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높이, 멀리 갈 수 있는가
1마일 4분 벽에서 ‘여자는 언제 남자를 앞지를까’라는 예측까지, 한계를 예측하는 시도는 거듭 기록 곡선을 사람으로 착각했다. 자는 구축이 만들어 낸 수치를 따라갈 수 있지만, 주체의 마지막 눈금에는 닿지 못한다.
이 글의 목차
1 거듭 틀리게 계산된 숫자
이 연작이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질 때다. 한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빨리 달리고, 얼마나 높이 뛰고, 얼마나 멀리 던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는 확실한 부분이 있다. 유한한 생물에게는 반드시 한계가 있다. 사람이 빛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고, 뛰어올라 달까지 갈 수도 없다. 그 궁극의 숫자는 분명 존재하며, 분명 유한하다.
그러나 불확실한 부분도 있다. 이 글이 다루려는 것은 그쪽이다. 분명 존재하는 그 유한한 한계를 계산해 낼 수 있는가.
지난 70년 동안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그 계산에 도전했다. 과거 성적 곡선을 바깥으로 연장하고, 생리학적 변수를 넣어 모형을 만들고, 통계학의 극값분포를 자료에 맞췄다. 그렇게 구체적인 숫자가 하나씩 나왔다. 1마일을 3분 30초 안에 달리게 될 것이다. 어느 해에는 여자가 남자를 앞지를 것이다. 마라톤의 한계는 몇 시간 몇 분 몇 초다.
그 숫자들은 하나씩, 계산이 틀렸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틀린 방식은 우연한 실수가 아니었다. 같은 근본적 오류가 되풀이되었다. 역사 속 특정 조건에서 성립한 관계를,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법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실패를 하나씩 펼쳐 놓으려 한다. 각각 어디서 틀렸는지 살펴보고, 이어서 모두가 함께 틀린 지점을 보려 한다. 그 공통의 오류는 바로 이 연작 첫 편부터 따라온 자가, 가장 큰 야심을 품었을 때 드러낸 가장 깊은 허점이다. 앞선 22편은 이미 일어난 일을 재면서 이 자가 겪은 여러 실패를 다뤘다. 이번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궁극의 한계를 재려다가 겪는 실패를 다룬다.
2 1마일 4분 벽에 과학이 사형선고를 내린 적은 없다
가장 유명한 한계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거의 모든 대목이 잘못 전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줄거리는 이렇다. 배니스터가 등장하기 전, 과학자들은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도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 의사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1954년 5월 6일, 배니스터가 3분 59초 4를 달리며 과학이 내린 금지령을 깨뜨렸다.
이 이야기를 문헌으로 확인되는 과학계의 합의라고 할 수는 없다.
1954년 이전의 생리학 논문, 이름이 명시된 과학자의 발언, 전문 학회의 성명, 의학적 판정 가운데 3분 59초는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 자료를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배니스터 자신의 말이다. 그는 훗날 생리학자로서 설명했다. 4분 1초나 4분 2초에 달리는 사람이 끝내 4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물리적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고. 그에게 4분은 심리적으로 두드러지는 둥근 숫자의 벽이지, 생리가 갑자기 끊기는 경계가 아니었다. 그는 그 장벽이 물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또 이미 1947년에 4분 벽은 언젠가 깨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기자들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렇다면 의사와 과학자들이 주자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는, 거듭 인용되는 그 말은 어떤가. 기네스와 한 기념 웹사이트에 실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1950년대 당시의 출처를 제시하지 않는다. 어느 과학자가 했다는 말인지, 배니스터가 대체 어떤 자리에서 그 말을 했다는 것인지도 밝히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인용문의 최종 출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 문구만으로 1954년 이전에 과학계의 합의가 있었다고 입증할 수는 없다. 실제로 몇몇 의사가 극적인 말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지금 남아 있는 단서로는 누가, 언제, 어떤 과학적 자격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과학계의 합의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러니 이야기의 실제 모습은 이렇다. 1954년 이전, 1마일 4분 벽에는 대중과 스포츠계가 부여한 강한 신비감이 분명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극히 어려운 일로 여겼다. 랜디에게 거듭 찍히는 4분 2초는 벽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 서술의 오류는 사람들이 4분을 몹시 어렵게 여겼다고 말한 데 있지 않다. 그 어려움을 문헌으로 입증된 과학적 정리로 바꿔 놓은 데 있다. 어려움은 진짜였다. 그 어려움을 정리로 써 놓았다는 과학은 가짜였다.
