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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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62장 · 총 81장

과거만으로 문을 닫지 않기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道者万物之主也,善人之宝也,不善人之所葆也。美言可以市,尊行可以贺人。人之不善,何弃之有?故:立天子置三卿,虽有拱之璧以先驷马,不若坐进此道。古之所以贵此道者何也?不谓求以得,有罪以免与?故为天下贵。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이제 늦었다는 결론 앞에서

오래전 잘못을 떠올릴 때마다 같은 결론에 닿는 사람이 있다. 나는 다시 믿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했으니 이제 와서 나아지려 해도 소용없다. 한 사건의 기억이 어느새 남은 생애 전체에 대한 판결이 된다.

제62장에는 그 판결을 잠시 멈추게 하는 말이 있다. ‘人之不善,何棄之有.’ 사람에게 선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떻게 그 사람을 버려도 된다는 이유가 되는가.

뛰어난 사람을 고르고 자격 있는 사람을 맞이하는 이야기는 익숙하다. 노자의 물음은 그 선별 밖에 남은 사람에게 향한다. 아직 달라지지 못한 사람, 과오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가능성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것은 누구나 곧 바뀐다는 예측이 아니다. 변화에 필요한 시간도 도움도 사람마다 다르다. 다만 지금의 모습이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정확히 보는 것은 다르다. 이 구별에서 이 장의 따뜻함이 시작된다.

2. 보물이면서 의지할 곳인 도

‘道者万物之主也,善人之宝也,不善人之所葆也.’ 도는 만물의 주이며, 선한 사람의 보배이고, 선하지 못한 사람이 의지할 곳이기도 하다.

이 연재는 주(主)를 만물이 향하고 의지하는 중심이라는 방향으로 읽는다. 앞 장의 하류, 제4장의 ‘万物之宗’과 이어지는 독해다. 그렇다고 주라는 글자에 주관하거나 다스리는 뜻이 전혀 없다고 한정하지는 않는다. 통행본에는 오(奥)가 있으며 왕필은 보호받을 수 있는 자리로 풀이한다. 글자는 달라도 여기서 읽어 낼 수 있는 한 방향은 배제보다 포용에 가깝다.

선한 사람에게 도는 자신의 걸음을 살펴보게 하는 보배다. 이미 좋은 일을 하므로 더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오만해지지 않도록 돌아볼 근거가 된다. 한편 아직 선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所葆’가 있다. 완성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회원제 공간이 아니다.

햇빛이 사람의 성적을 조사한 뒤 비추는 것은 아니듯, 사람이 살아도 되는 근거를 매번의 평가에만 맡기지 않는다. 자연의 비유가 사회의 책임과 판단을 모두 대신할 수는 없다. 그래도 다시 살아갈 토대까지 빼앗지 않는다는 방향은 보인다.

여기서 선과 불선을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과 단순히 바꾸어 읽지 않는 일도 중요하다. 성과가 부족하다고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처지 자체가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3. 아름다운 말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美言可以市,尊行可以賀人.’ 아름다운 말은 사람을 움직이고, 존중받을 만한 행실은 사람의 가치를 높일 수도 있다.

이 말을 모두 말재주와 허례에 대한 조롱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왕필의 주석은 도를 아름답게 말하고 존중하여 행하는 가치를 긍정하기도 한다. 좋은 말이 사람을 돕고 정중한 예가 존중을 전하는 일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

다만 오늘의 삶에 적용하면 말과 실질의 거리를 살펴볼 계기가 된다. 잘 다듬은 사과문을 내는 일과 같은 피해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바꾸는 일은 다르다.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하는 것과 상대가 어려울 때 시간을 내는 것도 다르다.

아름다운 표현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 표현이 무엇을 받치고 있는지 보면 된다. 안심시키는 말이라면 뒤따르는 행동이 그 안심을 배반하지 않는가. 훌륭한 행실이라면 박수가 없는 자리에서도 이어지는가. 겉을 꾸미는 일이 속에서 해야 할 일을 대신하기 시작할 때 가치가 비어 간다.

말과 의례가 쓸모없어서 도보다 덜 귀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삶을 실제로 살아 내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버리지 않는 것과 곁에 두는 것은 다르다

‘何棄之有’는 제27장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 태도, 제49장의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하는 자세와 이어진다. 그러나 이 말을 상처 입은 사람에게 돌려서 떠나지 말라, 용서하라, 다시 믿으라는 명령으로 만들면 안 된다.

한 사람의 인간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것과 그 사람의 접근을 계속 허용하는 것은 다르다. 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책임을 지고 피해를 회복하며 행동을 바꿀 일이 남아 있다. 피해자가 곁에 있어야만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나 제도가 회복을 돕는 편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직원이라면 인격을 재단하기 전에 역할이 분명했는지, 배울 기회가 있었는지, 필요한 지원을 받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잘못한 아이에게는 무엇이 잘못인지 알려 주면서도, 실수한 자신에게는 이제 설 자리가 없다고 느끼게 하지 않는다. 친구에게 도울 수 있는 일을 제안하되 감당하지 못할 일까지 약속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작게 꾸미지 않고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면서 자신 전체를 이미 끝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일은 멈춘다. 책임의 범위가 분명해지면 다음에 해야 할 일도 더 잘 보인다.

