리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천자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겠다는 뜻이었다. 제 환공,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제후들을 불러 모으는가? 무슨 자격으로 남들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가? 천자가 너무 약하니 내가 천자를 대신해 나서는 것이다. 천자의 명목상 권위가 패주의 허가증이 되었다.

‘양이’는 현실에서 쓸모를 발휘한다는 정당성을 제공했다. 나는 천자의 깃발만 내걸고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유용한 일을 한다. 모두를 모아 외적에 맞서게 한다. 명분만으로 부족한 부분을 기능으로 채운 것이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패정(覇政)은 새로운 구축이 아니었다. 임시 대체품이었다. 원래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 기본 기능은 제공하되 원래의 설계는 바꾸지 않는, 일종의 시스템 패치였다.

패정에는 독자적인 제도적 기반이 없었다. 패주 개인의 힘과 명망에 전적으로 기대었다. 제 환공이 살아 있을 때는 체계가 돌아갔다. 환공이 죽자 다섯 아들이 자리를 다투고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났으며, 패업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관중이 사민분업과 국비제 같은 제나라의 내정 개혁을 설계하기는 했지만, 그 개혁은 제나라 안에서만 유효했다. 국제체제 전체로 넓힐 수는 없었다.

패주의 자리는 진 문공(晉文公)이 이어받았다. 이후 진(晉)나라의 패정은 1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제나라보다 오래갔다. 진나라의 군주 개개인이 제 환공보다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진나라가 준제도화된 패정의 장치, 곧 육경제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군사·정치적 결정은 군주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지 않았다. 여섯 경족의 집단적 의사결정으로 이루어졌다. 그 덕분에 진나라의 패정에는 제도적 두께가 어느 정도 생겼고, 군주 한 사람이 죽었다고 곧바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육경제도 자체가 나중에는 진(晉)나라의 치명적인 잔여항이 되었다. 경족들이 비대해져 끝내 세 가문이 진나라를 나누어 가졌다. 패주는 경족을 통해 자신의 패정을 제도화했는데, 경족은 결국 자신들의 독립을 제도화했다. 해법이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또다시 잔여항 보존이다.

3. 예가 무너지고 악이 허물어지다: 증발의 구체적인 모습

‘예괴악붕(禮壞樂崩)’, 예와 악이 무너졌다는 이 네 글자는 너무 자주 쓰인 나머지 오히려 구체적인 뜻을 잃었다. 이 과정을 이해하려면 세부를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증발: 참월이 일상이 되다.

주례는 천자에게는 팔일무, 제후에게는 육일무, 대부에게는 사일무를 허용했다. 그런데 노나라 대부 계씨가 자기 집에서 팔일무를 올렸다. 공자는 분노했다. “여덟 줄의 춤을 자기 뜰에서 추게 하다니,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는가!”

공자의 분노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분노가 이 일이 이미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계씨가 감히 팔일무를 쓴 것은 규칙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규칙을 집행할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누가 계씨를 벌할 것인가? 노나라 군주인가? 군주 자신이 이미 계씨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주 천자인가? 천자는 자기 밥값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참월을 저질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예외에서 선례로 바뀐다. 선례가 일정한 수만큼 쌓이면 새로운 일상이 된다. 모든 대부가 육일무, 심지어 팔일무를 쓰는 판이라면 사일무를 쓰는 쪽이 오히려 ‘손해’다. 분수를 넘지 않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약함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예의 논리가 완전히 뒤집힌다. 예를 지키는 것이 원래는 고귀함의 표지였다면, 이제는 나약함의 표지가 된다.

두 번째 증발: 조근이 끊기다.

제후가 정기적으로 천자를 찾아뵙는 조근은 봉건제의 핵심 의례 가운데 하나였다. 조근은 체면을 세워 주는 행사가 전부가 아니었다. 제후가 천자에게 자신의 신하 됨을 확인하는 행위였고, 의례를 통해 권력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일이었다.

