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전국시대 일곱 가지 체제 유형의 생존 토너먼트
춘추시대는 상전이의 시기였다. 얼음이 물로 변하고 있었지만, 얼음은 아직 남아 있었다. 주나라 천자는 여전히 낙읍에 있었고, 제후들은 주례의 남은 조각으로 자기 행동을 꾸몄다. 명분의 질서는 속이 비었을지언정 공식적으로 폐기되지는 않았다.
춘추시대는 상전이의 시기였다. 얼음이 물로 변하고 있었지만, 얼음은 아직 남아 있었다. 주나라 천자는 여전히 낙읍에 있었고, 제후들은 주례의 남은 조각으로 자기 행동을 꾸몄다. 명분의 질서는 속이 비었을지언정 공식적으로 폐기되지는 않았다.
전국시대는 상전이가 끝난 뒤의 새로운 상태였다. 얼음은 모두 물이 되었다. 이제 아무도 시늉하지 않았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세 가문에 의한 진(晉)의 분할과 전씨의 제나라 왕실 교체였다. 기원전 453년 한·조·위 세 가문이 지씨를 멸망시켰고, 기원전 403년 주나라 천자는 그 세 가문을 정식 제후로 인정했다. 기원전 386년에는 전화(田和)를 제후(齊侯)로 인정했다. 두 사건의 성격은 같았다. 경대부가 군주를 대신하고, 신하가 주인이 되었다. 혁명이나 전쟁으로 군주를 쓰러뜨린 것도 아니었다. 군주가 명목상 살아 있는 동안, 현실의 권력 찬탈이 법리상의 계승을 밀어냈다.
주나라 천자는 이 모든 일을 인정했다. 인정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인정 자체가 주공의 체계에 내려진 공식적인 사망 선고였다. 주공의 종법제에서 대종은 다른 계통이 대신할 수 없고, 소종은 자기 분수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런데 진나라의 분할과 전씨의 왕실 교체는 소종이 대종을 대신하고 가신이 군주를 대신한 사건이었다. 천자가 이를 인정했다는 것은 자신이 세운 제도의 사망진단서에 제 손으로 서명한 셈이었다.
옛 구축물은 죽었다. 새 구축물은 아직 서지 않았다. 전국시대 250년은 그 자리에 들어설 새 구축물을 놓고 벌어진 입찰 과정이었다.
1 입찰의 규칙은 전쟁
춘추시대의 전쟁에는 아직 예라는 겉옷이 걸쳐져 있었다. 송 양공은 홍수(泓水) 전투에서 강을 절반쯤 건너는 적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후대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춘추시대 초기의 맥락에서 그의 행동이 황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전쟁에도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끼리의 싸움은 너 아니면 내가 죽어야 하는 섬멸전이 아니라 규칙을 갖춘 겨루기였다. 전차로 싸우고, 날짜를 정하고, 치사(致師), 곧 말을 탄 전사 하나가 나서서 도전하는 의식을 치르고, 도망가는 적을 쫓지 않고, 항복한 자를 죽이지 않았다. 춘추 후기에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규칙들이지만, 어쨌든 그런 규칙이 존재하기는 했다.
전국시대에는 이 규칙들이 전부 사라졌다. 전쟁은 철저한 섬멸전으로 바뀌었다. 목표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이었다. 백기는 장평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40만 명을 생매장했다. 춘추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춘추시대 사람들이 더 착해서가 아니다. 그 시대 전쟁의 논리에는 섬멸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후 하나를 이겨도 그는 여전히 제후였고, 그의 영지는 여전히 그의 것이었다. 당신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시키면 그만이었다. 전국시대는 달랐다. 한 나라를 꺾었다면 그 땅과 인구와 자원까지 가져야 했다. 상대를 남겨 둔다는 것은 언제든 반격할 적을 남겨 두는 일이었다. 섬멸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낳았는가? 체제 유형 간의 경쟁이 평화공존에서 제로섬 게임으로 바뀐 것이다.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은 오랫동안 공존할 수 있었다. 주나라 천자의 명목상 권위가 최소한의 질서 틀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모두 같은 체계의 구성원이었다. 천자의 말을 안 들을 수는 있어도 다른 제후국을 아예 없애 버리지는 않았다. 물론 춘추시대에도 나라가 멸망하는 일은 있었다. 다만 대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없앴고, 강대국끼리는 기본적으로 서로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전국시대에는 그 틀이 사라졌다. 강대국들이 서로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을 상위의 권위가 없었다. 모든 나라가 알고 있었다. 내가 강해지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안보 딜레마는 모든 국가가 처한 기본 조건이 되었다. 그런 조건에서는 모든 제도 개혁이 하나의 목표를 향한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이다.
전국시대 변법의 물결을 밀어 올린 힘이 바로 이것이었다. 어느 현자가 갑자기 기발한 생각을 떠올린 것이 아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력이 모든 나라에 자기 체제의 설계를 다시 하라고 강요했다. 개혁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개혁해도 멸망할 수 있지만, 적어도 한 가닥 살길은 생긴다.
