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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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스스로 걸어 나갔다

Han Qin (秦汉) · 한국어판 · 2026-10-09

이 판본에 관하여

한국어판 안내: 중국어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쓴 글이다. 원문에서는 간체자와 번체자를 전환해 읽을 수 있다.

제39화.

결투는 끝났다. 학원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학생회 멤버들은 전처럼 각자의 생활을 한다. 수업, 동아리, 복도에서 나누는 잡담. 달라진 것은 없다.

학생들은 텐조 우테나를 잊기 시작한다.

그녀를 입에 올리기를 거부하는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령이 내려진 것도 아니다. 잊는 것이다. 누군가 이름을 꺼내면 다른 사람은 그게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한다.

작품은 짧은 장면 몇 개를 보여 준다. 학생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문이 막힌다. 그러고는 화제를 바꾼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키오 쪽에서는

이사장실에서 오토리 아키오는 편지를 쓰고 있다.

‘세계의 끝’이라는 이름으로 결투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는 다음 차례를 준비한다.

편지를 쓰며 몇 마디 말한다. 요컨대 우테나는 결국 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 장미의 각인이 정한 규칙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

아키오가 성공으로 인정하는 것만 놓고 보면 그 말은 맞다.

체계는 남아 있다. 그도 남아 있다. 수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한 번 더 해 볼 생각이다.

안시가 건넨 몇 마디

그 옆에 서 있던 안시가 말을 한다.

뜻을 옮기면 이렇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시는군요.

됐어요. 이 편안한 관 속에서 언제까지나 왕자 놀이를 하고 계세요.

그리고 안경을 탁자 위에 놓는다.

이어서 말한다. 그 사람은 사라진 게 아니라고. 단지 당신의 세계에서 없어졌을 뿐이라고.

그러고는 이사장실을 나간다.

이 말들은 무엇을 하는가

여기서 이 글의 첫 번째 판단을 제시한다.

앞선 서른여덟 화 동안 안시의 말은 대체로 두 부류였다. 명령을 수행하며 하는 응답, 그리고 답이 되지 않는 대답.

방금 한 말들은 어느 쪽도 아니다.

작품 전체에서 처음으로, 안시는 오빠가 배정한 자리를 이토록 분명하게 거부한다.

내용도 단단하다. 상대를 판단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상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규정하고, 관 속에서 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상대가 모르는 사실, 그 사람이 당신의 세계에서만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런 다음 떠난다.

안경을 놓는 동작도 따로 볼 만하다. 안경은 그녀의 신분을 이루는 일부였다. 늘 쓰고 다녔던 그 안경은 ‘히메미야 안시’라는 학생의 모습에 속했다.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작품은 그 동작을 가볍게 보여 준다. 1초 만에 지나가고, 음악으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교문 앞

그다음은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학원 정문. 안시가 거기에 서 있다.

옷을 갈아입었다. 분홍색 옷에 흰색 베레모. 교복도, 장미의 신부가 입던 옷도 아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가겠다고 말한다.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기다려 달라고, 우테나에게.

그러고는 한 발을 내딛는다. 밖으로 나간다.

두 가지 모두 사실이다

이제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우테나는 실패했다.

그 체계에 맞서 이기지 못했고, 안시를 구하지 못했으며, 왕자가 되지 못했고,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했다. 결국 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아키오의 말은 문자 그대로 보자면 정확하다.

그런데 안시는 밖으로 나간다.

두 가지 모두 사실이다. 작품은 그 사이에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채 같은 화 안에 나란히 놓는다.

둘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레이션도 없다. 그러니까 우테나는 사실 성공한 것이라고 대신 말해 주는 인물도 없다. 인과관계를 짚어 주는 회상 장면도 없다.

그저 두 일이 그 순서대로 일어나게 하고, 이야기를 끝낸다.

그 문

다만 한 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지난 글 마지막에 말했듯, 그 문은 우테나 이전에는 닫혀 있었고 우테나 이후에는 열려 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문을 벌려 열었지만, 자신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누군가를 대신해 그 문 밖으로 나가 줄 수는 없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치가 아니라 서른아홉 화가 보여 준 사실이다. 우테나는 서른 화가 넘도록 온갖 방법을 써 보았다. 잘해 주고, 자유를 주고, 내 말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너는 내 물건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두 번째 글에서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안시에게는 그런 말들 역시 명령이었다.

우테나가 마지막에 한 일은 설득도, 베풂도, 구출도 아니다.

문 하나를 벌려 열고, 손을 뻗었다.

그 문이 열린 뒤 무엇이 일어날지는 우테나가 결정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일어난 것도 우테나가 볼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아키오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남았다.

아키오는 끝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 방에서 편지를 쓰고, 다음 차례를 준비하며,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부품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났다.

그에게는 규칙도, 문도, 반지들도, 편지들도 남아 있다. 늘 제자리에 있던 그 사람만 없다.

그 사실을 아키오는 모른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말은 진심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상황은 정말로 그런 것이니까.

작품은 그가 이를 알아차리는 순간을 보여 주지 않는다. 놀란 표정도, 뒤쫓아 가는 모습도,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치르는 장면도 없다.

그저 계속 편지를 쓰게 둔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들

이 연작은 여기서 끝난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한자리에 놓아 보자. 그 사이에 말을 보태지 않고.

명시된 규칙에 따라 얼마나 여러 차례 돌아갔는지도 모를 결투 체계. 승자는 한 사람을 데려갈 수 있고, 그 사람은 절대복종한다.

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문 사람. 너무 오래여서 자신은 이것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그 질문 자체가 더는 그녀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느닷없이 끼어든 소녀가 서른 화 넘도록 다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오려 한다. 마지막에 두 손으로 문을 벌려 열고 손을 뻗는다. 안시를 관 밖으로 끌어내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열린 문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이사장실에서 편지를 쓰며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고 말하는 남자.

그리고 학원 정문에서, 옷을 갈아입은 사람이 내딛는 한 걸음.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작품은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