춘추시대에는 조근의 빈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노나라는 모든 제후국 가운데 주례를 가장 독실하게 받드는 나라였다. 주공에게 봉해진 나라여서 주례를 가장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노나라조차 춘추 중·후기에 이르면 군주가 천자에게 조근하는 횟수가 거의 0으로 떨어졌다.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제후들이 버릇없어져서가 아니었다. 조근의 비용과 이익이 달라진 것이다. 낙읍까지 가서 조근하려면 시간과 자원이 든다. 얻는 것은 명목상의 인정뿐이다. 그런데 그 인정은 실제 정치적 힘겨루기에서 갈수록 값어치가 떨어졌다. 제나라가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들을 복종시킬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낙읍까지 달려가 천자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의례가 멈춘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의례는 권력 관계를 무대에 올리는 공연이다. 그 밑에 놓인 권력 관계가 달라져 천자가 더 이상 최강자가 아니게 되면, 공연은 설득력을 잃는다. 모두가 가짜임을 아는 공연에 시간과 돈을 쓰고 싶어 할 사람은 없다.

세 번째 증발: 정벌을 제각기 결정하다.

주례에 따르면 제후 사이의 전쟁에는 천자의 허가나 중재가 필요했다. “예악과 정벌이 천자에게서 나온다.” 이것이 이상적인 상태였다.

춘추시대가 되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에게서 나온다.” 공자는 이를 비판하는 어조로 말했지만, 현실이 그랬다. 제후들은 천자의 동의를 전혀 구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고, 전쟁의 결과도 천자의 중재에 맡기지 않았다. 천자는 심판에서 관객으로 바뀌었다. 아니, 관객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전쟁은 천자가 일어난 줄도 몰랐으니까.

춘추 후기에는 한 단계 더 내려가 “예악과 정벌이 대부에게서 나온다.” 제후가 천자의 말을 듣지 않는 데 그치지 않았다. 경대부도 제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노나라의 삼환, 곧 맹손·숙손·계손 세 대부 가문은 노나라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진(晉)나라의 육경은 나라의 군사와 외교를 실제로 장악했다. 권력을 실질적으로 쥔 자는 천자에서 제후로, 제후에서 대부로, 대부에서 가신으로 계속 내려갔다.

공자가 본 것은 세 단계의 하강이었다. 그의 묘사는 대단히 정확했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예악과 정벌이 천자에게서 나오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에게서 나온다. 제후에게서 나오면 대개 열 대 안에 그 권력을 잃지 않는 경우가 드물고, 대부에게서 나오면 다섯 대 안에 잃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배신이 나라의 명을 쥐면 세 대 안에 잃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여기서 배신(陪臣)은 제후의 신하를 섬기는 가신이다.

이 말에는 도덕적 비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에 대한 통찰도 담겨 있다. 권력이 아래로 내려가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천자에서 제후로 내려가는 데는 약 열 세대, 곧 서주 전체가 걸렸다. 제후에서 대부로 내려가는 데는 다섯 세대 정도, 곧 춘추 전·중기가 걸렸다. 대부에서 가신으로 내려가는 데는 세 세대 정도, 곧 춘추 후기가 걸렸다. 가속도마저 점점 커진다.

왜 빨라지는가? 한 단계 내려갈 때마다 권력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천자의 권력은 예악제도 전체가 보호하므로 천천히 침식된다. 제후를 보호하는 장치는 천자의 것보다 약하다. 제후의 위계적 정당성은 천자의 책봉에서 나오므로 천자의 가치가 떨어지면 책봉의 가치도 떨어진다. 따라서 제후의 권력은 조금 더 빨리 침식된다. 대부의 권력을 보호하는 장치는 더 약해서 침식도 더 빠르다. 아래로 갈수록 방벽이 얇아지니 뚫리는 데 걸리는 시간도 짧아진다.

4. 정 장공: 천자에게 처음으로 공개 도전한 인물

예괴악붕의 출발점이 된 인물을 한 명 꼽는다면 정 장공이 가장 적합하다.

정나라는 특이한 제후국이었다. 서주 말기에야 분봉되었으며, 오늘날 하남(河南)성 중부에 자리해 낙읍과 매우 가까웠다. 천자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정나라 군주는 대대로 주 왕실의 경사(卿士)를 맡았다. 천자의 최고 행정관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이로써 정나라는 독립된 제후국인 동시에 왕실의 내신이라는 이중 신분을 누렸다.