이 탈락전에서는 일곱 강국과 몇몇 작은 나라가 저마다 다른 체제를 동시에 가동했다. 그 경쟁은 학술 토론이 아니라 실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생사의 승부였다. 패자의 운명은 논문 게재 거절이 아니었다. 나라가 무너지고 집안이 망하는 것이었다.
2 일곱 가지 체제 유형
일곱 나라의 체제를 대략 훑어보자. 모든 나라가 명료하고 일관된 설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개혁한 나라가 있었고, 거의 손대지 않은 나라도 있었고, 고쳤다가 다시 고친 나라도 있었다. 그래도 몇 가지 큰 노선은 구별할 수 있다.
위(魏)나라: 가장 먼저 개혁했지만 끝까지 가지 못했다.
위 문후가 이회를 등용해 추진한 변법은 전국시대 첫 번째 대규모 개혁 사례였다. 이회의 개혁에는 농업 생산 효율을 높이는 ‘진지력지교(盡地力之教)’,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성문법전인 《법경》 편찬, 그리고 ‘먹을 것은 노동에 따라, 녹봉은 공적에 따라’라는 원칙이 들어 있었다. 혈통이 아니라 공적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겠다는 것이었다. 오기는 위나라에서 정예 보병인 ‘위무졸’을 길러 냈다.
위나라가 택한 것은 온건한 기능주의적 개혁이었다. 옛 귀족의 이해관계는 대부분 그대로 두고, 그 가장자리에 법에 의한 통치와 공적 중심의 제도를 도입했다. 장점은 개혁에 대한 저항이 작다는 것이었다. 기존 귀족을 완전히 쓸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점은 개혁이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귀족은 여전히 요직을 차지했고, 공적에 따라 보상하는 제도가 적용되는 범위도 제한적이었다.
위나라는 전국시대 초기에 패권을 잡았지만 중기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사방에서 공격받는 지리적 위치를 비롯해 이유는 여럿이었으나, 체제 개혁의 불철저함도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절반은 새것이고 절반은 옛것인 시스템이었다. 새 부분은 단기적인 우위를 주었고, 옛 부분은 장기적인 잠재력을 가로막았다. 인재도 붙잡지 못했다. 오기는 초나라로, 상앙은 진(秦)나라로, 손빈은 제나라로 갔다. 인재가 실력을 충분히 펼칠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는 시스템은 경쟁국에 인재를 수출하게 된다.
초나라: 귀족 중심 구축물의 마지막 보루.
초나라에서는 대귀족들이 권력을 나눠 가졌다. 초 왕실의 방계인 굴·경·소 세 가문이 주요 권력과 자원을 독점했다. 초왕의 권력은 이 대귀족들에게 심하게 제약받았다.
오기가 초나라로 가자 초 도왕은 그의 변법을 지원했다. 오기의 개혁 방향은 훗날 진나라에서 활동할 후배 상앙과 같았다. 귀족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어땠는가? 도왕이 죽자 귀족들은 도왕의 관 앞에서 오기를 활로 쏘아 죽였다. 개혁은 곧바로 폐기되었다.
초나라의 이야기는 구축물 내부의 개혁이 실패한 전형적인 사례다. 개혁자의 진단은 옳았다. 귀족들이 권력을 나눠 가진 구조가 국가 역량을 제한하고 있었다. 처방도 옳았다. 귀족을 약화하고 왕실에 권력을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개혁의 추진력은 개혁을 지지하는 왕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왕이 죽자 이익집단이 곧바로 반격해 개혁을 죽였다.
이는 반경이 은으로 천도한 이야기의 교훈과도 통한다. 구축물 내부의 개혁이 권력 구조 자체에 닿지 못하면 수명을 늘릴 수는 있어도 운명을 바꾸지는 못한다. 오기의 개혁이 뿌리내리려면 한 세대가 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초나라의 권력 구조는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혁자는 이익집단이 반격하는 속도를 앞지를 수 없었다.
초나라는 그 뒤로 다시는 체계적인 개혁을 하지 않았다. 거대한 덩치와 남방의 넓은 전략적 종심에 기대어 오래 버텼지만, 진나라와 벌인 마지막 대결에서 귀족 분할 통치 구조는 영토의 크기에 걸맞은 국력을 동원하지 못했다. 크지만 강하지 않고, 많지만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귀족 중심 구축물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제나라: 학문의 자유와 정치적 보수성이 기묘하게 공존했다.
제나라에는 전국시대 최대의 학문 자유 지대인 직하학궁이 있었다. 유가·법가·도가·음양가·명가의 학자들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토론했다. 국가의 부양을 받되 정치적 의무는 지지 않았다. 인류 역사상 ‘학문의 자유’를 제도로 실험한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제나라 정치체제 자체의 개혁 폭은 크지 않았다. 전씨가 제나라 왕실을 대신한 뒤 국내 정치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그만큼 보수적이기도 했다. 위나라의 이회 변법도, 진나라의 상앙 변법도 없었다. 제나라 국력의 주된 바탕은 제도 개혁이 아니라 경제였다. 소금과 철에서 나오는 이익, 그리고 번성한 상업이었다.
