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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미학 · 첫 길잡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줄은 안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소설, 이미 다 만든 잔. 좋아함과 아름다움, 판단을 한마디에 몰아넣지 않아도 된다.

Han Qin ·

그녀가 소설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친구는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마지막 몇 페이지에 관해 한참 이야기했다. 줄곧 진실을 말하지 않던 인물이 마침내 입을 열었는데, 작가는 그 말을 적지 않고 맞은편 사람이 잔을 내려놓는 모습만 썼다는 것이다. 앞선 수십 페이지의 별것 아닌 듯한 멈춤이 거기서 갑자기 무게를 얻었다고 했다.

“그럼 잘 쓴 게 아니라는 거야?”

“아니. 정말 잘 썼어. 다만 그런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모순은 아니다. 좋은 책이라고 알면서도 다시 읽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별다를 것 없는 노래인 줄 알면서 차 안에서 거듭 틀기도 한다. 책이 내게 무엇을 남기는지와 내가 그 책에서 무엇을 알아보는지는 언제나 같은 일이 아니다.

이를 모두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한마디로 합치면, 충분히 이야기할 만한 것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내게서 끝나도 된다

어느 여름을 함께 보낸 노래라서 좋아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여름이 없어서 들어도 별 느낌이 없다. 그 사람까지 감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른 대화도 있다. 재생 위치를 조금 되돌리고 여기 들어 보라고 한다. 앞에서 줄곧 자리를 잡지 못하던 소리가 이 박자에서 내려앉는다. 친구가 다시 듣더니 문득 고개를 든다. 아, 이렇게 이어지는 거였구나.

그 뒤로 둘이 이 노래를 똑같이 좋아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래도 방금은 같은 것을 알아보았다. 그저 각자 잠깐 즐거웠다는 뜻이 아니며, 한쪽이 다른 쪽을 설득한 일도 아니다. 소리 사이의 이어짐은 원래 그 음악에 있었다. 이번에는 친구에게도 들린 것이다.

SAE 미학이 살펴보려는 것은 이런 만남이다.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고 어디에 머물고 싶은지는 각자의 미감에 남겨 둔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알아보고 함께 인정할 수 있는 대목을 미학의 질문으로 삼는다. 논문은 이를 ‘겹침’이라고 부른다. 겹치는 데도 많지만 겹치지 않는 데는 더 많다.

이 입장은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름답다는 판단은 기분을 보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도 가서 볼 만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너도 나와 같아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 박자가 왜 잘 내려앉는지 들으면서도, 이 노래를 집에 가져가고 싶지는 않을 수 있다.

전문가에게 대신 고개를 끄덕여 달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어려움이 생긴다. 정말로 보았다는 것을 누가 증명할까?

미술관의 설명은 제작 연도와 재료, 작가를 알려 준다. 선생님은 선 하나가 화면을 어떻게 가로지르는지 보게 해 준다. 친구도 전에는 몰랐는데 여기를 다시 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끄덕임을 내 머릿속에 넣어서 내가 본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비싼 그림이라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칭찬해도 우리 대신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소수의 판단이라고 적은 수 덕분에 더 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미학은 투표가 아니며, 투표 결과를 거꾸로 뒤집는 일도 아니다.

물론 보는 일은 배울 수 있다. 어릴 때 듣지 못하던 화음을 악기를 연습한 뒤 알아듣기도 한다. 어지러운 붓질로만 보이던 것을 오래 보다가 그림이 어떻게 하나의 화면으로 성립하는지 알기도 한다. 남에게 배웠다고 영원히 남의 눈을 빌려 보는 것은 아니다. 좋은 가르침은 선생님이 나중에는 곁에 서 있지 않아도 되게 한다.

그러므로 ‘동의하지 않는 건 이해하지 못해서’라는 말이 마지막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도 무엇을 보았는지 다시 질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반대할 때마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으로 판정한다면, 그 판단은 결코 질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버린다. 개정된 논문은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 있다고 분명히 인정한다. 에세이가 대신 그 문을 닫을 수는 없다.

아름다움이 꼭 편안한 것은 아니다

한 영화에서 딸이 아버지가 살던 방으로 돌아온다. 카메라는 다가가지 않고 음악도 대신 울어 주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는데, 딸은 창문만 닫는다.

그 순간이 괴로울 수도 있다. 딸이 잃은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가 눈물로 그녀의 이야기를 다 해 버리지 않았고, 그 여러 해를 설명 한마디로 거두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 화면이 여기에 멈춘 데는 이유가 있다. 슬픔이 아름다움의 증거는 아니지만,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선율이라고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가벼워진 느낌은 진짜이므로 깎아내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 느낌만으로는 이 선율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직 답하지 못한다.

한 번 더 나누어 보자. 비극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일은 그 안에서 일어난 가해에 찬성하는 일이 아니다. 오래된 물건의 흔적을 보는 일도 사람을 괴롭힌 일이 일어날 만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으로 고통을 정당화할 수 없고, 고통을 준 사람의 책임을 없애 줄 수도 없다.