정 장공은 기원전 743년부터 기원전 701년까지 재위한, 활력과 야심이 넘치는 정치가였다. 그는 먼저 국내에서 동생 공숙단의 반란을 평정했다. 이 사건 자체가 형제 사이의 왕위 계승 다툼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장공의 어머니는 동생을 편애해 맏이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우려 했다. 수십 년 전 유왕이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려 했던 것과 구조가 똑같았다. 다만 무대가 제후국이었을 뿐이다. 주 왕실의 내부 분쟁이 정나라에서 작은 규모로 한 번 더 재현된 것이다. 이는 어느 군주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가하는 압력 아래 종법제 전체에 생기는 균열임을 보여 준다. 집안일을 평정한 장공은 이제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장공과 주 환왕 사이에 충돌이 터졌다. 직접적인 원인은 장공이 더 이상 조근하지 않자 환왕이 그를 벌하려 한 것이었다. 양쪽은 수갈(繻葛)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주 천자 군대의 대패였다. 환왕 자신도 어깨에 화살을 맞았다.

그 화살이 꿰뚫은 것은 환왕의 어깨만이 아니었다. 천자에게는 도전할 수 없다는, 200여 년 동안 이어진 정치적 환상까지 꿰뚫었다.

전쟁 뒤 장공의 행동을 눈여겨보자. 그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지 않았고, 주 왕실의 영지에 쳐들어가지도 않았으며, 밖에 대고 지나치게 자랑하지도 않았다. 부상당한 천자에게 사람을 보내 공손한 태도로 ‘문안’했다. 그 행동이 전하는 뜻은 이랬다. 나는 당신의 명목상 지위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실질적 권위가 내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두라. 이름은 당신이 갖고, 실속은 내가 갖는다.

이것이 춘추 정치의 기본 규칙이었다. 주 천자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도덕적 대가가 너무 컸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서는 모두가 그 정당성을 무시했다. 이름과 실질이 완전히 갈라졌다. 천자는 상표가 되었다. 브랜드는 남아 있는데 회사는 이미 파산한 것이다.

정 장공이 이 길을 열었고, 뒤이어 등장한 제 환공과 진 문공, 초 장왕은 같은 논리를 더 큰 규모로 되풀이했을 뿐이다. 환공은 ‘존왕양이’를 내걸었고, 진 문공은 천토에서 회맹을 열었으며, 장왕은 왕권을 상징하는 솥 정(鼎)의 무게를 물었다. 방식은 달라도 구조는 같았다. 천자의 이름을 빌려 천자의 실권을 행사한다. 많이 빌려 갈수록 천자 자신에게 남는 것은 줄어든다.

5. 초나라: 구축 바깥에서 밀려온 도전

춘추시대의 또 다른 중대한 변수는 초나라였다.

초나라는 주의 봉건체제 안에 있었지만, 그 맨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초인의 시조 육웅(鬻熊)은 일찍이 문왕의 스승이었고, 주 성왕 때 웅역(熊繹)이 초에 봉해졌다. 받은 작위는 자(子), 다섯 등급 가운데 네 번째로 매우 낮은 지위였다. 춘추 초기에 이미 영토와 국력이 중원의 대다수 제후국을 넘어선 나라에는 터무니없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훗날 초 무왕이 되는 웅통이 즉위한 뒤, 초나라는 이미 남방의 최강국이었다. 그는 수(隨)나라를 통해 주 왕실에 작위를 올려 달라고 청했다. 주례의 논리대로라면 작위는 실력과 공적, 영토에 대략 걸맞아야 했으므로 더없이 합당한 요구였다. 주 왕실은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초나라의 작위 승격을 허용하는 순간 오등작제 전체에 틈이 열린다. 다른 강력한 제후들도 자신의 지위를 다시 평가하라고 요구할 것이고, 위계질서 전체가 새 판을 짜라는 압력에 노출된다. 주 왕실은 초나라 하나의 원한을 사는 한이 있어도 체계 전체의 안정성은 흔들고 싶지 않았다.