이렇게 시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글 전체의 기조가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계 예측의 첫 함정은 숫자 하나를 잘못 계산하는 데 있지 않다.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장벽을 과학적이고 생리적인 경계로 위장하는 데 있다. 뒤에 나올 실제 과학 모형들은 더 정교한 방식으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 기조는 처음부터 분명히 짚어 둘 만하다. 이후의 모든 실패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1마일 4분 이야기가 보여 주듯, 사람들은 장벽을 넘기 전에는 그것을 넘을 수 없다는 과학적 이유를 지어 붙인다. 그러나 누군가 넘어서는 순간 그 이유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제야 사람들은 거기에 처음부터 제대로 된 과학적 근거가 없었음을 알게 된다. 뒤에 나오는 모형들이 하는 일도 사실은 그 행동을 좀 더 점잖게 바꾼 것이다. 어떤 성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성적이 한계이고, 점근선이고, 종착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어선 뒤에는 마찬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그 점근선과 종착점에도 불변의 과학적 근거는 없었다. 한 토막의 역사에 맞춰 그린, 한계처럼 보이는 무엇이었을 뿐이다.
3 1마일 3분 30초라는 50년짜리 내기
1976년, 세 학자가 한 글에서 구체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먼저 널리 퍼진 오류 하나를 바로잡자. 그 글이 실린 곳은 《네이처》가 아니라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다. 글의 디지털 식별자가 공교롭게도 《네이처》에 쓰이는 접두부로 시작한다. 지금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도 같은 출판 그룹의 기반 시스템을 쓰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이 거듭 나타나는 오해의 출발점일 것이다.
글에서 쓴 방법은 과거의 평균 달리기 속도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살핀 다음, 그 추세를 미래로 연장하는 것이었다. 핵심 예측은 이랬다. 1마일 세계기록은 약 50년 안에 3분 30초에 이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1976년 6월에서 50년 뒤면 2026년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1마일 세계기록은 엘 게루지가 1999년에 세운 3분 43초 13이다. 3분 30초보다 13초 넘게 느리다.
이 50년짜리 대표 예측은 실패했다.
어디서 실패했는가. 과거에 관찰된 속도의 향상률이 충분히 오래 지속되어, 모형을 맞춘 자료 구간에서 한참 벗어난 미래까지 외삽할 수 있다고 여긴 데서다. 그러나 기록은 일정한 속도로 전진하지 않는다. 기록을 만들어 내는 것은 계속 변하는 극값 생성 과정이다. 그 안에는 인구 증가, 경기 빈도의 증가, 프로화, 훈련의 발전, 기술의 갱신, 생리적 포화가 함께 들어 있다. 어느 요인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특정한 역사 구간에서 관찰된 향상 속도를 무한히 외삽할 수 있는 상수로 취급한 것, 그것이 이 예측의 가장 근본적인 오류다.
공정하게 말하면, 저자들은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는 확률적 표현을 썼다. 정리를 증명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뒤에서도 되풀이된다. 원래 논문은 나중에 대중에게 전해진 이야기보다 훨씬 신중한 경우가 많다.
이것이 첫 번째 실패다. 기울기가 계속 유지되리라는 가정의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 과거에 관찰된 향상률은 나중에 둔화했지만, 예측은 둔화하지 않으리라 가정했다.
이런 실패가 왜 거의 피할 수 없는지 이해하려면, 그 향상률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20세기 중반 달리기 성적이 빠르게 좋아진 배경에는 일련의 변화가 동시에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대회에 나섰고, 훈련 과학이 발전했고, 영양이 개선되었고, 대회가 늘었고, 프로화가 진행되었다. 이 변화들이 어느 기간에 겹쳐지며 가파른 향상 기울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끝없이 가속할 수는 없다. 참가자 수는 포화에 이르고, 훈련법은 효력의 상한에 가까워지며, 손쉽게 딸 수 있는 열매는 언젠가 다 따게 된다. 따라서 그 가파른 기울기는 물리 상수가 아니라 특정 역사 단계의 산물이다. 그것을 50년 뒤까지 외삽하는 일은 그 역사 단계가 영원히 지속되리라 가정하는 것과 같다. 거의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다.
4 여자가 남자를 앞지른다는 날짜는 거듭 빗나갔다
여자가 어느 해에 남자를 앞지를지 계산하는 예측들이 있다. 한계 예측의 실패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빗나간 부류 가운데 하나다. 다만 이를 다룰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성별에 관한 실질적 주장으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서 얻어야 할 것은 외삽 방법에 관한 교훈이다.
1992년 1월 2일, 《네이처》에 아주 짧은 학술 서신이 실렸다. 여성 달리기 기록이 과거에 더 빠르게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미래로 외삽해, 남녀 기록이 같아지는 여러 날짜를 계산한 글이었다. 나중에 한 생리학 종설이 그 회귀분석을 재구성하면서 제시한 교차 시점은 마라톤 1998년, 400미터와 1,500미터 2025년, 800미터 2030년, 200미터 2040년이었다.