직하학궁은 제나라 통치자가 독특한 체제 구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학문을 개방해 인재와 명성을 끌어오되, 학문적 성과가 곧바로 정치 개혁이 되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일종의 ‘싱크탱크 모델’이었다. 최고의 두뇌들을 먹여 살리되 운전대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장점은 사회의 자유도가 높고 사상이 번창한다는 것이었다. 단점은 좋은 아이디어가 논문 수준에만 머문다는 것이었다. 그 시대에 논문이라는 게 있었다면 말이다. 아이디어는 운영체제로 들어가지 못했다.
제나라 체제는 경제 주도, 학문의 자유, 정치적 보수성의 조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평화로운 시대라면 가장 편안한 조합이다. 경제는 좋고 문화는 꽃피며 백성의 생활 수준도 높다. 하지만 탈락하면 끝인 경쟁에서 편안함은 치명적이다. 악의(樂毅)가 다섯 나라 연합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제나라는 성 두 개만 남기고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경제적 번영이 그에 걸맞은 군사 동원 능력으로 전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돈은 있었지만, 그 돈을 전쟁 수행 능력으로 바꿀 제도적 통로가 없었다.
조나라: 군사 개혁의 한계.
조 무령왕의 ‘호복기사’는 전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군사 개혁 가운데 하나다. 그는 조나라 귀족들에게 전통적인 넉넉한 도포와 넓은 소매, 전차 전술을 버리게 했다. 대신 북방 유목민의 몸에 붙는 옷을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쏘는 법을 배우게 했다.
개혁은 대성공이었다. 조나라는 빠르게 군사 강국이 되었고, 장평 전투 이전까지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호복기사는 본질적으로 군사 기술의 개혁이었지 제도 개혁은 아니었다. 정치 구조, 사회 조직, 경제 제도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체계적인 개혁이 뒤따르지 않았다. 강한 군대는 있었지만 그 군대를 떠받칠 제도적 토대가 없었다. 병력 보충, 군수 지원, 군공에 따른 상벌 모두 진나라만큼 제도화되지 못했다.
장평 전투의 결말은 그 약점을 드러냈다. 조나라에는 45만 대군이 있었지만, 대치가 길어지자 군수 지원이 따라가지 못했다. 농업 생산량과 비축 식량이 진나라에 크게 못 미쳤다. 결국 장수를 바꾸고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백기에게 포위되어 섬멸당했다. 군사 역량은 앞서갔으나 제도 역량은 뒤처졌다. 균형을 잃은 체제는 극한의 압력 앞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연나라와 한나라: 개혁을 마칠 시간이 없었던 약소국들.
연나라와 한나라는 일곱 나라 가운데 가장 약했다. 한나라는 신불해의 ‘술치(術治)’ 개혁을 했다. 법도 제도도 바꾸지 않고 신하를 다루는 술법만 바꾸는 것이었다. 법가의 한 갈래로, 체계적인 제도 구축보다 군주 개인의 정치적 수완을 중시했다. 술치의 문제는 운영자 개인의 능력에 기대는 모든 방안과 같았다. 사람이 바뀌면 소용없어진다.
연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일은 연 소왕이 황금대를 쌓아 인재를 모으고, 악의를 써서 제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제 환공이 관중을 쓴 것과 구조가 비슷했다. 뛰어난 군주 한 사람과 뛰어난 신하 한 사람에게 크게 의존했다. 두 사람의 조합이 흩어지면 국운도 기울었다.
두 나라는 체제를 한 단계 끌어올리지 못한 채 탈락했다. 이들이 보여 주는 사실은 하나다. 이런 탈락전에서는 개혁하지 않으면 퇴장한다. 옛 체제가 반드시 남의 것보다 나빠서가 아니다. 경쟁 환경이 누구에게도 제자리에 서 있을 자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걷지 않는 것은 당신 자유지만, 남들은 뛰고 있다.
진(秦)나라: 다음 절에서 따로 살펴본다.
3 상앙 변법 가장 극단적인 체제 유형
전국시대의 모든 변법 가운데 가장 멀리, 가장 철저하게 나아간 것은 상앙 변법이었다.
상앙은 위(衛)나라 사람이었다. 그 역시 기존 체제가 밖으로 내보낸 인재였다. 위(衛)나라는 너무 작아서 그를 쓸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위(魏)나라에서 이회의 법가 이론을 배웠고, 그 이론을 들고 진(秦)나라로 갔다. 기원전 361년부터 338년까지 재위한 진 효공은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상앙 변법의 핵심은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전제를 없애고 논밭의 경계를 허물었다.
토지 사유제를 인정한 것이다. 그전까지 토지는 명목상 국가나 봉건 영주의 소유였고, 경작자에게는 소유권이 없었다. 상앙은 토지 매매를 허용하고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했다. 이 칼질은 옛 귀족의 토지 독점을 끊었다. 더는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땅을 저절로 소유할 수 없었다. 평민과 마찬가지로 경작하거나 사들여 땅을 얻어야 했다.