웅통은 유명한 여덟 글자로 응수했다. “왕불가위, 아자존이(王不加位,我自尊耳).” 왕이 지위를 올려 주지 않으니 내가 스스로 높이겠다는 말이다. 당신이 주지 않으면 내가 나에게 주겠다. 그는 스스로 왕을 칭했다. 훗날 초 무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왕’은 천자만 쓸 수 있는 칭호였으므로 제후가 써서는 안 되었다. 정면에서,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던진 도전이었다.

이 과정의 구조적 의미는 이렇다. 초나라는 구축 내부의 도전자에서 외부의 도전자로 바뀌었다. 그 전환을 밀어붙인 것은 주 왕실 자신의 경직성이었다. 왕실이 유연하게 승작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초나라는 제나라나 진(晉)나라처럼 계속 구축 안에서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 왕실은 교조를 택했다. 오등작제를 글자 그대로 온전히 지키겠다는 선택이었다. 그 대가로 원래는 구축 안에서 길들일 수 있었던 강대국 하나를 바깥으로 밀어냈다.

체계의 엄격함이 때로는 체계의 적이 된다. 규칙을 만들 때 전제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태 앞에서, 지나치게 경직된 규칙은 유연하게 조정되지 못한다. 그 대가는 규칙 전체가 통째로 버려지는 것이다. 이 교훈은 뒤에도 거듭 나타난다. 옛 제도를 내세운 왕망의 개혁, 명나라 후기의 은 유입 대처, 청나라가 통상 요구를 처리한 방식 모두 비슷한 구조다. 초 무왕이 스스로 왕을 칭한 일은 이런 실패 양식이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펼쳐진 장면이었다.

이때부터 초나라는 구축 바깥의 존재가 되었다.

이 도전의 성격은 정 장공의 것과 달랐다. 정 장공은 구축 내부의 도전자였다. 안에서 움직이며 그 자원을 활용하되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초나라는 구축 외부의 도전자였다. 이 구축의 관할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 질서를 세우려 했다.

바깥의 도전은 안의 도전보다 더 치명적이다. 내부의 도전자는 아무리 규칙을 어겨도 여전히 구축의 언어를 쓴다. 정 장공은 천자에게 화살을 날린 뒤에도 ‘문안’을 해야 했고, 제 환공은 패주가 되면서도 ‘존왕’의 깃발을 내걸어야 했다. 외부의 도전자는 당신의 언어조차 쓰지 않는다. 초인들이 왕을 칭하고, 다른 나라들을 멸하고, “중원의 호칭과 시호를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모두 같은 말을 하는 셈이다. 당신네 방식은 나와 상관없다.

초나라의 존재는 중원 여러 나라가 원래는 하고 싶어 하지 않던 일을 강요했다. 단결이었다. 제 환공의 ‘양이’가 호소력을 얻은 데에는 초나라가 북상해 온다는 압박이 실제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초나라의 위협이 없었다면 중원 나라들끼리 벌이는 내분이 주공의 체계를 더 일찍, 더 철저하게 허물었을 것이다. 외부의 위협이 구축의 수명을 늘렸다. 구축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는 당장 내부 싸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초나라의 도전은 다른 차원에서 구축의 토대도 침식했다. 주공의 체계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질서가 아님을 입증한 것이다. 초나라에는 자체 제도가 있었다. 초나라는 현제를 가장 일찍 사용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진(秦)나라보다 훨씬 앞섰다. 왕족 중심의 정치와 중원과는 다른 문화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이것들은 꽤 잘 돌아갔다. 춘추의 여러 나라 가운데 초나라의 영토 확장 속도가 가장 빨랐고, 멸망시킨 작은 나라의 수도 가장 많았다.

대안적인 질서가 존재하고 제대로 작동하기까지 하면, 옛 질서의 당연해 보이던 정당성은 흔들린다. 이제 “예악과 봉건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조직 방식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남쪽에는 그 방식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 갈수록 강해지는 나라가 있으니까.