1998년이 지났지만 남녀 마라톤 기록은 같아지지 않았다. 2025년이 지났지만 400미터와 1,500미터도 같아지지 않았다. 이 세 날짜에 관한 예측은 이제 경험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대단히 중요한 변수 하나를 빠뜨렸다. 여성 스포츠가 역사적으로 겪어 온 불균형이다.
여성 기록의 시계열이 쌓인 기간 대부분에 걸쳐, 스포츠 안에서 여성의 처지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참가자 수가 늘었고, 출전할 수 있는 종목이 확대되었고, 일류 지도자에게 접근할 통로가 열렸고, 인재 발굴의 폭이 넓어졌고, 프로가 될 기회가 늘어났다. 따라서 그 시기 여성 성적이 급격히 향상된 까닭의 상당 부분은 사회적 기회를 따라잡는 과정에 있었다. 생물학적 성차가 끝없이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참여 기회의 추격이 느려지면, 앞서 나타난 수렴의 기울기가 그대로 이어져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여성의 역사적 향상 기울기를 영구적인 성별 고유의 생물학적 추세로 받아들이는 것은 부적절하다.
순전히 수학적인 결함도 있다. 경기 시간이 선형으로 줄어드는 모형은 물리적으로 타당한 장기 모형이 될 수 없다. 무한히 연장하면 결국 0초를, 그다음에는 음수의 시간을 예측하게 된다. 마이너스 시간에 달리는 사람이라니, 터무니없다. 그리고 이 황당한 상황이 오기 훨씬 전부터 추정 교차 시점은 어느 해를 출발점으로 잡느냐에 극도로 민감하다. 그 역사에는 안정된 하나의 기울기가 아니라 구조적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 역시 애초에 질문으로 제시되었다. 제목부터 물음표가 붙어 있었고, 생리학적 동일성을 단정한 글은 아니었다. 현대의 종설들은 이를 도발적이며, 심지어 반쯤은 농담인 글로 묘사한다. 후대의 대중적 설명이 논문 자체보다 훨씬 단정적일 때가 많다.
이것이 두 번째 실패다. 사회적 추격을 영구적 수렴으로 오인한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 빠르게 변하고 있던 사회적 조건을 안정된 생물학적 상수로 취급한 것이다.
5 2156년, 아직 기한이 오지 않은 예측
2004년, 다시 《네이처》에 실린 짧은 보고가 더 유명하고 더 먼 미래를 겨냥한 예측을 내놓았다.
방법은 올림픽 100미터 우승 기록에 남녀 각각 직선을 하나씩 맞추는 것이었다. 우승 기록이라는 데 주의하자. 생리 변수가 아니고, 단순한 세계기록의 변화 과정도 아니다. 이 예측의 대표적인 교차 시점은 2156년 올림픽이었다. 그때 모형이 계산한 여자 우승자의 기록은 약 8.079초, 남자 우승자는 약 8.098초였다. 여자가 앞서는 것이다. 초록에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예측은 앞의 것들과 구분해야 한다.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직 기한이 오지 않았다.
2026년에 2156년의 예측이 이미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리다. 2156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두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첫째, 그 유명한 단 하나의 연도는 이례적으로 넓은 불확실성 범위를 가린다. 분석의 논의에서 제시한 교차 연도의 범위는 대략 2064년에서 2788년까지였다. 다시 말해 2156이라는 숫자가 언론에서 발휘하는 정밀도는 통계적 정밀도보다 훨씬 높았다. 700년 넘게 벌어진 불확실성 구간이 정확한 연도 하나로 압축되어 뉴스 제목에 오른 것이다.
둘째, 올림픽 우승 기록은 외삽에 쓰기에는 특히 좋지 않은 자료다. 한 방향으로 꾸준히 좋아지는 기록의 연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대회에서 누가 우승하는지는 챔피언십의 전술, 날씨, 바람, 예선부터 결승까지의 라운드 구성, 그리고 마침 누가 결승에 올랐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4년마다 나오는 우승자의 기록을 꾸준히 향상되는 생리적 최대치로 취급하면, 세계기록 자료에는 없는 잡음이 들어간다. 몇 주 뒤 《네이처》에는 이를 다룬 비판 서신 두 편이 실렸다.
따라서 이 예측을 정직하게 설명하려면 실패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안정적으로 수렴하리라는 전제는 이후 엘리트 선수들의 경기력 자료에서 유지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외삽의 신뢰도는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문면 그대로의 종착점인 2156년은 아직 반증되지 않았다.
이 구분은 이 글이 엄격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예측이 경험적으로 반증된 것과 아직 기한이 오지 않은 것은 다르다. 예측이 경험적으로 반증된 것과 학술지에서 논문이 철회된 것도 다르다. 앞에서 본 1998년과 2025년은 기한이 지났고 예상이 실현되지 않았으니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2156년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실패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전제가 흔들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두 경우를 한데 섞는 것 자체가 엄밀하지 못한 태도다. 이 글이 다루는 것은 바로 그 엄밀하지 못함의 대가다.