둘째, 군공작제였다.
작위를 스무 등급으로 나누고, 오르내림을 오직 군공으로 결정했다. 적의 목 하나를 베면 한 등급 올라갔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심지어 노예든, 출신은 상관없었다. 전장에서 적의 머리를 베어 오기만 하면 작위와 땅과 특권을 얻을 수 있었다. 반대로 귀족도 군공이 없으면 기존 작위와 특권을 모두 빼앗겼다.
이는 종법제를 뿌리째 뒤집는 일이었다. 종법제의 핵심은 혈연이 신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군공작제의 핵심은 전장에서의 활약이 신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앞의 신분은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귀속적 지위이고, 뒤의 신분은 행동으로 얻어 내는 성취적 지위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보상 체계의 밑바닥 논리가 통째로 뒤집혔다.
셋째, 편호제민이었다.
전국의 인구를 호적에 올리고 다섯 집을 오(伍), 열 집을 십(什)으로 묶었다. 서로 감시하고 연좌로 처벌했다. 한 집에서 죄를 지었는데 이웃이 고발하지 않으면 이웃도 같은 죄로 다스렸다. 극도로 촘촘한 사회 통제망이었다. 모든 사람이 감시당하는 동시에 감시했다. 이웃이 당신의 감시카메라였고, 당신도 이웃의 감시카메라였다.
편호제민은 기존의 혈연 집단인 종족(宗族) 조직을 무너뜨렸다. 상앙 변법 전에는 종족을 매개로 국가와 관계를 맺었다. 개인은 어느 종족의 일원이었고, 종족의 우두머리가 그를 대표해 상급 권력과 상대했다. 편호제민 이후에는 국가가 개별 가구를 직접 상대했다. 중간층이 빠져나갔다. 국가와 개인 사이의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넷째,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눌렀다.
농사와 길쌈을 장려하고 상업을 압박했다. 농업과 직물 생산에 종사하는 가구는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받았다. 상업에 종사하는 가구에는 세금을 더 물렸고, 심지어 강제로 군대에 징집하기도 했다.
정책의 논리는 이랬다. 농업이 식량을 생산하고, 식량이 군대를 먹이며, 군대가 전쟁을 이긴다. 상업은 식량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 데다 상인은 이동이 잦아 통제하기 어렵다. 전쟁을 핵심 목표로 삼은 시스템에서는 전쟁에 직접 봉사하지 않는 모든 활동이 불필요한 여분이며, 억눌러야 할 대상이었다.
다섯째, 도량형을 통일했다.
전국의 길이·부피·무게 기준을 하나로 맞췄다. 흔히 간과되는 개혁이지만 구조적 의미는 앞의 네 가지에 뒤지지 않는다. 도량형을 통일하면 국가는 토지 한 필지의 생산량, 가구 하나의 세금, 군대 한 부대의 군량 수요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사회를 정밀하게 관리하는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통일된 도량형 없이 정밀한 관리는 빈말에 불과하다.
다섯 가지를 한데 놓으면 상앙이 설계한 체제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전쟁에 최적화된 총동원 체제였다.
국가의 목표는 오로지 전쟁의 승리였다. 사회의 모든 자원은 그 목표로 흘러갔다. 사람은 곡식을 길러 군대의 보급을 맡거나, 전쟁에 나가 국가에 토지와 인구를 가져다주어야 했다. 세 번째 선택지는 없었다. 농사도 짓지 않고 싸우지도 않는 사람들, 곧 상인과 떠돌이 유세객과 은자는 모두 시스템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여분이었다. 억압하거나 밀어냈다.
사회 전체를 하나의 전쟁 기계로 바꾸는 체제였다. 효율은 엄청났다. 서쪽 변방에 웅크린 이류 국가였던 진나라는 100년 안에 여섯 나라를 휩쓰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치른 대가도 엄청났다. 사회 어디에도 전쟁 이외의 목표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문화, 사상, 개인의 자유, 삶의 질이 모조리 희생되었다.
상앙 자신의 최후는 그가 만든 체제에 붙은 주석과도 같다. 진 효공이 죽자 옛 귀족이 반격했고, 상앙은 거열형을 당했다. 하지만 제도는 폐기되지 않았다. 진 혜문왕은 상앙을 죽이고 상앙의 법은 남겼다. 이 대목은 대단히 중요하다. 상앙의 시스템이 이미 상앙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스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운영자를 갈아 끼워도 운영체제는 계속 작동했다.
이것이 상앙의 체제와 관중·오기의 체제를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다. 관중이 죽자 제나라의 패업이 무너졌다. 오기가 죽자 초나라의 개혁은 뒤집혔다. 상앙이 죽어도 진나라 제도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관중과 오기의 개혁은 정책 수준에 머물렀지만, 상앙의 개혁은 사회 구조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정책은 폐기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구조는 한번 바뀌면 되돌릴 수 없다. 이미 토지 소유권을 얻은 농민에게 권리를 반납하게 할 수 없고, 군공으로 올라선 평민을 예전 자리로 돌려보낼 수 없으며, 흩어 놓은 종족을 다시 모을 수도 없다.