초나라는 주공의 체계가 내쫓은 잔여항이었다. 원래는 구축 안에 있었으나 체계 자신의 경직성 때문에 밖으로 밀려난 존재였다. 체계는 초나라를 소화하지 못했다. 도리어 자신의 토대를 갉아먹는 외부 세력으로 만들어 버렸다.

6. 관중: 최초의 실용주의 정치공학자

주공이 이상주의적 구축 설계자였다면 관중은 실용주의 기술자였다. 주공에게는 청사진이 먼저이고 건물이 나중이었다. 관중에게는 문제가 먼저이고 해법이 나중이었다.

관중은 제 환공을 도와 패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공헌은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제나라의 내정 개혁에 있었다. 그 개혁에는 몇 가지 핵심 요소가 있었다.

사민분업. 사농공상이 저마다 정해진 곳에 살게 했다. 이는 흔히 말하는 직업 분류가 아니라 사회 통제 기술이었다. 직업에 따라 사람들을 특정 거주 구역에 붙들어 두고 서로 떼어 놓아 관리하기 쉽게 만든 것이다. 사(士)는 사끼리, 농민은 농민끼리, 장인은 장인끼리, 상인은 상인끼리 살았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 살게 하면 기술과 경험이 세대 사이에 효율적으로 전해진다. 동시에 계층을 넘나드는 이동은 제한된다.

국비제(國鄙制). 도성과 그 가까운 근교를 아우르는 국(國), 먼 교외의 농촌인 비(鄙)에 서로 다른 관리체제를 적용했다. 국인에게는 군역 의무와 정치적 권리가 있었고, 비인에게는 노동의 의무만 있었다. 이는 차등을 둔 관리였다. 핵심 지역에는 많이 투입하고 강하게 통제하며, 주변 지역에는 적게 투입하고 약하게 통제했다.

염철전매. 국가가 소금과 철의 생산·판매를 독점했다.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체계적인 국가 전매경제였다. 이는 재정정책만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였다. 소금과 철을 통제하면 모든 사람의 일상에 필요한 물자를 통제하게 되고, 국가가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하는 힘도 크게 늘어난다.

이 개혁들을 한데 놓고 보면 관중이 한 일은 주공이 한 일과 성격이 다르다. 주공은 윤리를 핵심에 둔 질서를 설계했다. 사람들이 예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중은 기능을 핵심에 둔 체계를 설계했다. 동의하든 말든, 체계의 설계 자체가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주공의 구축은 사람의 도덕적 자각에 의존했다. 관중의 구축은 제도의 강제력에 의존했다. 구축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전혀 다른 두 철학이었다.

관중은 자신의 이론을 명확한 형태로 남기지 않았다. 《관자》의 대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천은 훗날 법가의 핵심 발상을 열었다. 사람의 도덕성에 희망을 걸지 말고, 규칙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체계를 설계하라. 상앙의 변법과 한비의 이론도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순환 법칙의 관점에서 관중은 구축의 패러다임 전환이 싹튼 지점을 대표한다. 옛 패러다임인 주공 모델은 윤리적 구축이다. 질서는 공유된 가치관 위에 서 있다. 새 패러다임인 관중 모델은 기능적 구축이다. 질서는 이익의 계산과 제도의 강제 위에 서 있다. 춘추시대에는 두 패러다임이 공존했고, 관중의 모델은 아직 완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새 패러다임이 전면적으로 확산되어 마침내 진(秦)나라에서 극단에 이른다.

그러나 관중의 해법에도 나름의 잔여항이 있었다. 기능적 구축은 사람을 복종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질서에 공감하게 만들 수는 없다. 복종은 계산할 수 있다. 이익이 비용보다 크면 복종하고, 비용이 이익보다 크면 저항한다. 따라서 기능적 구축의 안정성은 그 비용과 이익의 비율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린다. 국가가 이익을 꾸준히 제공하거나 처벌을 꾸준히 가할 능력을 잃는 순간, 복종은 곧바로 무너진다. 기능적 구축에는 완충지대가 없다. 윤리적 구축에는 적어도 관성이 있다. 더 이상 지키는 것이 이롭지 않아도 사람들은 관성 때문에 한동안 계속 지킨다. 기능적 구축에는 그런 관성이 없다. 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복종도 사라진다.