6 생리학을 더해도 외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앞선 실패들이 모두 과거의 곡선만 보고 생리적 기전을 보지 않은 탓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생리학을 넣으면 정확히 계산할 수 있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생리학을 더하면 모형의 작동 원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측까지 반드시 더 정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1989년에는 실제로 생리학적 모형이 등장했다. 달리기 성적을 몇 가지 생리 변수와 연결한 모형이었다. 무산소 에너지 용량, 최대 유산소 파워, 유산소 파워가 지속 시간에 따라 얼마나 감소하는지를 나타내는 변수, 그리고 달리기의 에너지 비용이 그 변수들이다. 단순한 추세선이 아니다. 기전이 명시된 생리학적 모형이었다.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는 단계에서는 여전히 역사적 추세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 생리 변수들이 계속 개선될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이 가정 아래 모형은 1마일 3분 30초가 실현될 시점을 약 2040년으로 잡았다. 2040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향상의 궤적은 이미 초기의 선형 예측들보다 훨씬 느려졌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저자들 자신의 불확실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들은 대수학을 생물학과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론적인 1마일 3분을 논하면서, 그러려면 최대 유산소 파워가 산소 소비량으로 체중 1킬로그램당 1분에 약 112밀리리터에 이르러야 한다고 계산했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체중 1킬로그램당 1분에 약 98밀리리터에 아주 높은 무산소 용량을 더하는 조합은 충분히 그럴듯하며, 훨씬 더 빠른 중거리의 이론적 한계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자. 똑같은 모형에 서로 다른 변수 가정을 넣었더니 하늘과 땅만큼 다른 한계가 나왔다. 그런데 어느 변수 가정이 맞는지는 모형 스스로 답하지 못한다. 이른바 궁극의 숫자들은 가정된 극단적 변수 조합에 따른 조건부 출력이지, 측정된 인간의 한계가 아니다.
이것이 세 번째 실패다. 생리학에 미래로 투사한 생리학을 더한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 기전을 갖춘 방정식도 그 변수 안에 추측에 불과한 미래 궤적을 담을 수 있다. 방정식은 진짜다. 그러나 방정식에 넣은 미래는 짐작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아주 매력적인 생각 하나를 벗겨 내기 때문이다. 모형이 충분히 과학적이고 기전도 충분히 갖추면 미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혼동한다. 기전을 갖춘 방정식은 실제로 현재를 정확히 기술할 수 있다. 어떤 선수의 현재 생리 변수를 주면, 지금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는지 계산해 준다. 이것은 내삽이며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하려면 먼저 미래 선수의 생리 변수가 얼마일지 알아야 한다. 방정식은 그것을 계산해 내지 못한다.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과학적 방정식에 비과학적 추측을 더해서 얻는 것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예측이다. 기전의 엄밀함으로는 미래 변수에 관한 추측의 자의성을 메울 수 없다. 정밀한 방정식에 짐작한 미래를 넣으면, 나오는 것도 짐작한 결과다. 다만 방정식의 외투를 입고 있어서 실제보다 더 믿음직해 보인다.
7 점근선도 실패할 수 있다
앞서 본 선형 외삽의 실패를 보면 자연스럽게 보완책이 떠오른다. 직선은 끝없이 올라가 터무니없는 곳에 이르니, 대신 휘어지다가 점차 평평해지는 곡선, 점근선을 향하는 곡선을 쓰면 어떨까. 그러면 유한한 종착점이 생긴다.
2005년, 바로 그런 모형이 나왔다. 무한한 선형 외삽에 명시적으로 맞선 모형이었다. 처음에는 가파르고 나중에는 평평해지는 형태를 자료에 맞췄다. 기록상의 속도는 발전기를 지나며 가속해서 좋아지다가, 그다음 유한한 점근선에 가까워진다. 주된 결론은 남자 달리기 기록이 이미 모형이 추정한 점근적 한계의 약 1~3퍼센트 이내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더 나은 모형처럼 보인다. 수학적으로 타당한 종착점이 있고, 음수의 시간을 예측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모형 역시 실패했다. 아주 분명하게 실패했다.
이 모형이 마라톤 자료에 맞춰 얻은 점근적 한계는 약 2시간 3분 38초였다. 그런데 이 숫자는 이미 오래전에 달려 넘어섰다. 현재 세계기록은 2시간 0분 35초다. 점근선은 결정적으로 돌파되었다.
모형 내부에는 더 날카로운 경고도 있었다. 당시 여자 1,500미터 세계기록은 모형이 맞춘 점근선에 사실상 도달했거나 심지어 조금 넘어선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런데 이후 키피에곤은 2025년 7월 5일 공인기록을 3분 48초 68로 낮추었다. 그 역사적 자료에 맞춘 선을 훨씬 넘어섰다.