문을 남겨 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쇠를 건넨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을 막는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사람이 달라질 길까지 차단하지 않는 것이다. 이 구별이 있어야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 다른 사람의 희생을 끝없이 요구하지 않는다.

5. 옥과 네 필의 말보다 귀한 것

다음에는 천자의 자리와 고관, 옥벽과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가 나온다. 눈에 보이는 존귀함이 차례로 놓인다. 채택 본문은 ‘立天子置三卿’이고 통행본은 ‘置三公’이다. 삼경과 삼공을 같은 글자인 듯 섞지 않아도 대조는 선명하다. 가장 높은 지위에 가장 귀한 선물을 보태도 ‘不若坐進此道’다.

‘坐進此道’는 일반적으로 앉아서 이 도를 올리는 일이 옥과 말을 바치는 것보다 낫다는 헌상의 대조로 읽힌다. 도 안으로 앉아 들어간다는 뜻이 글자만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연재가 여기서 떠올리는 조용한 내면의 실천은 그 대조를 삶으로 넓힌 적용이다. 거창한 준비를 마칠 때까지 바르게 사는 일을 미룰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바깥의 영예와 안의 삶이 같지 않다는 사실은 다른 고전에도 여러 장면으로 나타난다. 『장자』 「추수」에는 초나라의 초빙을 거절하면서, 죽어 귀하게 모셔지는 거북보다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아 있는 거북을 택하는 이야기가 있다. 『논어』 「옹야」의 안회는 소박한 음식과 누추한 거처에서도 자신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 앞의 장면은 문학적 이야기이며, 뒤의 장면도 가난 자체를 아름답게 꾸밀 이유는 아니다.

푸른 소를 타고 관문을 떠나는 노자의 모습도 전해진다. 다만 확실한 전기적 사실이 아니라 전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이미지들이 묻는 것은 이름과 지위를 얻으려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삶까지 넘겨주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문제다.

영예를 얻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직책을 맡아 수행할 수 있는 책임도 있다. 그러나 영예가 없으면 실천할 수 없고 박수가 없으면 지속할 수 없다면, 가치의 중심이 너무 바깥으로 옮겨 간 것은 아닌지 살펴볼 만하다.

6. 구하는 일과 잘못에서 돌아오는 일

‘古之所以貴此道者何也。不謂求以得,有罪以免与.’ 옛사람들은 왜 도를 귀하게 여겼는가. 구하여 얻을 수 있고 잘못이 있어도 벗어날 길이 있다는 점이 그 이유로 제시된다.

여기에는 구원에 대한 큰 신뢰가 있다. 그러나 도를 믿으면 행동의 결과가 사라진다는 계약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有罪以免’을 오늘의 삶에서 생각한다면 과오를 가진 사람에게도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 받을 수 있다. 배상이나 제한과 모순되는 희망이 아니다.

‘求以得’도 바라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는 약속은 아니다. 방향을 바꾸어 보고, 도움을 청하며, 해를 끼치던 행동 하나를 멈추는 일이다. 그 입구를 높은 신분이나 화려한 의식이 독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걸을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도는 ‘天下貴’라 불린다. 소수의 성공한 사람만 소유할 수 있는 보물과 달리, 잘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길이 열린다. 누군가를 배제해서 희소성을 높이는 방식의 귀함이 아니다.

일이 잘 풀리는 사람에게는 방향을 잃지 않을 기준이 되고, 잘못에서 돌아오려는 사람에게는 그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 근거가 된다. 어느 쪽이든 귀함은 겉모습보다 삶을 바꾸는 데에 놓인다.

7. 오늘 닫지 않을 문 하나

과거를 생각하면 움직일 수 없다면 우선 평생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일을 멈춰 볼 수 있다. 오늘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그만두며 누구에게 상의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거대한 평가보다 작지만 구체적인 행동이 다음 하루로 이어질 때가 있다.

누군가를 돕는 쪽이라면 그 사람을 성적이나 과오만으로 부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혼자 질 필요는 없다. 가능한 지원과 불가능한 지원을 밝히고 안전을 지키며 필요하면 다른 도움으로 연결한다. 사람을 버리지 않는 일이 한 사람의 무한한 헌신으로만 성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겉을 훌륭하게 꾸미는 데 지쳤다면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아도 되는 실천 하나를 택해 보자. 약속을 지키거나, 변명 없이 사과하거나,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름의 크기와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다.

이 장의 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들어가기 위한 문이 아니다. 과거를 지닌 채로도 그것만을 미래의 전부로 삼지 않기 위한 문이다. 문 너머가 당장 환할 것이라고 약속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아직 걸을 수 있는 길을 내 쪽에서 먼저 끝내지 않아도 된다.


자세한 주석과 본문 비교는 제7논고와 Zenodo 판을 참고할 수 있다. 앞선 논고: 제1편, 제2편, 제3편, 제4편, 제5편, 제6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