제 환공이 죽은 뒤 제나라의 패업이 급속히 무너진 것은 이 약점을 부분적으로 입증했다. 관중이 설계한 체계는 관중이 살아 있는 동안 대단히 잘 돌아갔다. 그러나 관중이 죽고 환공마저 죽자, 체계는 곧바로 운용자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주공의 체계와 똑같은 약점이었다. 드러나는 방식만 달랐다.

7. 춘추의 본질: 구축의 상전이

깎아내기와 구축의 순환 법칙에서 춘추시대가 차지하는 자리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상전이(相轉移)다.

물리학에서 상전이란 물질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기체가 되는 것이다. 상전이의 특징은 전환이 끝나기 전까지 두 상태가 공존한다는 데 있다. 얼음물에는 얼음도 있고 물도 있다. 그러나 안정된 상태는 아니다. 온도가 계속 오르면 얼음은 마침내 전부 물이 된다.

춘추는 중국 정치의 얼음물 상태였다. 봉건제와 예악제, 종법제라는 옛 구축은 얼음이었다. 제후의 자립, 대부의 권력 독점, 기능주의적 통치라는 새로운 정치 현실은 물이었다. 둘은 같은 그릇 안에서 300년 가까이 공존했다.

공존했다고 평화롭게 어울렸던 것은 아니다. 옛 구축은 계속 녹았고 새 현실은 계속 넓어졌다. 다만 녹는 속도가 고르지 않았다. 큰 군사 충돌 뒤에는 빨랐고, 강력한 패주가 질서를 유지하는 시기에는 느렸다. 녹아 가는 양상도 지역마다 달랐다. 정나라나 진(晉)나라처럼 모순이 집중된 곳에서는 빨랐고, 노나라처럼 의식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지킨 곳에서는 느렸다.

상전이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전환이 끝나기 전까지 새 상태의 논리로 옛 상태의 잔존물을 이해할 수 없고, 옛 상태의 논리로 새 상태의 싹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춘추시대의 많은 정치적 행동이 모순되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제를 파괴하면서 한편으로는 예제를 존중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두 상태를 동시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위선자가 아니라 얼음물이었다. 일부는 이미 녹았고, 일부는 아직 고체로 남아 있었다.

공자는 이 얼음물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체현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상은 고체였다. 주례를 회복하려 했다. 그의 관찰은 액체였다. 주례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의 실천은 둘의 혼합이었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상을 놓지 않았다. 공자의 고통은 얼음과 물을 동시에 보았다는 데서 나왔다. 얼음이 물로 변하고 있음을 알았고, 이 과정이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얼음이 물이 되어야 한다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한다.” 보통은 도덕적 용기를 가리키는 말로 읽는다. 그러나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구축이 상전이를 겪는 동안 마지막 수호자가 내는 목소리다. 그는 상전이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이성적이어서가 아니라 얼음과 물 사이에서 얼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유가 2천 년의 기조를 규정했다. 안 될 줄 뻔히 알면서도 행한다. 구축을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어지는 순간 상전이는 통제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8. 춘추가 전국에 남긴 유산

춘추가 끝났을 때, 대략 기원전 476년 무렵, 혹은 세 가문이 진(晉)나라를 나눈 일을 경계로 잡아 기원전 453년 무렵에 무엇이 남았을까?

첫째, 이름과 실질이 분리된 정치문화.

주 천자는 여전히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제후의 봉호는 남아 있었지만 실권은 경대부의 손에 있을 수 있었다. 경대부의 명분은 남아 있었지만 실제 결정은 가신이 내릴 수 있었다.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층위에서 이름과 실질이 갈라져 있었다.

이 분리는 정치문화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이후 중국 정치는 ‘이름’과 ‘실질’의 구별에 몹시 민감해졌다. ‘정명(正名)’, 곧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 정치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공자가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한 것도 명실이 극도로 뒤섞인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이후 2천 년 동안 정치이론의 상당 부분은 이름과 실질의 관계를 논했다.