더 나은 모형이 어째서 또 실패했을까. 점근선이 2005년까지의 역사에 맞춰 그려졌기 때문이다. 자료에 맞춰 얻은 점근선은 조건부다. 그 역사가 담고 있는 기술, 인구, 훈련, 경쟁의 전체 구도에 달려 있다. 이후 구조적 변화가 생기면, 가령 러닝화의 혁신이나 동아프리카 선수층의 두터워짐 같은 변화가 생기면, 엘리트 경기력을 만들어 내는 함수 자체가 통째로 이동할 수 있다. 처음 가파르다가 나중에 평평해지는 곡선이라고 해서, 수학적으로 타당한 종착점 하나를 가졌다고 해서 이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네 번째 실패다. 역사적인 점근선을 불변의 점근선으로 오인한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 특정 기술 시대에 맞춰 얻은 종착점을 종 전체의 법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마라톤은 그것이 법칙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8 프랑켄슈타인 선수
앞서 살핀 실패들에는 모두 역사적 외삽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아예 역사를 버리고, 오직 생리적 한계 변수에서 출발해 한 사람의 궁극적 능력을 계산해 낼 수는 없을까.
이 길은 더 근본적인 난관에 부딪힌다.
1991년에 나온 한 마라톤 모형은 흔히 2시간을 생리적 한계로 제시한 모형이라고 잘못 인용된다. 실제로 한 일은 정반대였다. 모형은 한 선수를 구성했다. 최대산소섭취량을 아주 높은 값으로 놓고,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비율을 그 최대치의 약 85퍼센트로 설정한 뒤, 여기에 뛰어난 달리기 경제성을 더했다. 이 가상 선수가 달릴 마라톤 시간을 계산하니 1시간 57분 58초가 나왔다.
주의하자. 인간은 2시간 안에 달릴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정반대로 이 모형은 2시간을 깨는 것, 나아가 1시간 58분까지 가는 것이 생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저자 자신의 결론은 둘 중 하나였다. 당시 기록을 실질적으로 넘어서는 향상이 생리적으로 가능하거나, 아니면 마라톤 경기력을 결정하는 요인에 관한 당대의 이해를 수정해야 한다. 가능성에 관한 진술이지, 측정해 세워 놓은 벽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런 종류의 한계 계산에 두루 나타나는 함정이다.
이 가상 선수는 생리적 특성을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극값에 놓은 뒤, 그것들을 한 사람의 몸에 집어넣어 조립한 선수다. 가장 높은 산소섭취량, 가장 높은 이용 비율, 가장 뛰어난 경제성. 전부 가져야 하고, 전부 최고여야 한다. 문제는 실제 사람이 이 모든 극값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특성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을 수 있다. 서로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산소섭취량을 극도로 높여 주는 신체 구조가 바로 달리기 경제성에는 불리할 수 있다. 따라서 각 특성을 따로 최대화한 다음 그 최대치들을 모두 가상 선수 한 명에게 조립해 넣으면, 프랑켄슈타인 선수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 변수 조합이 현실에서는 영영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괴물 말이다.
이것이 순수한 생리학적 한계 계산의 근본 문제다. 어떤 성적을 내려면 어떤 생리적 특성의 조합이 필요한지는 알려 줄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사람 한 명이 그 조합을 동시에 갖게 될지, 가질 수 있을지는 알려 주지 못한다. 두 질문 사이의 거리는 거대하다.
같은 함정은 다른 한계 논증에도 거듭 나타난다. 최고 전력질주 속도에 관한 연구에서는 더 빠른 최고속도가 주로 더 큰 지면 지지력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공중에서 다리를 더 빨리 놀리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외삽해 인간이 시속 35~40마일까지 달릴 수도 있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다. 관찰된 최고 전력질주 속도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이는 놀라운 생체역학적 가능성이지, 검증된 100미터 8초대 예측은 아니다. 선수는 우선 가속해야 하고, 자세를 유지해야 하며, 경기 전체에 걸쳐 적절한 수평·수직 충격량을 가해야 한다. 최고속도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중 특정 단계의 제약을 곧바로 예상 경기 시간으로 바꿔 놓으면, 다른 제약이 먼저 한계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가정을 몰래 끼워 넣게 된다. 그리고 이 가정은 거의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다섯 번째 실패다. 부분의 제약을 전체의 한계로 받아들인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 한 고리, 한 단계의 물리적 제약을 성적 전체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간주한 것이다.
9 기록 하나와 그 아래의 수많은 사람
지금까지는 모형의 실패를 다뤘다. 이제 더 구체적인 것을 보자. 수십 년째 움직이지 않는 기록들은 인간이 이미 꼭대기에 도달했다는 증거일까.
