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의 논지를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풀어 쓴 글이다. 중국어 원문은 같은 페이지에서 간체와 번체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
교토의 낡은 다다미 넉 장 반짜리 방에 대학 3학년 남학생 하나가 산다.
그가 입을 열자마자 하는 말은 대략 이렇다. 대학 3학년 봄에 이르기까지, 지난 2년 동안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일을 단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회하는 말투가 아니다. 고발하는 말투다. 그것도 문장에 몹시 공을 들인, 문학적 재능과 자기만족이 넘치는 고발이다. 이 작품의 독백은 숨 돌릴 틈 없이 빽빽하다. 문장은 길고 어휘는 고풍스러우며, 한 문단 안에서도 이야기가 일곱 번 여덟 번 굽이친다. 자기 실패를 이토록 정성껏 서술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상당한 시간을 들였음이 틀림없다.
그가 고발하는 상대는 운명이다.
그가 원한다는 것
작품 내내 그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장밋빛 대학 생활.
대체 어떤 생활을 뜻할까?
그의 설명을 종합하면 대략 이렇다. 괜찮은 동아리, 뜻이 맞는 친구들, 검은 머리 소녀와의 연애. 그리고 자신도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나날.
여기서 짚어 둘 점은 하나다. 이 말에는 내용이 없다.
그런 생활 속의 하루가 구체적으로 어떨지, 그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나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나누는지. 단 한 번도 묘사하지 않는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아닌가뿐이다. 지금의 이 생활은 아니라는 것.
이 점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화에서도 그는 그 생활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말하지 못한다. 애초에 말할 내용이 없었으니까.
그의 불만은 과거를 가리킨다
그의 불평은 매번 같은 꼴을 하고 있다.
그때 시계탑 앞에서 그 동아리에만 들지 않았더라면.
그때 오즈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다른 길을 골랐더라면.
그의 모든 불만은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자신을 향한다.
이 대목에서 잠깐 멈춰 보자.
지금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 불만은 대개 두 방향 가운데 하나로 향한다.
하나는 앞을 향한다. 나는 무언가를 원하는데 아직 얻지 못했다는 불만이다. 여기에는 대상이 있다. 그것을 좇아 볼 수도, 시험해 볼 수도 있다. 언젠가 충족될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옆을 향한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면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불만이다. 여기에는 대상이 없다. 그 ‘다른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좇아갈 수도, 시험해 볼 수도 없고, 그러니 이 불만이 충족될 수도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째 방식을 쓴다.
두 번째 방식에는 첫 번째에 없는 장점이 하나 있다.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좇으면 실패할 수 있다. 끝내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얻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할 때는 그런 위험을 질 일이 영원히 없다.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은 비교
이제 이 글의 핵심으로 가 보자.
지금의 생활을 아무 내용도 없는 다른 삶과 비교하면,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내용이 없으니 결점도 없다. 그 삶에는 상대하기 힘든 친구도, 비 오는 날도, 말을 잘못 내뱉는 순간도 없다. 구체적이고 성가시고 볼품없는 일은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지금의 삶에는 그 모든 것이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것은 언제나 내용 있는 것보다 좋아 보인다. 비교하는 두 가지가 실제로 어떤지는 이 결과와 상관없다.
그러니 그의 불만은 생활이 특별히 엉망이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사실 그의 일상은 꽤 떠들썩하다. 매일 찾아와 귀찮게 구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고, 입만 열면 헛소리를 하는 스승이 있다. 날마다 영문 모를 사건도 잔뜩 벌어진다.
그가 만족하지 못하는 까닭은 들고 있는 잣대의 반대쪽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방
작품은 그에게 더없이 알맞은 거처를 준다.
다다미 넉 장 반. 교토의 낡은 공동주택 시모가모 유스이소에 있는 방 하나다. 넉 장 반이면 얼마나 될까? 7제곱미터를 조금 넘는 정도다. 책상 하나, 책장 하나, 이부자리 하나를 들이면 거의 꽉 찬다.
그는 이 방에서 2년을 지낸다.
초반 몇 화에서 이 방은 그저 배경이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어울릴 법한 거처일 뿐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 작품 전체를 이끄는 중심 이미지가 된다. 변화의 방식은 간단하다. 방이 늘어난다.
그 전에도 방은 수없이 등장했다. 매 화 빠짐없이 나온다. 그가 불평을 시작하는 곳이자 매 화 돌아와 닿는 곳이다. 여기서 출발해 한참을 돌고는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이 모든 게 처음의 그 선택 탓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글은 누군가를 훈계하는 글이 되고 만다.
주인공은 게으르지 않다.
때가 되면 일어나고, 수업에 가고,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고, 심부름도 한다. 온갖 황당한 일에 엄청난 시간과 체력을 쏟는다. 스승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들어주느라 온 도시를 뛰어다니고, 남에게 지기 싫어서 밤을 새워 준비한다. 거듭거듭 사건에 휘말리면서도 매번 진지하게 끝을 낸다.
재능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다.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며 생각도 잘한다. 머리가 놀랍도록 빠르게 돌아간다. 이 작품의 독백이 바로 그 머릿속인데, 그 독백은 촘촘하고 정확하며 기막히게 웃기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능력도, 기운도, 운도 아니다.
자신의 삶을 가늠하는 데 쓸 수 있는, 내용이 있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이것만큼은 누구도 대신 찾아 줄 수 없다.
사실 작품 속에서도 해 보려는 사람이 있었다. 아카시는 그에게 현실적인 말을 건넸고, 스승의 헛소리 속에도 가끔은 정확한 말이 한두 마디씩 섞였다. 오즈 역시 자기만의 형편없는 방식으로 줄곧 그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손에 든 잣대를 바꾸려면, 우선 그 잣대를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줄곧 그 잣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은 다시 시작하게 한다
1화가 끝날 무렵 그는 소원을 빈다. 막 입학했던 때로 돌아가 한 번만 다시 해 보고 싶다고.
작품은 그 소원을 들어준다.
2화가 시작되면 그는 다시 시계탑 앞에 서 있다. 같은 봄, 같은 게시판, 신입 부원을 모집하는 같은 동아리들.
이번에는 다른 곳을 고른다.
이제 작품은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던 그 자신을 정말로 그의 손에 쥐여 준다. 동아리를, 길을, 사건을 거듭 바꾸어 가면서. 이 실험의 가장 공정한 점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미리 주인공 대신 선언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판단하는 사람만은 그대로 두고 관객이 직접 보게 한다. 어느 길을 가도 같은 불만으로 돌아온다면, 진정 바뀌지 않은 것은 애초부터 운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