둘째, 여러 구축 유형이 공존한 경험.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은 서로 다른 통치 방안을 시도했다. 제나라의 관중 모델, 진(晉)나라 육경의 집단 의사결정 모델, 초나라의 현제와 왕족 정치, 정나라 자산의 법치 실험인 형서 주조는 모두 서로 다른 구축 유형이었다. 이들은 경쟁하면서 서로를 관찰하고, 배우고, 탈락시켰다.

여러 구축 유형이 공존했던 경험은 전국시대의 전면적인 제도 혁신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했다. 전국시대 개혁자들은 새 제도를 맨바닥에서 설계하지 않았다. 참고할 수 있는 춘추 300년의 실험 데이터가 있었다. 상앙의 변법도 허공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초나라의 현제, 제나라 관중의 개혁, 정나라 자산의 형서 주조 같은 선행 실험들을 종합해 극단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셋째,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이론의 공백.

주공의 체계는 이미 효력을 잃었는데, 그것을 대신할 새 체계는 없었다. 춘추는 ‘옛것은 이미 죽었고 새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중간 시기였다. 이 간극은 이론에 대한 막대한 수요를 낳았다. 주공의 방안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안이 통하는가?

백가쟁명은 그 수요에 대한 응답이었다. 유가·법가·묵가·도가·명가·병가·농가·종횡가. 이 학파들의 등장은 우연히 지식이 폭발한 사건이 아니었다. 정치적 공백이 낳은 지적 수요가 이 학파들을 불러낸 것이다. 옛 구축이 죽고 새 구축이 아직 서지 않은 때에는 ‘질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답이 제시되고, 토론되고, 시험될 기회를 얻는다.

백가쟁명은 상전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열운동이었다. 물이 고체에서 액체로 바뀌는 과정에서 분자들이 격렬하게 움직이듯, 옛 구축이 새 구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는 사상도 격렬하게 움직인다. 새 구축이 확립되는 순간, 곧 진(秦)의 통일 뒤에는 열운동도 억눌린다. 분서갱유가 그것이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창은 상전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만 열린다.

넷째, 핵심 교훈 하나: 구축의 연성 통제에는 한계가 있다.

주공의 예악제도는 인류 정치사에서 가장 정교한 연성 통제 체계 중 하나였다. 폭력이 아니라 문화와 윤리, 의례에 의존했다. 군대를 동원해 집행할 필요가 없으므로 운용 비용은 매우 낮았다. 하지만 효력이 지속되는 기간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해관계의 충돌이든, 혈연의 희석이든, 세대를 거치며 약해지는 결속이든, 참여자들이 더 이상 마음으로 이 체계에 동의하지 않는 순간 연성 통제는 작동하지 않는다.

전국시대와 진나라의 방향 전환은 이랬다. 연성 통제로 부족하다면 경성 통제를 더하자. 법률과 형벌, 관료체계, 군공작제는 모두 경성 통제의 도구였다. 이 도구들은 마음속 동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거나 욕심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연성 통제가 실패했다고 해서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쓸 수 있는 조건이 있다는 뜻이다. 체계의 규모가 작고, 참여자 사이에 실질적인 공동체 의식이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공동체 의식이 희석되므로, 연성 통제를 경성 통제로 보완해야 한다.

후대의 가장 성공적인 정치체계는 부드러운 통제와 강제적인 통제를 함께 썼다. 한나라가 유가와 법가를 병용한 것이 한 예다. 유가의 예교는 연성 통제였고, 법가의 형벌은 경성 통제였다. 부드럽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춘추가 입증했다. 강제 일변도로도 안 된다는 것은 곧 진나라가 입증할 것이다.

다음 편은 전국이다. 일곱 나라가 공존하며 일곱 구축 유형이 동시에 경쟁한다. 질서정연한 실험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탈락전이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것은 가장 좋은 구축 유형이 아니라 가장 극단적인 구축 유형이었다. 그 극단의 대가는 진나라에 이르러서야 치러진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