답은 아니다. 이를 분명히 보려면 완전히 다른 두 가지를 먼저 구분해야 한다. 기록의 정체와 경기력의 정체다.
세계기록 하나는 순서통계량이다. 오직 가장 좋은 성적 하나만 적는다. 그러나 그 기록 아래에는 수많은 선수가 펼쳐져 있다. 이 선수들 전체의 수준은 기록 아래에서 크게 향상될 수도 있고, 기록은 고정된 채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다. 거듭 기록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공식 숫자를 단 1밀리미터, 100분의 1초조차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기록이 수십 년째 그대로라고 해서 그 종목에 수십 년간 발전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기록은 극단에 있는 하나의 점이고, 종목은 분포 전체다. 점은 가만히 있어도 분포는 움직일 수 있다.
2026년의 여자 800미터는 이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크라토흐빌로바가 1983년에 세운 1분 53초 28은 오늘도 남아 있다. 그런데 2026년 6월, 웨로는 1분 53초 80을 달렸다. 보도에 따르면 역대 세 번째로 빠른 기록이며, 43년 된 세계기록과 불과 0.52초 차이다. 43년 묵은 기록은 여전히 서 있지만, 오늘의 주자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다. 남자 창던지기도 마찬가지다. 1996년 기록은 98미터 48인데, 2020년에는 97미터 76을 던진 선수가 있었다. 기록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아래의 사람들은 줄곧 그 기록에 바짝 붙어 넘실거렸다. 앞의 비교는 6월 시점의 것으로 남겨 둔다. 2026년 8월 27일 취리히에서 웨로는 다시 1분 53초 70을 기록했다. 1분 53초 28과의 차이는 0.42초, 기록 시간의 약 0.37%다.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도 그 격차를 도핑 유무의 증거로 만들지는 않는다.
더 강한 증거는 한때 정체의 전형으로 꼽혔다가 나중에 무너진 기록들이다.
코스타디노바가 1987년에 세운 여자 높이뛰기 2미터 09는 1980년대의 화석 같은 기록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예였다. 30년 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 2024년, 마후치크가 마침내 그 숫자를 움직였다. 1980년대에 세워진 남자 원반던지기 기록 역시 2020년대에 깨졌다.
이 두 사례는 30년 넘은 기록의 표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핵심을 말해 준다. 기록이 수십 년 더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깨기 어렵다는 증거이지, 궁극의 인간 한계라는 증명이 아니다. 오랜 잠이라고 해서 다시 깨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연작의 여덟 번째 글에서 다룬 정체와도 정확히 이어진다. 거기서는 소토마요르의 1993년 기록 2미터 45가 높이 서 있었고, 오랫동안 누구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 아래의 선수들을 보면 봉우리와 골짜기가 번갈아 나타난다. 2014년 바르심은 2미터 43을 뛰었다. 불과 2센티미터, 약 0.8퍼센트 차이였다. 그러다가 2025년 시즌 세계 최고 성적은 2미터 36으로 내려왔고, 2026년에는 2미터 34가 되었다. 11센티미터, 약 4.5퍼센트 차이다. 기록에 매끈하게 다가가는 곡선이 아니다. 높은 때와 낮은 때가 있는 출렁이는 구도다. 소토마요르의 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인류가 생리적 벽에 부딪혔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깨기 어렵고 아직 아무도 깨지 못한 기록일 뿐이다. 그 아래의 사람들은 오르내리며 단 한 번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덧붙여 한 가지는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여자 100미터의 10.49초 기록은 오늘도 세계육상연맹이 인정한다. 이것이 현재 관리 기구의 공식 판정이다. 한편 독립적인 통계 자료집들은 1988년 그 성적의 풍속 측정값에 계속 의문을 표시하며 주 목록과 분리해 둔다. 둘은 같은 명제가 아니다. 풍속 측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증거에 관한 논증이다. 세계육상연맹이 10.49초를 계속 인정하는 것은 공식 판정이다. 그 판정은 뒤집히지 않았다. 의혹 제기와 판정은 별개다.
여기서 이 구분을 다시 강조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와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수십 년 동안 정체하면 정반대의 해석 두 가지가 쉽게 생긴다. 둘 다 지나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이 한계에 도달했으므로 기록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이 글은 여러 반례로 그것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였다. 다른 하나는 애초에 부정한 수단으로 만든 문제 있는 기록이라서, 후대의 선수들이 깨끗하게 달려서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해석이다. 이 두 번째 해석은 스물한 번째 글에서 다룬 함정으로 미끄러진다. 기록이 오래 버틴다는 사실을 그 기록이 수상하다는 증거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버틴다는 것은 오래 버틴다는 사실일 뿐이다. 인간이 한계에 닿았다는 것도, 그 기록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기록이 수십 년째 움직이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아직 답이 없는 질문에 결정론적 답을 곧바로 채워 넣는다면, 그 답이 생리적 한계든 도덕적 의혹이든, 통계적 관찰을 그것이 뒷받침할 수 없는 결론으로 바꿔 놓는 셈이다.