상앙은 깊은 이치를 알았다. 진짜 개혁은 정책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정책은 되돌릴 수 있지만 구조는 되돌릴 수 없다. 개혁이 뒤집히지 않게 하려면 사회 구조 속까지 밀어 넣어야 한다. 뽑아낼 수 없을 만큼 깊숙이.
4 왜 진나라가 이겼는가 그리고 왜 필연은 아니었는가
일곱 나라가 입찰했고, 진나라가 낙찰받았다. 왜였을까?
흔히 드는 설명은 많다. 관중의 사방이 천연 요새였다는 지리적 이점, 융적과 오랫동안 싸우며 다져진 군사 전통, 효공·혜문왕·소양왕·시황제로 이어진 꽤 괜찮은 군주들, 여섯 나라 합종의 무력함. 모두 맞는 말이지만 표면의 요인들이다. 더 깊은 곳에는 체제의 설계가 있었다. 진나라는 전국시대의 모든 체제 가운데 기능주의를 가장 철저하게 구현했다. 국가 전체를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진 기계로 만들었다. 전쟁에서 이 기계의 효율은 실제로 대단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사고의 함정이 있다. 진나라가 이겼다는 결과에서 진나라의 승리가 필연이었다고 거꾸로 추론하는 것이다. 후험이 선험을 식민지화하는 셈이다. 진나라가 이겼으니 진나라의 체제가 틀림없이 경쟁 환경에 가장 적합했을 것이라는 추론. 이 추론은 잔여항을 지워 버린다.
실제로 진나라 체제에는 매우 뚜렷한 약점이 있었다. 모든 것을 한 판에 거는 유형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자원을 공격과 결전에 걸었다. 여분도, 탄력도, 완충장치도 없었다. 이런 체제는 극한까지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와 같다. 장력이 클수록 관통력은 세지지만, 갑자기 끊어지기도 쉽다. 전속력으로 전진하는 법밖에 모르는 기계는 전속력 전진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고장 난다.
진나라의 취약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시스템의 설계에 ‘기다림’과 ‘소모’를 받아들일 자리가 없었다. 군공작제는 승진 기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요구했다. 싸울 전쟁이 없으면 병사가 올라갈 길도 없어지고, 보상 장치는 헛돌았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누르는 경제 구조는 새 땅과 인구를 얻기 위해 계속 팽창해야 했다. 팽창이 멈추면 한정된 자원의 배분 압력이 내부 모순을 격화시켰다. 편호제민의 고압적 통제를 유지하려면 국가의 의지가 계속 관철되어야 했다. 조금만 느슨해져도 억눌린 사회적 긴장이 튀어 오를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진나라 체제는 끊임없이 먹이를 주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먹이는 전쟁의 승리였다. 먹이가 끊기면 자기 몸을 뜯어 먹었다.
그렇다면 여섯 나라는 이 약점을 이용할 수 있었을까? 이론상 충분히 가능했다. 진나라와 주력군끼리 결전을 벌이지 않는 것이다. 장평 같은 곳에서 진군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싸움을 피하며 소모전과 우회 기동, 유격전을 펼쳤다면 오히려 진나라 체제가 가장 취약했을 것이다. 결전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 군공작제는 헛돈다. 공격의 관성은 짐이 된다.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는 힘을 풀어낼 곳을 찾지 못한 채 저절로 끊어진다.
그러나 여섯 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는 결국 주력군을 출격시키는 쪽을 택했다. 합종 연합군의 전략도 되풀이해서 정면 대결로 돌아갔다. 체계적인 소모전과 장기전을 시도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 시대에는 소모전이 불가능해서가 아니었다. 당시의 전략적 상상력이 ‘정면 결전으로 승부를 가린다’는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의 전차전 전통에서 이어진 틀이었다. 전국시대에 들어 병력 규모가 만 단위에서 십만 단위로, 다시 백만 단위로 커졌어도, 겨루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돌파가 없었다. 모두 같은 트랙에서 달렸고, 트랙을 바꿀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진나라의 승리는 그 체제가 경쟁에서 필연적으로 이긴 결과라기보다, 그 특정한 게임 방식 아래에서 이긴 결과라고 보는 편이 맞다. 가능한 게임 방식이 그것 하나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여섯 나라의 패배는 전적으로 체제의 패배만은 아니었다. 전략적 상상력의 패배이기도 했다. 진나라의 취약성을 터뜨릴 수 있는 겨루기 방식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시야를 세계사로 넓히면 이 점이 더욱 선명해진다.