이미 다 만든 그 잔

도예 수업에서 누군가 잔을 여섯 개 만들었다. 여섯 번째가 마침내 손에 편했다. 입구의 두께와 몸통의 곡선, 탁자에 내려앉는 감각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잔을 놓고 오래 보았다.

다른 쪽 사람은 아직 고친다. 손가락으로 안쪽을 조금 밀면 바깥을 다시 다듬어야 한다. 잔은 아직 모양을 정하지 못했고 손도 계속 찾고 있다.

양쪽 다 볼 만하다. 무언가 모양을 얻어 가는 과정에 끌릴 수도 있고, 이미 모양을 갖춘 뒤 조용히 머물 수도 있다. 다 만들었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미완성이라고 완성된 것보다 저절로 더 생기 있는 것도 아니다.

Non Dubito의 ‘일상의 발견’은 아직 길을 찾는 작품에 자주 머문다. 코드 한 조각, 도구, 계획대로 되지 않은 시도 같은 것들이다. 이는 이 코너가 시선을 두는 자리이지 모든 아름다움에 내리는 판결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읽은 문장이나 수백 년 연주된 음악도 오늘 처음 보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잔에 금이 갔다고 저절로 더 아름다워지지도 않는다. 그 흔적이 이 잔의 삶에 어떻게 남았는지 보아야 한다. 결핍이라는 말부터 붙여 상을 주는 일이 아니다. 새것인지 옛것인지, 온전한지 불완전한지 하는 구분만으로는 아직 판단을 끝낼 수 없다.

같은 것에서도, 보는 방향은 다를 수 있다

창가의 잔을 다시 보자. 빛을 어떻게 받는지 보는 사람, 굽는 동안 생긴 변화를 보는 사람, 만든 사람이 왜 작은 불규칙함을 고치지 않았는지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같은 잔이지만 묻는 것은 같지 않다.

열세 갈래는 여기서 펼쳐진다. 별하늘은 한 진열장에, 음악은 다른 진열장에, 사람은 마지막 가장 높은 진열장에 넣는 분류가 아니다. 같은 대상도 다른 방향에서 드러날 수 있다.

질문 하나로 논쟁을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한 방향이다. 선율에서 아직 울리지 않은 음을 벌써 기다리는 것은 다른 방향이다. 자신이 어떻게 할지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지는 그에게 남겨 두는 데에도 또 하나의 방향이 있다.

훈련표도 아니다. 증명의 아름다움을 안다고 한 조각 색에 끌리는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열세 종류를 모두 익혀야 무언가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할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 에세이들에 수학과 물리가 나오지만 공식을 시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답이 둘 다 맞는데 왜 어느 방법에서는 그 까닭이 문득 보이는가. 아름답게 생각해 낸 방법도 왜 세계의 대답을 기다려야 하는가. 여전히 미학의 질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없어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있어도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야.” 이 말은 그대로 성립할 수 있다.

“이 책이 가장 아름다우니 앞으로의 모든 책은 더 물을 필요가 없어.” 이것은 다른 말이다.

SAE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할 때 반대하는 것은 두 번째 말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을 빼앗거나 계속 새것으로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다. 어떤 작품도 어떤 관점도 이후 모든 사람이 볼 것을 최종 결정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랜 뒤 같은 책을 다시 읽고 전에는 지나친 문단을 볼 수도 있다. 그때 감동했던 문장이 이제는 조금 남을 대신해 결정하는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책 전체를 지우거나 지난날의 자신을 비웃을 필요는 없다. 이번에는 다른 것을 본 것이다.

아직 다 말하지 못한 대목을 찾았다고 반드시 끝까지 설명해야 할 일을 받은 것은 아니다. 계속 따라가는 사람도 있고 책을 덮는 사람도 있다. 남은 질문은 이어 갈 수 있는 곳을 보여 준다. 실제로 계속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 오늘 밤 더 읽고 싶지 않다고 미학에 숙제를 제출할 의무가 생기지는 않는다.

탁자 건너 친구가 소설을 집어 들고, 그 인물이 잔을 내려놓던 대목을 편다.

“여기 말하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친구는 잠시 읽었다. 그녀는 이제 너도 이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원논문과 참고 자료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되었으며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기술적인 원논문 전체의 번역은 아닙니다. 각 글의 집필 설명에는 논의를 위해 만든 장면과 실제 연구·사료로 확인한 내용의 구분을 남겼습니다. 이론 논문은 영어·중국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 소개는 한국어판이 있지만, ‘일상의 발견’과 예전 장문 ‘예술가는 죽었다’는 기존 영어·간체 중국어판으로 이어집니다. 그 본문까지 이번에 한국어로 다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바탕과 범위

『SAE 판단력과 미학』 제2판과 열세 갈래를 바탕으로 쓴 글이다. 소설과 영화, 음악과 도예 수업의 장면은 논의를 위해 마련한 예시다. 특정한 출판 작품이나 실제 사건을 가리키지 않는다.