10 자가 닿을 수 없는 눈금
이제 이 글을, 그리고 연작 전체를 한데 모아 보자.
이 글에서는 한계 예측이 실패해 온 역사를 훑었다. 1마일 3분 30초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여자가 남자를 앞지르리라던 날짜들 가운데 이미 기한이 지난 것들도 빗나갔다. 생리 변수와 점근선에서 계산해 낸 궁극의 숫자들은 하나씩 돌파되었거나, 실제 사람은 어쩌면 영영 갖지 못할 변수 조합 위에 서 있었다.
실패의 모양은 저마다 달랐다. 역사적 향상률을 영구적인 상수로 삼은 경우가 있었다. 사회적 추격을 생물학적 수렴으로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한 기술 시대의 점근선을 종 전체의 법칙으로 삼기도 했고, 부분의 제약을 전체의 한계로 삼기도 했다. 따로따로 극값에 놓은 특성들을 가상 선수 한 명에게 억지로 끼워 맞추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모양의 실패들 밑에는 같은 오류가 있다. 조건부인 역사적 관계를 변치 않는 미래의 법칙으로 격상시킨 오류다.
라이더는 기울기가 지속되리라 가정했다. 휘프와 워드는 사회적 수렴이 지속되리라 가정했다. 테이텀은 잡음이 섞인 직선을 150년 앞으로 늘였다. 생리적 투사 모형은 잠재적 특성들의 미래 궤적을 가정했다. 점근선 모형은 과거 자료에 맞춰 얻은 구도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한 구도이리라 가정했다. 모두 같은 지점에서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손에 쥔 것은 과거에 관한 실제 관계였는데, 그 관계가 미래에도 고스란히 유지될 것이라 가정했다.
그러나 미래는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지 않는다. 미래에는 새 선수가 있고, 새 기술이 있고, 새 훈련이 있고, 새로운 경쟁 구조가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아직 나타난 적 없는 몸을 지닌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현재의 자료에 없다. 그런데 궁극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이다.
그러니 연작의 마지막 질문, 한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높이, 멀리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이렇다. 그 한계는 반드시 있다. 유한한 생물에게는 반드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자로 그 한계를 잴 수는 없다. 한계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위치를 알아내는 데 필요한 정보, 미래의 선수와 미래의 기술과 미래의 모든 것에 관한 정보가 아직 이 자의 측정 범위 안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에서 비롯되는 불확실성은 그 어떤 유명한 숫자가 암시하는 정밀도보다 크다.
이것이 이 글의, 그리고 연작 전체의 마지막 잔여항이다.
앞선 22편에는 저마다 잔여항이 있었다. 명단에 오르지 못한 이름, 계산으로 가려낼 수 없는 원인, 비교할 수 없는 성적, 존재하지 않는 반사실적 비교 대상의 몸, 들어갈 자리를 찾지 못한 연속성, 성공 서사의 측정 범위에서 제외된 사람들,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현실, 의도적으로 닫지 않고 남겨 둔 부분, 이름 붙이기를 거부당한 차이, 선 밖으로 밀려나도 줄어들지 않는 것, 장부가 보증할 수 없는 항목,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받아들여진 사람들. 이 잔여항들은 모두 자가 이미 일어난 어떤 일을 재면서도 닿지 못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 글의 잔여항은 궁극의 한계 그 자체다. 자가 가장 재고 싶어 하는 눈금이자, 가장 닿을 수 없는 눈금이다. 앞선 잔여항들처럼 구체적인 장면에서 빠뜨린 구체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종착점이다. 첫 글부터 지금까지 자가 줄곧 재어 가며 다가가려 했던 그 종착점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그 종착점은 잴 수 없는가.
앞의 답은 필요한 정보 일부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측 능력에 관한 판단이지, 특정 성적이나 생리적 경계를 영원히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증명이 아니다. 이제 질문을 바꾸자. 언젠가 그런 양들을 충분히 정확하게 알더라도, 그것으로 한 사람을 다 측정한 것일까? 앞의 질문은 지식과 증거에 관한 것이고, 뒤의 질문은 측정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뒤가 곧바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 트랙은 우리를 그 두 번째 질문 앞으로 데려왔다.
이 자가 재는 것은 사람이다.