총동원, 모든 것을 건 승부, 절대적인 집중으로 얻어 내는 절대적인 효율. 진나라의 이 체제는 중국만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유럽 역사에서도 적어도 두 차례 대규모로 재현되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나치 독일이다. 둘 다 국가를 전쟁 기계로 만들었고, 총동원을 통해 단기간에 적을 압도할 능력을 얻었으며, 초기의 번개 같은 승리 속에서는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결말은 완전히 달랐다. 나폴레옹은 쿠투조프의 러시아를 만났다. 결전에 응하지 않고, 땅을 불태우며 물러나고, 공간을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고, 끝없이 깊은 영토 속에서 상대의 보급선을 끊어 버리는 러시아였다. 나치는 같은 러시아를 만났고, 처칠의 영국도 만났다. 항복도 협상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티며, 상대가 모든 것을 건 승부의 동력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영국이었다. 두 번 모두, 상대가 그 체제가 정해 놓은 게임에 응하지 않자 모든 것을 한 판에 거는 체제는 끝내 부러졌다.
핵심은 나폴레옹과 나치의 적들이 이미 ‘너와 결전은 하지 않겠다’는 전략적 인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쿠투조프는 러시아의 깊은 영토 자체가 무기임을 알았다. 처칠은 시간이 자기편임을 알았다. 이런 인식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문명이 오랜 전쟁의 역사 속에서 배운 것이다. 모든 것을 건 상대가 솟아올랐다 무너지는 모습을 충분히 겪어야 ‘상대의 수를 받아 주지 않는다’는 전략을 끌어낼 수 있다.
전국시대에는 이런 인식의 축적이 없었다. 진나라는 인류 문명사에서 모든 것을 한 판에 거는 총동원 정권이 등장한 첫 세대에 속했다. 여섯 나라 역시 그런 정권을 처음 상대하는 나라들이었다. 참고할 선례도, 빌려 올 역사적 교훈도 없었다. ‘상대의 수를 받아 주지 않는다’는 전략은 이론상 충분히 가능했다. 훗날 유방도 항우에게 비슷한 전략을 썼다. 예봉을 피하고, 시간을 끌며 소모시키고, 적의 내부가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그것이 아직 자각적인 전략적 사고로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나라의 방식에는 그 시대에만 열린 기회의 창이 있었다. 창이 열리는 조건은 이랬다. 총동원 기술은 이미 성숙했지만, 총동원에 맞서는 전략적 사고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상앙 변법은 도구를 제공했는데, 아무도 이런 것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 창이 닫히는 조건은 반대였다. 문명이 총동원 정권들의 흥망을 충분히 겪으며 소모, 우회, 결전 거부 같은 비대칭 전략을 배우는 것이다. 그 인식이 널리 퍼지고 나면 모든 것을 한 판에 거는 체제는 다시는 진나라처럼 거침없이 휩쓸 수 없다. 준비된 적이 그 취약성을 정확히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마침 그 창이 막 열리는 순간에 서 있었다. 시대가 안겨 준 이익이지, 체제 자체의 우위가 아니었다.
진나라의 잔여항, 곧 한순간에 부러질 수 있다는 취약성은 언제나 존재했다. 당시의 적들이 이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진이 통일한 뒤 불과 15년 만에 망한 것은 외부의 전쟁 목표를 잃자 그 취약성이 저절로 터졌기 때문이다. 뛰어난 적이 찌를 필요도 없이 시스템이 스스로 끊어졌다. 진승과 오광이 깃발을 들었을 때의 초라한 규모, 그리고 진 제국이 무너진 속도는 여섯 나라를 파죽지세로 휩쓸던 진군의 모습과 지독하게 아이러니한 대비를 이룬다. 똑같은 체제가 공격할 때는 무엇이든 깨뜨렸고, 지킬 때는 일격도 버티지 못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한 판에 거는 체제의 필연적인 특성이었다.
그러니 전국시대의 교훈은 ‘가장 극단적인 체제가 경쟁에서 반드시 이긴다’가 아니다. 어떤 체제가 이겼더라도 그 승리를 곧바로 체제의 우수성 덕분이라고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더 깊은 질문이 필요하다. 상대는 당신의 잔여항을 터뜨릴 방법을 찾아냈는가? 못 찾아냈다면 당신의 승리는 상대의 실패이지 당신의 성공이 아니다. 이 구별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겼다는 이유로 자기 체제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오판할지 여부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내린 모든 결정은 ‘내 체제가 최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다’는 판단 위에 서 있었다. 장성 건설, 치도 건설, 아방궁 건설, 백월 정벌, 분서갱유까지 모두 그랬다. 그 판단은 후험이 선험을 식민지화한 산물이었다. 그는 승리로 체제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그 우수성을 근거로 더욱 극단적인 추진을 정당화했다. 그가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의 체제는 입증된 것이 아니라 아직 반박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반박되지 않았다는 것과 입증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5 백가쟁명 상전이기의 사상 폭발
전국시대는 전쟁의 시대인 동시에 사상의 시대였다. 그 뒤 2천 년의 중국 역사에서도 백가쟁명의 밀도와 깊이를 넘어선 시기는 없었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순환 법칙으로 보면, 백가쟁명은 우연히 찾아온 문화적 번영이 아니다. 구축물이 상전이를 겪는 시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산물이다.
옛 구축물인 주공의 예악·봉건 체계는 완전히 작동을 멈췄다. 새 구축물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그 사이의 공백기에는 ‘질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완전히 열려 있었다. 어느 답도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모든 답이 제안되고, 토론되고, 시험될 기회를 얻었다.
사상의 자유를 가능하게 한 것은 어느 개명한 통치자의 하사품이 아니었다. 제나라 직하학궁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조건을 만든 것은 권력의 배치 자체였다. 일곱 나라가 공존한다는 것은 사상가에게 선택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위(魏)나라에서 중용되지 않으면 제나라로 가면 되고, 제나라에서도 안 되면 진나라로 가면 되었다. 여러 나라의 경쟁은 사상가에게 ‘발로 투표할’ 시장을 제공했다. 어느 나라도 사상을 독점할 능력이 없었다. 금지하면 사람들이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도 사상을 억압할 유인이 없었다. 어느 미친 사람의 생각이 다음번에 자기 목숨을 구해 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훗날 진이 통일한 뒤의 상황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통일 뒤에는 정권이 하나뿐이었고, 사상가는 갈 곳이 없었다. 분서갱유는 진시황 개인의 악취미가 아니라 통일 정권의 구조적 필요였다. 독점적인 구축물은 그것을 대신할 체제 구상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안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 체제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백가쟁명의 내용을 깎아내기와 구축의 틀로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가는 옛 구축물을 수리하려 했다. 공자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했고, 맹자는 왕도를, 순자는 예의를 말했다. 핵심 요구는 모두 어떤 윤리적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무엇을 회복할 것인가’를 두고는 내부에서도 갈렸다. 공자는 주공에게 돌아가려 했고, 맹자는 요순에게 돌아가려 했다. 더 멀리 간 셈이다. 순자는 비교적 현실적이어서 법에 의한 통치를 보완책으로 인정했다. 유가는 옛 구축물의 유산 관리인이었다.
법가는 새 구축물을 설계했다. 상앙·한비·이사가 요구한 핵심은 옛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윤리 대신 법률을, 교화 대신 형벌을, 귀족 대신 관료를 두자는 것이다. 법가는 가장 급진적으로 깎아내는 사람들이었다. 옛 구축물을 기워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헐어 버리고 새로 짓겠다는 것이었다.
도가는 구축물 자체가 꼭 필요한지 물었다. 노자는 ‘무위로 다스린다’고 했고, 장자는 ‘덕이 지극한 세상에서는 현명한 이를 떠받들지도, 유능한 이를 부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핵심은 이렇다. 당신들이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권력과 질서와 제도는 모두 사람이 만들어 낸 골칫거리다. 가장 좋은 질서는 질서가 없는 것이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도가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잔여항 보존에 따라 어떤 구축물도 새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면, 최선의 답은 아예 구축하지 않는 것이다.
묵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 유형을 제안했다. 겸애, 비공, 상현, 상동, 절용. 차별 없이 사랑하고, 침략을 반대하고, 유능한 이를 높이고, 뜻을 하나로 모으며, 씀씀이를 절제하자는 것이었다. 묵가의 구상은 옛 구축물을 수리하는 것도, 법가식 강제의 구축물을 세우는 것도 아니었다. 평등한 사랑에 바탕을 둔 구축물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조직 형태도 독특했다. 묵가 조직에는 엄격한 규율과 최고 지도자인 거자(巨子)가 있었고, 구성원들은 고행승 같은 삶을 살았다. 이론 체계와 실천 조직을 함께 갖춘 학파로, 선진시대 제자백가 가운데 유일했다. 하지만 그 체제는 인간의 본성을 지나치게 거슬렀다. 겸애는 낯선 사람을 가족만큼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큰 사회 전체로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양의 구축물과 같은 약점을 안고 있었다. 참여자들이 어떤 본능을 계속 거슬러야만 유지된다는 점이다.
병가는 질서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전쟁 자체의 기술과 철학에 집중했다. 하지만 《손자병법》의 몇몇 명제, 이를테면 ‘전쟁은 속임수의 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은 더 깊은 층위에서 정보와 전략에 관한 일반 이론이다. 군사의 영역을 넘어선다.
종횡가의 관심은 여러 나라가 공존하는 체계 속의 게임이었다. 합종연횡은 본질적으로 국제관계 이론이다. 소진과 장의의 활동은 상위 권력이 없는 국제체계에서 생존 전략을 찾는 실천이었다. 국내 체제를 어떻게 설계할지는 관심 밖이었다. 오직 나라와 나라 사이의 힘의 균형을 보았다.
이 학파들은 진공 속에서 토론한 것이 아니다. 뒤에는 실제 정치적 수요가 있었다. 각국 군주는 탈락전에서 자기를 살려 줄 체제 구상을 찾고 있었다. 학자의 가치는 학문적 명성이 아니라 정치적 쓸모였다. 어떤 이론이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학자는 재상 자리에서 봉읍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지식인이 권력의 중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통치자가 지식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진의 통일로 생존 압력이 사라지자 그 수요도 사라졌다. 지식인은 필요한 사람에서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다. 귀한 손님에서 감시 대상으로 바뀌었다. 백가쟁명의 창이 열려 있던 시기는 여러 체제가 경쟁하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경쟁이 끝나자 창도 닫혔다.