육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재능을 풀어 주는 일이다. 빨리 달리는 사람에게 트랙을, 높이 뛰는 사람에게 가로대를, 멀리 던지는 사람에게 경기장을 주었다. 일상에 묻혀 버렸을 신체 능력들이 마음껏 펼쳐지고, 사람들의 눈에 띄고, 기억될 자리를 마련했다. 이것이 육상의 가장 좋은 면이다. 이 연작은 그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이곳에서 인간의 재능이 해방되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재능을 펼치게 하려면 성적을 드러내고 비교할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번의 수행을 정확히 측정하는 일은 재능 전체를, 더구나 한 사람 전체를 다 헤아리는 일이 아니다. 앞선 글들은 서로 다른 어려움을 만났다. 조건이 다른 성적을 비교할 수 있는가. 옛 증거를 다시 검증할 수 있는가. 연속적인 신체 차이를 범주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 최종 한계에는 미래에 대한 무지도 더해진다. 이 난점들의 원인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며, 모두 측정 실패인 것도 아니다. 숫자가 선명해질수록 그 조건과 남은 질문, 숫자 뒤의 사람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재능을 펼치게 하는 일과 측정의 범위를 인정하는 일은 함께 갈 수 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이 잔여항들을 영영 없앨 수 없는 까닭은 측정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확히 재어 낼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정해진 양을 필요한 정밀도로 알아낸다는 뜻이다. 숫자 하나가 대상 전체를 대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길이를 정확히 재도 그 물건 전체를 다 설명한 것이 아니며, 속도를 정확히 재도 그 사람 전체를 다 설명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는 알아도 그 달리기가 그 사람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모를 수 있다. 다른 바람은 무엇인지, 계속하고 싶은지, 승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초시계의 소수점 자릿수가 부족해서 남은 문제가 아니다. 숫자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사람은 숫자보다 더 많다.
그러므로 이 연작의 잔여항들을 뿌리까지 따라가면 모두 같은 것에 이른다. 숫자 하나가 자신을 온전히 대표하도록 내주지 않는 사람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름이었고, 몸이었고, 장부의 항목 하나였고, 문밖에 가로막힌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은 모두 같은 남음이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정확히 재려는 어떤 자의 범위도 넘어서는 부분이 언제나 있다.
이 연작이 지키려는 바닥은 이것이다. 사람은 목적이지, 그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시간을 정확히 재고 거리를 정직하게 측정하는 일 자체가 사람을 도구로 바꾸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력을 공정하게 인정하여 선수를 보호할 수도 있다. 선을 넘는 곳은 따로 있다. 한 사람의 가치와 선택, 앞으로 살아갈 자격까지 순위를 매기고 교체할 수 있는 성적 하나로 줄여 버릴 때다. 문제는 정확한 측정이 아니라, 그 측정으로 사람 전체를 대신하려는 요구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그 사람의 질문으로 남는다. 기록부의 소유물이 아니다.
육상은 성적을 비교해야 사람들이 같은 경기에서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존엄을 배신하는 일이 아니다. 허용할 수 없는 것은 성적에서 사람 전체로 건너뛰는 일이다. 이겼다고 삶의 가치 전부가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 졌다고 그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측정이 정밀해질수록 그 역할의 경계도 더 분명히 할 수 있다. 초시계는 이번 달리기에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를 말한다. 이 사람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제도는 자기 일을 더 잘하면서도 그 바깥의 모든 것을 삼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연작의 그 문장은, 여기서 말 하나를 고쳐야 한다.
우리는 ‘자는 아직 정확히 재지 못했다’고 말해 왔다. 시간과 거리, 비교 조건에 대해서라면 이 ‘아직’은 의미가 있다. 장비는 개선되고 오차는 줄며 규칙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성적 하나가 사람 전체를 대신하리라는 약속이 숨어 있다면 멈춰야 한다. 존엄은 기계의 부정확함에 기대지 않는다. 아무리 정확한 기계도 자신이 답하도록 만들어진 질문에만 답한다. 측정의 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사람을 측정 결과와 같게 만들려는 요구는 멈춰야 한다. 이것은 스포츠를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라, 다시 사람을 위한 자리에 놓는 일이다.
누가 더 빨리 달리는지 묻기 시작한 날부터 이 구축은 트랙을 만들고 초시계를 제작하고 기록을 남겼다. 앞으로도 더 정확히 측정하고, 정해진 조건에서 몸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연구가 신뢰할 만한 생리적 경계를 영영 찾지 못하리라고 예언할 필요는 없다. 지켜야 할 것은 다른 데 있다. 한계를 알아내고 한 번의 달리기를 정확히 재더라도 결승선을 통과한 그 사람을 다 설명한 것은 아니다. 다시 달려도, 멈춰도, 다른 삶으로 향해도 된다. 트랙의 끝은 그 사람의 끝이 아니다. 그것이 자가 자기 몫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마지막 눈금이다.
경기 성적은 정확히 잴 수 있다. 그래도 성적으로 한 사람을 다 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