6 전국시대가 남긴 궁극적인 교훈
250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탈락전은 시대를 넘어서는 몇 가지 교훈을 남겼다. 전국시대에만 해당하는 교훈이 아니다. 여러 체제 유형이 경쟁하는 모든 시대의 교훈이다.
첫째, 특정한 경쟁 환경과 시대적 배경이 체제 유형의 선택을 결정한다. 그러나 승리했다고 입증된 것은 아니다.
진나라 체제는 전국시대의 경쟁에서 이겼다. 순전히 우연은 아니었다. 전국시대의 안보 딜레마가 경쟁 기준을 ‘누가 가장 잘 싸우는가’로 몰아간 것은 사실이고, 진나라의 총동원 체제가 그 기준 아래서 매우 효율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경쟁 환경은 체제 유형의 선택을 실제로 제약한다.
하지만 제약이 곧 결정론은 아니다. ‘특정한’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진나라의 승리는 두 가지 특정 조건에 기대고 있었다. 첫째, 경쟁이 정면 결전과 주력군의 충돌로 승패를 가르는 탈락전이었다. 둘째, 그 시대의 전략적 상상력이 그 게임 방식에 갇혀 있었다. 여섯 나라에서는 소모와 우회, 주력군의 충돌을 피하는 전략을 누구도 체계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 전략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훗날 항우를 상대한 유방, 중원의 왕조를 상대한 유목민들이 그 효과를 거듭 보여 주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아직 그런 전략적 사고를 낳지 못했을 뿐이다.
진나라 체제는 모든 것을 한 판에 거는 유형이었고, 극도로 부러지기 쉬웠다. 상대가 트랙을 바꿨다면 어땠을까? 장평에서 결전을 벌이는 대신 시간을 끌고 힘을 소모시키며, 군공작제를 헛돌게 하고 팽팽한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게 했다면, 오히려 진나라가 가장 취약했을 것이다. 그 잔여항은 언제나 있었다. 특정한 경쟁 환경과 시대적 배경 아래서 작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특정한 경쟁 환경과 시대적 배경이 함께 진나라 체제를 선택했다. 환경이나 시대가 달랐다면 결과도 완전히 달랐을 수 있다. 진나라의 승리는 ‘특정 조건에서 반박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최적임이 입증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 구별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통일 뒤 진시황의 모든 결정은 ‘내 체제는 이미 입증되었다’는 오판 위에 서 있었다. 반박되지 않은 체제와 입증된 체제 사이의 거리는 흔히 과도한 팽창에서 붕괴까지의 거리다.
둘째, 인재의 이동은 체제 간 경쟁의 핵심 변수다.
전국시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땅도 군대도 아니었다. 인재였다. 상앙은 위(魏)에서 진(秦)으로 갔고, 장의도 위에서 진으로 갔고, 범저도 위에서 진으로 갔다. 위나라는 그야말로 진나라의 간부 양성소였다. 인재는 왜 진나라로 흘러갔을까? 진나라의 군공작제가 다른 나라에서는 줄 수 없는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출신을 보지 않고 실력만 보는 기회였다.
어떤 체제가 인재에게 올라갈 길을 열어 주지 못하면 인재는 길을 열어 주는 체제로 간다. 인재가 흘러가는 방향은 체제의 경쟁력을 가장 민감하게 보여 주는 지표다.
셋째, 구축물의 비가역성이 경쟁을 한 방향으로만 몰아간다.
상앙 변법 뒤의 진나라는 변법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유화한 토지는 거둬들일 수 없었고, 흩어 놓은 종족은 다시 모을 수 없었으며, 새로 올라선 군공 귀족은 도로 눌러 앉힐 수 없었다. 개혁은 되돌릴 수 없었다.
따라서 체제 유형 간의 경쟁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어떤 체제가 채택되어 사회 구조 깊숙이 뿌리내리면 경쟁에서 발을 뺄 수 없다. 계속 앞으로 가야 한다. 앞이 절벽이어도 그렇다. 진나라는 되돌아가 온건한 나라가 될 수 없었다. 사회 구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 기계로 계속 살며, 정복할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정복해야 했다. 그다음은? 그것이 다음 편에서 다룰 문제다.
넷째, 탈락전은 다양성을 없앤다.
전국시대가 시작될 때는 일곱 가지 체제 유형이 공존했다. 끝날 때는 하나만 남았다. 여섯 가지가 탈락했다. 아무 쓸모도 없어서가 아니라, 그 특정한 경쟁 기준 아래서 진나라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상실 자체가 하나의 잔여항이다. 통일 뒤 진이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대신 쓸 통치 방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안들을 모조리 제 손으로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전쟁 기계로 사는 법만 알았지, 다른 것은 할 줄 몰랐다. 변신이 필요했지만 변신하려면 참고할 기준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것이 탈락전의 역설이다. 승자는 모든 대안을 없애 버린 뒤에야 자신에게도 대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음 편은 진, 가장 극단적인 닫힘의 시도다. 온 천하를 하나의 기계로 만든 사람, 그리고 평화가 오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기계의 이야기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